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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23)

카지모도 2024. 12. 10.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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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 다시 오거든

 

방이 깊어 효원은 윗목 반닫이 속에 깊숙이 넣어둔 상자를 꺼낸다.

대접의 주둥이를 서로 맞물려 포개 놓은 것만한 이 상자는 , 마치 제사에 쓸

밤을 친 것 같은 모양인에, 윗면과 바닥면은 편편히 깎이고 배는 볼록 나왔다가

다시 아래로 홀쭉하니 빨려 들어간 팔각형이었다.

몸통의 사다리꼴 면면마다 가위표로 복판을 갈라 쪽빛 당홍 노랑 녹색 종이를

바르고, 그 한가운데 청 홍 황의 삼색 빛깔 굽이치는 태극모양이며 검은 날개

당초문처럼 펼친 박쥐를 정교하게 오려 붙인 상자는, 곽종이로 만든 것이다.

효원이 그 상자 뚜껑을 열자, 연분홍 갑사 바른 안쪽이 볼그롬한 뺨을 수줍게

드러낸다. 아른아른 비치는 무늬는 봄날의 아지랑이 같다.

"상자는 겉모습도 예뻐야 하지만, 열어서 안쪽이 고와야 한다."

효원의 친정 어머니 정씨부인은, 앙징스러운 바구니만한 이 종이상자에 색지

를 붙이고 갑사를 바르는 용원에게 말했었다.

정씨부인은 솜씨가 좋아 아기자기 안방에 쓰이는 아녀자 물품을 못 만드는 것

이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색지함과 매듭만큼은

"과연 절품이라."

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만들곤 하였다.

효원은 본디 호방 활달하여 보자기나 귀주머니를 만들기보다는, 먹과 붓으로

궁체 글씨 쓰기를 즐겨하였지만, 아우 용원은 또 그네와 달라서 어머니 곁에 앉

아 명주실과 한지에 물을 곱게 들여, 다회를 치고 끈목을 만든 색색가지 실로는

딸기술 봉술 나비방울술 방망이술 낙지발술을 꼬아 늘이우기도 하고, 톡톡한 종

이로는 수십 개 봉지가 주둥이를 오므리면 함같이 접히었다가 펼치면 합죽선처

럼 옆구리 벌어지는 손것 지갑이며, 올망졸망 쓸모 따라 크고 작게 배치한 서랍

까지 몇층씩 빼닫게 한 상자들을 곧잘 만들곤 하였다.

그 중에서도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팔각 종이상자는

"여기다가 패물이랑 노리개랑 담아 두시어요."

하면서 용원이, 시집가는 형 효원에게 주려고 각별히 곱게 마음을 기울여 만든

것이라, 정이 어려 새삼 애틋하였다.

상자 속에는 어머니 정씨부인이 장녀의 혼수로 넣어 준 금가락지 옥가락지며,

금비녀 비취비녀 은비녀, 붉은 산호와 남색 유리, 노란 밀화를 날개에 박은 칠보

나비단추, 호박과 금파단추, 은칠보 국화무늬에 매화무늬 아로새긴 뒤꽂이들이

장그랑장그랑 소리 나게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 한 켠에는 붉은 비단 보자기가 자그맣게 돌돌 말리어 있다.

혼례 때 쓰고는 백지로 싸서 보관해 둔 삼작 노리개와, 아직 한 번도 쓰지 않은

백옥 세공 투각 향갑 노리개, 오색 실로 수놓은 매미 향낭 노리개가 함께 들어

있는 보자기다.

이 보자기를 펼치어 매듭 술을 단 노리개를 내놓고, 등불 아래 효원은 한동안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방바닥 장판

위에 한 줄로 나란히 늘어놓아 본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손끝이다.

방문 바깥 마당으로는 바람 많은 음 이월의 밤을 스산하게 흔드는 덜걱, 덜거

덕, 소리가 지나간다.

그 소리에 흔들리는 등잔불 주홍의 불빛이 적막하게 어리는 보패들은, 낱낱이,

영롱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울연한 어둠을 머금은 듯 보인다. 그것은 어쩌면 무

겁게 그늘진 효원의 심상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것이 좋을까.

그네는 제 앞에 늘어놓은 패물 노리개를 다시 하나 하나 손바닥 위에 올려놓

고 어루만져 살피며 들여다본다. 비록 자신의 물건이라 하지만 이렇게 찬찬히

들여다본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효원은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낯빛으로

뒤적뒤적 이것들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 다른 것은 그만두고 삼작 노리개와 백옥 세공 투각 향갑

노리개만 집어들어, 그 중에 한 가지를 고르려는가, 다시금 묵묵히 고개를 숙이

고 있다.

저고리 겉고름이나 안고름 아니면 치마허리에 차는 노리개는 홍 남 황 삼색을

기본으로, 분홍 연두 보라 자주 옥색, 얼마든지 고운 열두 가지 빛깔의 다회로

매듭을 맺고는, 거기에 패물을 달아, 낭창하게 흘러내리는 술을 치마같이 길게

드리웠는데, 이 노리개 세 점을 한 벌로 친 것이 삼작 노리개였다.

원래 대례복에 차는 대삼작 노리개에는, 손바닥 크기가 넘는 선홍색 산호가지

와, 백옥으로 깎은 나비 위에 진주 청강석 산호 같은 구슬들을 절묘하게 배열하

여 금속 세공을 한 나비 한 쌍, 그리고 밀화로 부처님 손 모양을 빚은 패물, 주

먹만한 밀화불수를 쭉쭉 벋은 낙지발술에 달아, 진귀하고 무게 있는 기품을 자

랑하였다지만.

그만은 못해도 효원의 삼작에는 노란빛 짙은 녹두색 봉술에 은장도 맺은 것과

진남색 봉술에 칠보 입힌 은박쥐 맺은 것, 다홍 술에 양날게 활짝 편 은나비 맺

은 것이 한 벌로 묶여 있었으니, 은삼작 낙지발술 노리개라고나 할까. 그것은 정

밀하면서도 요려하고 또 은근하였다.

그리고 향을 넣는 백옥 향갑은 곽 속을 다홍 갑사로 곱게 발랐는지라, 머리카

락같이 섬세하게 투각된 백옥의 문양 사이 사이로 붉은 빛이 얼비치어, 보는 이

의 마음을 빨아들이며 사로잡았다. 이 향갑에는 금사를 감은 청옥색 봉술이 하

르르 드리워져 있었다.

"이 향갑에는 사향을 넣어라. 뒤뜰 후원이나 동산을 거닐 때, 사향내는 배암의

범접을 막아 주느니. 뿐 아니라 이 향을 갈아서 술이나 물에 타 마시면 급한 체

증에 효험이 있니라. 사향은 향내도 좋지만 쓰임새가 꼭 있으니 유념해 두렴."

또 호박이나 금파 같은 패물은, 사람이 뜻밖에 다쳐 피를 흘릴 때 갈아서 응

급용 지혈제로 쓰는 것이라고, 정씨부인은 덧붙여 일렀었다.

"이런 패물들은 다 허영에서 단순히 사치하자고 마련하는 게 아니라, 몸가짐을

아름다이 하면서도 그 용도를 제대로 알아 지혜롭게 쓰는 부덕의 소치로 지니는

것인즉. 잘 가지고 있다가 이 다음에 네 자녀나 며느리한테 물려주어라. 대를 물

리면 가보가 되겠지."

하시던 보패와 노리개들.

효원은 이 중에서 백옥 향갑 노리개를 따로 백지에 싼다.

그리고 금가락지 한 쌍을 다른 백지에 쌌다.

어이가 없다면 없는 일이었으나, 그네는 더 이상 깊이 생각지 않고 이것들을

아까 풀어 놓은 비단 보자기에 감아 싸며, 저도 모르게, 맷돌이라도 얹히는 가슴

같이 무겁고 답답한 속에서 터지는 한숨을 후욱, 뱉는다. 뱉은 숨이 뭉치며 거꾸

로 받친다.

"콩심아, 가서 안서방네 좀 보잔다고 해라."

자리끼를 받쳐들고 새아씨 시중들 일이 혹 없는가, 밤늦어 건넌방으로 들어온

교전비 콩심이한테 효원은 낮은 소리로 일렀다.

"예."

"또 때까치마냥 땍, 땍, 떠외지 말고. 가만히 오래. 알었지?"

"예.

뒤걸음치며 방문을 열고 나간 콩심이가 행랑채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우례의

방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 들리는 것에

"누군가?"

싶어서 귀를 쫑긋한다.

"어매애. 이 오밤중에 왜 질을 나설라고요잉? 벨일이네, 참말로. 왜 않든 일을

헌당교? 누가 급사했단 전보를 받은 것도 아닌디."

놀란 소리 하는 것은 꽃니어미 우례였고

"급사 못잖은 일이 있어서 헐 수 없이 기양 나서야겄어. 내가 암만해도 걱젱이

되야 불안헌 일이 하나 있그더엉. 어째 벨일이야 있을라디야. 기왕 날도 저물었

는디, 험서나 하룻저녁 더 자고 묵을라고 했는디, 아 왜 그렁가 아까부텀 당최

맴이 시끄러서 머이 지핀 것맹이라 안되겄네. 나 기양 살째기 나갈랑게 어른들

소란허신디 표내지 말소잉?"

하면서 등짐을 짊어지는 것은 황아장수 아낙이었다.

"난리 몰아오능게비네에. 숨넘어가겄소이? 날도 춥고 질도 험한디, 가다가 늑

대 만나먼 어쩔라고오."

하는 것은 옹구네 목소리다.

아니, 저 예펜네가 아직도 안 가고 여그서 놀았등갑네.

콩심이는 공연히 입을 비쭉하며 휘잉 그 방문 앞을 지나쳐 안서방네한테로 새

아씨 말씀을 전하러 간다. 새앙쥐 꼬랭이 같던 머리채에 제법 살이 오른 뒤꼭지

를 깐닥거리며

전갈을 받고 온 안서방네를 가까이 부른 효원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닫이 위에 싸놓은 보퉁이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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