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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권 (16)

카지모도 2025. 4. 23.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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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존마저 속수무책으로 강탈당하여 버린 범련사 절이언만, 연등과 풍경

은 지난날 초파일에 그러했듯이 오늘도 여전히 공중에 매달린채, 불심의

언저리를 헤고 있어서. 보는 이 마음은 더욱 유감하였다.

도환을 따라 고개를 돌리었던 강호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사천왕 존위들

을 하나하나 어루어 더듬어 본다.

청동에 도금한 부처님을 공출로 어이없이 빼앗겨 버린 절의 대문에, 이와

같이 오채 찬란하고 우람한 사천왕을 중창하여 세우는 불사는, 누구를 위

하여, 무엇을 지키려고 일으킨 것일까.

"호법, 호국이 그 본뜻입니다. 첫째로, 부처님의 진리법을 받들어 사바세계

의 온갖 사악한 것들로부터 거룩하고 신성한 것을 보호하고 둘째로, 나라

를 지켜서, 쳐들어오는 침략자를 일격에 무찌르고 국토를 수호하는 것이

사천왕의 임무입니다. 이 사천왕 불사에 참여한 신도들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몸소 사천왕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국토를 지키고

싶었는지도."

"그 '나라'는 곧 불국토를 가리키겠지요?"

"물론. 허나 불국토는 저 먼 피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육신이 태어

나서 몸담아 살고 있는 내 발밑의 땅덩이를 잘 지켜야만 거기에 불국토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리의 나라를 지키는 사천왕의 엄청난 힘을 빌려 그 위력으로, 눈물나는

제 나라 제 국토를 지키고 싶은 사람들. 그들의 간절한 염원.

"사천왕은 삼국시대 신라 이래 고려와 조선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 모셔

진 것이든, 갑옷을 입은 장수, 무장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몹시도 험상궂고 무서운 분노상이다.

툭 불거져 튀어나온 두 눈을 화등잔같이 부릅뜨고, 시커멓게 솟구친 눈썹

을 잔뜩 치켜올린데다, 새빨간 입을 따악 벌린 채, 호령 포효하며 손에는

저마다 갖가지 무시무시한 무기와 지물들을 움켜쥔 맹장의 기괴한 형상.

그것만으로도 이미 사람들한테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 족한데, 체구 또한

엄청나게 커서, 구 척 장신 십 척 장신, 어지간한 사람 키의 두 배는 물론

이고 세 배가 넘을 것 같은 사천왕의 다리통 하나만 해도 굵은 기둥처럼

육중하고 퉁실하여, 거기 한번 밟히면 창자가 흩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 거창한 발로는 악귀들을 질끈 밟고 있었으니, 보기만 해도 짓눌

린 것 같아서 비명이 터지려고 하지 않는가.

"사천왕은 본디 인도의 고대종교에서 받들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부처님

께 귀의하여 부처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부대

중을 보호해 주니, 민간에서는 온갖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사천

왕을 섬기는 신앙이 생겨나서, 이 존위들을 삿된 기운 물리치는 부적처럼

받들기도 합니다."

일본의 불교에는, 사천왕을 특히 크게 모시는 종파도 있지요.

"이와 같은 사천왕은 불교의 무궁한 하늘 가운데, 인간계에 가장 가까운,

욕계육천 여섯 하늘 중에서, 제일계인 사천왕천의 주인이지요."

"가장 가깝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가요?"

"인간과 소통이 가능한 하늘, 인간을 닮은 하늘, 인간이 죽어서 천계로 간

다 했을 때 만나는, 첫 번째 하늘이란 말입니다."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각각 그의 권속들을 거느리고, 세상의 동, 남, 서, 북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은, 그 부하 권속들과 함께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

면서, 인간살이 세간의 선악을 항상 빠짐없이 살핀다고 하였다.

"여기서 보고 들은 것을 매달 초여드렛날에는 사천왕의 심부름꾼 사자들

이, 열나흗날에는 태자가, 보름날에는 사천왕이 몸소, 제석천께 반드시 보

고를 한답니다."

"제석천이라면...?"

"욕계육천 가운데 두 번째 하늘인 도리천의 임금이시지요. 사천왕은 계보

로 보자면 제석천의 휘하 권속이거든요."

"아하, 그러니까 사천왕보다는 도리천이 하나 더 높은 곳에 있는 하늘이구

만요... 하지만 도리천은 또 무엇인지, 문외한으로서는 정말 모를 말씀 뿐입

니다."

"도리천은 세계의 중심에 드높이 솟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하늘입니다.

그 하늘 한가운데는 제석천이 사시는 선견성이 있으며, 그 아래 성을 에워

싼 동, 남, 서, 북 사방에는 각기 여덟 하늘씩이 있어서, 사팔은 삼십이천에

다가 제석천 계시는 곳을 더하여 도합 삼십삼천이 되는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불교의 하늘은 무궁하기도 합니다."

"사천왕천 위에는 도리천, 도리천 위에는 셋째 하늘 야마천, 그 너머는 넷

째 하늘인 도솔천이요, 그 다음은 다섯째 하늘 낙변화천이고, 여섯째 하늘

은 타화자재천..."

"하늘이라면 그저 푸르고 검은 것으로만 알았더니."

강호의 말에 도환이 소리 없이 웃는다.

"그런데 사천왕의 얼굴이 저토록 험상궂고 무서운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본디 귀신들의 대왕이었던 탓인가.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저 흉악하게만

보일 수도 있을텐데."

"거기에는 아마 여러 가지 뜻이 있을 겝니다. 용맹과 위엄을 극대화 한 면

도 있을 것이고, 인간의 심성 속에 깊숙이 숨어 있는 죄의식을 불러일으켜

각성하게 하려는 면도 있을 것이고."

니이이, 니이이잉.

어디서 날아든 것일까, 까맣고 허리 잘록한 나나니벌 한 마리가, 봄날에 겨

운 몸짓으로 나른하게 한 바퀴 천왕문 안을 돌더니, 강호의 귀밑을 스치며

사천왕이 들고 있는 비파에 가 살풋 앉는다.

딩, 도도옹.

착각이었겠지만, 순간 강호는 그 벌이 날아가 앉은 비파줄이 댕그르르으,

울리는 것만 같은 생생한 느낌을 받고 놀란다.

"아니, 스님. 사천왕이 비파를? 이건 뜻밖인데요."

"무기가 아니라 악기라서요?"

"아, 지금까지는 정말 무심히 보았습니다."

"이 존위는 북방다문천왕이십니다."

강호는 고개를 들고 사천왕 가운데 한 분을 올려다본다.

그는 천왕문으로 들어서는 강호의 오른손 편 안쪽에 봉안되어 있었다. 네

위 가운데 그가 먼저 눈에 뜨인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비파때문이었을

것이다.

"헌데 어찌 칼이 아니라 비파를 들고 계십니까."

놀라서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모으는 강호에게 도환은 대답 대신 한 마

디를 던진다.

"글쎄요. 이 비파로 한번 화두를 삼아 보시지요."

나나니벌이 비파줄에 날개를 비비며 노는 북방천왕전에도 연등이 드리워져

있다. 정교한 솜씨를 다하여 곱게 물들인 한지를 접어서, 실금까지 조롬조

롬 잡은 꽃잎이 비늘인 양 낱낱이 층을 이루며 박히어, 동그랗고 소담스러

운 숭어리로 피어오른 연꽃 등은 진분홍, 연분홍, 병아리색, 선연도 하다.

아직은 초파일에 못 미처 불을 켜지 않은 빈 등이었지만, 어디 사는 누구

라고 적은 이름표가 꽁지에 매달려 미리부터 소원을 빌고 있는 천왕전. 그

연등 뒤에서 북방천왕은 비파를 탄다.

단청 물린 오색구름, 연화머리초, 천장을 찌르도록 솟구친 키.

높고 큰 천왕은 태산 같은 몸을 장중하게 앉히고 비파를 끌어안았다.

약간 벌리고 앉은 다리 왼쪽은 비스듬히 들어올린 채, 오른쪽은 편안하게

바로 내린 그의 두 무릎에는 행전 같은 소삼이 둘리어져 있었다. 그 녹옥

색 소삼을 무릎 밑에 고정시켜 묶은 무릎끈은 산딸기빛 다홍색인데 댕기처

럼 앙징스러운 나비 고를 맺어 놓아서. 진흙을 빚어 만든 것이라고 믿어지

지가 않는다. 뿐 아니라 소삼도 갓 지은 진솔을 입힌 듯 옷주름이 역력하

다.

북방천왕은 이 무릎 위에 살짝 비파를 얹어, 왼손으로는 윗목 조임을 건

듯 쥐고, 오른손으로는 금방이라도 줄을 퉁길 것만 같이 손가락을 사현위

에 막 가져다 댄다.

두루미병처럼 가느다란 목이 자롬하니 흘러내리다가 몸통에 이르러서는 둥

그스름하고 풍만한 타원의 자태를 이루어 아우른 비파는, 아른아른 나뭇결

무늬를 그대로 드러내게 투명한 칠을 했는지라, 마치 물살이 음률에 밀려

비파에서 파문을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가락의 미묘한 음향이 저절로

제 몸에 어리어 얼비친 무늬를 그린 것 같기도 한데.

비파의 허리 한가운데, 잘록하고 납작한 실패를 가로놓은 듯 위아래양쪽으

로 반달 곡선을 그린, 은하수라 할까, 이승과 저승을 나누는 황천의 강이라

할까, 흰 물빛이 넘실넘실 경계를 긋고 있었다.

거기에 세로로 뚫린 울림통 구멍의 모양 또한 절묘하였으니, 흡사 초승달

과 그믐달이 서로 등을 지고 있는 것처럼, 혹은 어느 고운 손톱 깎아서 돌

려놓은 듯, 아니면 어여쁜 여인의 버들눈썹 그린 듯, 날씬하고도 전아하게

좌우 대칭 두 낱으로 뚫리어 있는 것이, 이미 속세의 악기 아닌 것을 깨닫

게 한다.

그리고 네 가닥 줄이 팽팽하게 당겨진 목에는 은행잎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고, 보라 남빛, 진홍색, 색색을 칠한 조임쇄가 비녀마냥 꽂혀 있었다.

그 조임 아래, 무엇을 나타내려 한 것일까.

비파의 몸통을 따라 흐르는 곡선의 옆구리에, 손가락만씩한 길이로 보라,

청록, 흰색, 검정, 노랑, 파랑의 손가락만씩 한 막대기를, 위에서부터 아래

쪽으로 칸칸 졸졸이 계단처럼 붙여 놓은 것이 보인다.

그것이 붙어 있는 위치로 보아 연주에 쓰일 성싶지는 않았으나, 너무도 선

명하고 어여쁜 무지개 계단이어서, 강호는 몸까지 앞으로 기울이며 골똘히

들여다본다.

저것은 어쩌면, 부처님의 미묘하신 법문이 북방천왕 손끝에서 가이없는 음

률로 바뀌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중생의 마음에 홀연 일어나는 희열의 신

비롭고도 찬연한 음계를 그려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음계는 세상의 모든 번뇌와 고난을 쓰다듬어 잠재우고, 어떠한 사악이

라도 감화 굴복시키어서, 지상의 예토 더러운 땅에 뒤엉키어 짓뭉개진 업

신을 한 단 한 단 이끌어 올려, 드디어는 저 천상에 이르게 하는 계단일는

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국토를 침략해 들어오는 적국의 적병들까지도 이 음률에 그만 마

음이 선도 순화되어 창칼을 내던지고 무릎을 꿇으며, 그 창칼은 봄눈처럼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 버리는 비파의 눈금.

아니라면 혹 저것들은 키를 재는 눈금인가?

마음의 키, 법과 도의 키, 생의 키, 오욕칠정의 욕계를 건너 다음 하늘로

넘어가는 키. 무궁한 진리의 키.

강호는 이 알 수 없는 색의 눈금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느결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비파의 음계를 짚으며, 사천왕에게

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귀에는 신묘하고도 청정하며, 그윽하고 화려한 음률이, 온몸에 사향처

럼 감돌아 울리는 것이 곧 들리는 듯하였다.

아, 강호는 낮은 탄성을 터뜨린다.

엄지와 가운데손가락으로 비파 현의 조임 부위를 가볍게 잡고, 다른 손가

락들은 그냥 무위로 펴서 법열에 맡긴 왼손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사람의 손 그대로인가.

다만 사람의 것보다는 훨씬 더 크고 통통하고 미더워, 역시 천왕의 것이 분

명하지만, 안쪽 손바닥과 손금, 그리고 손가락의 마디 금이 저대도록 실감

나게 섬세한 조형물로 만들어질 수가 있을까.

거기다가 놀라운 것은 그 손톱이었다.

딩, 도도옹, 둥.

비파줄을 울리는 오른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손들에 돋은 손톱은 가지런

히 깎아서 정말 눈물이 나리만큼 투명하고, 정갈하고, 엄숙하였다. 게으름

이나 방심이나 더러운 때가 티끌만치도 용납되지 않은 저 손톱들의 깨끗

함.

그것은 경이롭게까지 비쳤다.

"소승은 사천왕을 친견하고자 여러 절에도 다녀 보았습니다만, 가까이는

전라북도 완주 송광사, 고창 선운사, 구례 화엄사, 여천의 흥국사, 고흥의

능가사며 영광 불갑사, 그리고 경상도 땅으로 가서 북도의 금릉 직지사와

청도 적천사에, 경상남도 남해 용문사, 하동 쌍계사, 양산의 통도사, 에다가

충청도 보은의 법주사 등등, 모두 다 한결같이 무장한 복색에 웅장하고 위

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손톱들들은 단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짧

고 곱게 다듬었어요. 극사실로 묘사한 이 손톱들은 저한테 중요한 상징성

을 가지고, 깨치게 했습니다. 이 천왕이 청정한 분이라는 상징."

"그렇지요. 왜, 흉칙한 귀신이나 잡된 것들은 꼭 손톱부터 기다랗지 않습니

까? 짐승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혹은 삿되고 요염하게."

"정대하신 존위의 풍모를 저는 손톱에서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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