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에는 승려가 귀족이었지만, 조선에 들어서서 숭유억불 정책을 행하는 바람에
승려가 그만 팔반사천이 되어 버리잖었어? 노비, 승려,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 들이 참 이런 부류에 한데 묶였는데, 찬규는 그나마 또 중의 종이었으니. 나중에야
명색이 승려가 되었다고는 하나, 냉대, 멸시, 짓밟히며 받은 천대가 오죽하였으며,
그것을 말로 다 못하고 흉중에 품은 억울 원통함과,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은 소원이
오죽했을까.
천한 노예 찬규는 제 뼈를 지지며 타오르는 먹피 같은 불꽃을 재우지 못한 채, 자기와
함께 울어 울어 그 눈물 모인 파도로 이 잘못된 세상을 여한 없이 뒤집어 버리고서, 대대
로 켜켜이 누르고 조이던 신분의 족쇄를 통쾌하게 풀어 던지며, 부디 이 죄보다 무거운
굴레를 벗고만 싶은 노비, 천민, 상민 들을 은밀히 모으기 시작하였다.
세상을 고치자.
그들은 서로 핏속에다 문신을 새기었다.
그렇다면 그 무너뜨려야 할 파도 위에 뜬 배는 지배계층인 양반, 혹은 기득권을 가진
세력, 또는 그런 것을 만들어 준 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모자랐다. 눈물을 파도를 이루지 못하였다. 파도를 이루지 못한 몇 줌
남루한 눈물이 어찌 저 질긴 닻 깊이 내린 육중한 배를 뒤집을 수 있으랴.
결국 찬규는 변을 일으킨 지 얼마 못되어 관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청천 하늘 아래 마른 뱃전 절벽을 향하여 대가리 거꾸로 박으며 부딪쳐 부서지는 물거
품처럼, 찬규는 하찮은 모가지를 칼날 아래 떨구고 죽었다. 참수를 당한 것이다. 선지피
가 시꺼멓게 엉겨 굳은 그의 대가리 머리카락을 거둠거둠 걷어매어 높다란 장대끝에 달아
놓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이 다 그 끔찍한 형상을 보게 한 뒤, 어느 날인가 그것은 없어
졌다. 찬규는 이생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대역무도한 반란 죄인 찬규를 사로잡아 주리를 틀며 조사하는 첫머리에, 그 고을의 원
인 관장은 엄중히 물었다.
네 태생지가 어디냐?
이에 찬규는 대답하였다.
전라도 남원이올시다.
전라도 남원이올시다.
오직 이 한 마디 때문에, 저 아득한 상고로부터 이날에 이르기까지 성벽처럼 굳건하고
위엄있으며, 구슬이나 비단처럼 영롱하고 보배롭게 흥왕하던 남원땅은 하루아침에 죄인의
하급땅으로 강등되어 굴러 떨어지게 되고 말았으니, 그가 태어나 탯줄 끊은 것밖에는 아
무 덕본 것도 인연 지은 것도 없는, 잘나고 차가운 남원에, 떠돌이 종 찬규는 모질게 보
갈이를 한 셈이었다.
그때 조정에서는 한낱 천더기 중의 종이 일으킨 이 반란의 참악한 흉보를 듣고 상과 중
신들이 모두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원은 찬규 같은 흉악무도한 반란자가 난 땅인즉, 오늘로 당장 남원도호부를 폐하고
현으로 강등하라.
고 추상 같은 영을 내리었다.
남원부 온 고을 백성들은 차후로, 이런 패역 죄인의 땅에 함께 난 죄를 부끄럽게 참회하
고 오로지 근신하라. 지명 또한 일후에는 절대로 남원이라 쓰지 말라.
하는 영도 같이 내려서, 남원은 이날로부터 제 고을을 감히 남원이라 부르거나 쓰지 못하
게 되었다.
그리고 천 년 이상이나 변함없는 긍지로 써 오던 지명을 모든 문서에서 깎아 지우고,
대신에 이 고장의 이름을 낯설고 어설픈 일신이라고 고치게 하였다.
말하자면 호남의 웅도로서 위용을 떨치고 자랑하던 남원도호부가 그만 순식간에 일신현
으로 바뀐 셈인데, 전국의 행정 조직인 삼백육십여 주, 부, 군, 현 중에서도 이는 최하
말단 등급의 서열로서, 맨 뒤꽁지에 일컬어지게 된데다가, 반란 죄인이 난 곳인즉, 이 고
을은 등급이 문제가 아닌 천향의 처지로 시궁창에 곤두박히게 된 것이야. 남원이 곧 찬규
가 되어 버린 것이지. 그러니 찬규를 죽었다, 사라졌다, 할 수 있겠어? 마한 이래 이천
년 동안 남방에서 제일 가는 군사의 요충지였고, 정치 행정의 중추였으며, 문인, 달사,
현인, 의열, 충효가 끊임없이 잇달아 나와 문향으로서의 떨기를 천하에 자랑하던 남원,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이 함락될 때에 장렬하게 순절한 접반사 정기원을 비롯한 여덟
충신과 병사들, 그리고 제 고장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서 돌멩이 하나로 마지막까지 왜군
들과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성내의 일만여 명 주민들 시체를 경건하게 묻은 만인
의총이 바로 여기 성스럽고 의롭게 모셔져 있는 남원. 이었지만, 분하고 서러운 사노
찬규의 대가리 하나는 그 모든 역사와 공덕의 무게보다 더 혹독하게 무거웠던가. 저울대
위에 걸린 남원과 찬규의 대가리는 좌청룡, 우백호같이 맞먹지도 못했어. 모가지 떨어진
찬규 대가리가 얹힌 저울판이 아래로 툭 꺼지면서, 남원 놓인 저울판은 공중으로 솟구쳐
치올라 홀깍 뒤집혀 버렸으니. 찬규는 살아서 저를 바꾸 고 싶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죽어서 남원을 바꿔 버린 것이지. 참 엄청난 일이야.
그러나 이 찬규의 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남원부 거주자로서 남녀노소 상하귀천 그 누구를 막론하고, 찬규의 이름을 알고 있거
나, 찬규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일이 있는 바, 찬규와 지면이 있는 사람은 가차없
이 모조리 목을 치라. 는 영이 일신현 강등의 파발마를 뒤쫓아 조정에서 내려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 남원은 단칼에 목을 치는 피비린내와 튀는 피, 단말마의 비명과 지질리는
공포로 살려 달라. 울부짖는 처절함이 너무나도 참혹 낭자하여 온 고을 곡곡이 꼭 아비
지옥, 규환 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물론 이통에 억울하게 희생된 부민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만, 억울하기로 들면 찬규
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게다. 얼마나 처절한 원한이 맺히게 억울했으면 그 죽은 이름이 산
사람 목을 그토록이나 미친 듯이 치게 했으리. 무서운 일이다. 참으로 이런 일은 무서워.
강호는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면서
무서운 일이다.
는 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이 불의의 변이 일어난 것은 영조 16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로부터 이백 년의 세월이 흐른 음력 이월 중순이다.
지난날 찬규의 변에 대해서 밤이 늦도록 함께 이야기하던 강모와 강태는 지금 이곳에
없었으나, 강호는 웬일인지 자꾸만 아까부터 그 이야기만은 되풀이 되풀이 생각하고 있었
다. 아니, 그것은 아까부터가 아니었다. 어젯밤 그가 매안에 당도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모처럼 돌아온 고향, 매안의 온 마을에 감도는 살기와 어둡고 음산한 피 냄새, 그리고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머금은 불길함의 검은 어깨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강호는 찬규
의 흐느낌이 귀곡으로 울리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그 울음끝에 걸린 소름이 그의 정수를 송곳같이 꿰뚫었다.
이백 년 전에 이미 죽어 효수당했던 찬규의 목이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서 매안에 숨어
울고 있다니.
푸른 힘줄이 돋은 그 울음의 멍든 옹이에 춘복이가 감긴다.
그러더니 찬규와 춘복이는 서로 엉크러들면서 한 몸에 한 얼굴로 겹쳐져 버린다. 그리
고 남원도호부와 매안이 저절로 일목요연하게 비유되며 그들의 반대쪽으로 떠올랐다.
찬규와 남원, 춘복이와 매안, 찬규와 춘복이, 남원과 매안.
그 대비 환영들은 도저히 떼쳐내 버릴 수 없는 주문이나 무슨 예감처럼 강호에게로 파
고들었다.
춘복이 하나 때문에 어쩌면 매안을 송두리째 잃을는지도 모른다. 인근에 떨치던 이 위
세도, 대대로 지켜오던 명예도, 그리고 그런 날은 뜻밖에도 그다지 멀지 않은 장래에 닥
쳐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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