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웬일로 네가 죄송헐 때가 다 있구나?"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미욱하고 생각이 짧았어요."
효원은 음성을 공순히 하며 수그린 이마를 더욱 수그린다.
"사람이 그러면 큰일난다, 큰일나. 일에 아무리 연유가 있고 절박할 때라도 순
서를 먼저 챙겨야지. 순서 뒤바뀌면 사람 노릇 거꾸로 허고 마는 법이야. 순서.
알었느냐? 네 평생에 다시 안 볼 사람이라도 그렇게는 못허고, 지나가는 걸인
대우도 그렇게는 헐 수 없는 것인데, 소의 시짜 붙은 네 부모 동기 숙질간에 그
게 어디 당키나 한 행위야? 민촌것도 그리는 안헌다. 내가 도대체 너희 시숙모
를 무슨 낯으로 대하며 네 종시매를 내가 어떻게 얼굴 들고 보겄냐, 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어째 순순히 모두 다 잘못했다니, 너도 어제는 무슨 벼슬봉 겁기가 발동
을 해서, 본정신 아니었던 것으로 치부허고, 나도 더 이상 추궁은 안허리라. 허
지마는 너희 시숙모님 마음 상한 것을 더 늦기 전에 풀어 드려야 할 것 아니냐.
이따만큼 네가 작은댁에 내려가서 종시매 문병도 허고, 가 뵈어라. 원 내참."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효원의 행동이었지만, 본인도 그 어느 때
보다 순순히 자책을 하고, 잘못했다, 비는 기색이 역력하여 율촌댁은 그쯤 하고
는 말을 접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댁에 내려갈 핑계를 얼른 찾지 못하던 효원이, 큰방에서
나오며 꾸중 들은 것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기고는, 조급한 마음에 아침을 뜨
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오류골댁으로 내려갔다.
기표는 수천댁으로 다시 돌아간 모양인지, 집안이 괴괴할 정도로 인기척 없는
데, 댓돌 위에는 두 내외의 낡은 신발만 기운 없이 씰그러져 있었다.
"어서 오소."
바깥의 소리에 내다본 오류골댁이 불에 데인 것같이 놀라 뜬 목소리로 효원을
맞으며, 겁에 질린 낯색을 하였다.
"작은어머님. 어제는 노여우셨지요."
"아이고, 별소리를 다."
차라리 고맙네.
질부가 아니었더라면 그 순간을 어떻게 모면했을꼬. 마치 귀신이 미리 시켜
짚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평소에는 그러지 않던 사람이 앞뒤 경우 티끌만치도
차라리 않고 덮치어, 나가라고 쫓아낼 때는 참 그런 억장 무너지는 꼴이 없더니
마는... 이런 죽을 일을 당하기는 당하면서도, 어쨌든 어제 그 자리에서 온 식구
둘러앉아 대소가 환시리에 참경을 당한 것보다는, 그래도 제 식구끼리 앉어서
당한 것이 좀 낫었는가, 어쩠는가.
오류골댁은 입이 안 떨어져, 인사 치레 몇 마디조차 잇지 못하였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네는 효원을 보는 순간 주르르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여,
어금니를 물었던 것이다.
그네는 지난 하룻밤이 이승과 저승을 거꾸로 엎어 되집은 것보다 더겨운 혼돈
이었고, 그 바람에 가슴이 깎이어 나간 이승의 절벽 낭떠러지 아찔하고 까마득
한 꼭대기에서, 순식간에 떠밀리어 끝도 없어 떨어져 내리는 공포를 가누기 어
려웠다. 손바닥에 칼날 쥔 사람이 칼자루 쥔 사람을 바라보듯이 애원과 두려움
에 범벅된 눈으로, 그네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닥쳐오고 있는 어둠 속의 그림자
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누군가, 누군가... 손을 벋어 부디 이 참혹한 정황
에서 자신들을 끄집어내 구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빌고 있엇던 것이다.
"작은어머님, 장 담그셨는가요?"
"장이랄 거 무에 있어야지"
"어디 저 좀 보여 주시겄어요?"
"그건 무어허게?"
"보아 두면 다배워지지요."
아랫목에 죽은 사람 다 되어 누워 있는 강실이를 피하여, 효원은 오류골댁을
앞세우고 장독대로 나왔다.
"이렇게 생겼지 뭐."
장독아지 뚜껑을 열어 보이는 오류골댁한테 효원은 낮은 소리로 한마디, 한
마디씩, 그러나 멀리 돌지 않고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작은아씨 일은 서두를수록 좋겠습니다. 아직은 그래도 수습할 여지가 있으니
까요. 어머님도 모르시고."
"이 사람아."
이 사람아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오류골댁은 장독아지 뚜껑을 양손에 든 채로 덮을 염조차 하지 못한채, 그렇
다고 무슨 말을 하지도 못한 채 다만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다.
"저도 밤새도록 온갖 궁리를 다해 보았지만 묘안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이
래서 걸리고 ,저런 일은 저래서 걸리고, 헌데 한 가지. 저희 친정 대실이 여기서
는 도경을 넘어 산 넘고 물 건너가야 하는 것이어서 멀리 있지만, 멀리 있어서
다행입니다. 저희 안어른께서 평소에 다니시는 절에 외따른 암자가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더러 몸이 아픈 사람이나 백일 불공 천일 불공 드리러 오는 보살 부
녀들이 묵곤 하는 모양이어요.
이 근처 남원 일대라면 아무래도 어느 절 어느 암자에 깊이 가서 계신다 해도
이목이 번다하니 눈에 뜨일까 걱정이고, 다른 군 다른 동네에 알아보려 해도 연
고 너무나 없으면, 오는 새벽 자진하려 했던 일이 또 생기지 말란 법 없지 않습
니까. 다행히 저희 친정의 연고 있는 것이면서 안어른이 잘 아는 절이오니, 사람
하나 딸려서 극진히 보살피라 이르면 우선 고비는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자네 안어른께는 도대체 무슨 면묵으로 이런 정황 그런 말씀을 사뢸 수가 있
단 말인가."
"성품이 관대 후덕하시니 흉허물 안허실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기로."
"여기서 만천하에 드러나 만인에게 욕을 당하시는 것보다는, 한 번 부끄러울
각오하시고 한 삶한테 흉잡힌다 하시면 될 것이어요."
"안될 일이지. 그쪽은 사가인데, 내가 이씨 문중 며느리로서, 자네 시숙모로서,
사람으로서 그리해서 안되는 일이야."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굴로 들고,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그런 정황
이 될는지도 모르는데. 사람 살리려다 죽이는 길이 될는지도 모르는데.
오류골댁은 흉중이 착잡하여 얼른 말이 떨어지지 않는데다가, 웬일인지 불길
한 생각조차 스쳐서 대답을 못한다.
"제 말씀대로 하시어요. 서두르셔야 합니다. 저는 도부꾼 황아장수 오는 대로,
비단 지고 댕기는 그 아낙, 작은어머님도 아시지요, 왜.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
습니다. 저의 안어른께 봉서 한 장 쓰고, 용채 조금 준비해 볼 테니, 작은아씨
기운차리도록 그간 미음이라도 자주 먹이시고는, 갈 길이 가깝지 않으니 당부
단단히 해 두서요."
효원이 오류골댁을 똑바로 정시한다.
눈빛으로 못을 박는 것이다.
아무리 손아래 질부요, 자기는 손위 시숙모라 해도 벌어진 일이 '죄'라서, 죄
지은 사람의 어미로 이미 몸을 세울 수 없게 된 오류골댁은, 효원의 말을 맞받
지 못하고 음성을 떨군다.
"이런 경우가 있는가 그래... "
"황아장수 아낙이 모레 온답니다. 온다는 날 으레 오는 사람이라 이번에도 어
김없을 거예요. 따로따로 나가서, 동구밖 어디로 미리 말을 맞취 놓고, 만나야지
요. 그런 것은 다시 제가 내려와 말씀 디리께요."
"사람들한테는 무어라고."
"작은아씨 본디 몸이 약한 것을 다 아는 일 아닌가요? 외갓댁에 잠시 정양 갔
다고 하면 될 것입니다."
효원은 장독대의 독아지와 단지, 올망졸망한 뚜껑들을 열었다 닫았다 시늉하
면서 빈틈없이 소근소근 낮은 소리로 말을 해나갔다.
"모레, 모레예요. 작은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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