"나 같은 상놈이 어니 감히 그 문중에 큰마님 초상 영우에 가 향이나 한 오래기
사를 수가 있겄소오, 절이나 한 자리 헐 수가 있겄소. 그저 샅에서 요령 소리가
나게 허드렛일 허는 거이 고작이라, 그렇게 죄송시럽고 서운허드라고요. 말 못허
는 짐생도 다 저 거둬주는 쥔은 알아보고, 허다못해 돼야지도 밥 주는 쥔 발짝
소리만 나면 꽤액 꽥 꿀꿀꿀 난린디. 이것은 멩색이 사람의 자식으로 인두껍을
쓰고는, 인자 영영 영결허는 마님한테 절 한 자리를 못허는 거이, 어디 그게 안
서운헐 일이요?"
"고마운 마음이제."
“언감생심 머."
"마님도 그 맘은 다 알고 가셌을 거이여. 너무 서운해 말어."
"아 그래도 그거이 어디 그렇소? 해가 배끼니 배꼈다고 세배를 디릴 수가 있능
가, 초하루 삭맹이니 상식을 올릴 수가 있능가. 그래 내가 작심을 허고, 정월 대
보름날 달 뜨면 나 혼자 암도 모리게 마님 산소 한 번 챚아가서 꼭 절 한자리
해야겄다. 올리야겄다, 그랬지라우, 언감생심 대낮에야 나 같은 놈이 어디 여그
발이나 딜에 놀 수 있간디요? 도독질을 허는 것도 아니지만 대낮에는 못허는 일
잉게, 이렇게라도 해야제잉."
"그래 절은 허고?"
"하면요. 참 맴이 다 풀리는 것맹이드라요."
“춘복이 그렇게 안 밨는디 갠찮헌 사람잉게비?"
"갠찮으먼 멋 허요? 씰 디가 있어야제."
"아 왜 없어? 이만헌 사램이."
"그래 간 김에 기양 한 바꾸 돌아부렀소. 내 펭상에 또 언지 여그 올수 있겄냐
싶어서, 앞앞이 다는 못했지만 건중건중 건네서 그 조상 어르신들 산소에 절은
한 자리씩 올렸소. 내가."
왜 그랬는지 춘복이는 만동이 내외 대신 제가 방패를 두르고 나서서, 박달이가
그쪽으로 마음을 못 쓰게 해야 한다는 데 조바심이 들었다. 아닌 밤중에 남의 선
산에 들어갔다가 꺼덕꺼덕 나오는 춘복이를 수상하게 여기자면 얼마든지 그렇게
여길 수 있는 일이어서 그에 대한 방비도 해야 했지만, 그보다 더 큰일을 저지
르고 있는 만동이 내외는 어쨌든지 우선 무사해야 할 것 같았다. 잽히먼 죽응게.
춘복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춥겄네. 얼었그만. 조께 들왔다 가든지."
"아니라우. 가야제."
춘복이가 발을 돌릴 기세를 보이자 박달이는 한 마디 덧붙였다.
"산에 벨일 없제?"
"달이 참 좋습디다."
춘복이 말에 박달이가 웃었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새삼스럽게 추위가 끼쳐드는
지 어그그흐으, 하면서 소름을 한 번 털어 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천에
뜬 달이 눈부시게 희었다.
"대체나 달 좋그만."
"갈라요."
"그리여. 가 바."
박달이가 삽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춘복이는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
다. 중천에 뜬 달을 본 때문이었다. 아직도 풍물 소리 꿈결같이 아득히 들리고,
달집 태우는 냇내가 여기까지 낮은 냄새로 깔려오고 있지만, 시간이 더 기울기
전에 어서 매안의 원뜸 오류골댁 살구나무 아래로 가야만 한다는 조바심이 그의
발걸음을 헛뜨게 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럭 그는 걸음을 눌러 디뎠다. 서두르먼
쏟아져. 그는 지신에게 타일렀다. 무산의 동산 봉우리 날망에서 들이삼킨 보름달
정기며, 매안 선산의 제각과 비석과 호석, 그리고 보름달 같던 무덤의 봉분들을
그토록 전심 전력으로 흡인한 정액이, 온뭄에 혈력으로 차 올라 목까지, 정수리
머리꼭지까지 그득한데, 자칫 한 걸음 잘못 디디면 그만 헛되이 쏟아지고 말 것
이 그는 두려웠다. 그는 앞발이 조바심으로 내닫는 걸음을 뒷발로 지그시 누르
며, 빠르되 신중한 걸음으로 물을 건너고, 아랫몰을 지나고, 중뜸을 지나고,원뜸
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그는 강실이의 이름을
간절히 밟았으니. 무슨 급류의 물살에 놓인 아슬아슬한 징검다리처럼 그 이름은
밟을 때마다 흔들렸다. 그 징검다리를 잘못 딛어 그것이 뒤집히거나, 아니면 그
돌을 딛는다는 것이 헛짚어 물살을 짚으면, 그대로 어디론가 휩쓸려 떠내려가
버릴 것만 같은 심정에 춘복이는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 급류는 제 천한 핏줄의
물살이었던 것이다. 나 좀 건네게 해 주시오. 이 물살에 떠내리가먼 나는 어디로
가겄소? 나는 그러기 싫소. 나는 그 물살에 빠지기 싫소. 나 좀 건네게 해 주시
오. 여그 이 복판으서 저어짝 엉덕 욱으로. 매와 핀 언덕이면 더욱 좋으리. 매안
이 바로 눈앞이고, 그 매화나무 고목의 세월 실린 검은 둥치와 벋은 가지가 바
로 눈앞에 보인다. 구불구불 늙은 줄기가 굽이치는 듯 꺾이는 듯, 새 가지는 버
들 같고 묵은 가지는 채찍 같은데, 겨울비가 씻어 낸 가지에 암향이 그윽하게
어리면서 꽃망울 벙그는 매화 한 점. 그것이 강실이였다. 강실이가 살고 있는 오
류골댁 사립문간의 살구나무가 춘복이에게는 바로 매화 나무였다. 그 매화 핀
원뜸의 언덕으로 오르는 춘복이의 발걸음이, 그 살구나무 바짝 가깝게 이르렀을
때, 그는 가슴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게 놀랐으니. 거짓말처럼 강실이가 그 살
구나무 아래 사립문간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비긋이 열린 문은 고샅
으로 열린 그네의 하염없는 귀인가. 그네는 언제부터 거기 나와 서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 막 나와 선 사람의 한기에 대한 움츠림이 없고, 마치 그 한기가
살갗을 파고들어 뼛속까지 스민 끝에, 핏줄이며 오장이며 안 보이는 마음까지도
이제 바깥 한기 그만큼이 되어, 굳이 안인가 바깥인가 나누어지지 않은 투명체
처럼 강실이는 보였다. 그 얼음 속 같은 강실이 머리 위에도 달을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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