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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25)

카지모도 2024. 12. 13.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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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푸른 발톱

 

밤이 더욱 깊어진 한고비, 안서방네가 보퉁이를 보듬고 주춤주춤 뒤따르는 고

샅길은, 발부리로 더듬어 간신히 한 걸음씩 나갈 만큼 어두웠다. 구름만 두텁지

않았으면 달이 있는 밤이라 이보다는 걷기에 나았을 것이지만 오늘 밤은, 다행

인가, 불행인가, 비 먹은 구름이 스산하게 두꺼웠다.

"작은아씨."

어둠 속에서 안서방네는 강실이를 부르며 보퉁이를 건네준다. 이제는 강실이

혼자 가야 한다. 묵묵히 그것을 받아드는 강실이 손이 검불처럼 힘이 없어 휘청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하였다.

이 기운으로 어뜨케 단 한 발이나마 낯선 넘의 길을 디디시꼬잉.

"부디 몸조심 허시기요."

업어다 디릴 수만 있다먼 얼매나 좋으까. 천리라도 만리라도 내가 따러갈 수

만 있는 형편이라먼, 산을 넘고 물을 건네도 내가 이 등어리에 다 업어 뫼시고

갈 거인디. 그러먼 작은 아씨도 아조 쪼께는 덜 설우실랑가도 모르는디. 저승길

도 아닌디 어찌 이리 혼자서 가시까요오.

안서방네는, 보퉁이를 받아 안은 채 무엇을 어찌할 아무 염도 내지 못하며, 그

저 바람에 몸을 맡기고는 아랫몰 물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강실이한테, 하

직의 인사로 공손히 무릎을 꿇어 절을 한다.

맨땅에 조아리는 안서방네가 흙 묻은 이마를 들어올릴 때, 그네의 눈앞 어둠

속에서 강실이의 흰 치마폭 자락이 펄럭, 펄럭, 나부끼었다.

안서방네는 끓어지는 창자를 오그리며 일부러 범상한 척 하직을 한다. 그것이

이 불쌍한 상전에 대한 하인의 예였다.

작은아씨. 어디로 가시든지 그저 몸 성히. 딴 맘 잡숫지 말고, 큰 맘 잡숫고...

어머님 생각을 해서라도 부디 이 고비를 이기시야 해요잉.

안서방네는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은 채 젖은 얼굴을 들어 강실이를 우러른

다.

조상님들이 무심치 않으실 거이여요.

이상하게도 명부의 적막한 펄럭임같이 나부끼는 치맛자락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안서방네는, 물을 건너 동구밖으로 가뭇 모습을 감추는 강실이한

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황아장수는 동구밖의 정자나무 귀퉁이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기로 했던 것

이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어둠에다 몸을 묻고 눈빛으로만 강실이 오는 기척을

살피던 황아장수 아낙의 눈에 희끗희끗 옷자락이 비쳐 들었다.

오시는구나.

등짐 진 멜빵을 추스리며 그네는 길섶으로 한 발짝 나선다.

오는구나.

똑같은 시각에 옹구네도 강실이의 흰 옷자락이 휘청휘청 펄럭이며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네는 정자나무 이쪽 건너편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네

의 눈빛이 번뜩 푸른 발톱같이 부시를 친다. 그리고는 휙, 여우가 공중으로 몸을

날리듯, 강실이 오는 길목 어귀에 미리 나가 길을 막았다. 그리고 버르르, 갈기

를 일으키며 기다렸다.

그네는 이미 심상치 않은 오늘 밤의 일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개보다 날

카로운 그네의 후각과 촉각에 걸려든 일이 지금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구신을 속이제 나는 못 속여. 내가 누군디."

아까 황아장수와 어깨를 나란히 부딪치며 좁은 고샅길을 구불구불 내려올 때,

겉으로는 아무 내색 안하면서 흔연히 다른 이야기만 주원섬겼지만, 속으로는 골

똘히 생각에 생각을 굴리며, 웬일인지 조급하게 쫓기는 마음을 그네는 겨우 붙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랫몰 어귀에서 할 수 없이 아낙과 헤어지며

"그러먼 어디 정그정 쪽으로 갈라요?"

물었다. 아낙은 그 대답 대신 쭈밋거리더니

"나 알어서 갈랑게 몬차 가드라고. 쉬엄쉬엄 가지 머. 어채피 밤질이라 서둘르

먼 돌팍에나 채이지, 축지법을 헐 것도 아니고."

하는 것이었다.

"어매? 아까는 누가 뒤꼭지 할퀴러 쫓아오는 것맹이로 신짝을 뒤집어 신게 서

둘등마는. 왜? 원뜸에 누구 빚쟁이 온답디까? 도망치디끼 오밤중에 쉬익 쉭, 비

얌 소리를 냄서 나와 놓고는?"

"넘이사."

"오상허네요이. 머 누구랑 밤도망 갈 약조 맞촤 놨소?"

"참 쪽지께 무당을 허겄네, 일없이 질같으서 밤을 샐랑가?"

"아니 나는 그래도 질동무 의리로 한 마디 헝 거이제."

"의리는 내가 이고 갈랑게 얼릉 집이나 가 보셔어. 글 안해도 질 더딘디 발목

붙잡지 말고. 말에 갱겨 자빠지겄네. 칡넝쿨잉가."

"누구 눈 맞최 논 홀애비 있능갑소잉? 어째 내 그에 그러네?"

히히히.

옹구네는 일부러 눙치는 웃음을 깨물어 장난치는 것이라는 표를 하고는, 발걸

음 돌리어 거멍굴로 가는 척하면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이어서 황아

장수도 옹구네 낯바닥 돌리는 것까지는 못 보았을 터이나, 옹구네는 그 아낙의

걸음 놓는 방향을 날카롭게 꼬아보았다. 옹구네 짐작대로 황아장수는 동구밖 정

자나무 쪽으로 가고 있었다.

틀림없이 아낙은 정자나무 아래에서 강실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새로 뚫린 정

거장 앞길을 피하여 사람 없는 소롯길로 빠져 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는, 걸어서

밤길을 갈 것이다.

거기까지는 짐작하겠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두무지 떠오르지

않아 가슴을 웅그리며 물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우선 막혔던 오줌을 누던 옹구네는, 순간, 쏟아지는 쐐애, 소리에 번개

같이 한 생각이 꿰뚫고 스쳐 후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여, 그러먼 되겄다."

아이고, 신통허구라.

제 무릎이라도 치고 싶을 만큼 옹구네는 갑자기 신이 났다. 그리고 어서 강실

이가 나타나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데, 일각이 여삼추라더니 그말 그른 데

없어서, 조바심에 숨만 넘어갔지 강실이의 모습은 좀체로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드디어 펄럭, 펄럭, 헝겊 조각 희뜩이는 것처럼 아랫몰 물 모퉁이로 사

람 옷 나부끼는 기척이 비친 것이다.

옹구네는 그 물 건너는 길섶에 무기를 꼬나쥔 복병처럼 고개를 무릎에 박은

채, 오줌 누듯 옹크리고 앉아서 바짝 몸을 숨기고 강실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

다. 정거장 쪽으로 가든 소롯길 쪽으로 가든 이 길목까지는 건너와야 어느 방향

을 정할 수 있는 길섶이었다.

마치 먹이를 채려는 승냥이같이 온몸에 터럭을 세우고 발톱을 가는 옹구네는

벌레벌레 가슴이 벌렁거린다.

강실이는 옹구네 가슴 벌렁거리는 것을 따라, 얼핏 어둠에 먹혀 지워진 듯 스

러졌다가 흰 반점처럼 가뭇 드러나곤 한다.

강실이의 모습이 안 보이면, 아차, 싶다가 설핏 보이면 옹구네는 후끈, 더운

피가 얼굴로 모여 흥분을 참지 못했다.

아이고오, 더이어어.

성질 급한 옹구네 가슴패기에 땀이 맺힌다.

그때였다.

일부러 속곳도 추스리지 않은채 저고리 앞섶을 누르는 옹구네 바짝 코앞으로,

허깨비 같은 강실이가 소리도 없이 다가섰다.

옹구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할퀴듯이, 별안간 홱, 몸을 솟구쳐 일으키며

훌떡, 뛰어올라 강실이를 덮치며 왈칵, 앞으로 쏟아진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강실이 두 팔을 거칠게 붙들며 쏟아진 옹구네 몸에 쏠려 강실이는 그만 픽,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작은아씨."

세찬 기세로 자빠뜨려 함께 넘어지며 옹구네는 일부러, 내가 너 안다는 시늉

으로 똑똑하게, 작은아씨를 부른다. 강실이는 기색을 해버린 것일까, 대답은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참말로 작은아씨네? 저는 똑 구신인 중 알았그만이라우. 아이고, 송구시러와

서 어쩐디야? 지가 시방 원뜸에서 낼오다가, 소매(오줌)조께 보미라고 궁뎅이 벗

고 앉었는 판에, 저거스 머이 희뜩희뜩 비치길래, 도깨빈가 구신잉가 겁이 짠뜩

나서요, 어뜨케나 놀랜 짐에 기양 머이 저 잡아먹을라고 허는지만 알고, 작은 아

씬지도 몰르고 뎀베 부렀네요. 무서서라우. 요. 요, 저 아직도 벗고 앉었는 것 좀

보시요예."

나동그라진 강실이를 붙들어 일으키며 옹구네는 발명을 한다.

강실이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겁에 질려 탈기된채, 혼절한 사람같이 기운이

빠져 버려 몸을 추스리지 못하였다.

이렇게 느닷없이 놀라지 않았더라도 한 걸음 내딛기 어려운 정황의 강실이가,

이 어떤 길을 나서는 것이랴, 미어져 무너지는 억장을 감당하기에도 겨운데, 이

총중에도 행여 누구 동네사람 눈에 드이어 그나마 마지막 남은 부모 얼굴에 먹

칠하는 일이 생기면 어찌하나, 가물가물 꺼져드는 의식을 있는 껏 추리어 한 점

에 모으며 긴장하고 오던 터이라, 저절로 기진하여 쓰러질 것만 같은 강실이였다.

그런 끝에 이렇게 놀라 놓았으니.

"정신채리시요잉? 예?"

흔들어 깨우는 척하면서도 옹구네는 행여 강실이가 바로 깨어날까봐 얼른 둘

러업고는, 보퉁이까지 챙겨 뒷짐에 들고, 서둘러 정자나무 쪽으로 걸음을 돌린

다.

"그런디 어디 가시요예? 보따리끄장 다 챙게 갖꼬? 도망가시오?"

겁날 것이 이미 없는 옹구네가 등에 업힌 강실이한테 묻는다.

"내 고에 황아장시랑 어디로 가기로 헝 것맹인디, 아매 저 정자나무 아래 어디

보독시리고 있을 거이요, 그런디 작은 아씨가 먼 죄 졌소? 왜 이러시능가 나는

통 모리겄네. 가매도 있고 기차도 있는디, 어디를 가니라고 쥐도 새도 모리게 이

러고 밤질에 보따리를 지고, 이름도 성도 모를 넘을 따러 강남을 가까잉? 종도

있고 호제도 있고 머심도 있는디. 몸도 성찮은 작은아씨가."

못박는 소리만 골라 가면 콕, 콕, 쪼아대는 옹구네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거품

처럼 부클부클 피어난다. 제 생각 첫 번재 고리가 한 올도 비틀어지지 않게 뜻

같이 맞아드는 것이 아무래도 신통했던 것이다.

"누구여?"

정자나무 귀퉁이에 몸을 숨긴 채 붙어 서 있는 황아장수를 본 옹구네는 이번

에도 일부러 놀랄 만큼 큰소리로 물었다.

"쉬잇."

그것이 옹구네 목소리인 것을 알아들은 아낙은, 혼겁을 하게 놀라 소스라치며

길섶으로 폴짝 뛰쳐 나왔다. 그리고 나무라는 기색으로 눈을 부릎떠 보인다.

"오늘 밤에 놀래는 사람 많네에."

옹구네는 황아장수 아낙한테 강실이 업은 모양을 보여 준다.

"물 넘어오시다가 기양 픽 씨러져 부렀소. 기진 맥진, 맥이 다 떨어져서 도대

체 걸으실 수가 없었등게빈디. 대관절 무신 사정잉가는 모리겄지마는, 혹시 이

작은아씨 뫼시고 어디고 갈라고 그랬었소?"

아낙은 뜻밖의 상황에 말문이 막혀 얼른 무어라고 대꾸를 하지 못한다 그러나

옹구네는 틈을 주지 않고 채근하듯 감겨들며 묻는다.

"아 말을 해야 속을 알제. 둘이 혹시 어디로 가기로 했능가 싶어서 여끄장 업

고 왔제. 앙 그러먼 멋 헐라고 일로 와아? 원뜸에로 가제. 작은아씨댁이 정자나

무 밑이간디? 내가 눈치 하나로 사는 사램이라, 이렁가아, 허고는 어찌 되얏든

믈어나 볼라고 왔그만. 아니먼 후딱 말히여. 작은아씨 기색 혼절을 해서 돌아가

시먼 나만 죽응게로."

으름장을 놓는 것이나 진배없이 을러메던 옹구네가 정말로 몸을 돌려 세우려

하자 황아장수는 황망히, 그러나 결심한 듯이

"가만 있어 봐."

한다. 그네의 이마에 진땀이 돋는다.

"가만 있으먼 머 무신 수가 난당가? 가든지 오든지 우선 작은 아씨를 어디다

가 뉩헤얄 게 아니요오? 질바닥으서 밤 샐라요?"

"내가 어디 조께 뫼시고 갈 디가 있었그더언."

"어디로요?"

"몇 백 리는 못되야도 그만치 버금 가게는 가야는디."

"미쳤능게비."

"이게 무신 일이당가."

"이런 냥반을 뫼시고 가다가 낯선 질에서 초상 치르실라요? 또 그 덤태기는

누가 쓰고? 어매, 저승사자로 나설랑게비요잉? 겁도 없이."

"그러먼 어쩌얀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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