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알아 두려는 것처럼 강호는 길라집이하는 공배네 뒤에 대고 묻는다. 공배네는 손
을 들어 조심스럽게 시꺼먼 동산 기슭을 가리킨다. 외짝 지게문이 불그룸한 불빛을 머금
고 있는 것이, 꼭 눈에 피 벌겋게 돋은 눈구녁을 뜨고 있는 것 같은 집이다.
그 집을 눈여겨 바라본 강호는 백정 택주가 사는 곳도 물었다.
만일에, 그가 이렇게 매안의 그 누구도 모르게 오밤중이 겨운 시각에 거멍굴로 찾아와
서성거리는 것을 어른들이 아신다면
네가 지금 무슨 조정암이 흉내를 내는 것이냐? 이런 당치않은 꼴을 보았나. 백정 택주
가 경사자집에 능통했다는 말 내 일찍이 못 들었는데 글공부허러 갔더냐? 동경 유학으로
는 모자라서? 네가 소위 매안이의 자식으로서 지금 온당한 자리에 서 있느냐? 철딱서니없
는 것. 옛어른 흉내, 아무나 내는 것 아니다.
하며, 크게 진노하여 꾸중하실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또한 다리가 성치 못할 일
이었다. 더욱이나 지금은 때가 때인 만큼 강호가 섣불리 거멍굴 행보를 하는 것이 미묘하
기 짝없는 정황 아닌가.
즈그들 사능 거이 머 집이랄 게 있당가요 어디. 시방 날이 깡깜해서 그렇제 버언헐 때
보먼 한누에 옹게옹게 옴싹 다 들와서, 누구네 집 찾고 불르고 헐 것도 없그만요. 박적
만배끼 안헝게요잉. 동네가. 다 뵈이고 다 보기지라우. 그런디 어두워농게 요렁 것도 질
이라고 요리 조리 더듬더듬 해지시요? 초행잉게. 즈그는 눈깜고도 댕기지만. 어쿠, 조심
허겨요,, 자빠지신디.
동네와 길 남루한 것이 제 탓이나 되는 양 못내 송구스러워하는 공배네 기색에, 강호는
가여운 마음이 들어 문득 습습해진다.
(상놈은 지게가 의관이고, 나이가 양반이라는데.)
지금껏 하던 대로 공배네한테 무심히 말을 놓던 것이 걸리며, 희 머리 뒤숭숭하게 잿빛
으로 섞어 쓴 그네의 나이를 짐작으로 헤아려 본다.
집은 어디요?
예?
느닷없는 존대말에 공배네가 잘못 들었는가 하고 겅겁결에 뒤를 돌아보며 반문한다. 놀
란 그네의 음성끝이 위집힌다.
어디 사시오?
아이고. 서방님. 왜 않든 일을 허싱기요잉?
황감을 지나쳐 당황한 공배네가 못 집을 것 집은 손을 털어내듯 실색을 하는데, 무망간
에 나무라는 어조가 튀어나온다.
(안 먹든 것 먹으면 관격이 나는 거인디, 내가 오늘 먼 일을 당해도 당헐라고 서방님
만났능게비다, 아매. 이게 웬일잉가 모르겄네에.)
공배네는 자꾸 뜻하지 않은 일에 부닥치자 울컥 두려운 마음조차 들었다. 그네는 그 마
음을 감추려고 가슴을 오그린다.
관격은 음식이 급하게 체하여 먹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보며, 급기야는 까무러쳐 정
신을 잃고 마는 위급한 병인데, 꼭 그 관격 걸린 사람처럼 공배네는 말문이 막혀 버린다.
입은 닫은 그네는 도망이라고 하듯이 끈걸음을 놓아 핑 농막으로 달아갔다.
강호는 묵묵히 그 뒤를 따라 걷는다.
육시 처참을 해도 분이 다 안 풀릴 투장을 하고는 덕석말이 체형을 당하여, 그 자리에
서 대가리 빠개져 죽어도 할 수 없고, 안 죽었으면 죽지 않은 것만 천만다행 감지덕지 해
야 하는 극죄인의 집에, 제 발로 먼저 족질이 찾아가고 있는 것을 이기채가 안다면, 그
진노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그것도 예사 사람이 아니라 문중의 어른인 문장 이헌의의 장손 된 자로서 이런 발칙한
놈. 위에서는 어른이 몰매 때려 살이 흩어지고, 아래서는 네놈이 도학자연 그것들한테
낯 내어서 인심 얻을 일 있더냐? 너 이놈, 거기, 그 수악헌 곳에 간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지금 네 문중과 종족을 능멸하기로 작정하였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천인 이 공노할
가문의 일로 어른이 책벌한 년놈을, 네까짓 것이 감히 무얼 알아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
고 쌍지팡이 짚고 나서서 이런 경거망동을 한단 말이냐. 너는 위신도 없고 체면도 없느
냐? 네가 내 한 일을 책망하고, 나한테 정면으로 맞서서, 내 면상을 후려쳐 깎고 밀어
젖히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게. 이런 방자하고 경우 없는 놈.
새파랗게 질리어 숨이 끊어지는 이기채의 밭은 노성이 금방 뇌천에 꽂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어 이헌의의 노엽고 근심시러운 얼굴이 떠오른다.
어두운 밤바람이 그 얼굴들을 씻는다.
춘복이의 농막 토방에 이르러 왠지 차마 얼른 문짝을 못 열고는 잠시 우춤주춤하던 공
배네가, 강호의 눈빛에 밀려 문고리를 잡았다.
나는 여그서 기양 가야능가 어쩌야능가. 무단히 서방님 허부도 안 듣고 따러 들으갔다
가 베락이나 맞으먼 어뜨케 히여?
방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강호를 뒤따르려다 멈칫한 공배네 눈에, 깜짝 놀라 우두두 일
어서는 옹구네가 비친다.
옹구네 손에는 여전히 그 망할 놈의 미영걸레가 들려져 있었다.
순간 공배네 오장이 홱 뒤틀린다.
피 터진 춘복이 낯바닥이고 몸뚱이고 모두 옹구네 차지여서, 미영걸레를 따로 들고 가
지 않는 한, 걸레 천신이 안되어서도 그 애간장 녹는 피 한 방울을 닦아 주지 못한 채,
오만 수모를 다 당해가며 멀거니 구경만 하고 밀려나 앉아 있던 아까 생각이 다시 치받친
것이다. 걸레 대신 치맛자락이라도 부욱 찢어서 여보란 듯이 닦아 주기나 하면 모르겠거
니와, 아니라면 그저 옹구네 하는 양이나 실컷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등신 시늉이 새삼
분통터진 공배네는, 앞뒤 가리는 것을 그만두고 신짝을 툭툭 벗는다.
다 떨어진 미영걸레가 무신 마팬가아? 어따 대고 휘휘 휘둘, 휘둘르기를. 옴짝꼼짝 못
허게 사람 손 딱 뭉꺼 놓고. 빌어먹을 년. 아조 걸레 권세가 대단허등만, 어디 사리반서
방님 앞에서는 어쩌능가 내가 좀 바야겄다. 지께잇 년이 버티고 앉었는 자리에 나라고 왜
못 앉었겄어? 들으가자, 들으가. 오기가 나서도, 궁금해서도, 걱젱이 되야서도 내가 기양
은 못 가제.
옹구네는 들이닥치는 기세인 공배네한테는 아는 척도 안하고 강호를 향해서 창황한 기
색을 감추지 못하며, 명색이 아랫목인 곳을 두 손으로 내드리듯 앉으시라 가리킨다.
서방님이 어쩐 일이싱교?
강호는 아무 말 없이 춘복이 어깨맡에 앉으며 방인을 둘러본다.
네 귀퉁이가 헐어서 모서리조차 없는 바람벽에 묵은 곰팡이가 그림자처럼 번진 방은,
방이라기보다 을씬녀스러운 헛간만 같았다. 하지만 이곳을 하늘 아래 유일한 거처로 삼고
살아온 춘복이가, 찢긴 사지를 참혹하게 부리고 누워 있는 이 방바닥은, 어쩌면 이 세상
에서 가장 확실하게 그의 등을 받쳐 주는 한 평 면적이며 구체일는지도 몰랐다. 그가 등
을 기대고 부빌 수 있는 것이란, 천지에 오직 저 누추한 흙벽 한 점과 부들자리 방바닥
한 닢뿐인데, 어떻게 세상이 따듯하기를 바랄 수 있으랴.
(그는 추울 수밖에 없다. 추우면 얼고 얼면 웅크러든다. 웅크러들면 뭉치고 뭉치면 단
단해진다. 단단해진 것은 무엇도 품지 못한다. 돌덩어리처럼. 품는 대신 돌덩어리는 다른
것에 부딪치면 그것을 깨고 만다. 이 돌덩어리에 부딪쳤을 때 깨지지 않는 것은 이보다
더 단단한 강철이나, 목화솜 무명천같이 푸근하고 부드러운 것일 게다.
허나 만일 강철이라면 이 돌덩어리가 끊임없이 제 몸을 내던져 부딪쳐 울 때, 깨지지는
않을는지 모르나 시끄러워 평화를 잃고, 결국에는 우글쭈글 일그러지고 상처도 입을 것이
다. 물론 돌덩어리도 부서지겠지만. 그런데 만일 목화솜 무명천이라면 이 돌을 품어 병아
리로 깨어나게 할 수는 없을는지 모르나 둘다 상하지 않고 대립도 안할 터인데.) 강호는
오랜 세월 거친 일로 낫에 찍히고 추위에 터지고 칼에 베인 흠집과 공이투성이 인 춘복
이의 손을 가만히 잡는다.
부옇게나마 정신이 들어온 춘복이는 찢어진 눈퉁이가 부어올라, 선지 핏물이 아직도 동
자에 고여 있는 모양인지 눈 속이 무겁고 탑탑하여 좀 껌벅거려 보고라도 싶었지만 마음
대로 안된다.
눈이 떠지지를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강호를 볼 수가 없었다.
운신을 제대로 못하니 잡힌 손을 마주잡을 수도 ㅃ낼 수도 없다. 독오른 두꺼비 배야지
만큼 시퍼렇게 멍들어 부푼 손을 영문도 모르는 채 잡히고 있는 춘복이는, 이 사람이 누
구일까, 감지해 보려 한다. 아까 방문이 열리고 누가 들어오자 옹구네가 우두두. 놀라 일
어서면서
서방님이 어쩐 일이싱교?
라고만 했지 무슨 서방님이라고 택호를 안 불렀으니, 눈감은 춘복이로서는 짚일 리가 없
는 것이다.
공배네가 따라 들어온 것은 기척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몹시 어려운 지체가 거동하여
온 것이 분명한지, 옹구네도 공배네도 단 한 마디 입을 안 뗀다. 공배네는 몰라도 옹구네
가 어지간한 경우라면 이렇게까지 숨죽이고 있지는 않을 것인데, 이상하다. 누구일까. 묻
고 싶지만 두 입술이 바위덩어리를 맞물고 있는 것처럼 부풀고 무거워 벌리지 못한다.
사람의 몸뗑이, 이거 참 아무껏도 아니구나. 그께잇 거 몇 대 조께 투드러 맞었다고,
눈 깜작 새 이 지경으로 벵신이 되야 부네, 참. 이러고 있을 때 누가 몽뎅이 하나 들고
들와서 패 쥑이먼 죽제 머 손구락 한나 깐닥도 못허겄다. 모가지를 눌러 쥑여도 당해야지
벨 수 없겄고. 잘구에다 담어서 쩌어그 어따 갖다 내부러도 머 어째 볼 방도가 없겄어.
그는 등골이 써늘해지면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참말로 나는 내 몸뗑이 딱 한나뿐이구나.
하는 것이 절감되었던 것이다.
만일에 눈먼 봉사라도 저를 낳아 준 어매 아배가 옆에 있더든지, 아니면 살갑고 미더운
각시가 있다든지, 혹은 제 속으로 낳은 자식이 있다든지 하면 심정이 이러지는 않았으리라.
살과 피를 같이 나눈 혈육 한 점 없는 인생이, 성씨도 없고, 성씨가 없으니 비렁박적을
차고서라도 고고샅샅 삼천리 끝까지 헤매어 찾아가 볼 만한 일가 친척 단 한 명도 없는
춘복이. 나.
라는 생각이 뼈에 미친다.
그래서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었는데, 그래서 무서운 생각이 지금은 확 끼쳐든 것이
다. 골수가 시리었다.
(그런디... 작은아씨가, 애기를 뱄다. 내 자식을 뱄다... 아아.) 그리고 연유를 아직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작은아씨가 지금 바로 내 가까이. 거멍굴에 와 있다. 옹구네 집
에 와 누워 있다.
춘복이는 가슴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 무엇 한 가지도 차마 믿어지지 않아서 내 발로 걸어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야겠는데, 그리 안되어 그는 숨만 벅차게 몰아 쉰다.
심장이 툭탁툭탁 뒤는 소리가 울리면서, 잡은 손이 푸들푸들 떨리는 것을 보고 강호가
희색으로 묻는다.
정신이 좀 드는가?
하는 순간, 춘복이는 아찔하였다.
(대실서방님이싱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춘복이 귀에는 강호의 그 음성이 꼭 강모 소리처럼 들렸던 것이
다. 뛰던 심장이 멎는가 싶었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불 8권 (11) (0) | 2025.02.02 |
---|---|
혼불 8권 (10) (0) | 2025.02.01 |
혼불 8권 (8) (0) | 2025.01.28 |
혼불 8권 (7) (0) | 2025.01.27 |
혼불 8권 (6) (0) | 2025.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