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나 나주같이 관찰사 없는 주에는 목사가 수령으로 갔다. 목사는 정삼품 관원인데 각
고을에서는 으뜸 벼슬이지. 전국 팔도에 스무명을 두었느니. 전라도에 목사는 네 명이 있
었다.
그 다음 단계는 부였다.
부에는 부사가 부임을 해서 다스렸는데, 남원같이 대도호부가 있는 곳에는 정삼품관이
왔고 일반 도호부에는 종삼품이 임명됐다. 그래서 남원의 관장을 남원부사 그러지 않느
냐.
끝으로 중앙에서 임명하는 지방장관으로서는 가장 낮은 등급이었던 현감이 부임하여 다
스리던 곳이 현이었다.
이 현에도 두 가지가 있어, 작은 소현에는 종육품 현감을 두었고, 그보다 좀 큰 대현에
는 종오품 현령을 두었니라.
어쨌든 행정단위로 가장 작고 하위 말단이었던 능성 현이 가장 크고 높은 능주로 된
것은 오로지 정암 선생 때문이었다.
고 이헌의는 말했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정암 조광조.
그는 일찍이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주례의 육경을 연구하여 성리학에 통달했
던 문경공 김굉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근공정진 성리학 연구에 힘써, 스승의 스승
이었던 정필재 문충공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는데.
왕의 지극한 신임을 받은 그는, 이상적이고 도학적인 유교정치를 실현하고자 삼십대 신
진사류 소장학자들과 더불어, 종래로부터 내려오던 여러 관습의 악폐와 모순을 주자학에
의거, 과감히 뜯어고치는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진정으로 이 땅에 참된 도를 세워 하,
은, 주 삼 대 와 같은 지치의 왕도정치를 통한 군자의 세상을 이루어 보고자 하였으나.
진작부터 뿌리 깊은 세력을 가지고 있던 보수 훈구파의 음해 적대와 강력한 반발을 사
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특히나 조정 공신의 사분지 삼을 차지하고 있던 훈구 대신들 일
흔여섯 명의 공신호를 조광조 일파가 박탈하자, 이에 놀란 남곤, 심정 같은 훈구 대신들
은 조광조를 모략 중상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더욱이 조광조가 이론에만 치우쳤던 지난날의 과거제도 대신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관
리를 뽑고자, 새로이 현량과를 실시하여 관리를 채용한 것에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
과거에 선발된 백이십 명이 거의 모두 조광조 일파의 신진사류였던 탓이다.
그때 시정을 비판하고 모든 관리들을 규찰하여 억울한 것을 바로잡아 주는 감찰 관청
사헌부의 최고 관직으로, 대헌 이라고도 하는 정이품 대사헌에 올랐던 조광조는, 대사헌
이 된 지 불과 이삼 년 안에 벌써 나라의 기풍을 쇄신하여, 벼슬아치들에게서 청탁과 뇌
물을 씻어내고, 백성을 오직 덕으로 다스리자, 선비들은 그를 선생으로 존중하고 백성들
은 다시없는 상전으로 우러러 받들었다.
그러니 자연 따르는 무리가 반상간에 구름을 이루었다.
이러한 명망과 정황을 남곤, 심정이 모를 리가 있으랴.
그들은 딸이 희빈으로 중종을 모시고 있는 홍경주와 함께 왕에게 날이면 날마다 궤계를
부려 참소하였다.
조광조 일당이 간사스러운 속임수로 정치를 어지럽게 하니 처벌하소서. 종묘 사직이 위
태롭습니다.
그들은 또한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등에 업고 괴이하
게 일을 꾸미어 왕에게
조광조가 공신들을 제거하고 임금이 되려 하옵니다.
하는 모함을 하도록 했다. 아비 홍경주의 사주를 받아 일을 감쪽같이 도모한 희빈 홍씨
는, 아무도 모르는 깊은 밤에 경복궁 함원전 뒤뜰 배나무 잎사귀에다 꿀물 섞은 배즙으로
주초위왕.
이라 써 놓았다.
하늘은 무심하여 벌레한테 조광조를 내주고 말았던가.
단맛을 좇는 벌레들은 꿀 묻은 글자 생긴 모양대로 잎사귀를 파먹었다.
희빈 홍씨는 그 잎사귀를 쟁반에 따서 받쳐들고 대전으로 나아가 이것이 바로 조씨가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흉악 불길한 예언이며 참람한 변괴의 징조이올습니다.
하고 짐짓 두려움에 떨며 아뢰었다.
주와 초를 이으면 조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중종은 실로 기이한 현상인지라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조광조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훈구파들의 끈덕진 무고가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는 거의 위협에 가까운 논조로 왕을 몰아세우자, 그간 조광조의 도
학적인 언행에 은근히 지쳐서 염증을 느껴오던 왕이 마침내 그를 투옥하여. 결국 엄청난
기묘사화를 일으키고야 말았으니. 훈구파들의 강경한 주장으로 조광조 일파에게는 모조리
사약을 내리거나 배소에 가시나무고 울타리를 쳐 위리안치를 시키고, 절해고도 외딴섬에
절도부처 귀양을 보내었다.
이때가 중종 14년.
정암은 억울하게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뒤 인종 지나 명종 지나 실로 오십 년 만인 선
조 초에야 드디어 신원이 되어,사훙에나마 영의정에 추증되고는, 기묘명현으로 문묘에 배
향되었는데. 시호는 문정공이시다.
헌데 능주와는 무슨 연관이 있길래요? 그 어른이 귀양을 간 곳이 바로 능성현이었다. 거
기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지. 그처럼 크고 훌륭한 이의 고초와 죽음을 받아 안은 고장이
라, 훗날 정암 선생 신원 후에 고을도 함께 승격이 된 것이다.
아아, 그러합니까. 그때, 사사되실 때, 선생은 몇 살이셨을까요? 서른여덟이었느니라.
강호는 묵묵히 그 나이에서 제 나이를 헤아려 빼 보았다. 아직 스무살 청년이었던 강호한
테도 서른여덟은 너무나 젊고 아깝게 여겨졌던것이다. 비록 필부라 할지라도 죽기에는 이
른 나이 아닌가. 하물며.
(뜻을 가진 사람이 살기에 세상은 알맞지 않은 곳일까. 뜻이 가는 길은 평탄치 못하
다.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은 무오사화 때 김종직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사사되고, 그의 스승 김종직은 무오사화 때 조의제문으로 부관참시를 당하여 두 번 죽
었다. 그리고 조광조는 기묘사화에 사약을 받았다. 이렇게 사제 삼 대가 모조리 죽어 참
화를 당하고도 그뜻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여,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오지 않았다. 물론
세월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들의 원통한 죽음은 신원이 되었다. 허나, 명예가 회복되었다
고 해서 그들의 꿈도 회복되었을까. 비록 죽은 이의 이름은 다시 찾았으나, 주인의 몸을
잃은 꿈은, 피 토하고 고꾸라진 그 꿈은, 중음신이 도어 역사의 중천을 떠다니고 있는지
도 모르지. 서른여덟, 조광조. 정말 그때부터는 경륜을 다하여 한번 대장부의 뜻을 포부
대로 펴 볼 만했을 터인데. 때를 얻지 못하고 버리는 목숨의 사무침이여. 뜻의 불우함이
여.)
강호는 흰옷 입은 조광조의 마지막 모습이 사약 사발과 더불어 떠오르는 형영에 이상한
그리움과 흠모로 가슴이 미어졌다.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세상을 바꾸어 이 땅 위에 새롭게 세워 보고자 하는 꿈
을, 그 순간 강호는 그렇게 그리워하며 흠모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형체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은 간절하였다.
(아름다웠으리라.)
구체적으로 누구와 닮았다고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그는, 살빛이 희고 맑았을 조광조의
옥골 선풍 얼굴과 단아 고결한 풍채, 그리고 혁신의 꿈에 펄럭이던 도포와 넉넉한 소맷자
락, 끌어당겨 서책을 읽고 글씨를 썼을 서안이며, 그의 음성까지도, 혼자서 역력히 그리
어 몸으로 느끼며 체감하려 하였다.
(그 아름다운 이가 숨을 거두어 마지막 몸을 의탁한 곳이라면, 마땅히 그 고을은 승격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옳은 일이다.)
불빛이 까우러지는 오두막이 저만큼 보이는 거멍굴 근심바우 밑에서 강호는 문득 발걸
음을 멈추며 골똘히 그 생각을 잇고 있었다. 그리고 홀로 고개를 깊이 주억였다. 그러더
니 이내 좌우로 젖는다.
(어리석다. 한 나라를 이끌어 올릴 지렛대를 그 하찮은 꿀 몇 점으로 징표 삼아 부러뜨
려 죽이다니. 참으로 군자의 취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간특한 소인배 신하와 후궁들에게 어이없이 휘둘린 그날의 임금을 한탄스럽게 생
각하였다.
임금의 어둠은 온 나라의 운명을 어둡게 하는 법.
주초위왕 글자를 촘촘히 갉아먹어 납작없이 귀신의 희롱을 나타낸 배나무 잎사귀를 뚝
따다가 임금 앞에 들이밀어 보여 주면서
조씨가 장차 왕이 될 것이라 합니다.
했다 한들, 어찌 한 나라의 군주로서 그런 어린애 장난 같은 잔꾀에 넘어가 충격을 받고,
일세에 다시 나기 어려운 학자요, 어진 신하를 의심하여, 결국은 죽이기까지 할 수가 있
단 말인가.
(허나 사람을 얻고 잃는 것도 다 국운이리라.)
한 개인의 운수가 곧 국운으로 이어지는 인물이란, 길흉간에, 저 혼자의 힘만으로 나고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호는 생각해 본다.
그리고는
(어떤 것이 누구의 집인지 내가 알 수가 있나.)
어둠에 익은 눈으로 거멍굴 오두막들의 곰삭은 버섯 지붕 짚시울을 더듬어 본다. 그러
나 한번도 직접 와 본 일이 없는 천민촌에 발길도 낯선 고샅을 어떻게 디뎌서, 누구에게
로 먼저 가야 할지, 그는 잠시 막막하였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8권 (9) (1) | 2025.01.31 |
---|---|
혼불 8권 (8) (0) | 2025.01.28 |
혼불 8권 (6) (0) | 2025.01.25 |
혼불 8권 (5) (0) | 2025.01.23 |
혼불 8권 (4) (0) | 2025.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