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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27)

카지모도 2024. 12. 15.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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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납치

 

못마땅하게 세운 무릎에 두 팔을 거칠게 감아 깍지를 낀 채 삐딱하니 틀고 앉은

옹구네가, 깎은눈으로 춘복이를 꼬아본다.

바지직, 바지직, 무명씨 기름 등잔불에 까물어지는 얼룩이 피멍인지 그림자인

지 시꺼멓게 뭉쳐서, 온 낯바닥이 맞어 죽은 귀신 모양으로 터지고 헝클어진 춘

복이는 짐승 앓는 소리조차 제대로 못 내는데, 옹구네는 농막으로 내달려올 때

의 기세와는 달리, 지게 문짝 문간 윗목에 오똑하니 앉아, 그러는 양을 바라볼

뿐이다.

마음이 있어도 손을 쓸 수가 없는 탓이었다.

에라이, 더러운 년의 팔짜야.

아무도 안 보는 속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옹구네는 지난번에 강실이 업어오던

생각을 한다.

참내, 내가 아무리이 아무리 근본 없는 불상년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껍데기만

둘러썼제 어디 사램이랄 수도 없이 살어는 왔다마는, 내가 무신 개 돼야지도 아

니고, 창시 빠진 무골충이도 아닌디... 살다 살다 벨노무 우스깡시러운 꼬라지를

다 보겄그만잉. 잉? 내 참.

애비 회춘허라고 지극 정성 꽃 같은 동첩을 업어다 디리는 효녀 심쳉이라먼

또 모르겄네.

콧물을 훌쩍이듯이, 등에 업은 강실이가 흘러내리는 것을 몇 번씩이나 들썩

추켜올려 다시 고쳐 업으면서, 옹구네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 잘하는 말이 단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었다.

슥, 삭, 슥, 삭, 스슥, 삭.

고샅을 밟는 발소리만 황아장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무락 어둠 속으로 빨

려들 뿐 인적도 없는데다, 오늘 낮 당한 일이 하도 참혹 뜻밖이라 온 마을 거멍

굴이 멍든 것처럼 웅크리고 있어서, 무슨 소리 귓가에 스치기만 하여도 소스라

칠 판에, 두 아낙이 담장 밖 길가에서 무어라고 객담 주고받을 형편이 아니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황아장수는 어줄어줄 옹구네의 엉뚱한 뒷자락만 잡고 가기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가 듣든지 말든지, 일의 시작부터 지금 이렇게 옆구리로

빗나가게 되기까지 전말을 좀 이야기해 보고 싶은 심사도 치밀었다. 그러나 먼

저 말문을 열지는 않았다. 비록 엉겁결에 옹구네와 한 바디에 얽혀들기는 하였

으나, 아직 그 속을 몰라 날 고르고 씨를 치는 가닥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탓이

었다.

그네는 고생에서 배운 신중함이 몸에 밴 구석이 있었다.

이게 머이 심상치 않은 징조는 징조다. 휘영청 달 밝어얄 밤에 난데없이 먹구

름 찔 때, 내 어찌 요상허드라. 구름 저렇게 쪄 노먼 인자 비오고 말제, 필경. 구

름장도 두껍그만, 변괴시럽게 이월 장마가 질랑가아. 어쩐 일이여 시방. 바람할

라 설렁설렁.

처음 계획대로 길을 떠났다손 치더라도, 사람 눈이 무서운 마을 어귀만 벗어

나면 어차피 주막집 곁방 신세를 져야 할 터였으니, 차라리 핑곗김에 옹구네 오

막살이 아랫목으로 온 것이 낫지 싶다고, 자꾸만 속다짐을 하며 우겨 보았으나

웬일인지 가시 걸린 꺼슬이 가라앉지 않았다.

옹구네는 또 옹구네대로 입도 떼기 싫어 강실이 업은 뒷손만 갈퀴처럼 얽어

걸고 휭휭 걸음을 놓았다.

아이고 참, 이거는 보쌈도 아니고 도적질도 아니고, 보시그만, 보시. 참말로 열

녀도 가지가지네. 내가 아조 옹구아배 죽고도 못해 본 열녀를 이번에 뽄때 있게

한 번 해볼랑게비다.

세상 천지 네거리를 다 막고 물어 바라. 어뜬 호랭이 물어갈 넋 빠진 년이 지

서방한테 시앗을 업어다 주능가. 그것도 저보다 더 젊은 년, 더 때깔 좋고 잘난

년을.

나도 긍게 미친 년은 미친 년이여.

가만히 내비두먼 강실이인지 작은아씬지 지 발로 아장아장 동구밖으로 걸어나

가, 낯설고 물 선 디로 아조 영영 가부릴 거인디. 흔적 없이 사러져서 다시는 펭

상에 치맷자락 그림자도 얼씬 안헐 거인디, 그러먼 백 번 좋제. 안 그러게 생겠

이먼 그렇게 해 도라고 치성을 디레도 모지랠 판국에, 대관절 멋 땀새 남 다 자

는 오밤중 깜깜헌 질가에 쭈그리고 앉어서, 퇴깽이 눈깔을 똥그람허게 뒤집어

뜨고 뚜리뚜리, 오능가 가능가 놓치능가 잡능가 지키고 앉었다가, 무신 진사 급

제 알성시 과거를 볼랑가 이 꾀 저 꾀 삼중 꾀를 짜내서는, 오랏줄로 칭칭 무꺼

깨골창에 패대기를 쳐도 시언찮을 시앗년을, 금이라까 옥이라까 ㅎ 묻으까 업어

다가, 아나 잡수우, 송두리째 바칠 거이냐. 임금님 진상도 이렇게는 못허겄다.

나 같은 년 또 있으먼 나와보라 그러제.

양반, 양반. 양반만 열녀 있는지 알지마는, 그건 다 빚 좋은 개살구고, 진짜 열

녀는 여가 있다, 여가 있어, 야야. 더러운 년의 열녀 여그 있어어. 어리구으, 내

팔짜여어.

앙가슴을 두드리는 대신 강실이를 바짝 죄어 업고 걷는 옹구네 머리꼭지가 어

둠에 짓뭉개져 먹구머니 같았다.

"아이, 야. 옹구야. 이렇게 좀 해 바라이? 요리, 요렇게 좀."

등에 업은 사람 때문에 손이 묶인 옹구네는, 제 어미를 기다리다가 잔뜩 꼬부

린 채로 잠이 든 옹구를 발로 건드려 밀며

"예, 저그 저 이불 조께 내려 보쇼예. 욘가 머잉가 저것도 이리."

방문간에 주춤거리고 서 있는 황아장수를 불러 턱짓을 하였다.

궤짝 같은 소나무 반닫이 위에 얹힌 이부자리 요대기를 끌어내리던 황아장수

는 내심으로 놀란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 동안에 오다 가다 마주치면서는 섣부르게 나서기 좋아하고 아는체 잘하는

난단이인 줄로만 알았더니, 옹색하고 보잘것없는 초막집 방칸이 뜻밖에도 훈김

돌게 깨끗하고, 이부자리 빨아서 시친 솜씨며 베개 꾸며 놓은 모양새가 허술하

지 않은 때문이었다.

"아앗따아. 어거 질 잘났네. 손때가 기양 자르르."

윤이 나는 반닫이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며 황아장수는 모처럼 참았던 숨

을 트려는 듯 곁다리로 말뚜껑을 열었다.

"그께잇 거이 머 귀헌 거이요? 귀목도 먹감도 아닌디."

"아 머이든지 질 나먼 좋제에. 꼭 귀목에 먹감나무 장롱이어야만 좋옹가아?

암만 하찮은 바가지 한 개라도 내 손에 오래 익으면 살갑고, 이쁘고, 금밥그릇을

준대도 안 바꾸게 정들어서 그 바가지 한 개 갖고 오만 짓을 다 허는 사람도 있

잖응가. 정짓간에 물바가지야 한 해 쓰먼 더 못 쓰지마는, 요마안허니 요강단지

만헌 놈, 노오러니 잘 익어서 살도 마침 마참허게 올른 놈을 곱게 켜서 바가지

맨들어 노먼 참 이쁘잖에? 거그다가 봄이머는 화전 부치는 진달래 따다 담고,

가을에는 밤도 까서 담고, 홍시감도 담어 놓고 머고, 올기쌀도 소복허니 담어 놓

고.머리맡에 애장물로 그만헌 거이 또 없제. 그렁게로 해 바뀌어 새 박 따도 작

년에 쓰든 바가지, 재작년에 쓰든 것, 석삼 년에 몇 십년씩 된 바가지들 다 그

냥 쓰잖능게비 왜. 깨지먼 꼬매 쓰고. 막넝쿨에 주렁주렁 흔헌 거이 박인디, 박

이 없어 그러겄소? 정들어서 애끼는 거이제. 내가 ㅂ는디, 저그 원뜸에 이문 종

택에서는 시어머니 쓰시든 바가지를 메누리가 물려받어 쓰다가, 아깝담서, 율촌

아씨말이여, 인자 기양 신주단지 맹이로 뫼셔 놨다드랑게. 시어머님 손때가 묻었

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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