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기표는
"뺨맞고 잘못했단 말 들으면 무엇합니까. 당헌 다음에 덕석말이 한다해도, 한
번 당해 버린 일은 물린 수 없는 것. 저런 놈한테 무단히 방심했다 허 찔리지
말고 미리 단속하셔야 헐 겁니다."
하고 했었는데, 이렇게 당할 줄이야.
이기채는 분노로 와들와들 온몸이 떨리면서 자꾸만 속에서 식은 땀이 났다.
화기가 치솟아 불길이 뻗치는 것이 아니라 웬일인지 겉으로는 뇌성을 치게 호
령 소리를 지르지만, 추운 사람처럼 오한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무슨 일이 있는게야?"
동계어른 문장 이헌의가 흰 수염이 성성하게 일어선 채로 들어온다. 노복의
전갈을 받고 급히 나선 걸음이라 숨이 차는데도, 고를 겨를이 없는 물음이다.
이헌의의 뒤를 좇아 기응이 핼쓱한 얼굴로 나타났다. 누렇게 뜨다 못해 질린
자리는 푸릿푸릿 죽은 살같이 반점이 돋아난 기응의 얼굴은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하였다. 낯색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백지장같이 바래고 마른 입술이며 쑥 들
어가 핏발진 눈들이 어제 보던 기응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이마를 찧을 상처 또
한 싯붉었으니.
"자네 어디 안 좋은가?"
이헌의는 종가의 일을 잠시 잊은 사람처럼, 유심히 기응의 안색과 형상을 살
피면서 의아한 얼굴로 근심스럽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아니라니. 사람이 저렇게 변색이 되고 축이 날 때는 원인이 있지. 어찌 아니
야? 무슨 일이 있어?"
"그저 요새 조끔 보대낀다 싶드니마는... 괜찮습니다."
기응은 이헌의의 시선을 피하여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고, 기표는 기응을 마주
보지 않으려고 턱을 들어 서로 빗기며 차 오른다.
"샌님, 춘복이 잡어 왔는디요."
사랑마당에서 우세두세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상머슴이 고한다. 이 말
이 신호가 되어 겹문 영창을 탕 열어제친 이기채가 누마루로 나갔다. 그리고 방
안에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의 좌우로 따라 나섰다.
사랑마당에서 올려다보는 그들은 머리꼭대기보다 더 아득히 놓은 곳에서 춘복
이를 내려다보았고, 마루에 선 상전 이기채의 발은 흡사 공중을 밟고 또 있는
듯 보였다. 그만큼 사랑채는 높았다. 장정의 키보다 더 높이 축대를 쌓아 올려
그 축대 위에 사랑채를 우뚝, 그러면서도 날아가게 세운 때문이었다. 사랑채는
서슬과 위엄에 가득 차 있었다.
사랑마당에서 그 사랑채 축대로 오르는 화강암 돌계단에 쇠끝 같은 겨울 햇빛
이 날카롭게 찍힌다.
축대 아래 마당 가운데 깔린 덕석의 복판에 춘복이가 잡혀 와, 흩어진 더벅머
리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네 이노오옴."
이기채의 움성이 저 배 밑바닥 오장의 창자를 쥐어 움킨다.
분노로 뒤엉킨 단말마가 중치에 콱 뭉치면서 숨을 막아 버린 듯, 그의 음성은
치솟다가 끊긴다. 대신 얼굴이 질린다. 그 모습은 사람을 위압하여, 몰매를 치는
것보다 더 두렵게 한다.
"네놈이 한 일을 네 주둥이로 낱낱이 말해 보아라."
이기채는 춘복이 정수리를 뽀개 버릴 것처럼 노려보았다.
덕석가에 저만치 웅게중게 둘러선 사람들이 끽소리도 없이 숨죽이고 춘복이
뒤꼭지만 바라보았다. 그들은 침조차 삼키지 않았다.
"네 이 천벌을 받을 놈. 말 못하겠느냐."
이기채가 채자 삼차 다그치는데도 춘복이는 입이 붙은 채 떨어지지 않는다.
이기채와 춘복이 사이게 긴장이 차 오르며 숨을 막는다.
춘복이가 붙들려 왔다는 말에, 사색이 되어 기함을 한 것은 효원과 안서방네
였다.
"아이고매, 새아씨. 이 일을 어쩌먼 좋당가요. 시방 사랑마당에 춘복이란놈 끄
집어다 노혹 덕석몰이를 헐랑게빈디요, 어매에, 저놈이 어뜨케 잽혜 왔이까요잉?
무신 일로?"
이 사단의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강실이의 비밀을 드
디어 사랑에서도 알게 되셨는가, 앞이 그만 캄캄하였다.
"으아아악."
퍽, 퍽, 퍽, 소리가 나면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비명이 터진다. 이미 춘복이
를 덕석에 말아 몽둥이로 몰매를 내리치는 모양이었다. 안서방네는 그매가 자기
어깨로, 등판으로, 정수리로 떨어지는 것만 같아 아찔아찔, 몸을 동그랗게 굼벵
이 감듯 오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사랑마당은 안마당 건넌방에서는
보이지 않으니, 더욱 공포가 컸다.
"저놈이 못 전디고 입을 여는 날에는 인자 무신 일이 벌어지까요... 그런디 여
까지 잽헤 왔이먼 입 안 열고는 또 못 배길 거인디요."
죽제. 입 안 열먼 니가 죽어얄 거이다.
원에 사랑 샌님이 누구신디 니 입 하나를 못 열으시겄냐, 허나, 춘복아, 니가
입을 열먼 우리 작은아씨 돌아가신다. 불쌍허신 우리 애기씨 돌아가신다. 그러니
어쩌끄나, 어쩌먼 좋으끄나.
그런디, 너는 입을 열어도 살기는 에러울 거이다.
니가 저질른 일이 상놈으로서 양반의 작은아씨를 겁도 없이 겁탈했잉게. 목숨
이 열 개라도 죽을 일 아니겄냐. 만일에 발설허먼 너는 죽어.
말을 나해도 죽고, 해도 죽고, 니 신세도 가련헌 신세다만, 우리 작은아씨 니
가 좀 살려 도라. 옹구네 말대로, 니가 그렇게도 오류골 작은아씨를 사모 흠앙했
이먼, 덕 한 번 베풀어라. 니가 니 생전에 작은아씨한케 멀 해 디리고 잡어도 해
디릴 수 있는 것 어디 있겄냐? 가진 것 없어서 설운 니가 제발 준 일 적선에 큰
덕 한 번 베풀어라. 베풀어디려어.
암말도 말어잉? 맞어 죽드라도 너는 모른다 허고, 죽으먼 죽었지 절대로 그
일은 말허지 말어라잉? 머리크락을 비여서 짚신을 삼어 은혜를 갚을 거잉게. 내
꼭 갚을 거잉게.
부디, 부디 암말도 말그라이. 잉?
안서방네는 내리치는 몽둥이 몰매질 소리에 흠칫흠칫 몸을 죄면서도, 그때마
다 호성암 종소리 울리는 것에 맞추어 부처님한테 절하듯이, 매질 소리에 마음
을 문지르며 빌고 있었다.
참 천벌을 받을 일이었지만, 그 몽둥이 소리가 들리면 그래도 그 순간만은 안
심이 되었던 것이다.
아이고, 아직은 말 안했구나.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이기채의 고함 소리는 폐장을 쥐어짜 흩뿌리는
것 같던 비통 대신, 끓어오르는 격노를 억누를 수 없는 분기가 탱천해져서 안채
마룻대에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아버님께서 점심 진지도 안 자셨는데, 저리 노여우시니 혹 현기증으로 어지러
우실까 걱정이 되는데요."
효원은 안채 대청마루에 나와 선 율촌댁한테 근심스럽게 말한다.
"대체 무슨 일로 저러신다더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끔찍한 일일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너희 어르신께서, 상중
에 계신 큰상점(상제)으로서, 저렇게 핏소리 낭자하게 몰래를 치실 리 있겠느냐.
아마 사람으로는 차마 못할 흉악한 일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으리라."
율촌댁의 말에 효원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때 그네의 뇌리를 친 것은, 이 일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강실이의 얼굴과 강모, 춘복이 얼굴이 겹치며 뒤섞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윽고 그네를 사로잡은 것은 철재의 얼굴이었다. 이 가문, 이 집안의 증손인 철
재가 장성하여, 이 더러운 사건의 굴레와 족쇄 때문에 낯을 못 들고, 어디 가서
든지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정경이 가슴을 때린 것이다.
자식에게 누를 끼치는 부모의 조상.
이보다 더 부끄러운 경우가 어디 있으랴.
제발 조용히... 조용히.
효원이 저도 모르게 주문을 왼다.
일을 키우지 마소서, 아버님.
"네 이노옴."
사랑에서 고함 호령이 다시 울려 온다.
율촌댁과 효원은 말을 멈추고 소리에 눈을 쏟으며 귀를 기울였다.
"정월 대보름날 밤 산지기 박달이가 선산에서 내려오는 너를 두 눈으로 봤다
는데. 보기만 해? 네 놈 주동이로도 산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면서? 그런데 산
소에는 손을 안 댔다면, 누가 그 말을 곧이듣겠느냐, 이실직고하면 죽는 것만은
면하려니와, 끝끝내 버틴다면 맞다가 명줄 끊어지는 것을 원망 말어라. 산소에
손댄 놈이 너지?"
율촌댁이 놀란 눈으로 효원을 본다.
"산소라니?"
"이제 보니, 아까 참에 산지기가 사랑에 뵈오러 왔더랍니다. "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효원은 안서방네를 불러, 안서방 잠깐 안채로 왔다가라, 이르도록 하고는 동정
을 알아보려고 사랑채로 가는 내외담 모퉁이에 모둠발로 다가가 선다. 이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저는 그런 일 없습니다 "
"저놈이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 아직도 말 못하겠느냐?"
"그런 일 없습니다. "
맷집 좋고 오기 많은 춘복이도 이제는 다 맞아 지쳤는지 그 말만을 겨우 밀어
낼 뿐, 바스락 하는 기척도 없었다.
"아니, 이게 무엇이냐."
대문간에 우루룩 발자국 소리 들리는가 싶더니 몰매 소리가 잠시 그치고는 아
무 수리도 들리지 않다가, 이기채가 경악하는 음성이 터졌다.
아까 춘복이가 끌려올 때, 박달이는 일꾼 두 사람을 데리고 황망히 뜬걸음을
놓아 청암부인 산소를 자세히 살펴보러 갔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덤 속에서 천만 뜻밖에도 웬 뼈다귀 주머니를 발견했으니, 박달이는
그만 숨이 질려 혼비백산 뒤로 나가떨어질 뻔하였다.
아이고, 나 산지기 종내 헐랑가 모르겄다. 누가 나를 데꼬 갈라고 자꼬 씌이능
게빈디. 오늘 이게 웬일이여.
청암부인 무덤 옆구리 헐리었던 자리를 모촘모촘 헐어 본 일꾼들도 모두 백지
에 싼 그 뼈다귀에 입을 따악 벌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춘복이 거 수악헌 놈이네이."
"명당 도둑질은 부녀지간에도 헌당만 그려."
"부녀지간이라니? 어뜨케?"
"부자지간은 조상이 같어도 부녀지간은 서로 봉제사 조상이 달르제. 딸은 시집
가먼 넘의 성씨 후손이 ㄷ게로. 자기 자손 위헐라고 명당 찾다 보먼 부녀지간에
도 자리 놓고 안 다투것능가잉?"
"허, 거, 씨잘데기 없는 소리들. 시방 그런 이얘기 허게 생겠능가?"
박달이는 옆에 따라오는 일꾼들 입을 무질러 저희 집으로 쫓아 버리고는, 한
걸음에 내달려 이기채한테로 뼈다귀를 치켜들고 온 것이다.
"더럽다. 치워라."
이기채는 관자놀이에 불끈 힘줄이 솟구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마루를 구르더
니, 버선발로 우르르 축대 계단을 내려와 휙, 몽둥이를 채어 집었다.
그리고 덕석에서 끌어낸 피투성이, 걸레가 되게 찢어져 버린 옷이 싯벌겋게
너덜거리는 춘복이의 대가리 정수리를 향하여 박살을 내리라, 그대로 내리치려
공중으로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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