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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8권 (4)

카지모도 2025. 1. 22.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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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는 아무리 해도 춘복이 얼굴과 형상에 연이어 당골네 백단이, 무부 만동이가 덕석

말이로 너덜너덜해진 몸뚱이에 피칠갑을 한 채 절룩이며 날 저무는 매안에서 쫓겨 나가는

모습과, 그 걸음으로 다시 매안을 향하여 그들이 중음신 그림자들처럼 걸어 들어오는 환

영을 지우기 어려웠다.

(원한같이 무섭고 깊은 것은 없건만, 왜 그 씨앗을 산야에 저토록 많이 뿌려, 두려운

줄 모르고 칡과 등이 자라나게 하는가. 그 원한의 줄기와 뿌리가 서로 뒤얽히어 뻗으면

태산 명산이라도 숨막히어 기가 끊기고, 무쇠 철기와 지붕이라도 그 등걸에 짓눌려 무너

지고 말 터인데, 그래서 다 척지지 말라, 했을 것인데.) 강호는 찬규의 대가리와 춘복이

의 몸뚱이 그리고 백단이와 만동이의 봉두난발이 서로 칡뿌리와 등넝쿨처럼, 피울음으

로 또아리져 켜켜이 엉키는 것을 눈앞에 바로 보는 듯 했다.

그렇게나 장하고 아름다운 남원의 위용과 넓은 품을 두고도, 어느 갈피 한 자락 그늘에

다 그 하찮은 찬규 하나를 품어 주지 못했던 용렬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토록 단호하게 몽둥이를 내리쳐 그 누구도 넘보거나 접근하지 못하게 서슬을

세우는 매안의 배타는 또.

(이런 세상은 반드시 바뀌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마구에 바뀌고 말 것이다. 그 징

후는 이미 도처에 보이고 있다.)

강호는 잠을 못 이루렀다.

(내가 이 세상을 향하여 세운 이상을 나는 꼭 실현해 내고 싶다. 비천하고 상스러운 하

천의 폭동 보복이 두렵다거나 그 계급에 대한 기득권자의 측은지심 연민 때문이 아니라,

당당한 이상으로서, 인간이 지행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세상을 이 땅에 나는 이룩하고

싶다. 비록 작은 힘이지만, 사람 하나의 진정한 뜻과 올바른 마음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

리라.)

잘못되고 부서진 것들은 복구되어야 한다.

제도와 관습이라는 허울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빼앗아 박살하여

버린 횡포는, 마땅히 역사와 사회로부터 철회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와 환경을 모든

인간 앞앞에 각자의 몫으로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한다.

그것을 받은 자가 제 몫을 어떻게 쓰든지 간에.

남원도 다시 복원이 되었다.

그 참람한 일이 일어난 지 몇 해가 지나고 나서, 홍문관 옥당의 홍익삼이 유서 깊은 남

원부가 강등된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기던 중, 저간의 사정을 상세히 조사한 결과 부민들

의 억울한 사연을 알게 되어, 영조 26년에 적극적으로 남원부 호를 되돌려 찾도록 있는

힘을 다했다.

비록 세월은 지났다 하지만, 그의 이름만 들었다 하여도 그 자리에서 참수를 할 만큼

흉악 끔찍한 찬규의 변에 관하여 언급을 하고, 나아가 그 벌을 받고 있는 남원의 이름을

원래대로 복구하자, 운동하는 것은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충정은 참으로 진실하여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는지라, 마침내 이해 사월

초닷새날, 상께서는 친히 중신회를 열고

남원부 복호에 관한 여러 대신들의 뜻은 어떠하오?

하문하시니, 회의에 참석한 좌의정 김약노, 우의정 정익량, 이조판서 김상노, 병조판서

이대보, 형조판서 조재호 등 대소신료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남원부 복호의 타당함을

아뢰었다.

이에 상께서는 곧 홍익삼을 부르시어

남원부 복호를 선포하라.

고 명하였다.

이름이 깎이어 없어지고 고을이 강등된 지 실로 십 년 만의 일이었다.

얼마나 좋았을까.

강호는 문득 그날의 남원부 부민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참말로 쾌활하고 즐거웠으리라.

그러나 홍익삼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그 일이 쉬웠으리야.

강호는 밤바람에 이마를 맡기고 원뜸의 솟을대문 문간에 서서, 메마른 어둠이 숯가루같

이 쌓인 고샅과, 불꺼진 숯막보다 더 괴괴하게 엎드린 매안의 지붕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기채의 사랑에서 나오다가 콩심이 전갈을 받고는 다시 되짚어 들어가 효원을 만나고

나오는 강호는, 집으로 가는 골목을 그냥 지나치면서 두벅두벅 걷는다. 인적이 끊긴 고샅

에 그의 구두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다. 그것은 마을이 숨을 죽이고 있는 탓인

지도 모른다.

중뜸을 지나, 휘엇하게 뻗어오른 적송이 몇 그루 별도 없는 밤하늘의 희뿌연 천공에다

검은 구름덩어리마냥 머리를 두른 모퉁이를 돌아 지나고, 아랫몰 끄트머리에 다다른다.

아이고 서방님, 언제 오셨능기요오?

손에다 당그래를 든 채로 막 제 집에서 나오던 임서방이 깜깜한 중에도 얼른 이쪽을 알

아보고 허리를 굽신한다. 그의 낫낫한 목소리에서는 반가운 기색이 묻어났다. 그는 강호

를 보면 나이는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리지만 이상하게도 흠모의 마음이 저절로 고이는 것

이다. 그것은 반촌에 빌붙어 사는 일개 타성으로서, 상놈이 양반을 우러르는 그런 마음하

고는 다른 것 같았다.

그냥잉, 나맹이로 산전수전 다 저끈 인생이 독자갈 소리 따글따글 냄서 살자먼, 머 그

렇게 인자는 부러울 것도 그리울 것도 애터질 것도 없이 그냐앙저냥 살아지는디. 사리반

서방님을 뵈먼잉, 이런 인생 마음에도 왜 그렁가 머이 화안허니 틔이는 것맹이그덩. 이러

어케 문앞으로 지내가시는 것만 뵈어도 기양 가슴이 박하 먹은 것맹이로 왜 화아허니. 잉?

내 말 알겄어?

한번은 임서방이 어서방한테, 강호의 뒷모습이 저만큼 아랫몰 아래 냇물을 건너가는 것

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 일도 있었다.

모르겄어, 왜.

어서방도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일부러 눙을 쳤었는데, 참 아쉬운 것은 강호

가 매안에 있는 날보다 동경에 있는 날이 더 까맣게 많은 점이었다.

음. 어제

강호가 대답한다.

말씀은 들었그만이라우. 저물으셋등게비네요. 지가 못 뵈인 것이.

그랬네. 집안은 다 무고한가?

즈그 같은 것들이야 머 탈날 거이 있능기요? 목숨이 정승인디요. 살어만 있으먼 되지

요. 객지 타국에서 불철주야 공부허시니라고 외나 서방님이 애쓰겼을 것이네요. 세상도

시끄런디.

고마울 말일세. 아니 그런데 왜 밤중에 당그래는 들고? 아, 예에, 이거요? 저그 저 어

서방이 부엌에 재 긁어 내다가 즈그 당그래 모가지가 매급시 툭 빠져 부렀다고, 어뜨케

조께 잘 박어서 고쳐 써 볼 수 있으끄냐고 아까 갖꼬 왔 길래, 저엉 때요, 밥 먹고 나

서 앉어 갖꼬 또드락또드락 해 봉게로 머 기양 임시벤통을 헐 만허겄어서, 시방 갖다

줄라고 나옹만요.

그래 임서방이 본디 솜씨가 좋지.

에이, 머 솜씨랄 것이 있능교오, 우습지. 근디 서방님은 날 다 저물었는디 어디 가싱가요?

임서방은 강호와 마주서서 이야기 나누는 마음이 좋아서 자꾸만 말을 붙이고 싶어한다.

강호도 그런 임서방을 홀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 가는 길이냐는 말에는 대꾸를 안한

다. 그리고는 대답 대신 걸음 옮길 기색을 보인다. 그러한 몸짓에 눈치 빠른 임서방은 자

기가 주제넘었다는 생각이 드는지 얼른 말꼬리를 접는다.

아직은 야기가 찬디요.

그렇구만.

강호는 발을 뗀다. 그리고 아랫몰을 빠져 나와 소리 없이 냇물을 건넌다. 그는 거멍굴

로 가고 있는 것이다. 깊어진 밤의 어둠은 그를 거멍굴 우묵한 복판으로 수욱 빨아들이더

니 너울로 감추었다.

위험할는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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