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1. 3

카지모도 2016. 6. 23. 13:48
728x90




16093 1991. 3. 1 (금)


부시 대통령.

종전 선언으로 걸프전은 막을 내리다.

미국의 완벽한 승리일까.

그러나 후세인은 저토록 건재한데.


그러면 이제부터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가 정립되는 것인가.

강자논리의 질서, 국제정의는 강자중심으로 경도되기 마련이다.


걸프전을 종말의 징조로 간주하여 그토록 난무하던 말세론자들은 전쟁이 끝났으니 또 무어라고 주어섬길 것이지.


어제 이덕찬씨와 술마시다.

민속주점 만수무강의 아주머니.

그 아주머니의 사람을 편하게 하여주는 여성스러움의 엑기스는 무엇일까.

그것은 절대 성적인 어떤 것은 아니다.


술에 취한 한밤중, 마루에 불끄고 앉아서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 듣는다.

음산한 1악장의 가락.

그러한 음산함 속에서도 슈베르트의 소박함과 청순함이 깃들어 있다.


오늘, 할아버지 기일.

어머니는 출근, 형도 외출하고.

가야숙모 인도의 할아버지 추모예배.

형네서 아침먹고 회사에 들른다.


다소 서늘한 대기이지만 그 속에 봄은 이미 스며들어 있다.

바다는 쪽빛.

봉래산 기슭은 아늑하다.


16094 1991. 3. 2 (토)


英이의 한계가 지금의 그것이 고작인데, 나는 그 아이의 능력을 과장되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때로 생각하여 보지만, 그렇지 아니함을 나는 알고 있다.


英이의 불과 수년전의 어린 시절을 상기하여 보라.

피아노선생의 감탄이 아니더라도, 단 한번 들은 노래를 곧바로 자기 노래로 만드는 재능, 한번 읽은 동화책의 내용을 시간이 많이 흘러도 거의 고대로 암기할수 있었지 않았나.

졸업할 때 국민학교를 대표한 교육감상 수상은 무엇이고, 선생님들의 확신에 찬 기대의 말씀들은 무어란 말인가.

한점이라도 J의 치맛바람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음악의 그 즉흥적인 연주실력은 무어란 말가.

피아노, 플롯.

음표를 즉각 이해하여 연주할수 있다는 것이 어설픈 두뇌로 가능한 행위인가.

그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고 英이의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있을텐데, 어떻게 그 숨은 능력을 일깨워 줄수 있을까.

부모짜리는 이토록 지혜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돈이 있었으면 집중적인 과외라도 시켜보겠건만.


정지용 감독의 '남부군'

빨치산 궤멸의 역사적인 사실을 성실하게 그린 영화.

지리산의 영상도 좋았고, 극적인 전개가 다소 단조롭게 보이는데 후래시백 기법의 테크닉을 좀 부려서라도 좀 풍성하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몹씬에서는 전형적인 한국영화의 어설픔이 그대로 드러나 리얼리즘을 해치는 요소는 어쩔수 없었을 것이다.

안성기만한 배우는 흔치 않다.


꿈, 어제 내 꿈은 개꿈.


새벽 일어나 俊이 방에서 俊이와 나란히 엎드려 시편을 읽는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왼다.

기도를 드린다.


16095 1991. 3. 3 (일)


英이 방, 책상의 위치를 바꾸는등 방의 어레인지를 바꾸어 정리한다.

함께 일하는 英이는 오늘 표정이 밝다.

英이의 밝은 표정의 언어와 웃음에서, 나는 그 아이의 숨은 가능성, 비범한 어떤 재능을 읽는다.

기분이 좋아서 모차르트의 모데트를 따라 부르는 英이의 음색과 음정은 가히 코로라투라 소프라노에 손색이 없다.

땀을 흘리면서 아비짜리는 흐뭇하여 죽을 지경이다.


고즈넉한 오후.

봄이 이미 스며든 저 바다를 덮은 대기의 따스함을 느끼면서 나는 한잔 술을 마신다.

정녕 나는 얼마나 이런 풍경속에 잠기는 것을 꿈꾸며 또한 사랑하고있는지.

조지 거슈인의 섬머타임이 느릿하고 한가하게 들려오는 미국 어느 남부의 저택.

쓰르라미는 울고, 그늘은 깊고, 노예는 한가하여 노래를 부른다.


16097 1991. 3. 5 (화)


심기가 매우 불편할 때, J의 언어는 흡사 싸움박질하는 형국이다.

여과되지 않은 그 언어는 주위사람들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여 상대방도 그예 마주대고 거친 언어구사를 촉발케 한다.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J가 어떨 때는 우스울 정도인데.


새벽, 어둠 속의 달리기.

운동, 운동.

몸을 떨어 먼지를 털어낼 것.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

건강한 인생, 긍정과 밝음.

그리하여 경건의 회복.

낭비하지 않는 목숨, 인생의 생산성.


16098 1991. 3. 6 (수)


아이들.

점점 커갈수록 그 애들의 교육방법론에 대하여 난감해 진다.

내게 무슨 교육에 관한 뚜렷한 신념이나 가치관이 있어서 아이들에게 원칙을 갖고 다그칠수 있단 말가.

내게 무슨 명확한 비젼으로 아이들에게 꿈나무 한그루씩 심어 줄수 있단 말가.

누구보다도 평범해 빠진 범부로서의 속물적인 바람 하나만 있을뿐인 못난 아비짜리인데.


좋은 대학, 안정된 직업, 여유있는 삶의 영위.


16099 1991. 3. 7 (목)


英이의 공부의 분량도 그렇고 공부하는 방법도 옳지 않다.

학교수업, 수업을 마치면 10시까지 자율학습, 집에 돌아와 꾸벅거리다가 11시쯤 취침, 5시 넘어 흔들려 깨어서 겨우 일어나서는 공부를 하는둥 마는둥하여 6시 40분쯤 등교.


집에서의 학습량은 극히 미미할뿐더러 전혀 효율적인 공부가 아니다.

말하자면 학교에서의 공부가 거의 전부일텐데 그 학교에서의 학습은 양과 질에서 믿을만 한 것인지.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무슨 배짱인지 '붙으면 될거 아냐'하고 신경질을 부려대는데 그렇게 말하는 英이에게 스스로에게는 근거가 조금이라도 있는겐지.

학원도 다니지 않겠다, TV 과외도 도움되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英이.

답답하고 답답하다.


俊이는 집 밑에 있은 8학군학원 그만두겠단다.

모범생학원인가 하는 곳에 수학만 듣겠다고 한다.


이 녀석들 머릿속, 마음 속을 한번만 들여다 볼수 있었으면.

이 녀석들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파악할수 있다면 나는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키울 것은 키울수도 있겠건만.


내 사춘기때의 터널, 때로 암담하고, 때로 근거없이 장미빛 미래를 꿈꾸고, 때로 달콤하고, 때로 분노하던 그 터널.

지금 생각하여 보면 혼돈 바로 그것이었는데, 그 시절 내게 한사람의 스승, 선배, 한사람의 이끌어주는 사람만 있었더라면하고 안타까워 하는 이 마음을 아이들에게 이해시킬수만 있다면.


그러면 아이들은 아빠에게 손을 내밀 것인데.


16100 1991. 3. 8 (금)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빗방울이 성기게 듣는다.

바람은 전깃줄을 윙윙 울리고 창문을 흔들며 먼 바다의 물결을 뒤집어 놓는다.


박순녀 '靈歌' 다시 읽는다.

여성적인 섬세한 감수성으로 엮은 영혼이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나라의 몇몇 여성작가들은 남성작가들이 도무지 미치지 못하는 여성적인 유니크한 감성의 세계를 표현할줄 안다.

박경리, 강신재, 한무숙, 손소희, 박순녀, 박완서...


어제는 다소 일찍 퇴근하여 바람불고 비뿌리는 집에 오르는 고개길을 무엇에 쫓기듯 올라와서 일찍 잠자리 들었으나 꿈자리는 왜 그렇게 난삽한지.


순간에 충실할수 있다는 것이 최선의 행복이다.

잠잘때는 잠자는 것에, 먹을때는 먹는 것에, 섹스할 때는 섹스하는 것에, 똥 눌때는 똥누는 것에, 마실때는 마시는 것에, 일할 때는 일하는 것에, 읽을때는 읽는 것에...


그런데 나는 무엇 한가지 할 때에도 두뇌는 계속 다른 것에 손을 뻗고 있다.

연상과 상상이 끊임없이 작용한다.

그러다가 지금 하는 것과 지금 상상하는 것의 주객이 뒤바뀌어 버리는 경우도 있고.

이런 것들이 급한 성격을 만들기도 한다.


16101 1991. 3. 9 (토)


하나의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전환될때에 전 장면의 잔상은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화라는 과학이 성립한다.


생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단절되어 독립된 사고라는 것은 존재할수 없다.

귀납이라던가 연역이라는 추리의 과정없이, 전혀 연관없는 고립된 생각은 존재할수 없다.

만일 전후의 연관없이 단절된 사고가 있다면 그것이 정신분열의 증후가 아닌가.

그래서 정신분열자의 사고는 뛰어나게 기발할 수가 있는 것일게다.


그러니까 가끔 내게 갑자기 틈입하는 전혀 생뚱한 생각들은 전혀 독립되어 내습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전후의 사고의 연관성으로 파악해야 한다.


16102 1991. 3. 10 (일)


일요일의 흐린 하늘.

찌푸린 하늘은 오후들자 그예 빗방울 뿌린다.

오후에야 게으른 몸을 일으켜 목욕하여 찌뿌드드하게 엉겨있은 때를 벗겨내고 정신을 추스려 英이 방의 호젓함에 잠겨 책을 펼친다.


새벽같이 英이는 도서관으로, 俊이는 지석이와 고갈산에 올라가 4시간여를 곳곳의 봉우리를 섭렵하고 9시가 넘은 한밤중 돌아온다.

녀석들은 캄캄한데 산 속이 무섭지도 않았는지.


16104 1991. 3. 12 (화)


회사의 화장실에서 '영가'의 종장을 읽으면서 눈물 흘린다.

유강식, 진세, 뚱글레와 꽃띠...

유강식은 북에 두고온 딸에게, 잠들기전에 언제나 의식을 치루듯 기도한다.

"정아, 아버지도 살아있으니 너도 살아라"


섬들은 결코 서로 다가갈수 없다.

인간이란 타인의 영혼에 들어갈수 없는 영원한 에트랑제로 살수 밖에는 없는 존재.

그나마 부모 자식간의 관계란 그중 가장 가까운 구원의 관계이다.

핏줄이 만들어 놓는 그 끈끈한 목숨들.


그래,

"어머니"

"내아이"하고 발음해보면 언제나 슬프지...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월요일의 일과.

소각로 건은 결국 일본제품 미우라의 수입 쪽으로 기운다.


16105 1991. 3. 13 (수)


완연한 봄기운 가득한 한낮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계절에 민감해 지는 모양이다.

세월의 흐름을 비로소 의식하게 돼서일까.


봄의 따스한 무엇 무엇들은 행복감을 자아낸다.

분명히 봄은 행복한 게절이다.

부활의 계절, 갈릴리의 계절.


예전에 나의 허영은 봄을 경멸하고, 여름을 폄하하고, 겨울을 가치있는척 폼을 잡았는데 이 얼마나 감정을 속인 허위의 포즈였던지.


이를테면 얼음짱같은 냉철한 이성과 思考의 세계를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지적 허영이고 위선의 오만이었다.


봄, 봄은 얼마나 행복한 계절이냐.

곧바로 창조주의 솜씨, 그리스도의 부활의 숨결을 느낄수있는 기적의 계절이 아니런가.


어제 오후, 미우라 한국대리점 신사장 방문.

엘리트 무역업자의 세련된 포즈.

그러나 장사꾼의 비수는 그 세련 뒤에 숨어있는 법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THOMAS EDWARD LAWRENCE 의 傳記 읽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무엇이 그토록 좋은가?

피터 오툴이 연기한 데이빗 린의 영상적 이미지?

그의 STOIC한 품성이나 언뜻 비치는 허무주의?

무릇 속물을 비웃는듯한 그의 영웅주의?


글쎄, 어쨌던 그는 내가 도저히 도달할수 없는 그곳에 있다는 것, 나와 같은 세속적인 범인은 아니라는 것, 시인이 아니라는 것,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는 약아빠진 여우같은 사람이라는 것.

아아, 그는 투명인간처럼 이 가시적인 물리적 현상적 세상을 그저 스쳐 지나갈수 있다는 것.


16106 1991. 3. 14 (목)


어제 따스한 대기 속에 하늘은 뿌옇게 흐려 있다.

공단 지역의 매캐한 매연 속을 달려, 김형준의 차를 징발하여 환경청 다녀오다.

소각로의 허가, 감리, 승인 문제가 그다지 어려울 것같지 않아 업자들의 어떤 농간이 있을수도 있다는 느낌.


환경청에서 돌아오면서 김형준에게 을숙도로 차를 몰게 한다.

갈대숲, 나룻배, 나무다리, 초가집등 옛 면모는 완전히 잃어버렸다.

곧고 넓게 닦아 놓은 도로, 넓게 조성된 광장과 거대한 뚝, 수문.

도회의 비정한 풍경화로 드넓은 벌판은 개발을 기다리는 황향한 대지일뿐이다.


강물은 의구할진데 옛 정취는 어디 갔는고.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잃어가며,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늙어 가는 것인가.


로렌스는 페이잘로부터 아라비아 결혼예복을 선물받고, 드디어 아라비아 복장을 하다.


퇴근하여 SJ엽 , 인사과장과 어울려 시내나가 생선회를 먹다.

단순 선량한 SJ엽 . SJ엽 보다는 훨씬 노회한 문상봉.

그들에 비추인 나는 멋쟁이, 유식하고 복잡한 야심가...


다자이 오사무의 어린 시절, 그는 늘 타인이 자기에게 원하는바 그 인상을 심어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는데, 진짜 자기는 속으로 얼마나 슬퍼 하였는네 그것은 사뭇 고문이었을 것.


16109 1991. 3. 17 (일)


빈센트 반 고흐.

어제 저녁 마루 소파에 길게 누워서 그 영화 보다.

속절없이 고흐에 빠져든다.

강렬한 색채속에 녹아있은 불꽃과 같은 열정.

그 열정은 고흐의 생존에 어떤 의미였던가.

그 뜨거움은 환희였을까, 아니면 절망의 색채였을까.


예전 나는 고흐의 그림을 크레파스로 여러장 베껴 그렸었다.

고흐를 한번 느껴보려는 그 시도의 그림작업에서, 나는 통일성과 조화와 균형잡힌 예술을 느꼈을뿐이지, 거기서 어떤 광기를 느끼지는 못하였었다.

그는 결코 광기의 사람이 아니었다.


고호. 그는 실로 불세출의 예술가이다.

영화에서는 또하나의 고귀한 관계를 보여줘 나를 감동시킨다.

고흐와 태오의 우애, 신이 맺어준 형제.


영화를 보고나서, 20여년전 성규가 선물하여 준 화집을 펴든다.

고흐의 그림, 그림들.


예술가는 모두 행복한 족속들이지만 화가란 진정 행복한 사람들이다.

고흐는 불행하지 아니하였다.

광기가 아닌, 통일과 조화와 열정으로 스스로를 불태웠으므로.


16111 1991. 3. 19 (화)


천경해운 화물선 SB-381 진수.

FAT진수의 장관은 한 몇 개월 볼수 없을 것이다.


오후에 은행들러서 통장 정리하고 카드찾는다.

사람들로 붐비는 은행.

눈부시게 약진하는 컴퓨터의 효율성은 은행을 대중화 시키는데 기여한 제1의 공신이다.

이제 은행뿐이겠는가.


옷가지 산다.

의상- 의상이라는 것은 외형의 모습만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면적인 어떤 부분을 장식하는바가 더 클런지 모른다.

자기만족, 우월감, 또는 자신감의 고취같은 기능.


새벽 일어나 목욕.


그리고 모차르트 걸다. '3대의 피아노 협주곡.'

모차르트는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다.

혹은 너무 슬퍼서 아름다운 것이지도.

엘비라 마디간의 영상.

피어 데게르마르크는 나비를 좇아 뛰논다. 그 순간 총성.

영원히 아름다운 모슴으로서 동결, 스톱 모션.


英이 방에서 기도.

주님은 가까이 계신다.


16112 1991. 3. 20 (수)


다아윈 '곤충기' 다시 읽는다.

다윈의 과학정신은 성실하고 진실한 그의 품성에서 나온 것이다.

진리를 향한 무한한 열정과 자연에 대한 사랑.

서양정신의 가장 우수한 전형을 다아윈에게서 발견하고, 이것은 아이들 교육에 매우 훌륭한 교범이 될 것이다.


동양이 형이상학을 논하여 그 사상이 우주를 넘나들 때 서양의 합리주의 실증주의의 과학정신은 땅에 엎드려 흙사이에 꼬무락거리는 벌레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 벌레를 관찰하면서도 그들은 그로부터 비약하는 허황된 상상을 하지 않는다.

관찰의 결과에서 어떤 교훈이나 도덕을 도출해 내지도 않거니와 연역하여 추상적인 것으로 확대해석하지도 않는다.

다만 사실만을 관찰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자연의 법칙만을 추구할 뿐이다.


어제 점심때 잠시 시내나가서 티켓으로 구두를 산다.

바가지, 모두가 60,000원 이상의 정가가 붙어있는데 명절 후, 티켓을 겨냥한 가격 올려붙이기 혐의가 농후하다.


이덕찬씨와 마신다.

그의 발육부진, 착하다는 것과는 또다른 정신적 발육부진.

책임감결여, 사회와의 연대의식은 없이 신변주의, 일종의 사적인 한계에서 맴도는 팽이와 같은 의식구조.


그러나 나 역시 이덕찬씨의 팽이 밖으로 얼마만큼 벗어났다는 것인지.


16114 1991. 3. 22 (금)


연 이틀째 휘몰아쳐 웅웅 울어대는 바람.

저 수평선 넘어에서 해원을 휩쓸며 달려와 전기줄을 현악기처럼 떨게하여 야릇한 음률을 연주하고, 창문을 한두번 덜컹거리며 흔들었다가는 옥상을 훌쩍 뛰어넘어 고갈산 소나무 숲을 치달린다.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도 예리한 칼날처럼 유리창에 일직선의 금을 긋는다.

폭풍주의보.

체감온도도 뚝 떨어졌다.


낙동강 오염.

수돗물에서 지독한 냄새, 알고보니 구미공단의 두산전자에서 페놀 폐수를 몰래 방류하였다.


깎이는 산과 메꾸어지는 바다.

저 화장끼없어 해맑은 숫처녀의 얼굴에다 회칠을 하여 싸구려 작부의 얼굴을 만든다.

곳곳에 화장독이 올라서 푸르죽죽한 자욱을 드러내지만 작부는 싸구려 눈웃음만 치고 있다.


16117 1991. 3. 25 (월)


TV 드라마 '고개숙인 남자'

처음과는 달리 갈수록 멜로로 흐른다.

드라마란 한번 보기 시작하면 계속 보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이미숙의 연기 훌륭하다.


J는 정한용과 이미숙 부부의 싸움 모습이 그렇게 우스운지 한참을 박장대소한다.

처음 이 드라마는 제법 진지하였었는데, 아무래도 시청자 구미에 영합하지 않으면 힘든게 상업방송인 모양이다.


16118 1991. 3. 26 (화)


아침.

구름사이로 햇살이 얼굴을 내밀면 바다의 복판에는 흡사 무대의 조명처럼 부분적으로 환하게 빛이 난다.

몹씨 바람이 불어댄다.

뒷창문으로 바라뵈는 송림은 죄다 이리저리 바람에 휩쓸려 눕고들 있다.


기초의회 선거일, 나는 진작 기궈하기로 하였으니까, 오늘 윤정모 '고삐'나 읽으려 마음 먹는다.


16119 1991. 3. 27 (수)


윤정모 '고삐'

극적인 구성이나 플로트등 소설작법의 원칙을 무시하여 황량한 뼈마디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소설.

부끄럽고 은밀한 이야기들은 거침없이 그 치부를 내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은 나를 충분히 감동시킨다.

반미논리를 설파하는 작가의 웅변은 차치하고라도, 이것이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감히 선언할수 있는 작가의 용기는 아무리 상찬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나와 동갑내기인 작가 윤정모.

그 용기를 가능케 한 작가적 양심과 신념에 나는 감동한다.


새로운 세계.. 거듭나기.. 변신... 부활.

이를 위하여는 구각을 깨고 나와야한다.

현금의 자기부정 없이는 불가하다.

나의 모든 것을 까발려 이것이 나의 진면목이다하고 소리친후 얻게 되는 소중한 그것은 비로소 타인의 시선과 네거티브한 무의식의 사슬에서 벗어낫다는 해방감이 아닐까.

아아,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는 첩경이 아니겠는가.


어제 英이, 학교창문 밖의 숲에서 여학생의 교실을 향하여 바지춤을 내리고 이상한 짓을 하는 사내를 보고 혼비백산 한 모양.

J도 나도 그것을 설명할길 없어 곤혹스러웠다.

그런 것을 엄마에게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英이의 순진함이 나는 귀엽다.


16120 1991. 3. 28 (목)


계절이 거꾸로 진행하고 있다고 느낄만큼 춥다.

날씨는 흐리고.


어제 기초의회의원 선거는 56%의 투표율.

여권 성향의 인사가 대거 당선.


회사에서 뒤적거려 읽은 잡지 '시사저널'.

박노해 체포되고, 그의 뒷이야기.

본명 김길평, 그의 아내 김진주.

혁명가와 혁명가의 아내.

까칠한 표정이지만 신념과 승리에 찬 눈빛, 그 한 장의 사진이 내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16122 1991. 3. 30 (토)


어제 어머니께 다녀오다.

인성의원 다니시고 부터 원기가 새로우시다.

고마운.

시나브로 취하여 늦은 시각, 빵과 딸기 사들고 돌아온다.


새벽에 민방위 훈련이지만 7시 넘어 겨우 일어나, 비상계획실 교섭하여 참석한 것으로 할 요량으로 훈련은 불참키로 한다.


16123 1991. 3. 31 (일)


俊이는 새벽 5시30분 지석이와 산에 오르더니 10시30분이나 되어서 돌아온다.

아침들도 먹지 않은채 5시간동안 산속을 돌아다닌 것이다.


좋은 친구가 있은 10대의 한시절은 얼마나 가치있는 시절인가.

俊이도 그러한 가치있는 친구와 그러한 가치있는 시절이기를.


월간조선 4월호에 실린 시 한편.


"거울 앞에서

내가 문득 나에게 낯설어 보일 때

나는 내게서 타인을 느낀다.

내가 아닌 타인의 거울 속에서

내가 아닌 나의 모습에 놀라며

나에게 무슨 일들이

이토록 내 자신 하나 찾지 못하게

지난 나날들을 버려놓았느냐고 말한다.

나는 잔인한 세월에 머리를 흔들며

쉽게 오늘을 다짐하면서

지루하게 내일을 기다리는 내가

서울 앞에 설때마다

서로 다른 나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

무엇때문인가

나는 왜 사랑하는

나를 찾아야 하는가

나의 모습이

두 개의 얼굴이 아니라

끔찍하게도 3차원으로 보일 때

나는 모순의 거울 밖

그 어디에서

내 본래의 얼굴을 찾고 있는가.

거울 앞에서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마다

거울 속에 발자국도 없이

낯선 타인이 되어서

초라하게 서 있는

나는 나에게 안부를 전한다."


-이재호 '타인의 거울'-



'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 > 部分'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91. 5  (0) 2016.06.23
1991. 4  (0) 2016.06.23
1991. 2  (0) 2016.06.23
1991. 1  (0) 2016.06.23
1990. 12  (0) 2016.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