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 25

혼불 9권 (22)

"하아. 사천왕천보다 높은 하늘인 도리천의 임금이신 제석천왕도, 아수라같이 못된 놈한테는 할 수 없이 당하십니까?""아, 아수라란 놈은 아예 높고 낮은 것이 없이 무조건 상대가 보이면 대가리 디밀고 덤벼들어 싸움을 거는 나쁜 귀신 아닌가요.""그 정도 망나니라면 차라리 귀엽다고 해야 할지.""글쎄올시다. 허허, 또 한편 이 여의주는 중생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시는 부처님의 공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여의. 뜻과 같으니, 네 마음 먹은 그대로 모두 이루어지이다.황홀한 축수가 아닌가.강호는 용의 혓바닥 같은 여의주 불꽃을 올려다본다.이 여의는 그대의 여의가 아니라, 나의 여의로다.사천왕의 불타는 여의주 잉걸은 뜨거운 화염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저 용을 붙잡은 손아귀의 힘을 좀 보십시오.""놀랍군요."남방..

혼불 9권 (21)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소승이 보기에는 완주 송광사 사천왕이, 흙으로 빚은 조선 사천왕 존상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조형으로서, 높이 십삼 척의 위용도 웅장하고, 그 큰 신체 각 부위 균형이며 전체 조화가 놀랍도록 알맞게 어우러져 큰 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얼굴의 표정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조각되어, 깊이 패인 이마의 주름살에 미간의 찌푸림, 우묵히 들어갔다 튀어나온 눈두덩, 그리고 눈자위와 눈밑의 굵은 주름들을 보고 있으면, 도무지 투박한 진흙을 주물러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극채 찬란한 색깔들."도환은 눈에 비치는 곡두 환영을 바라보듯 감개를 누르며 말했다."저는 이 완주 송광사 사천왕을 사천왕의 전형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현존하는 소조 사천왕으로..

혼불 9권 (20)

5. 아름다운 사천왕 사천왕 각위의 키와 몸집, 그리고 팔이며 다리길이, 그것들을 들어올려 뻗치거나 구부리거나 내린 모양, 또 앉거나 선 자세에 맞추어 먼저 나무로 기본틀 뼈대를 만든 다음, 새끼줄을 촘촘히 감고는, 그 위에 진흙을 발라서 살을 입힌 뒤, 있는 솜씨와 염원을 다하여 표정을 짓고, 옷을 빚어, 색색깔로 온갖 문양 놓아서 채색한 조상은, 보면볼수록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엄청나게 과장된 것 같으나 질박해서 단순하고, 장난스러운가 하면 한없이 장중하고도 두려우며, 놀랍도록 섬세한 사천왕의 얼굴과 몸과 옷. 그리고 손마다 들고 있는 갖가지 장엄구."사천왕상은 대개 흙으로 빚은 소조가 아니면 나무로 깎은 목조예요. 제가 돌아다니면서 본 비율은 이쪽 저쪽이 거의 반반이었습니다. 옹기처럼 굽거나 ..

혼불 9권 (19)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듣던 강호가, 귀면의 콧구멍에 꿰어진 군청색 끈을 들여다본다.끈은 허리띠를 물고 있는 귀면의 콧구멍에서 빠져 나와 가위표로 꼬아지면서 허리띠 아래로 내려가, 산도야지라고나 해야 할까, 아니면 무엇일까, 무척도 사나운 맹수가 분명한, 들짐승 같은 것의 콧구멍을 여지없이 한달음에 엮어 꿰고 있었다.그 짐승은 복종의 뜻으로 눈을 감고 있다. 지금 막 잡아서 껍질을 벗긴 것처럼 생생하고 얌전하게 터럭 하나 하나, 붓털 지나간 자국에서 죽은 터럭이 살아나게 그린 이 짐승은 몸통이 진회색이었는데, 귀때기속이 바알갛게 뒤집혀, 만지면 꿈틀, 할 것만 같았다."이것이 '강철'이라는 짐승입니다. 이 짐승이 얼마나 독한 놈인가 하면, 한번 지나만 가도, 그냥 아무짓도 안하고 말입니다. 산중이고,..

혼불 9권 (18)

그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마치 우주의 궁곡을 깊은 뱃속에서 우렁차게 토해 내는 것만 같은, 저 입속. 통로.강호는 그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그리고, 속으로 한 위 한 위, 천왕들의 입 모양을 정리해 본다."자, 서방광목천왕은 어떻습니까?"그 입매에 서린 서원들.강호는 그것이 알고 싶어 홀로 대답을 더듬는다."사천왕의 몸은 무궁무진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눈동자와 눈썹, 그리고 머리카락이며 입술, 또는 갑옷과 지물들. 이 형상을 통해서 우리는 사실 법문을 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사천왕은 부처님의 경전이 조상으로 현신을 한 셈입니다."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강호는 고개를 끄덕인다."천왕들이 손에 들고 있는 지물들도 각기 다른 것, 알아보셨습니까?""아, 예. 북방다문천왕은 비파를 ..

혼불 9권 (17)

무시무시한 위용과 극채색의 찬란함 속에 홀로 고요한 손톱의 희고 맑음. 가지런히 깎은 마음.이 손으로 비파를 타는 북방천왕의 눈은, 튀어나오게 불거진 퉁방울 같은 다른 사천왕들하고는 전혀 다르게, 지그시 내리감듯 뜨고 있었다."북방천왕의 눈은 왜 저렇게 반이나 감기어 있는 것일까요?""어떻게 보이십니까?""설마 조는 것은 아니실 테고, 당신의 비파에서 울리는 불법의 감로 선율을 삼매경에 잠기어 듣고 계시는가.""그럴 수도 있겠지요."아니면, 다문천왕이시니, 서러운 세상의 들끓는 애, 오, 욕과 희로애락 굽이굽이 몸부림치며 우는 하소연, 지그시 듣고 계시는 것인가.내 다 들어 주마. 내, 다 들어 주마.피 토하고 우는 사연, 내 다 들어 주리니.북방천왕은 비파를 끌어안고 고요히 미소를 머금는다.비파 소리와..

혼불 9권 (16)

이 본존마저 속수무책으로 강탈당하여 버린 범련사 절이언만, 연등과 풍경은 지난날 초파일에 그러했듯이 오늘도 여전히 공중에 매달린채, 불심의 언저리를 헤고 있어서. 보는 이 마음은 더욱 유감하였다.도환을 따라 고개를 돌리었던 강호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사천왕 존위들을 하나하나 어루어 더듬어 본다.청동에 도금한 부처님을 공출로 어이없이 빼앗겨 버린 절의 대문에, 이와 같이 오채 찬란하고 우람한 사천왕을 중창하여 세우는 불사는,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지키려고 일으킨 것일까."호법, 호국이 그 본뜻입니다. 첫째로, 부처님의 진리법을 받들어 사바세계의 온갖 사악한 것들로부터 거룩하고 신성한 것을 보호하고 둘째로, 나라를 지켜서, 쳐들어오는 침략자를 일격에 무찌르고 국토를 수호하는 것이 사천왕의 임무입니다. 이 ..

혼불 9권 (15)

4. 이 소식을 모르는 이 답답하여라 "얼핏 보아, 사천왕이 사실 자애롭다거나 예쁜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무서우면 무서웠지. 자비의 불문에 수호신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거칠고 우악스러워서, 보는 사람 마음에 신심이 우러나게 하는 대신 두려워 멀리하게 해 버리기 쉽지요."강호가 도환을 바라보며 말한다.초파일을 맞이하는 범련사의 분주한 천왕문에 걸음이 머문 강호와 도환은, 아까 선 그 자리에서 좀체로 움직이지 못한다. 강호는 지금껏 모르고 있던 사물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에 사로잡히고, 도환은 옆사람도 짐작할 수 없는 환희심에 깊이 잠긴 것 같았다.도환은 혼자서 미소 짓는다.그는 강호가 지금 막 건네는 말의 속뜻을 미리 짚어 본 것이다."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소승이 이처럼 그 이상한 ..

혼불 9권 (14)

강호가 고개를 갸웃하였다."전쟁의 난리통에 국법이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서 그랬습니까?""아니올시다.""어떻게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고 백성은 죽어가며 강토가 피폐해지는 전란을 계기로, 불교만은 새 기운을 얻을 수가 있었단 말입니까?""그것은 승병 때문이었습니다.""승병?""그 가련할 정도로 수백 년 짓뭉개진 사찰의 승려들이 나라를 구하고자 결연히 일어나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분골쇄신, 살신성인, 구국 승병활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전국적으로. 나라에서도 이 점을 가긍히 여겨 그 아름다운 충성에 대한 대가를 주었지요. 전란에 부서진 사찰들을 중건하도록 허락한 것은 물론이고, 불교를 억압할 때 파괴되고 황폐해진 폐찰이나 절터까지도 복원 중창하라 하였습니다."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고맙고 장한 불교에 ..

혼불 9권 (13)

거룩한 사찰의 문과 불전의 입구, 그리고 불상의 좌우에, 또 불사리 모신 탑의 문에 그려지거나, 새겨지거나, 아니면 조상으로 강건하게 서서, 이들은 불법을 보호하며 받들고 있는 것이다.금강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모습을 드러냈다.이렇게 사찰에다 금강문과 천왕문을 중문으로 세워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봉안하는 까닭은, 청정한 도량에 사악한 악귀가 끼여들지 못하게 엄중히 외호하며, 절에 오는 사람들의 방일한 마음을 신성 엄숙하게 가다듬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그 문들을 지나면서 깊이 절하고 속진의 남루를 깨끗하게 씻어내며 바로잡은 마음이 도달하는 곳은 이제 불이문.'불이'는 글자 그대로 '둘이 아님'인 것이니, 나뉘어 흩어진 그 무엇들의 본체는 본디 하나라는, 진리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한 말이라."본래 진리는 둘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