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 소식을 모르는 이 답답하여라
"얼핏 보아, 사천왕이 사실 자애롭다거나 예쁜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
니잖습니까? 무서우면 무서웠지. 자비의 불문에 수호신 모습이라고 보기에
는 너무나 거칠고 우악스러워서, 보는 사람 마음에 신심이 우러나게 하는
대신 두려워 멀리하게 해 버리기 쉽지요."
강호가 도환을 바라보며 말한다.
초파일을 맞이하는 범련사의 분주한 천왕문에 걸음이 머문 강호와 도환은,
아까 선 그 자리에서 좀체로 움직이지 못한다. 강호는 지금껏 모르고 있던
사물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에 사로잡히고, 도환은 옆사람도 짐작할 수 없
는 환희심에 깊이 잠긴 것 같았다.
도환은 혼자서 미소 짓는다.
그는 강호가 지금 막 건네는 말의 속뜻을 미리 짚어 본 것이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소승이 이처럼 그 이상한 사천왕한테 흠빡 매혹
되었는지 궁금하십니까?"
"궁금하다기보다, 저도 한 수 배우고 싶은 것이지요. 이런 소중한 보물이
그 동안 먼지 속에 버려져 있었다는 걸 저는 몰랐습니다."
가까이에서, 우리와 함께 오래오래 살아온 것인데도.
"모르다 알면 더 진미가 나지 않습니까? 횡재한 것도 같고."
"횡재라고요?"
"알아도 이미 소용없을 때 알게 되면 도둑맞은 것이나 같고."
"하아. 그렇겠습니다."
강호가 도환의 말에 감념 어린 탄사를 나지막이 터뜨린다.
"대웅전에 본존불이 계실 적에야 으레 의당 언제라도, 언제까지라도, 무정
물처럼 붙박이어 거기 그렇게 계시는 줄로만 알았지. 어느 누가 이처럼, 더
러운 동아줄에 칭칭 묶여서 도라꾸에 실린 채, 왜놈들 손아귀에 끌려가는
치욕을 당하시리라는 걸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도환이 침중하게 합장한다.
"그놈들이 어디 절집에 부처님만 그렇게 빼앗아 갔습니까? 조선의 온 백성
집집마다 숟가락 젓가락 밥그릇까지 다 모조리."
이미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공출이어서 강호는 제 말끝을 삼킨다.
"그것은 그래도, 눈에 보이는 것들이지요. 보이는 물질은 잃으면 잃은 줄을
압니다. 허지만, 보이지 않는 정신이나 마음은 빼앗겨도 빼앗긴 줄을 모르
니. 찾을 길 또한 망연한 것입니다."
부처없이 텅 빈 법당을 잠시 머리 속에 그리는 것인가, 도환은 말을 하다
말고 묵묵히 대웅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불가에서는 스님들이 사람의 머리카락을 일러
"번뇌초."
라 한다는데, 혹 다른 말로는
"무명초."
라고도 한다 했다.
번뇌의 풀, 그리고 무명의 풀.
자라나 쓸데없는 번뇌와 어둠을 더부룩히 기르고 가꾸는 것이 저 속세의
가련한 중생들 관습이라면, 스님들은 맨 먼저 이것들을 결연히 잘라 내고
깎아 내 없애 버리는 것이 할 일이다. 삭발은 삼엄하다.
삭도로 밀어서 명경같이 말갛게 매끄러운 도환의 푸른 머리통너머로 연초
록 물이 드는 범련사 산록과 도량에는, 저마다 이름의 꼬리를 단 연등들이
흡사 아련한 풍경 소리와 더불어 노니는 듯, 미풍을 받으며 흔들린다.
시절이 좋았더라면, 저러한 정경들이 그 얼마나 정취로웠으리.
절 복판 중앙의 한가운데 모시어져 신앙의 중심이 되는 부처, 주불로서, 으
뜸가는 부처님을 가리킬 때, 그를 '본존'이라고 한다. 즉 '석가모니불'을 달
리 그렇게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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