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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8권 (8)

카지모도 2025. 1. 28.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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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는 신분을 탓하지 않고 혜화문 밖 갖바치와 여러 해 동안 상종하며 교분을

나누었는데, 갖바치가 조정의 재상을 찾아갈 수는 꿈에도 없는지라. 늘 조대헌이 밤이면

미복을 하고 갖바치를 찾아가서 오래도록 마주앉아 이야기하다 가곤 하였다 한다. 그 갖

바치가 예사 사람이 아니라 문식이 놀랍고, 언행 거동이 반듯하여 사대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며, 경서와 사서, 제자류, 시문집에 밝고 식견이 높은데다가, 앞날을 예견하는

요량이 범상치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놀랍게도 그때 당시 이조판서였던 이장곤 또한 그

갖바치를

나의 선생.

이라고 존중하며 미편을 하고 찾아 다녔다지만.

지금 강호가 그 흉내를 내고자 여기 바가지 속 같은 천민촌 거멍굴 어둠 속에 서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누구여?

어둠 저쪽에서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놀란 듯 경계하는 듯한 음성이 불쑥 튀어나온다.

나이 든 아낙의 목소리다. 강호는 순간 그 기척이 반갑다. 그래서 얼른 그 소리난 쪽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그러나 소리 임자는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쪽이 낯선가 보다.

크흠.

강호가 적의 없는 마른기침을 하며 상대방 마음을 누구리고는 두벅 두벅 몇 발짝을 걷

자, 아낙도 사람 오는 것 안다는 시늉으로 공연히 부스럭부스럭 움직이는가 싶더니 누구

대요?

다시 묻는다. 아낙은 공배네였다. 평소 같으면 조심성 많은 그네가 그럴 리 있었을까

만, 지금은 막 농막에서 옹구네한테 됩대고깔로 호되게 당하고 오는 길이라, 봅시 분이

받쳐 머리 속이 후끈거리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거기다가 천만 뜻밖에도

강실이가 아이를 뱄다.

는 날벼락 같은 말까지 겹쳐서, 난마처럼 뒤얽힌 정신에 얼른 쉽게 강호를 못 알아본 것

이다. 그가 거멍굴 사람이 아닌 것만은 직감으로 알아챘지만, 아직은 엊그제 사건에 놀란

속이 진정되지 않은 끝인지라. 이렇게 밤 깊은 시각에 낯선 사람 비치는 것이 왠지 두려

워, 그네는 지레 오그라진다. 그래서 강호가 코앞에 바싹 다가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

았다. 마치 독사 본 개구리처럼.

아이고, 서방님. 아니, 여그, 어쩐 일이싱기요잉?

드디어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본 공배네는 정말로 놀라서 황망히 두 손을 맞잡으며

굽신 허리를 꺾었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몸둘 바를 몰라하며 떠듬떠듬 겨우 그 말을 한다.

(아니, 참말로 이게 웬일이까잉. 매안이 어디고 거멍굴이 어디라고 사리반서방님이 몸

소 여까지 외겨어 긍게. 필시 무신 곡절이 있을 것인디 그거이 머이까. 만고에 없든 일을

어찌허시꼬. 우리가 매안으로 올라가도 차마 낯 딱 치키들고 마주뵙기 에러와서 고개를

땅에 박어 쉭이고 설설설 기어야는 서방님이, 이 아닌 밤중에 기별도 배행도 아무껏도 없

이, 생전 첨 오는 낯선 질을, 왜 시방 암행어사맹이로 살째기 저러고 오시능 거이냐고오.

긍게로. 일난 동네에.)

얼른 몰라봤더니 아는 얼굴이로구만.

강호가 먼저 운을 떼었다.

예에, 에. 지가 외나 몬야 알어뵈야는디 기양.

맞잡은 두 손을 비비는 공배네는, 묻지 못해 속을 알 수는 없었으나 우선 그가 다른 매

안 사람 아닌 사리반서방님인 것에 그래도 마음이 좀 놓인다. 그라면 결코 모진 일 하러

오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였다.

밤도 짚었는디 어찌... 여그... 외겼능교?

그럴 리가 있으랴는 투로 공배네가 강호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도대체

매안의 지체로 양반의 자제가 이 천민들 엎어져 사는 하촌에 발을 디뎌 들어선다는 것부

터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시궁창에 진솔버선 신은 발을 딛지 않

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그리고 도무지 매안의 양반들은 이곳에 직접 올 필요가

없었다. 부르지 않아도 으레 거멍굴 떨거지들은 눈곱 떼면 매안으로 내달아 올라갔고, 아

니어도 부르거나 시킬 일이 있으면 노복이나 머슴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니 장에만 가도 큰일나는 줄 아는 매안의 이씨 그 누구라도 이 거멍굴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은 아직 없었다. 하나도.

(아니다. 있다. 작은아씨. 아, 아, 아이코오, 어쩌꼬잉. 작은아씨가 여그 와 지시지

참,. 쥐도 새도 몰라얀다고 항아장시가 오금박등만 지가 외나 매안으 가서 나발 불었이

까? 작은아씨 여가 지신다고. 그래서 벌쎄 그리고 알려졌능가? 그렇게 참말로 암도 모리

게 사리반서방님이 와서 보시고는 도로 뫼시고 갈라고 혼자 외겼이까아?) 생각이 그에 미

치자, 이 마을에서 무슨 불길한 피투성이가 다시 될 일은 없을 것도 같 아져 안도가 되

었다. 적어도 강실이 일이라면 거멍굴 누구가 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 었다.

혼자서 한 짐작이지만 남도 아닌 족친이 몸소 와서 작은아씨를 모시고 간다면, 무사히

인도하는 셈이 되어 차라리 낫지 싶고, 무엇보다 옹구네 같은 더러운 년 집구석에 금지옥

엽 작은아씨 애기씨가 몸져 누워 계신다는 것이 애초에 말이 안되어. 얼른 빠져 나오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진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리듯이 강실이를 옹구네한테서 건져 내야만 하는 사람처

럼 갑자기 조급해진 공배네는 하마터먼

작은아씨 뫼시로 외겼능기요?

툼벙, 말을 떨어뜨리며 아는 척을 할 뻔하였다.

그러나 아차, 남의 눈칫밤으로 한평생 뼈가 굵어 등이 꼬부라지는 공배네가 펀뜻, 정신

을 차리고 꿀꺽, 말을 삼켜 버린다.

(아조 섶을 지고 불러 들라고 환장을 했등갑다, 내가. 어매, 나 조께바아. 이게 그렇게

쉬운 일잉가 어디이. 시방 옹구네 그 여펜네 말 대로라먼 작은아씨는 죽으먼 죽었제 인자

다시 매안으로는 못 가실 몸인디. 들키먼 차라리 맞어 죽고, 여그라도 무사히 숨어 지시

먼 목숨을 부지허실 거이라고 그년이 막 으름장 안 놓등게비? 아까막새. 나한테, 참말로

베락맞은 소리지만 몸 가지싱 거이 사실이라먼 어쨌든 아직은 나서먼 안되시겄잖응가 말

여. 아이고, 내 주댕이. 큰일날 뻔했다. 사참해라.)

공배네는 자기가 부리를 함부로 까불지 않은 것이 어떻게나 다행스러웠던지 후루루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거멍굴에 불이 많구나.

공배네는 쓸어 내리는 가슴 한 쪽이 아슬아슬 위태로워. 섶나무 뭉치가 여기저기 웅크

리고 있는 것만 같은 거멍굴 검은 지붕들을 훑어보며, 불깃이 부디 이제 더는 번지지 않

기를 저도 모르게 빌었다.

(아닝게 아니라 내가 아까는 온 정신이 아니였등게비다. 법도 갖꼬 세상 사는 매안이

가, 내외법도 엄중헌디 아무리 한집안간 이라지만 당혼 처자 작은아씨를 서방님이 오밤중

에 단식으로 와 뫼세갈 리가 있겄능가. 없제. 아조 친남매지간이나 된다먼 혹 또 몰라.

안서방네나 누구 심복을 대동헌 것도 아니고, 그러먼 대관절 여그를 왜 오겼이까잉.) 궁

리에 몰골한 속은 답답했지만, 서방님이 무슨 말씀 하시기 전에 하민으로서 먼저 강 호

한테 자불자불 여쭐수도 없는 처지라. 공배네는 안절부절 못하는데, 강호가 드디어 무

겁게 입을 열었다.

춘복이는 어띠쯤 사는가?

이것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어찌 춘복이를 찾으싱기요?

의아한 낯색으로, 수그렸던 고개를 들어올리는 공배네 머리 속에 또 잡으로 왔능게비다.

라는 생각이 번개같이 스치며 그만 가슴 밑창이 퉁 꺼지는 듯하였다.

공배네는 지금 확실히 얼이 빠져 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좀 가 보려고 그러는데.

앞장서라는 말로 들은 그네는 다리가 후둘후둘 떨린다.

왜 그러시느냐고 물을 수도 없는 아랫것 공배네는 저 가는 걸음 놓는 곳이 밭둑인지 구

덩인지를 모르고 허둥거리는데, 어둠을 밟는 발아래 써그럭써그럭 언 흙이 부스러진다.

만동이 집은 또 어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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