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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9)

카지모도 2024. 11. 22.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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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응은 양 주먹으로 방바닥을 받치고 앉은 채 고개를 떨구어 꺾으며 울부짖음

같은 한숨을 토한다. 답답한 것은 기표가 아니라 기응이었다. 기표는 이미 그 민

첩하고 놀라운 찰지로 이번 사단의 내막을 꿰뚫어본 것이 분명한데, 다만 그의

심증을 당사자 기응의 실토로 확인하려 조이는 것일 케고, 기응은 필사적으로

버팅기며 거기 걸리지 않으려고 마지막 뒷걸음을 쳐 보는 형국이었다.

"누구는 속이 없고 짐작이 없어? 진작부터 강실이 행태가 여늬 사람같지 않아

괴이쩍게 여겼지만, 내, 말을 안했지, 어젯밤에 마당에서 벌린 괴이쩍은 무슨 말

들었을 것이야. 오늘 아침 동트기 전 아무 사람 이목 없을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소문 없이 수습해 보려고 이리로 오던 길에 내가 또 그 꼴을 봤으니, 여기 무슨

변명이 먹혀? 도대체 . 저것이 어젯밤에 의원 부르고 나서 오늘 신새벽, 죽을 작

정으로 저수지 방죽가에 들이달아 초죽음 다 되어 서 있었을 적에는, 반다시 그

럴 만할 필유곡절이 따를 것 아니라고?"

"그렇게 다 아시면 차라리 형님이 전후를 말씀허십시오. 저는 실지가 모르는

일이 더 많고, 저년도 말을 안해서, 제가 아조 어젯밤에는 패 쥑일라고 작정을

했었습니다."

말을 해라.

말을 해.

눈 뜨고 말을 해.

네가 이년 나를 쥑일 셈이로구나. 오냐. 일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너는 살 수

있으며 나는 살 수가 있겄냐. 오늘 밤에 너 죽고 나 죽자. 어차피 내가 안 죽이

면, 문중이 들고 나서서 온 동네 조리 돌리고 덕석에 말겄지. 안 봐도 뻔한 일.

아이고호, 아이고오호.

어젯밤의 충격과 울분이 다시 머리꼭지까지 치받친 기응이 평소의 그라고 생

각 못할 짓으로, 머리빡을 벅벅 긁으며 쥐어뜯어 뒤엉크니,기표가 오히려 어이없

는 낯색으로 말을 못 이었다. 그러다가 쫓기는 사람마냥 몹시도 불안하게 애원

반 고집 반으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좀체 숙으려들지 않는 기응의 양이, 불

칼 같은 기표의 성깔에 부아를 돋우어 더욱더 언성을 높이게 하였던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죽는 것으로 끝인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사람인 줄 알았어?

사람 독이 어떤 것이데, 그 살고 난 자기가 죽었다고 그렇게 쉽게 씻어져?어림

도 없는 소리. 향기 중에 향기도 사람 향기여서 천 년이 가고 만 년이 가도 오

래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독 중에도 사람 독같이 무서운 것 없는 법이

야. 그래, 살어서는 죽여 마땅한 일 저질러 살었는데,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 저

지름이 모조리 지워지고 없어진다고, 누가 그러던가?"

"이 일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모른다고는 또 누가 그래? 세상 천지 모든 사람 앞앞이 물어 보았어? 버선목

뒤집듯이 다 일일이 뒤집어 들여다보았느냐고. 그 속을."

"나는 모릅니다."

"집안 망칠 일이 벌어졌지? 그렇지? 집구석 쑥대밭 될 일이 지금 저년 뱃속에

서 크고 있지? 엉? 이게 어떻게 나 하나 너 하나로 끝나는 일이야? 저것 하나

죽는 것으로 끝날 일이야? 엉?"

더는 못 참고 날끝이 시퍼렇게 깎인 대창을 채켜들어 기응의 앙가슴 복판에

콱 메다꽂은 기표는, 억색이 되어 버리는 기응의 흙빛 낯바닥을, 자신의 검붉게

충혈된 머리로 한 대 쳐 박살을 낼 것처럼 바싹 들이밀며 어금니를 윽물었다.

그런데도 아까와는 달리 기응은 차라리 허탈한 표정으로 오뚝 앉아, 기표의

서슬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제 말을 해. 자초지종을."

"나도 모르요."

"나도 몰라?"

"저 대신 가서 좀 물어 주시오."

'나'로 왔다 '저'로 갔다 얼이 빠진 기응의 말에, 화가 북받친 기표가 다시 쥐어

지르는 고함을 질렀다.

"아니, 아직도 발뺌을 해? 이 지경에?"

그렇지만 그 고함이라는 것이, 워낙 조마조마 간을 졸이고 있었던 오류골댁과

안서방네였던 탓에 그처럼 정수리에 바위 때리는 벽력 소리로 들리었지, 막상

기표도 무서운 참극 별어질 것을 직감한 이 마당에 행여 음성이 울 넘어갈까 보

아, 말에다가는 칼침을 박으면서도 오히려 말소리는 자신이 먼저 극조심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서방네가 사립문을 빠져 나가면서 일부러 잠시 귀를 곤두세우고 안

의 동정을 가만히 살피었으나, 그저 무엇인가 노색 띤 웅얼웅얼이 집안을 울리

는 것 정도만 얼핏 엿들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한 마음 놓은 안서방네가 사립문을 나서자마자 단걸음에 내달아

효원에게로 갔을 때 지난 밤 잠을 설친 흔적이 역력한 효원은 벌써 이부자리를

개켜 놓고 있었다.

"되렌님은요?"

"사랑에."

"예에."

철재는 요사이 들어 사랑채로 나가 이기채한테서 자거나, 율촌댁 큰방에 할머

니 곁에서 자는 일이 더 많아, 효원은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요

즘같이 집 안팎이 어수선한 판국에 아무리 말귀 모르는 어린 아들이라 하나, 수

군수군 낮은 말 주고받는 것이 행여라도 철재한테 옮겨질까, 적이 마음 쓰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간밤에 별일은 없고?"

안서방네 들이닥치는 기색에서 이미 읽히는 바 있었지만, 효원은 짐짓 한숨을

늦춘다.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 두려는 것이리라. 또한 대청마루 건너서 큰방에

기척이 들릴까 내심 저어하는 조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네의 반듯한 이마에는 벌써 푸른 긴장이 팽팽하게 어린다.눈빛도 새

파랗게 일어선다. 그리고 입시울을 단단히 마무려 안서방네를 지그시 건너다보

았다. 쏘아보는 시선이다. 그 시선에 서릿발이 돋는다.

젊은 새아씨 눈기운이 어이 저리 청암마님맹이신고.

이 총중에도 문득 한 가닥 스치는 느낌이 미덥고 유정하여 안서방네는 무릎

더 가까이 효원에게로 다가앉는다.

내 등에 업어 기른 애기 되렌님 금옥 같은 배필이신 새아씨가, 내 등에 업어

기른 우리 애기씨 작은 아씨 때미 이 무어 못 당헐 고초를 겪으시는고. 금과 옥

이 열 말이라도 다 못 채울 비단 치마 열두 폭에, 근심과 재난들만 태산 중첩

무거워라. 이 노릇을 어쩌먼 좋을꼬잉.

안서방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는 귓속말로 속삭이다시피 효원에게 오늘 새벽 겪은 일을 쳐음부터 낱

낱이 아뢰었다. 그 중에서도 지금 막 오류골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급박한

정경은 아주 소상히 일렀다.

효원은 미리 짚어 알고 있는 이야기 듣는 사람처럼, 서둘지도 재촉하지도 않

는 범상한 낯빛으로 미동도 하지 않으면서 안서방네 말을 다 듣더니, 덩어리진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 듣는 동안 내내 한 번도 쉬지않은 숨이 어둡게 막혔다

가 저절로 터지듯 토해지는 한숨인 것이, 겉으로는 태연한 척 꾸미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가 겨워서 구절구절 숨조차 쉴 수가 없었던

것이리라.

"알았네."

효원은 안서방네에게, 되었다, 손짓하였다. 그리고는

"기왕에 드러난 일은 드러난 일이려니와, 만일에 작은댁 어른들이나 수천샌님,

큰방마님이시라 할지라도 이리 된 연유 하문하시는 경우, 절대로 모르는 일이라

고 말씀드려야 하네. 공연히 새서방님 함자나 거멍굴 것 이름 들먹이지 말고. 아

주 참사가 날 것이니."

"예."

"지금 당한 일만 가지고도 회오리가 무서운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생사람들 오

장 찢어 피 토하는 일은 막어야 할 것 아닌가."

그것은 곧 내 가문이 찢기는 것이요, 가문이 찢기면 내 아들, 우리 철재가 찢

기는 것이다. 내 가슴이 찢기는 대신, 일평생 함봉하고 나 홀로 견디는 대신, 철

재를 이 몸으로 막아 주어야 한다.

나를 찢고 , 철재를 지켜야 한다.

심정만 같았으면, 콩심이한테 그 이야기 듣는 그 순간, 강실이도 강모도 공중

으로 쳐들어서 맞잡아 촤악, 다 찢어 버리고 싶었다. 가루가 되어 허공에 잔해를

흩뿌릴 때까지, 종이 찢듯 그림자까지.

그러다가 춘복이 말 들었을 때는,

"네가 그런 사람이었느냐."

능멸하기 전에, 왈칵, 두려운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지금, 강실이가 아이를 뱄다 하니.

그 두려움은 실체가 되어 효원을 덮쳐 누른다.

대관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꼬.

강실이는 효원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가엾다.

"도부꾼 황아장수 오는 날이 언제드라?"

효원은 혼자말처럼 물었다.

안서방네가 손가락을 깜작거리며 짚더니

"모렝게빈디요."

효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가 보라고 손짓으로 시늉하였다.

큰방에서 율촌댁 일어나는 기척이 부스럭부스럭 들리면서, 놋요강 뚜껑 챙그

르르 부딪치는 소리가 난 까닭이었다.

어느결에 창호지 장지문이 파랗게 바래어 인광 돌아 날이 샌 것을 알리는데,

마당을 지르며 물지게 진 붙들이가 철걱거리고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싸악 싸악 싸악, 마당 쓰는 빗자루 소리가 귀를 쓸어 내린다.

간밤의 일 인간사 아무것도 모르는 정짓문 바라지는 삐그드득 빗장이 열이고,

무쇠 검은 솥뚜껑 밀어젖히는 둔중하고 실팍한 정그렁 소리에 이어, 쇠아아 물

붓는 소리, 그리고 솔가지 나무 부러뜨리는 투둑투둑 똑 소리 ,식었던 아궁이에

지피는 불땀이 주황으로 세차게 타오르는 후욱후욱 투명한 불길 소리. 달그락거

리는 그릇 소리들.

이것들이 서로 소런거리면서 소리끼리 부딪어 평화롭고 순결하게 깨어나는 새

벽은, 죄가 없어 얼마나 가벼우냐.

이기채의 사랑에서 카랑카랑 울린 기침 소리가 푸른 공기를 흔드는데, 철재가

선잠에서 깬 소리로 무어라 칭얼거리며 돌아눕는 모양이었다.

이만한 새벽과 아침을 맞이하기 이제는 어려워지려니. 미구에 곧.

효원은 밤새 엉긴 근심을 씻어 내듯 이마를 쓸어올려 머리까지 쓰다듬고는,

큰방으로 시어머니 아침 문안을 들어갔다.

효원을 힐끗 바라본 율촌댁의 표정이 삭이지 못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어 불

편하게 구겨진다.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예를 하고는 늘 그러했듯이 손바닥으로 아랫목 웃목 만져 보며 온기를 살피는

효원을 찬찬히 바라보는 율촌댁 눈살에 금이 패인다. 그런데도 문안이랍시고

들어온 며느리는 시어미 안색 살필 생각은 아니하고, 애꿎은 방바닥만 딴청부리

여 더듬고 있는 것이다.

저것이 일부러 내 얼굴을 피하는 것이냐, 어쩌냐.

싶어서 율촌댁은, 효원이 들으라고 잔기침을 해본다.

그러면서 그네는 또 그런 자신이 몹시 못마땅해진다.

이제는 그 어려운 시어머님도 작고하셨으니 자신 위에 더 어른이 안계시건만,

며느리한테 어젯밤 같은 일로 봉욕이라고나 해야 할 일을 느닷없이 당하고도,

당연히 나무랄 일 꿇어앉혀 준열하게 꾸중하는 대신, 며느리가 먼저 자신의 심

서를 헤아리고 살피어 사죄하기만 바라는 소심이, 울컥, 홧증으로 돋친다..

네가 대관절 뭐 잘헌 것 있다고, 뻗대하니 모가지 세우고 이 방에 들어와서

손바닥으로 방바닥만 쓸고 있는 것이냐. 시방.

크흐음.

기침에 가시가 걸린다.

"그래, 엊저녁 일은 네가 꼭 잘했느냐?"

드디어 율촌댁이 목에 걸린 가시를 뱉어 낸다.

효원은 얼른 손길을 거두고는, 어머니 말씀 그 어떤 책망이라고 다 옳으시니

달게 받겠다는 거동으로, 율촌댁 앞에 앉아 잠잠히 이마를 수그렸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아. 어디 저 천하에 불상것들이나 허는 짓을 네가 감

히 누구 앞에서. 그게 사람이 헐 짓이드냐? 패악질이지. 너 너희 종시매한테 무

슨 오랍의댁 유세헐 일 있었느냐? 설령 나는 모르는 찰원수 너희끼리 서로 진

일이 있다손 친들, 그런 일이 있을래도 있을 건덕지도 없었지마는, 원수는 원수

고 법도는 법도지, 아니 그래, 네 시에미 버티고 앉어 있고, 너희 시숙모님 창황

중에 놀란 가슴 안절부절 질정치 못하시는 머리맡에, 화적떼 난입도 아니고, 함

부로 뛰어들어서 네가 무슨 권한이 그리 세어, ㄴ은 어미가 혼절한 환자를 오밤

중에 둘러업고 쫓겨나게 몰아붙여? 몰아붙이기를. 너 어디 모질어서 사람 쓰겄

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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