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1. 1

카지모도 2016. 6. 23. 13:45
728x90




16033 1991. 1. 1 (화)


元旦.

辛未年 첫날.


사설을 늘어놓지 말자.

진지하게 살 일이다.

그리고 중심을 잃지 말 일이다.


16034 1991. 1. 2 (수)


어머니 주위 모여 신년 예배.

차례로 어머니께 세배드린다.

앞으로 20년만 이렇게 세배를 받으시라. 어머니.


형과 정종 한병을 비우면서 TV의 마당극 보면서 낄낄거리다.

오후, 돌아 와서 또 몇 병의 맥주로 마감.

술에 젖은채 쓰러저 잠들고.


늦잠.

몸살끼 까지 곁들여, 쓰린 속을 싸잡은채 왼종일 俊이와 마루에 누운채 TV와 씨름.

英이는 제친구 원주와 외출.

J는 S형 네집 마실.


16035 1991. 1. 3 (목)


새벽, 일어나 찌든 몸뚱이 때를 벗기고, 이틀동안 무질서하게 자란 수염을 밀고, 모차르트의 청아한 소프라노 울리게 하여 놓고 내 방 냉기 속에 앉아서 요한1서를 소리내어 읽는다.

그리움으로 번져 오르는 사랑.

주님.


추위에 쫓겨 이내 俊이 방으로 철수하여 아카데미 총서의 논문집 '죽음과 목회'중에서 '구약에서의 하나님'을 진지하게 읽는다.

구약에서도 부활의 의미, 죽음 후에 실존하는 어떤 개념은 있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생각.

범죄하는 동기 자체에 輕重이 있을까.

살인과 가벼운 욕을 내뱉는 행위는 그 동기에 있어서는 동일할 수가 있다.

그 격발되는 감정모체의 색깔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살인과 욕이라는 결과의 차이는 지대하다.

동기가 죄악이라면 그 둘은 경중이 있을수 없는 죄일터인데.

좀 진지하게 천착해 보아야 할 주제이다.


1991년의 출근 첫날.

사회인에게 직장이란 개념은 영혼과 정신에 참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개념이 아닐수 없다.


16036 1991. 1. 4 (금)


어제 시무식.

이제 또 한 개인의 경제적인 일상은, 사회의 정규적인 시스템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21세기의 마지막 10년에 들어서면서, 과연 인류는 보다 착하게, 정의를 향하여, 전향적으로 발전되고 있는 것일까.

기독교의 종말론적 카오스로 한발 한발 걸어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J는 S형 어머니, Hw 선생님등과 'GHOST'라는 영화 감상하러 외출하고, 나는 俊이와 저녁차려 먹는다.

잠자리 들기전에 엎드려 요한1서 다시 읽는다.

번져오는 그 분의 이미지는 사랑.


자리에 누워 기독교 방송의 '새롭게 하소서' 듣는다.

환갑넘은 주기철목사의 막내아들이 말하는 아버지에 관한 얘기를 들으면서 사르르 잠이 든다.

J와 아이들 부스럭거리고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에 설핏 잠이 깨이고 그 이후로는 결국 회색수면.

내 수면 프로그램의 回路는 어떤 카오스의 LOGIC이다.

옅은 잠. 가려움 증, 깨어남의 영구 반복 회로인 루프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 무한반복의 암시에 걸려들면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휘뿌연 머릿 속을 이고 3시도 안되어 벌떡 일어나 버린다.

아카데미 총서의 '신학적 측면에서 본 죽음의 이해'를 읽고 성경을 뒤적이며 새벽을 맞는다.


16038 1991. 1. 6 (일)


J, 심한 몸살 감기 걸리다.

그런 몸을 일으켜, 비록 볼은 부운채로이지만 밥하랴, 빨래하랴, 청소하랴하는 J를 나는 도우려하지 않는다.

여자의 일이므로.

그래서 J의 볼이 부어 있으므로 섯불리 나설 계제가 아니다.


일요일, 俊이와 교회 간다.

무언가 낯설고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내가 극복해야 할 교회의 문화적 분위기인데.

그러나 무엇보다 아들 녀석과 에클레시아의 경건한 분위기에 잠기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


교회에서 돌아와 누워있는 제 엄마를 대신하여 부자가 나란히 산에 오른다.

투명한 대기,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이고 고갈산은 선연한 자태의 선을 드러내는 SKY LINE을 그리고 있다.

명징한 겨울 의식을 품고, 끼끗하게, 여름의 옷을 벗어 더욱 고즈넉하게, 조용하여 더욱 넉넉한 풍경화는 담백하여 더욱 시리다.

참새 떼들 푸드득 푸드득 날고 있는 저편 바다 또한 시리도록 푸르르다.

이 풍경 속을 정적의 정에 겨운 두부자는 병과 물통에 물을 가득 길어, 지고 들고하여 말없이 타박타박 산을 내려오다.

옆의 아비에게 조금도 지지않는 俊이.


16039 1991. 1. 7 (월)


간밤 기침하는 J 곁에서 나도 감기몸살이 옮았는지 잠결에 몸이 찌뿌드드하여 뒤척인다.

그러나 깨어난 육신에 몸살끼는 없다.

기분이었던 모양이다.

J는 그저 몸살기운인 모양, 실며시 껴안아 주지만 그녀는 모른다.


새벽 화장실, 열왕기 상을 거의 다 읽도록 한시간여 앉아 있다.

배설해도 배설해도 시원치 않은 잔변감.

청결예배 내지는 세척강박, 혹은 완벽주의.


묵은 구두의 먼지를 털어내어 닦고, 자욱한 털가루가 끼어있는 면도기를 소제하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곧 21번을 울리게 한다.


그 2악장의 선율은 바로 '엘비라 마디간'.

저미게 슬픈 영상, 피아 데게르마르크의 요염하면서도 청순한 아름다움, 북유럽의 풍광을 배경으로 그 영화는 모차르트 21번 2악장과 찰떡궁합으로 맞아 떨어졌었지.


기도.

추운 새벽, 7시가 된 지금까지 밖은 아직 칠흙의 어둠이다.


16040 1991. 1. 8 (화)


어제 저녁 J와 자리에 누워 '새롭게 하소서' 듣는다.

전화로 신앙상담하는 시간인데, 어떤 여자의 상담내용은 이렇다.

보너스는 십일조로 내야하나, 혹은 감사헌금으로 내야하나.

용서의 기도는 몇번을 해야 용서를 받는가.


이런 순박하고 성실한 신앙의 자세에 비하여 나의 신앙이란 얼마나 교활찬란한 것이냐.

어린아이와 같은 오염되지 않은 순진한 눈길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망울을 갖기에 나의 눈망울은 너무나 충혈되어 잇다.


16041 1991. 1. 9 (수)


새벽 2시 30분.

양정 KH근 이 집으로부터 심야의 총알 택시타고 이제 돌아오다.


성규는 제아내 이영재와 서울에서 내려와 PS곤 부부, KH근 부부, JN영 등과 KH근 이 집 안방에 퍼질러 앉아서 술도 아니고, 얘기도 아니고, 情도 아닌 그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여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정겨운 친구들로써, 어색함과 어눌함과 짐짓 과장된 폼과, 또는 예수에 대한 얘기들은 진솔하지는 않았더라도 부끄럽지는 않은 것이다.


16042 1991. 1. 10 (목)


어제는 예견한 바와 같이 결국 회사를 쉴 수밖에 없었다.


오후에 성규가 집으로 오다.

한잔의 술도 없이 근 4시간여를 서늘한 마루에 앉아 얘기를 나눈다.

사업 얘기, 영화 얘기, 문학 얘기.

소박하지만 품위있는 그의 품성은 성규의 미덕이다.

그리고 타인의 시선따위에 결코 주눅이 들지 않음은 그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다.

나와 같은 자의식따위가 그에게는 없다.

나는 실로 좋은 친구를 갖고 있는 것이다.


16044 1991. 1. 12 (토)


어제 성규 동생의 결혼식.

식장에서 축가를 부르는 여학생의 노래.

베토벤의 아델라이데 였나.

십몇년만에 뵙는 성규의 모친.


저녁에 KH근 , PS곤 , JN영 과 함께 용호동 잔치에 와야한다는 빗발치는 성규의 권유를 사양하여 물리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도저히 술을 마실 계제가 되지 아니한걸.


16045 1991. 1. 13 (일)


어제 성규 올라가다.

플랫홈에 나가 성규의 아이들, 샛별같은 람이랑 그 여동생에게 책과 인형을 선물로 사 건네주고.

떠나가는 기차.

역의 플랫홈은 언제나 조금씩은 아쉬움이 남는 법이다.


부산역 광장에서 열성적으로 노방전도하는 사람들.

1999년 종말이 닥아왔고, 1992년에 에수님은 재림하신다고 정말 급박한 목소리로 할렐루야를 부르짖으며 전단을 나누어주는 英이 또래의 여학생.

그 확신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정말로 그들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에 차서 에수님 재림과 종말을 외치고 있다.

무엇이 그 확신의 배후일까?

전단지에는 666 얘기, 성경에서 말씀하신 징조의 상황과 작금의 현상과의 일치, 성경의 상징에 대한 단정적인 해석으로 가득 차있다.


정말 그들의 확신에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16046 1. 14 (월)


이덕찬씨 딸네미, 인숙이.

그 아이 얘기를 이덕찬씨는 자랑스레 들려준다.

경찰대학에서, 눈이 나빠서 사격시험 낙제, 자퇴하여 아시아나 항공 입사.


비디오 '로메로'

종교는 현실의 악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로메로는 단연 민중의 적을 향한 그 악한 세력과의 투쟁을 선택한다.

남미에서 해방신학을 태동케한 그 분위기가 느껴진다.

극적인 감동은 다소 미흡하나 오스카 로메로의 얘기는 실화이고 그 주인공은 아담스 훼밀리의 그 배우이다.


16047 1991. 1. 15 (화)


유럽 여러나라도 이락과의 회담을 포기.

이락주재 교민들 철수.

중동에는 전운이 짙게 감돌고 있는데, 음산한 세기말의 분위기가 지구촌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다.


겨울의 신 새벽.

깊은 숲속에서 맑게 솟아나는 샘물처럼 슈베르트의 리트가 흐른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바리톤은 영혼을 긁고, 제럴드 무어의 피아노 반주는 가슴을 적신다.


俊의 방에 앉아 베드로전서 소리내어 읽는다.


16048 1991. 1. 16 (수)


낡은 문고본 책을 책장에서 끄집어 내 다시 읽는다.

이문구 '장한몽'

추청도 사투리처럼 느려터지게 비비 꼬여 표현되는 그의 문체는 사뭇 어색하더라도, 그 속을 흐르는 에스프리는 빼어난 것이다.

이문구의 체취- 투박하고 우직하여 진실하다.

아마 어제밤 꿈의 베낭 속 송장의 꿈은 아마 이문구소설의 주제인 무덤과 송장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오후 2시, 아라크가 쿠웨이트를 철수하느냐 아니면 그예 미국과 한판 붙느냐하는 고비.

공갈과 배짱, 국제 정치란 어린애 싸움과 흡사하다.


16050 1991. 1. 18 (금)


어제 오전 8시 30분. 그 쪽 시각은 오전 2시 30분.

미국,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등 다목적군의 비행기가 바그다드 공습.

최신예 폭격기들 수천대가 이라크의 레이다까지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은 최첨단 장비로 수십만톤의 폭탄을 퍼붓는다.

부시, 고뇌에 찬 표정으로 전쟁 개시를 선포한다.

물량 동원의 작전은 속전속결로 승리하는 듯 하다.

당최 이라크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후세인의 배짱은 대단하다.

전쟁 승리의 낙관적 분위기에 주가는 폭등하고, 금값이나 기름값은 오히려 떨어져서 부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TV로 보는 전쟁상황이란 무슨 전자 오락 게임을 보는 듯 하다.

스포츠 실황중계 하듯이 전쟁 상황을 중계하다니 아닌게 아니라 놀라운 세상이다.

무슨 무슨 병기의 성능은 이러이러한데 저러저러한 작전으로 적의 그러그러한 것들을 궤멸시키고 어쩌고...


그러나 상상해 보라. 이 스포츠 게임에 어디선가는 경천동지할 궹음과 폭발 속에서 무수한 인명이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흩어지고 있음을.

그러나 세계는 스포츠게임에 열광하고 있다.

참 비정한 세계, 오직 경제 논리만이 최상의 덕목이 되고 말았다.


자리에 누운채 늦도록 J에게 중동의 역사와 현실을 아는대로 설명해 준다.

중동을 얘기하면 필경 기독교의 얘기에 이르지 않을수 없으므로.


16051 1991. 1. 19 (토)


이라크, 이스라엘 공격.

이 전쟁이 걷잡을수 없이 확대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진득하니 참아야 한다.


퇴근하여 김형준 차로 시내나가 닐 다이아몬드 노래, 나비부인 LP사고, 용문각 만두 사들고 어머니께 가다.

일거리 있음에 어린아이처럼 희희낙낙하시는 어머니.

일흔넘은 내 어머니.


늦잠.

그러나 단잠 이루다.


주가는 다시 곤두박질 치고, 성급하게 즐기며 관전했던 게임은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만만한 후세인이 아닌 것이다.


16052 1991. 1. 20 (일)


이라크는 쉽게 두 손을 들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아직까지는 신중하고, 요르단에서 반미분위기는 고조되고, 시리아 역시 유동적인 입장.

터키가 움직이고 있고 더불어 NATO도 들먹거린다.


일요일, 俊이와 교회다녀오다.

설교제목은 '죄'

동삼교회에 확 이끌리지 않음은, 살짝 뒷좌석에 앉아서 소극적으로 참석하는 나의 그 나이롱성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16053 1991. 1. 21 (월)


어제 저녁, 예전 유신시대를 그린 TV 드라마에서 당시 대학생들의 고뇌, 낭만의 청춘을 느끼면서 참 아픈 향수에 젖는다.

젊은 시절, 나의 고뇌와 사랑은 진정한 청춘의 모습이었을까?

한 줌 낭만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거짓과 오해와 시행착오로써 껴안고 뒹굴었을 뿐이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내 청춘.

이슬같이 순수한 진짜배기 청춘을 다시 한번만 살아봤으면.


내 삶의 양태를 밝은 쪽을 향하여 전향적으로 돌려 놓을 것.

내게는 아직 이루어야할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하고, 나 또한 그것을 향한 의지가 있으며, 작금의 상황에서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俊 방에서 기도드리는 새벽.


16054 1991. 1. 22 (화)


이라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장기전의 우려가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다.

현대 최첨단 무기가 아무리 가공하더라도, 저항하는 인간의 정신이란 그리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오만-

이 전쟁에서 미국이 수월하게 승리하면 미국은 더욱 오만해 질 것이다.

그리하여 배타적인 독선의 패권주의를 휘두르면.

그러나 죄없는 인명이 살상되고 있으니 사담 후세인은 손을 들기는 들어야 할터인데.


오늘 '대일열전기' 출장.

1억이 넘는 소각로의 구매 검토.


16055 1991. 1. 23 (수)


김경곤 운전하는 회사차를 타고 대일열전기, 풍영화섬, 대왕섬유 돌아 본다.

에너지 자금의 융자관계의 보장도 없고, 환경청 승인문제도 떨떠름하고, 우선 계약이나 하고보자는 배짱들이다.

내가 밖에 있는 동안 삼보 E.S.S의 상무라는 사람이 출장 내려와 자료를 놓고 갔다.

놓고 간 도면과 자료들에서 대기업의 풍모가 느껴진다.


16056 1991. 1. 24 (목)


전쟁은 교착상태.

이스라엘은 또 미사일 공격을 받았으나 아직까지는 진득하게 참아주고 있다.

곳곳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16057 1991. 1. 25 (금)


英이 열일곱번째의 생일.

고 여리고 여린 젖숭이가 어느새 말만한 처녀로 커 버렸는지.

귀엽고 예쁜 장난감 같았던 英이.

꼭 다문 조그만 입매하며 호기심이 자득 서린 커다란 눈망울, 무엇을 묻더라도 똑똑하고 무슨 노래를 불러도 또렷또렷한 영특한 아이.

그 시절, 누구라 우리 英이를 폄할 건더기가 있었겠는가.

피아노, 그 아이의 플룻을 들어 보았는가.


흐린 하늘, 수묵화처럼 단조로운 컨트라스트의 아침 공간.


이제 식탁에 둘러앉아 제 엄마가 정성껏 차려 놓은 상에 둘러앉아서 기도를 드리려 한다.

英이는 엄마로부터 장미꽃 열일곱송이를 선물받았다.


상 위에 놓인 케이크에 꽂힌 초는 몇 개?

英아, 너는 이제 열 일곱....


16058 1991. 1. 26 (토)


CBS 들으며 말세론을 생각해 본다.

성경에 명기되어 있는 말씀의 분명한 부분들, 예수님의 재림 부활 영생.

이런 현상을 초월한 신비적 단어들이 만들어 내는 상상력은 각 민족마다 전통적 문화감각에 따라 DEFORMATION되고 비약하여 급기야는 전형화된 하나의 도그마를 만들어 내기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 현실이 어지러울때마다 그것이 투사되어 말세론이 창궐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한 말세라는 의식은 어떤 종교적인 근거가 없더라도 보통사람들의 내재된 도덕관념이나 윤리의식에 투사되면 온갖 사회병리적인 현상들이 말세의 징조로 느껴질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종말론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창하는 바와 같이 한갖 신화로서 도외시하여 버리면 되는 것일까.

그럴수는 없다.

성경의 종말에 대한 사상은 너무도 뚜렷하거니와 기독교의 본질적인 핵심이 이것 아닌가.

종말론을 부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뿌리 자체를 뒤흔드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유물론자의 잠꼬대에 불과할 뿐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오신다.

그리고 실존으로서 예수를 신앙하는 자는 부활한다.

이 오의는 논리로서 설명되어 지는 것이 아니며 유추하여 도달할수 있는 지식의 영역이 아니다.


지금 기승을 부리는 말세론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16060 1991. 1. 28 (월)


일요일.

새해들어 나의 일요일은 빠짐없는 교회출석과 술 안마시기가 지켜지고 있다.

현장을 벗어나게 하여 주신 일종의 감사 약속이기는 한데, 이런 형식주의가 주님께 올바른지.

교회에 대한 회의를 안고 있으면서 말이다.

교회라는 곳이 목사, 장로, 집사, 동료신자들에 의하여 나의 신앙이라는 것이 더욱 고무되고 격려되고 보완되어 성장할수 있는 장이 될 수도 있을터인데.

공동체라는 조직을 기피하는 내 기질이라기 보다 기실 내 게으름주의, 사변주의, 도피주의, 쾌락주의에 다름 아닌지.


TV드라마 '고개 숙인 남자'

제법 고급한 드라마이다.

고뇌하는 젊은 지성의 편린과 청춘이라는 진솔함이 돋보이고 구성 또한 탄탄해 뵌다.


16061 1991. 1. 29 (화)


퇴근하며 이덕찬씨와 마시다.

매우 선량하지만 피해의식이 만들어 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덕찬씨.

무척 단순하지만 또 한쪽에는 어수선하기도 한 사람.

나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

부자집의 6남 1녀의 막내외아들로 태어 나, 그의 누나들이 그의 몫 재산을 모두 털어가 떵떵거리고 살고있는데 넉넉지 못한 그는 그저 착한 표정이다.


그런데 이덕찬씨가 들려주는 충격적인 얘기.

그의 아내가 신이 내렸다고.

그래서 방 한켠에 신당을 차린단다.


으스스한 샤먼의 세계, 신기한 귀신의 나라.

무엇이 그녀에게 저항할수 없는 능력으로 작용하는 것일까.


16062 1991. 1. 30 (수)


팔순의 할머니와 단둘이 단칸 셋방에 살고 있던 열세살짜리 소년.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어찌할줄을 몰라 열흘동안이나 할머니의 시신과 함께 있었다.

이럴수가.

도회지의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아니, 도회지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한편 그 꼬마가 할머니의 시신과 지냈던 그 열흘을 상상하면 가슴을 쾅하고 때리는 무엇이 있지 않은가.


가끔 거리에서 마주치는 늙은 껌팔이 노파, 배에 고무판을 덧대고 뱀처럼 기면서 찬송가를 부르는 여인.

원인을 알 수 없는 쓰라림이 있다.

왜 나는 쓰라린가.

동정이냐, 감상이냐, 혹은 감동이냐.

분명히 쓰라려 아픈 어딘가가 분명하게 느껴지는데 나는 그 원인을 알수없다.


英이.

주민등록증 발급 신청서 나오다.

내 딸은 이제 어른이 되었단 말인가.


16063 1991. 1. 31 (목)


시간이 흘렀음을 달력을 보고서야 깨닫는다.

찰라의 경과로 시간을 의식하는 사람은 없다.

한뭉텅이의 시간, 날이 혹은 달이 뭉턱 지나간후에야, 문득 달력을 보고는 아니 벌써하고 혀들을 차게 된다.

올해의 벽두, 추춤추춤 하는 사이에 어느새 한달이 지나갔다.


길선이 장모 별세.

퇴근하여 문상한다.

서울사는 길선이와 그 아내 최영희, 오랜만에 보는데 전의 그 친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소원한 느낌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나는 그가 교활하여 내게 상처를 주었고, 그와의 추억은 무참해져 버렸다고 이미 단정하여 버렸다.

그러나 길선아, 너는 알 리가 없다. 뱀같이 징그런 놈아. 사랑하였던 놈아.


택시타고 동삼동 와서 이덕찬씨 만나 마신다.


요즘 회사의 화장실에서 다시 읽는 소설, 박경리 '시장과 전장'

작가의 감성이 듬뿍 배어있는 행간의 어떤 분위기.

하기훈.. 가화...



'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 > 部分'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91. 3  (0) 2016.06.23
1991. 2  (0) 2016.06.23
1990. 12  (0) 2016.06.23
1990. 11  (0) 2016.06.23
1990. 10  (0) 2016.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