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발각
궤털 허옇게 곤두선 박달이 두 귀가 바싹 질린 두려움을 가까스로 견디느라고
쭝긋쭝긋 움죽거린다. 꿇고 앉은 무릎 위에 얹힌 그의 힘줄 불거진 손이 후들후
들 떨린다. 그 떨리는 것을 가누려고 저도 모르게 무릎을 움켜쥐니, 무릎까지 사
시나무마냥 떨리었다.
놀란 머리터럭이 불불불 갈기처럼 일어선 박달이의 낯빛은 노랗게 질리다 못
해 흙빛으로 잦아들었다.
고개를 푹 꺾어 떨어뜨린 그의 목덜미에 이기채의 대침 같은 시선이 날카롭게
꽂힌다.
"무슨 일이냐?"
큰사랑 목외 장지 위칸에 고꾸라지며 엎드린 박달이를, 이기채와 함께 쏘아보
던 기표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는 본디 성품도 그러했지만, 특히 아랫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와 음성을 얼음을 씻어내리듯 냉엄하였다.
"저어... 저, 저."
바로 보고 앉지도 못하는 신분이라 모로 꺾어 앉은 매안 이씨 선산의 산지기
박달이는 간이 오그라붙는지, 입술까지 거멓게 말려들어가면서 말을 얼른 못 잇
는다.
마침 점심상을 보아 소반에 받쳐들고 사랑으로 나오던 계집종 키녜는, 사랑채
누마루 아래 서성거리는 안서방을 보고는
"애기되렌님 어디 지싱교? 진지 잡사얀디. 아까 콩심이가 업어 디리동만 안
뵈이네요."
하면서 이 상 받아 달라는 시늉을 한다.
안서방은 무엇인지 심상치 않은 낯색으로 손사래를 쳐 보이며, 조용히 하라,
눈짓으로 키녜 입을 막는다.
"손님 외겼소?"
소리 안 나게 마루에다 소반을 내려놓은 키녜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키가 건
드렁하니 커서 걸을 때마다 건들건들 흔들리는 것이, 앙바라지게 통통하고 작달
막한 돔발이와 곧잘 비교되어 웃음엣소리에 오르내리는 키녜는 찬비동자아치다.
이날 이때까지 언제 한 번 맛나게 된밥 자시는 일 없는 상전, 이기채였지만
청암부인 초종 치른 이후로 더더욱이나 식음을 멀리하니, 끼니 되어도, 간결한
몇 가지 소찬에 미음 아니면 기껏해야 묽은죽 한 대접 올리는 것이 전부라, 얼
핏 일이 쉬울 것 같지마는 그래서 오히려 더 까다로웠다.
오늘 점심도 형제분 겸상으로 차려내 왔으나, 기표는 밥이요, 이기채는 죽이었
는데, 그 미음이나 죽 쑤는 일은 키녜같이 늘 기명물에 손 담그고 그릇 씻으며,
아궁이에 불 때고, 큰방 건넌방 사랑채에 상 들고 나가는 것이 임무인 계집종으
로는 감히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대로 할 줄을 모르는데다가 솜씨가 없어서도
못하고, 정성이 모자라서도 안 되었다.
"고봉밥 뒤꽁치로 꽁꽁 눌러서 수북허니 꼬깔맹이로 먹어도 돌아스먼 배고픈
거인디, 우리 샌님께서는 허구헌 날 저렇게 죽 미음만 잡수시니, 무신 기운으로
이 큰 살림을 관장허실 거잉고오."
저러다가 여차 한 번 씨러지시먼 참말로 어쩔 거잉고오잉.
뒤엣말은 차마 발설하지 못한 채 속으로 쟁이면서, 안서방네는 마음을 졸였다.
그리고 이기채의 죽과 미음만은 언제나 손수 준비하는 효원의 곁에서, 침이 튈
까 조심되어 소리 없이 손을 도왔다.
"밥은 아무나 해도, 죽은 아무나 못 쑨다."
율촌댁은 일렀다.
건강한 사람은 별미반식으로, 밥에 질리면 때로 한 끼는 죽을 먹는 것이 입맛
에 도움이 되고, 노인 계신 집안에서는 자릿조반이라 하여 조반 대신 맛깔스러
운 흰죽을 올리기도 하며, 초례 갓 치른 신랑 신부가 첫날밤을 새우고 나면 이
른 새벽에 잣죽이나 깨죽을 들여넣어 주는 것은 관습이었다. 뿐만 아니라 ,궁중
에서도 초조반으로 죽을 아침 수라보다 먼저 드렸다.
밤새도록 잠을 잔 위가 아직 눈을 뜨지 않았는데, 빈 속에 곡기를 주어 부드
럽고 매끄럽게 식욕을 일으키며, 몸을 달래 주니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참으로 요긴한 구황음식이어서 흉년이 들고 기근이 심할 때 한줌
식량을 풀어서 한 솥 죽을 얻어내 주린 창자에 기아를 달래면서 실낱 같은 목숨
을 이어나가는, 서럽고 절실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또한 어린아이 이유식이며, 병을 앓고 있는 환자나 병후 회복을 하고 있는 허
약한 사람에게 다시 없는 음식이 바로 죽이었다.
그리고, 죽은 상을 당하여 밥을 먹을 수 없도록 슬픔에 지친 이웃이나 친척에
게 쑤어 보냈다.
그런데 위가 실하지 못한 이기채는 환자가 아니면서도 질기고 된 음식을 극도
로 삼가니, 오직 보양의 방책이라면 비록 그 이름이 '죽'일지언정 갖가지 꾀를
내어, 곡류 육류 소채 어패 해물을 고루고루 섭취하도록 끓여 대는 수밖에 없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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