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아직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 청암부인이 손바닥에 옹이가 박이도록 쌀을
씻어 죽을 쑤며, 여러 해 시병 봉양하였으니, 이제 죽이라면 웬만한 것은 어지간
히 가늠할 만큼, 맛에서나 솜씨에서나 남다르게 되었는데, 죽은 재료를 준비하고
손질 갈무리하는 데서부터도 손이 많이 가고, 쑤는 과정 또한 아주 정성스러워
야만 했다.
거가대족 집안의 가주 종손이 상용 음식으로, 다른 것은 밀어내어 마다하고
다만 죽을 찾을 뿐이지라, 그것은 이미 '죽'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었고, 그 마련
을 결코 소홀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선 무슨 죽 무슨 죽, 하여도 흰죽 쑤기가 제일 어려웠다.
"쌀만 싯쳐서 물 많이 붓고 폭폭 오래 끓이먼 되제, 흰죽이 머이 그리 에럽다
요?"
킨녜는 그렇게 말했다가 안서방네한테 한 소리를 들었다.
"아이, 왜 꼭 새아씨가 죽을 끓이신당가요잉? 정짓것들 다 두고?"
하던 말끝이었다.
"니년이 끓에 디레 봐라. 어디 샌님이 잡숫능가. 간저(어른 수저 높임말)도 안
대실 거이다. 죽이 그게 잘 끓일라면 공이 많이 들으가고도, 흰죽은 그 중에 쑤
기가 지일 에러운 거이다. 쌀 싯츨 때보톰 니께잇 것은 월렁쯩이 나서 건드렁건
드렁 궁뎅이가 공중에 떠 갖고 못히여."
"빡빡 문질러서 뜸물 쏟고 쫘악 싯쳐내먼 안되야요? 깨깟허게."
"저 바, 저 바. 저렁게 안된다고. 너 같으먼 인자 기껏 흰죽 쑨다고 싸래기를
바솨 놀 거이다아."
"어차피 죽인디요?"
"그게 그렁 게 아니여?"
"어매, 밥을 허고 말겄네."
"니가 머 밥은 얼매나 잘허냐?"
"나랏님 수랏상을 올릴란디?"
"아니 수랏상."
안서방네는 키녜 턱밑에다 상 받쳐 밀어올리는 시늉으로 두 손을 후욱 치켜
들이댔다. 키녜는 크큭 웃으며 얼굴을 비켜 꼬았다.
"그렁게 나는 못허제에."
"아냐? 그걸 니가 알어?"
"봉사도 날짜 가는 속은 알도라고. 내가 머 그것도 모르께미?"
흰죽 쑤는 쌀을 씻으려면 이남박보다 질그릇 옹배기가 좋았다.
옹배기에 대고 쌀을 문질러 씻을 때, 손에 너무 힘을 주면 부서지기 쉽고, 힘
을 안 주면 잘 씻기지 않으며, 대강 씻으면 나중에 죽이 거칠었다. 그 조그맣고
흰 쌀날 한 톨 한 톨이 입고 있는 겉껍질 엷은 옷만을 홀랑 벗겨낸 속쌀이, 그
몸을 하나도 상하지 않은 채 깎인 데도 없이 연한 살을 부드럽게 드러내며 오돌
오돌 살아 있게 씻어내는 일이 어디 쉬운가.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죽에서 진미
가 고소하게 우러나고, 맛에 힘이 있으며, 먹고 난 다음에도 쌀의 진기와 속기운
이 든든하게 남았다.
죽이라고 해서 싸래기로 쑤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곱게닦아낸 쌀을 대여섯 시간 넉넉히 물에 불려서, 눈에 안보여 그러
해 볼 수만 있다면, 그 쌀 한 톨 한 톨의 단단한 켜가 뭉쳐 있던 힘을 풀고 저
절로 벌어져, 수백 수천의 흰 꽃잎 일어나듯 벙글어 난만해지도록, 그 켜켜가 벌
어져 갈피마다 숨을 쉬며 너울어지도록 두었다가 , 밥을 지을 때보다 대여섯 배
정도의 물을 더 부어, 반투명으로 기름이 자르르 돌며 잘 퍼질 때까지 쑤는 흰죽.
"제대로 쑨 흰죽은 고기보다 살로 간다."
고 하였다.
행자판 검자주 옻칠 소반에 정갈한 백자 대접 흰 달같이 놓이고, 다른 반찬
소용없어 간장 한 종지 앙징맞게 동무하여 따라온 것이, 벌써 마른 속에 입맛
돌게 하는데, 간장 한 점 숟가락 끝에 찍어 흰죽 위에 떨구고 한술 뜨면, 그 담
백하고도 은근하며 다숩고 순결한 기름기라니.
입안에 들면서 벌써 음식이라는 이질감 없이 살 속으로 편안히 스미는 것이
바로 흰죽이었다.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유순하고 여리면서도 자애 모성을 품고
있는 음식이어서, 뱃속에 들어가 오장과 쉽게 동화되고, 상한 속과 할킨 속, 무
력하고 깎인 속을 쓰다듬어 다스려 준다.
"ㅈ은 것 뜬 기운으로는 흰죽 못 쑨다."
청암부인은 효원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도 네 손이 제법이구나. 죽이랍시고 풀대죽을 쑤어오면 내 어쩔꼬 했더니
마는 .자알 먹었다."
이기채의 죽 요리를 하다가도 효원은 문득문득
"잘 먹었다."
하던 청암부인 시할머니 어조가 들리는 듯 느껴지곤 하였다.
조손으로 만나서 내가 이생에 할머님한테 드린 것이라고는 오직 죽 몇 그릇뿐
이언만, 할머님은 나한테 너무 큰 세상을 넘겨 주고 가시었다.
그렇게 망연히 생각기도 하였다.
율촌댁과 효원은 일년 내내 사시사철 가지가지 맛깔스럽고 보 되는 죽거리를
장만하는 데 각별히 마음을 기울였다.
검은 깨 흑임자, 흰깨, 호두, 은행, 대추, 밤과, 잣, 그리고 기침 변비에 약으로
쓰는 살구씨 속알맹이 행인 같은 것을 곱게 갈아서 쌀가루를 섞어 쑤는 열매죽
이며, 청대콩, 누런콩, 팥, 녹두를 삶아서 체에 내리어 쌀을 넣고 쑤는 콩죽 종류,
그리고 보리나 폿보리를 갈아서 쌀과 함께 쑤는 죽.
또 생굴이나 전복, 홍합, 조개, 피문어 같은 어패류를 폭 고아 쌀가루나 쌀을
놓고 끓이는 죽과, 붕어, 잉어 죽.
거멍굴 근심바우 화덕같이 달구어진 무릎에다 바짝 널어 말렸다가, 여러 조각
으로 두드려 깬 다음 다시 몽글게 바수어 가루 낸 쇠고기 가루를, 보얀 쌀가루
에 섞어 고기죽에 쓰도록, 백정 택주의 아낙 달금이네가 매안으로 이고 오는 것
은 때 맞추어 걸러 본 일이 없었고, ㄲ이나 닭죽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뿐이랴. 율무 가루, 연뿌리 가루, 가시연밥의 녹말, 마름 녹말에 칡녹말, 그리
고 마의 가루, 이런 각종 열매들을 갈아 만든 가루들은 맛도 맛이었지만 기혈을
돕는 약효까지 있어, 만드는 번거로움을 마다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특별히 인삼을 넣고 쑨 인삼죽에, 도토리죽, 아욱죽, 호박죽, 콩나물
죽들도 시절따라 별미로 준비하였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 중에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나 가공하여 죽으
로 쑬 수 있었고, 그것들은 이기채의 부실한 위를 그나마 아슬아슬 달래며 이날
까지 무사히 신체 보존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산해진미 처쟁이면 멋 헐 거이냐? 먹도 못헌디. 살어 생전에는 삼시 세 끼
밥 한 그륵을 못 먹을람서, 곳간에다가는 오뉴월 염천에 갈비짝이 썩어나게 쌓
아 놓고, 나락섬은 노적봉 꼭대기보돔 더 높으댄히 절벽맹이로 꼬깔을 지어 놓
고, 죄로 가제, 죄로 가아. 이런 사람은 없어서나 못 먹제, 그런 사람은 체다보고
도 못 먹능게. 그게 바로 죄닦음이여. 달리 그러잖에."
옹구네는 꽁보리밥 새까만 봉우리에 귀닳아진 달챙이 숟가락을 푹꽂아 수북히
떠올린 위에다, 잘 익은 열무김치 한 가닥을 돌돌 감아 얹어 가지고 아가리를
짝 벌리어 한 입에 넣으며 말했었다.
"아이구우 맛있어. 맛있어어. 야야, 옹구야. 너 물 말어서 먹을래? 아나, 물. 앗
따, 참말로 시여언허다잉. 그저 오뉴월 복더우에 개쌔바닥 늘어져도 요렇게 찬
시얌물에다가 보리밥 뚝뚝 깨서 말어 먹으먼 그거이 살로 가제, 그거이 살로 가.
죽이 다머이여. 죽이. 하이고오, 기운 없어라, 천하 없는 인삼 녹용 죽이라도 죽
먹고는 오래 못 사능 거이다. 뱃심이 있어야제?"
그것은 지난 여름 미영밭에 김매는 잘, 놉일하던 중간에 아낙들이 모두 둘러
앉아 새참 먹는 자리였다. 평순네는 아예 아무 대꾸도 안하고, 공배네는 못마땅
해서 결국 한 마디 거들었다. 거기에는 핀잔 겸 말문을 막으려는 심산이 섞여
있었다.
"아이고, 이노무 인생아. 넘의 말 아니먼 헐말이 없냐? 어찌 그리 소가지라고
꼭 심통불통 꾸보랑통인고. 앞남산 밤대추는 아그대 다그대 열렸다드니, 옹구네
머리통 속에는 원에서 머이 어쩡고오허는 생각만 아그대 다그대 열렸제? 잉? 무
거서 어쩐디야? 쏟아지겄네. 그것 무거서 앞으로 꼬꾸라져 코 깨져잉."
"마당 터지께미 솔뿌랭이 걱정허요?"
"건 또 무신 소리여?"
"아 늙으먼 잠도 없다는디 신새복에 인나 앉어서 촛대맹이로 우두거니 멋 헐
라요? 그 말이나 생각허제. 되작되작."
"내가 되로 주고 말로 받제. 무신 이문을 봐? 저 주딩어서 먼 말 나올지 암서
도 꼭 이런당게."
공배네는 어이가 없어 평순네를 바라보며 웃고 말았다.
물정 모르는 옹구는 어른들 틈새에서 보리밥 한 볼테기 얻어먹고는 씩 입시울
을 닦고 괴춤을 추기며 일어섰다.
"어른 손님보둠 빨개벗은 손님이 더 무섭다고 안히여? 애들 눈이 그만치 더
무섭고, 애들 말이 또 그만치 더 무섭다는 거인디, 아 옹구라도 속없이 무신 소
리 어디 가서 욍기먼 옹구네 베락 맞고, 무단히 우리도 애민놈 저테 베락 맞능
게에. 조심히여, 지발 덕분에 좀."
공배네는 그래도 그 말만은 옹구네한테 우겨박았다.
"글 안해도 매안에 이씨 집안 잠정네들 대감이고 샌님이고 수 못허는 것 세상
이 다 아는디, 저렇게 멕기 존 죽이라고 주야장천 죽만 먹음서 얼매나 오래 살
수 있겄소잉? 사람 뱃속이랑 거이 요손이나 말허고 똑같애서, 일을 해야 굉이
백이고 굳은살 볼가져서 심도 생기는 거인디잉, 저렇게 보드란 것마안 보드란
것만 챗어 먹으니, 나 암만해도 율촌샌님 얼매 못 가제 싶우대?"
하는 통에 흠칫 놀라 대꾸한 말이었다.
"자식 떄미 속상헐 일 그냥반 참 마않겄드라고요, 속상허먼 명 ㄲ여."
"옹통져라. 속상헌 거 알았으먼 뒷공론은 말어야여."
"상놈이 오래 살제. 두고 뵈겨. 나는 인자 쉽게 안 죽을 거잉게. 꽁보리 밥도
감지덕지, 칡넝쿨을 통째로 생케도 돌아스먼 배고픈 사램잉게로."
"찔기네."
"찔게야 오래 살제. 안 그러요? 잘 전디고."
"처먹은 기운 주둥팽이로 다 올라오능게비다. 아깝도 안헝가?"
"노적에 불지르고 튀밥을 줏어 먹어도 내 재미여."
"오냐, 그래. 많이 줏어라, 많이 줏어. 대그빡이야 꼬실라지든지 말든지.
농사 헛짓고 동낭치가 되든지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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