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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24)

카지모도 2024. 12. 11.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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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치마 저고리 각각 두 감씩 든 것이고, 이것은."

보퉁이를 안서방네 앞으로 밀며 효원은 아까 가락지와 향갑 노리개를 싸두었

던 붉은 비단 보자기를 보퉁이 위에 얹는다.

"펴보면 아실 것이네. 누구 눈에 안 띄게 얼른 갖다 드리게."

안서방네는 그러나 그 보퉁이와 보자기에 손을 못 댄다.

심중이 시방 오죽허시리요.

아매 아거이 당신 혼수로 갖고 오신 옷감 패물들잉게빈디, 덤뿍 덜어서 띠여

주시능갑다. 범연허신 새아씨, 시앗을 보먼 질가에 돌부체도 돌아앉는다등만, 도

량아 하해와 같드래도 이런 꼴 당허고는 속 안 씨릴 수 없을 거인디, 이것 저것

속상헌 흉허물은 다 덮어 부리시고 우선 사람 살리울 일부터 앞세워 생각하기가

어찌 쉬울꼬. 아이고, 내가 당최 송구스러워서 몸둘 바를 모르겄구나.

"긴요하게 쓰시라고."

말끝을 흐리는 것이 효원의 마음도 몹시 착잡한 듯하였다.

뚜드러 패도 시원찮으실 거인디.

마지못해 두 손으로 보퉁이와 보자기를 글어안은 안서방네가 총총히 막 중문

을 나서려 할 때, 황아장수 아낙과 옹구네가 토방으로 내려서는 것이 보이고, 그

뒤에 등잔불을 등진 우례가 무어라고 몇 소리 하면서 긁적긁적 뒤따라 나오는

양이 보였다.

안서방네는 무망간에 주춤하며, 보듬은 것에 힘을 주었다.

"내가 아랫몰끄장은 동무를 해 주겄지마는, 그 담은 몰르요잉? 산을 넘든 물을

넘든."

"밤질 댕기는디 이골난 년이 머 어둡다고 못 갈랍디여?"

"배곯은 호랭이가 드글드글허다든디?"

"사램이 무섭제 호랭이가 머이 무서?"

"앗따아, 팥죽 많이 쒀 놨능게비?"

"얼릉 가아. 앞질 막지 말고. 걸려어. 글 안해도 급헌디."

"누가 뒤에서 쫓아오요? 급헌 걸음 허다가 무단히 개골창이나 논바닥에 거꾸

로 백히지 말고, 싸드락 싸드락 이얘기도 해 감서 갑시다아. 나도 심심헌디. 인자

가먼 또 얼매나 얼매나아 있다가 올람서."

"하이고오, 정든 님이등갑네. 벨라도 살갑게."

"아닝게 아니라, 님만 님이간디요? 정들먼 다 님이제."

수작을 주고 받으며 고샅으로 나가 저만큼 앞서가는 아낙과 옹구네 두 사람의

뒤꽁무니에 그림자 스미듯 숨어서 따라가던 안서방네는 웬일인지 순간 불길한

예감이 싸악,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무엇에 대한 불길함이라고 집어 내어 말한

수는 없었으나, 가슴을 차갑게 훑고 써늘히 내려가는 그 찬기운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고샅의 인기척에 호제집 누렁이가 커르르응, 커겅, 컹, 컹, 아는 사람 발자국에

대고 싱겁게 짖는 소리를 낸다.

안서방네는 두시런거리며 저 아래로 멀어지는 두 아낙의 흐끗흐끗한 뒷모습에

눈을 주고 서 있다가, 잽싸게 오류골댁 사립문 안으로 들어선다.

"오류골아씨."

안방 문앞 바싹 다가서서 숨소리로 불렀는데도 방문이 벌컥 열린다.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바깥 소리에 오류골댁

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탓이리라.

"들어오소."

"아니, 여그서 기양 갈랍니다. "

안서방네는 토방에 선 채로 말했다.

아무리 속내를 아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은 하인의 신분이니 상전들의 속

아픈 사정에 너무 상세히 아는 체하는 기미를 보여, 상전을 무안하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심바람이 있어서."

"무슨?"

그제서야 몸을 일으켜 마루끝으로 나온 오류골댁이 안서방네 품에 보듬은 보

퉁이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본다.

"새아씨가 이걸 전해 디리랑만요."

"무언데?"

"저는 잘 모르겄는디요."

"들어와."

오류골댁은 순간 직감으로 안서방네가 이번 일을 시종 모두 알고 있으리라 짐

작하였다. 그리고 비록 그네가 노비 안서방의 아낙이지만 본디는 양인의 딸이라

종은 아닌데다가, 그 어느 한다 하는 양반의 부인 못지않게 깊은 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오래 보아서 아는지라, 이와같이 찢어지게 애통한 날, 차라리 털어놓

고 함께 울고라도 싶어진 오류골댁은 보퉁이 대신 안서방네 손을 잡았다.

상전의 체신은 이미 무너져 위의를 잃어버린 이 마당에 ,누구의 목이라도 의

지하여 끌어안고 통곡을 할 수만 있다면, 그네는 상하귀천도 가릴 것 없을 것만

같았다.

"지무세야지요."

"아직 안 잔다네."

"그러먼... "

울음이 치받는 것을 가까스로 누른 오류골댁 북받친 음성에 이끌리어 안서방

네는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렇다기보다는 사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는지도 모르는 작은 아씨 강실이의 모습을 단 한 번만이라도 가깝게 더 보고 싶

은 마음을 가누기 어려워서 그네는 그만, 방문턱을 넘은 것이다.

강실이는 흰 댕기를 물린 머리를 가지런히 빗고 흰 종이로 만든 그림자처럼

방 가운데 오도마니 앉아 있었다.

"작은 아씨."

안서방네는 오류골댁한테 보퉁이를 건네면서 강실이 앞으로 주저앉았다. 그리

고는 덥석, 마른 가랑잎 같은 손을 잡았다.

강실이는 그 투실투실한 온기에 눈물이 배어 있는 안서방네 손바닥이 제 손을

감싸는 대로 내맡긴 채, 무연한 시선을 떨구고만 있었다.

"어디로 가시든지 그저 몸 성히 기시야요."

꼭 지가 따러갔으먼 쓰겄는디요.

그래야만 맘이 노이겄는디요.

어쩌까요.

속말을 삼키는 그네의 입시울이 일그러지며 비죽비죽 실룩인다.

그러더니 그예 눈물을 쏟고 만다.

파리하게 빛이 바랜 강실이 두 손을 싸안아 제 뺨에 어루며 부비며, 못 참고

흐느끼는 안서방네 등뒤에서 오류골댁도 입술을 짓깨문다.

아예 이 방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일찌감치 초저녁에 불을 꺼버린 대청

건너 작은방의 기응은, 잠이 들었을 리 천만 없으련만 헛기침 한 토막도 소리내

지 않는다.

불쌍허신 우리 작은 아씨.

눈물로 범벅진 강실이의 손을 제 입에 대고, 터지려는 통곡을 안간힘하며 막

고 있는 안서방네 온몸에 몸부림의 경련이 인다.

차라리 죽는 일리라먼, 이런 몸뎅이 다 늙은 것 머이 아까워서 대신 못 죽어

디리리요. 열 번이라도 죽고 백 번이라도 죽으리다. 허나 대체 이 일을 어쩌먼

좋으까요잉. 올개미 둘러쓰고, 벗도 못헐 멍에지고, 칼 쓴 죄인맹이로 하로 하로

생목심 깎어 바트는 세상을 혼자 살어얀디.

어머니도 안 지시고 ,부모 성지간 암도 없고, 일가 친척 하나 없고, 아는 사람

머리크락도 안 뵈이는 심심산골 절간으 암자로 들어가시먼, 인자 살어서는 못

오실라요오, 아이고오. 살어서는 못 오실라요오...

거그가 어딩가 내 꼭 알어 갖꼬, 어쩌든지 꾀를 내서 한 번 지가 가 볼랑만요.

가서 뫼시고 살든 못헌다 허드래도 꼭 한 번 가서 뵈일랑만요.

시상에 이런 일이 있능가요.

먼 길을 떠날 사람이라 모처럼 헝클어진 머리 물 발라 빗은 강실이의 머릿단

에 검은 불빛이 미끄러진다. 하지만 상중이니 아직 무색옷을 입을 수는 없어 흰

옷을 입고 가야 한다.

오류골댁은 강실이가 복을 벗어도 좋은 날을 날짜 짚어서 일러 준다. 그리고

방 한쪽에 싸 놓은 봇집을 푼다. 효원이 보낸 보퉁이와 비단 보자기를 거기 함

께 싸려는 것이다.

"한 번 보시지요."

모시 한 필과 숙고사 연분홍 저고리에 옥색 치맛감, 그리고 진홍 대단 치마에

진노랑 저고리감이 개켜져 들어 있는 효원의 보퉁이를 펼친 오류골댁이 깜짝 놀

란다.

"질부가 어찌 이렇게."

"긴요하게 쓰시랍니다. "

허어.

오류골댁 입에서 중치 눌린 탄식이 터진다.

대실 질부 효원의 마음 씀씀이와 도량이 놀랍고 고마운 탓도 있었지만, 왜 그

런지 그처럼 값비싼 물품을 강실이한테 들려 보낸다는 것이, 참으로 이 가련한

여식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밀어내 버리는 것만 같은 흉중을 가

누기 어려운 탓도 있었다.

"이것은 또 무에인가."

오류골댁이 금가락지에 향갑 노리개를 싼 보자기를 풀어 펼치는 순간, 강실이

는 드디어 미간을 깊이 파며 괴로운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내가 인두겁을 쓴 사람의 형상이라면 차마 어찌 저 참혹한 모시 비단 숙고사

며, 가락지 노리개를 바로 볼 수 있으리요.

나는 사람도 아니다.

강실이는 머리 속이 꿰뚫리는 통증에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것은 놋젓가락을

머리 복판 정곡에 박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나는 결코 저 물품들을 가지고 가지 않으리라.

눈부시게 화려하고 자지러지게 어여쁜 것들이 찌르는 비수는, 덕석말이 몰매

곤장이 오히려 달다 할 만큼 무참히 강실이의 가슴속 깊은 살을 난자하여 찢으

니, 어디로든 정처없이 떠나는 것은 견딜 수 있으나 효원이 보낸 물품만은 도저

히 이고 메고 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

강실이는 겨우 입술을 달싹이어 오류골댁을 부른다.

"왜야."

어찌 네가 입을 여느냐.

보퉁이 싸는 손을 잠시 멈춘 오류골댁 시선에 눈물이 맺힌다.

"그것들은 그냥 여기 두서요."

"무엇 말이냐? 이것?"

오류골댁이 효원이 보낸 보퉁이와 보자기를 싸다 말고 들어올리는 시늉을 하

며 묻는다. 강실이는 대답할 기운조차 없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대실 새형이 너한테, 생각이 있어 주는 것 아니냐. 새형 말대로 이제 긴

요하게 쓰일 데가 있을 게다. 가지고 가기는 좀 무거워도."

"아니요."

"아니라니?"

"이 다음에, 후제... 내 다시 오거든, 때 쓸께요. 그때까지 어머니가 잘 두시어요."

오류골댁은 억장이 미어져 말을 못 잇는다.

말 그대로라면 강실이 말이 하나도 잘못되거나 이상할 것 없었다. 설령 시

집을 가는 딸이라고 하여도 여기는 친정이니 다시 얼마든지 올 수 있는 곳이며,

유배를 간다 할지라도 세월이 가서 죄가 풀리면 마땅히 돌아오는 것이 집 아니랴.

그런데 그 '다시 오거든'이라는 말이 다시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길을

강실이는 가려 하는 것만 같다.

오류골댁은 울음을 삼키며 그것들을 꽁꽁 묶어 조그맣게 부피를 줄인다.

기어이 지워 보내려는 것이다.

"무거워서 나는 못 들고 가요."

"황아장수가 제 등짐에다 얹어 지면 되지야."

아이고, 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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