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3 1990. 12. 2 (일)
일요일, 英이는 도서관, 俊이는 교회.
11시 넘자 나는 J와 물통 지고 산으로 간다.
푸르다 못해 무섭도록 싯퍼런 하늘을 이고 선연하게 그 실루엣을 드러낸 고갈산.
비디오. '프로펫서'
시실리적 배경의 음악등 분위기는 좋았으나 스토리전개는 작위적이고, 교수 보스인 주연은 어색하다.
16004 1990. 12. 3 (월)
관리부로 전보된 후인 한달간 나의 일요일은 무위롭다.
현장을 벗어났으면 이제 경건을 되찾아 주일을 맞으면 좀 좋으랴마는 게으른 일락을 향한 나의 욕망은 한치 변함이 없구나.
꿈- 무수한 꿈속에 등장한 얼굴들.
꿈의 숲을 벗어나면 그 중 한 얼굴도 도무지 명확하게 그려낼수가 없다.
16005 1990. 12. 4 (화)
늘 그렇다. 술은.
일과중 오늘 술을 마실수 있을만한 컨디션이면 그날의 일과는 감정이 고양되어 있은 상태이다.
설레이며 퇴근 후의 술좌석을 기다린다.
어제도 역시.
PP갑 의 차타고 오면서 동삼동에서 소주마시고 PP갑 의 집까지 가서 마감한다.
PP갑 아들 박한영의 수재성, 얘기를 나누면 뛰어난 두뇌와 고집과 집념같은게 느껴진다.
늦은 밤.
어둠 속에서 맥주잔 들고 가부좌 틀고 앉아 부르흐의 바이올린을 듣는다.
미친여자가 휘둘러대는 섬세한 머리카락의 올올들.
그 예리한 귀기가 폐부를 찌르고 그 아픔은 환상적이기도 하다.
정경화는 그렇다.
그리고 쉼없이 중얼거린다.
술마심을 폄하지 마라. 술마신다고 스스로를 폄하지 마라.
예수님도 나를 폄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16007 1990. 12. 6 (목)
어제 이우백(또백)형 회사로 찾아오다.
딸 결혼, 딸치운다고 노심초사한 흔적이 그 얼굴에 역력하다.
한동안 경건을 획득치 못하고 있다.
상상력까지 고갈되고, 미적 감수성은 퇴색하였다.
그 뿐이랴, 즉물적이고 쾌락적이고 지극히 속물적으로 급전직하 낙하하고 있는게 아닐까하는 초조감.
그 초조감이 오히려 심리적인 어떤 강박이 되어 더욱 해롭다.
바람이여.
풀섶을 가던, 그리고 때로는 북녘의 검은 산맥을 넘나들던 그 무형한 것이여.
너는 언제나 내가 이렇게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을땐 와서 흔들며 애무했거니.
나의 그 풋풋한 것이여.
불어다오.
저 이름없는 풀꽃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아직은 이렇게 가시지 않을 때
다시 한번 불어다오, 바람이여.
아 사랑이여.
16009 1990. 12. 8 (토)
경제는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성을 지배하며 감정을 지배하며 문화를 지배하고 도덕을 지배하며 심리를 지배하며 이윽고는 실존을 지배한다.
경제에서 벗어나려는 무망한 몸짓.
다시 시도하여 그 분께 사로잪힘.
지금은 유보이가.
16011 1990. 12. 10 (월)
어제, 또백이형 딸내미 결혼식.
결혼식장이라는 곳.
장터와 같은 시글벅적한 저자거리에서 치르는 규격화된 의식의 제품.
다행이 음주의 유혹을 뿌리치고 돌아오다.
12월이지만 너무 포근한 월요일 아침.
술이 없는 思考, 술이 없는 에스프리, 술이 없는 경건, 술이 없는 언어, 술이 없는 사랑, 술이 없는 그리움, 술이 없는 시인.
아, 술이 없어야 존재하는 그것들. 상헌이.
한없이 병든이여. 무수히 상처받은 이여.
술없는 너여.
16012 1990. 12. 11 (화)
우리 가곡의 아름다움.
가곡을 듣고 있노라면 늘 아련한 향수에 젖고, 안온한 자궁모체 속에 잠기는 듯 하다.
참 좋은 노래들, 우리 가곡.
식성은 자극성있는 음식을 추구한다. 맵고 짜고 시고.
감성 또한 자극적이어야 만족한다.
오락도 극도의 자극을 요구하고, 드라마의 소재도 극단적인 트루기를 요구한다.
갈수록 이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듯한데, 나의 경우 지나친바 있다.
그러나 가곡은 전혀 자극적이지 아니하다.
16013 1990. 12. 12 (수)
일본 소설 '元祿 太平記'.
사무라이의 명분이라는 것.
주군을 죽게한 원인의 한사람이라는 이유로, 반드시 기라 요시나카의 목을 뻬어야 한다는 명분이라는 것.
수십명 신하가, 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명분론으로서 그의 목을 베고 죽어 간다는 것.
생각컨데 거기에 무슨 당위성이 있단 말인가.
인간적인 증오나 감정모체에서 우러난 복수심같은 것은 없다.
오직 사무라이의 명분이라는 괴물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지만 논리적으로는 그것이 엉터리인데, 진지하게 행위하는 사무라이들의 방법론은 시리도록 아름답지 아니한가.
홀로 내 방에서 소주 한병, 그리고 꿈없는 편한 잠.
아침, 어머니 오시다.
다음 화요일 가야 병원의 고용의사로 출근하신다.
그에 들뜨신 늙으신 어머니가 귀엽기까지한데,
'내가 너희 집 들렀다는 얘기를 형네에는 말하지 말라'는 그 한마디 말씀에 나는 그만 어이없이 슬퍼저 어머니께 큰소리를 치고야 만다.
'왜 그래요 도대체! 왜 여기 오시면 안되는건데요!'
우물우물 하시며 곤혹스러워 하시는 어머니를 보고는 곧 후회.
16014 1990. 12. 13 (목)
주님께 감사하다.
어제 종일 평형감각을 잃지 않았음을 주님께 감사한다.
평형감각, 자신을 확보함.
진정한 용기와 결단은 이런 상태에서만 나올수 있다.
어제 아침, 어머니께 화를 낸 것이 종일 마음을 짓누르고, 형제에 대한 감정의 실타래가 카오스적인 혼란한 어두움일 법 하지만, 마음을 침잠시켜 중심을 깨뜨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따위 문제를 다시 누구에게 어필하여 어머니의 심기를 괴롭게 하여서는 안될 것을 깨닫는다.
술마시자는 여러 유혹을 뿌리치고 돌아와 우리 가곡 들으며 잠들다.
편한 잠.
曉情- 내가 만든 造語.
새벽사랑.
俊이의 입속 헐다.
전형적인 나의 증세인데 그 아픔을 나는 잘 알고 있다.
俊아, 아빠를 닮지 말아야 할게 참 많이 있단다.
英이 3일째, 오늘 마지막 시험.
새벽 어둠 속 집을 나서서 학교로 가고.
나는 빈 英이 방에서 빌립보서 완독.
사무치는 잔잔한 바울의 감동, 신앙의 기쁨이라는 것.
그 기쁨의 가운데서 미소짖고 계시는 예수님.
16016 1990. 12. 15 (토)
침잠하여 흔들림이 없으면 일상은 가치롭다.
연말, 사업계획, 생산계획, 예산책정등 업무 산적한 세밑.
급강하한 기온.
흠씬 느껴지는 겨울의 정서.
16018 1990. 12. 17 (월)
말콤 엑스.
그의 바위같은 신념.
일개의 뒷골목 건달을 각성시켜서 하나의 사상가로 만들 수 있었던 신념이라는 것.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결코 실패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저돌적으로 무모한 신념.
흑인과 백인은 분리하여야 한다고, 제도의 개선과 점진적인 융화를 상정하여서는, 그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이지 결코 흑인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흑인은 흑인끼리 독립하여 살아야 한다는 말콤 엑스.
말콤 엑스도 나중에는 극한적인 그의노선을 바꾸기는 하엿으나 그가 마틴 루터 킹보다 더 흑백문제의 본질에 접근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싸늘한 새벽, 월요일.
베토벤의 첼로소나타.
그 유장한 선율이 흐른다.
내 방 새벽 추위 속에 앉아서 베드로후서 소리내어 읽고 기도.
가라 앉게 하소서. 깊은 바다와 같이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16020 1990. 12. 19 (수)
어제, 어머니 첫출근.
가야국민학교 앞의 인성의원.
J는 장미꽃 한아름 사들고 나는 회사를 잠시 삐처나와 택시타고 간다.
오전 11시, 남성교회 목사님과 전도사님, 형내외, 가야숙모등 진찰실 둘러 서서 예배.
복도에는 아이들 데리고 온 환자들 앉아 있다.
번창하시고.
어머니, 일하시는 즐거움.
70이 넘으신 노파가 아니다. 기력도 좋을시고.
퇴근하여 정과장과 소주 한잔 걸치고 어머니 퇴근 시각 맞추어 찾아 뵙다.
기쁨을, 소망을. 은총을.
신앙의 어휘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원이다.
16021 1990. 12. 20 (목)
올해도 10여일 남겨두었지만 세밑의 들뜸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어제 보수동 유스호스텔 찾아가서 그곳 관리과장과 70명 연회 예약.
12월 28일, 생산부의 관리직 사원 부부동반, 한식 뷔페식으로.
英이는 요즈음 학교의 제 서클에서 개최하는 우표전시회 준비로 여간 분주한게 아니다.
俊이 오늘부터 시험.
16022 1990. 12. 21 (금)
가려움, 수면중에도 온 몸이 가려움을 느낀다.
가려움과 연관된 꿈.
어제 SB-374 진수.
SLIDING하다가 RUDDER의 LASHING WIRE가 끊어저서 PROPELLER BRADE에 약간의 DAMAGE.
현장에 근무하고 있었더라면 제법 골치 아픈 사고다.
英이 모의고사 성적 받아오다.
형편없는 점수의 수학과목.
수학, 이 중요한 과목에 기초가 되어 있지 않은 英이.
어떻게 수학실력을 향상시킬수 있을까.
겨울 아침.
제법 잿빛 하늘이 겨울다운 을씨년함을 연출하고 있다.
16023 1990. 12. 22 (토)
어제 사무실로 오세건 찾아오다.
반가왔으나 사상공단의 시꺼운 얘기를 쉴새없이 떠벌려서 다소는 피곤하다.
연말의 정신없이 바쁜 일과.
염과장, 정과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일솜씨.
아무리 엔지니어들이라고 하지만 PAPER WORK의 일처리 솜씨는 영 비효율적이다.
세상이 한참 잠들어 있을 2시경.
바로 윗층인 6층에서 들리는 소리, 쿵쿵 바닥을 두드려대고 있다.
이제는 그칠까 저제는 그칠까하고 참고 있으려는데 도무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6층의 벨을 누르니 한밤중 마늘을 빻고 있은 여자가 문을 여는데, 도무지 미안한 표정이 아니고 그 작업을 중단하는 것만이 아쉬운 기색이다.
다시 잠을 청하려니 그래도 마늘 빻는 소리는 멈추지 않아 또다시 벨을 눌러 강하게 항의하자 그제서야 멈춘다.
참 무지막지한 폭력이 아닐수 없다.
덕분에 J도 나도 잠을 설처버렸다.
16024 1990. 12. 23 (일)
겨울은 깊어가는데 날씨는 온화하기만 하다.
냉엄하고 투명한 겨울의 얼굴은 어디에 숨어 있는걸까.
산적한 일꺼리들, 토요일 늦은 시각 퇴근하며 소주 마신다.
시나브로 취하여 몇시에 돌아왔는지.
술맛에는 9품이 있다던가.
임금이나 손위 어른 앞에서 엎드려 마시는 俯伏酒가 제일 맛없는 九品.
공석에서 돌려 마시는 會飮酒가 八品.
제사나 잔치집에서 낯선 사람들과 마시는 禮酒가 七品.
주점에 가서 여럿이 마시는 것이 六品.
자기짐이나 친구의 사랑에 가서 대작하는 것이 四品.
사랑에서 혼자 마시는 독작이 三品.
좋은 경치 찾아 대작하는 것이 二品.
풍광찾아 홀로 마시는 것이 一品이란다.
나의 음주는 때로 일품의 품격이 있을법 하다.
홀로 음악과 책을 벗삼아, 더욱이 때로 달빛 부서지는 滄波를 내려다 보며 마시는 나의 술은 가히 일품의 품격이 있지 아니한가.
또한 가난의 행복, 청빈낙도의 박주를 마시는 嘉喜를 나는 익히 짐작할수있거니와 그것은 바라옵건데 예수께서 가르치신 산상수훈의 그것이기를.
일요일, 사무실 나가야 한다.
16026 1990. 12. 25 (화)
연말서류, 각종 보고서의 산더미.
작업에 효율이 없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그 일에 대한 애정이 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주지않고, 내가 끌어안고 있은 이 방법 역시 관리자로서는 빵점자리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함을 어이하랴.
TV '인간시대'
여든 넘은 노파, 성당의 종치기.
노상 간구하는것은 '어서 죽게 하소서' 뿐이다.
죽은 아들 곁에 빨리 가고 싶은 오직 하나의 소망을 갖고있은 노파.
이미 삶의 희로애락은 없다. 초월.. 아픔...
나는 알수 있을 것 같다.
훌훌 벗어버린 초연한 기쁨. 모든 인연의 아픔에서 벗어난 지고한 마음의 그 세계를 나는 충분히 그려볼수 있을 것 같다.
16027 1990. 12. 26 (수)
선대와 DOCK에다 차려 놓은 고사상, 창립기념일.
큰 절해 올린다.
2공장의 식당에서 떡국 조찬.
마친후 부차장들 기장으로 망년회 떠났으나 나는 빠져 버린다.
코오롱 크린스, 俊이 햄버거, 귤 그리고 술사들고 집에 돌아 온다.
장인어른 당뇨로 와병중이어서 J는 사직동행이고 집안에는 승즌이 뿐.
TV 앞에서 한잔두잔.
시나브로 취하다.
16028 1990. 12. 27 (목)
영하 6도.
춘천은 영하 16도라고.
겨울다운 겨울, 그렇지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하는 법이다.
곳곳에 대입 함격자 발표.
英이 심기를 살피고 그것을 건드릴까봐 그 뉴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아비짜리의 마음.
꿈- 어떤 퇴락한 저택의 2층 홀에서 파티. 그로데스크한 분위기의 파티. 그 저택은 일본식인데 보생의원같기도 하다.
이 꿈은 아마 내일 연회 진행에 대한 강박이 데포르마숑된 꿈일 것이다.
꿈- 옛날 남항동의 어느 골목길, 고교시절의 윤원이, 박영식등장. 내 고교 방황하던 사춘기시절.
이 꿈은 아마 英이의 고교생활에 대한 아비짜리의 강박이 데포르마숑된 것일 것이다.
신년도 생산계획, 금년도 실적보고 완료하다.
공정율에 의한 매출액과 원가투입율에 의한 매출액 산정방법.
이에 대한 박이사의 편견은 꺾이지 않아 10여년의 실적분석은 도무지 CLEAR되지 않는다.
16029 1990. 12. 28 (금)
어제 장모님 실족하여 머리를 다치시다.
머리를 다치셨으니 혹 이상을 염려하여 컴퓨터 촬영등을 하였으나, 일곱바늘 꿰매고 외상이 있으니 일단은 안심해도 좋은 듯.
대동병원에 가서 손을 잡아 드리고 늦은 시각 J와 함께 돌아오다.
아비 어미 없는 그 틈에 英이는 외출하고 없다.
꾹꾹 눌러 참는 아비짜리, 어미짜리.
英아.
아빠를 상상력이 부족하고 꽉꽉 막힌 보수주의라서 젊은이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욕하지 말아다오.
아빠도 역시 너와 같은 나이를 겪었고 사춘기도 있었으며 방황도 하고 반항도 하고 어쩌면 지금의 너보다 더하면 더하였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英아.
나이를 먹고 과거를 뒤돌아 보니, 너무나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단다.
그 시절 누군가 있어 야단을 처주고, 미래의 꿈을 심어주고, 분발을 촉구하여 주는 존재가 있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다. 그 누군가가 있었다면 아빠의 인생은 너무나 달라졌을 것을. 적성에 맞지도 않는 직장에서 하기도 싫은 일을 하면서 여유없는 경제로서 힘들게 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하고 말이다.
그 시절, 아빠에게는 아무도 간여치 않았으며 구체적으로 나를 끌어줄 아무도 없었단다.
네 할머니도 계셨고, 작은 할아버지도 계셨지만 그 분들은 아버지없이 자라는 아빠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따뜻함이나 애정은 있었겠지만 엄격하게 아빠의 앞길을 관리하겠다는 의지는 없이 이를테면 너 알아서 하라고 방기를 하셨다고 할수 있었단다.
누구인가 내게 관심을 기울이고, 나를 관리하여 주는 존재가 있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나이를 먹고나서야 절실하게 엄습하는구나.
세상은 좋은 학교에 좋은 전공을 하여 그런 사람들이 사회의 상층부를 이루고, 그런 사람들만이 자기 인생을 자기 뜻대로 가치있게 활용할수 있는 구조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공부를 해야하고, 하고 싶은것들이나 관심있는 것들을 잠시 유보시켜야 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그런데, 스스로 마음을 아무리 독하게 먹는다고 하더라도 네 나이 때는 스스로 제어하고 냉정하게 자신을 컨트롤하기가 무척이나 힘든 것이다.
그래서 곁에 잔소리꾼이나 간섭쟁이를 두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수가 있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지금은 아빠나 엄마의 너에 대한 간여가 지나치다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네 지금의 생각이나 느낌이, 그 간여가 싫어 죽겠을지라도 스스로를 한번 냉정하게 뒤돌아 보아야 한다.
그 미묘한 사춘기 때의 질풍노도와 같은 감정의 기복에서 아무런 중심없이 만들어 지는 생각이라는 것은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英아.
우리 마음을 열자.
너는 그 차거운 표정을 풀고, 아빠는 큰소리치는 주책을 접으마.
그리고 우리, 마음을 열어 보자꾸나.
너의 지금은 네 인생에서 너무나 중요한 때이다.
16030 1990. 12. 29 (토)
어제 애린 유스호스텔의 대연회장.
생산부 관리직 사원의 부부동반 '송년의 밤' 개최.
내가 주관하고 진행한 행사.
70여명 흥겨운 시간 갖다.
박이사도 만족, 전사원도 만족. 그 아내들도 만족.
나는 J와 함께 무슨 노래를 불렀던가.
예산 소요. 120만원.
겨우 일어나 출근.
토요일의 일과, 결근은 거의 없다.
공정담당 김형준기사 르망 스페셜 새차 뽑다.
오늘 장모님 퇴원, 컴퓨터 촬영결과 이상없다고. 큰 다행.
16031 1990. 12. 30 (일)
올해를 넘어가는 고갯마루.
여기저기 망년회 모임 모임들.
술마시는 세밑이다.
망년회-
어딘가 속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몸짓.
군거적 순종의 원리를 확인하게 되는 행태.
끼리끼리 모여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올 한해도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안도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익숙한 마찬가지의 몸짓.
전주교도소의 탈주범들.
강을 등지고 차츰차츰 조여오는 포위망 속에서 동료의 머리에 권총을 발사하고, 스스로는 가슴에 발사하여 최후를 맞는다.
그 생생한 장면이 기자의 사진에 그대로 촬영되어 신문에 실리다.
죽음 직전의 그 표정에는 차라리 멀뚱한 순박함이 어려있는데, 충격적인 장면이다.
16032 1990. 12. 31 (월)
庚午年 마지막 날.
올드랭 사인이 울리고 환호하면서 커튼 콜도 끝날 것이다.
이제 한해의 막은 내리고 다음 레퍼토리의 공연이 시작된다.
그 공연의 기획은 아직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