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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권 (14)

카지모도 2025. 4. 20.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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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가 고개를 갸웃하였다.

"전쟁의 난리통에 국법이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서 그랬습니까?"

"아니올시다."

"어떻게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고 백성은 죽어가며 강토가 피폐해지는 전란

을 계기로, 불교만은 새 기운을 얻을 수가 있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승병 때문이었습니다."

"승병?"

"그 가련할 정도로 수백 년 짓뭉개진 사찰의 승려들이 나라를 구하고자 결

연히 일어나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분골쇄신, 살신성인, 구국 승병활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전국적으로. 나라에서도 이 점을 가긍히 여겨 그 아름다

운 충성에 대한 대가를 주었지요. 전란에 부서진 사찰들을 중건하도록 허

락한 것은 물론이고, 불교를 억압할 때 파괴되고 황폐해진 폐찰이나 절터

까지도 복원 중창하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고맙고 장한 불교에 대한 포상이기도 하고, 그 복원될 절터들이 입지 좋은

산속에 있는지라 군사의 요충지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난세에 충신 나고, 부모가 병들어야 효자가 나듯이, 호되고도 모질게 양대

전란을 겪은 후에야 호국 호법의 염원이 간절해져서, 어느 때보다도 뜨겁

고 강렬한 소원으로, 나라와 백성들은 사천왕같이 힘세고 큰 존재가 자기

들을 지켜 주기 바랐던 것이다.

못된 외적은 단칼에 호령하여 물리치고, 나라와 불법은 소중하게 보호하여

주기를 염원하는 마음은 사찰마다 산더미처럼 물밀 듯이 밀려들어, 사천왕

들은 날마다 태산이 좌정을 한 모양으로 우람하고 용맹스럽게 우뚝우뚝 높

아졌다.

그리고 눈부시게 찬연한 오색 단청을 입었다.

"아까도 잠시 말씀은 드리다가 말았습니다만 임진왜란 이후에 사천왕이 세

워진 사찰은 대개 반드시 승군 승병이 일어났던 의병 집결소였어요. 그러

니 호국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임진왜란에 승군 대장으로 활약하시던 부휴선사와 그의 제자 벽암대사를

두고 사람들은 대불과 소불이라 지칭하였답니다. 이분들이 사천왕과 반드

시 관계가 있을 법한 것은, 묘하게도 제가 다녀 본 절들에 사천왕이 중건

된 해가 기록되어 있는 걸 살펴보니, 우연의 일치인가, 벽암대사가 조실로

계실 때 꼭 사천왕을 다시 세우셨더란 말입니다. 간 곳마다."

승군과 호국과 사천왕과 식민지의 승려.

그리고 동경 유학생.

사천왕이라면 우선 막연히나마 얼핏 스치며 힐끗 본 인상만으로도그 어떤

분노를 참지 못하여 잉걸처럼 이글거리는 눈방울이 툭 불거져 부릅뜬데다

붉은 입에 주먹코, 도무지 우리마을 주변의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아 기이

기괴한 얼굴, 거기다가 괴력을 발휘할 만큼 거대한 몸체, 후려칠 듯

위압적으로 쳐들어올린 팔과 악귀를 짓밝고 있는 발들이, 꿈에라도 정

다울 리 없어 보이지만.

강호는 만감이 착잡하게 뒤엉키는 눈으로 새삼스럽게 사천왕을 올려다본

다. 저 힘을 빌려서 지키고 싶었던 것들. 나라, 불법.

웬일인가. 눈에 눈물이 돈다.

지나치게 험상궂어 애기 같아 보일 만큼 순진해져 벌인 사천왕의 동, 남,

서, 북 얼굴과, 저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몸에 절하여 바친 낱낱의 염원들

은, 얼마나 간절한 눈물들이었을까.

더 무섭게, 더 크게, 더 강하게.

한 점 한 점 붙이고 새긴 그 눈물이 끝내는 저렇게 엄청난 과장을 넘어서

서 그만 무구에 이르러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무서워서 귀엽구나.

강호는 저도 모르게 스며드는 마음에 스스로 놀라 의아했다.

"아이고, 나, 저 얼룩덜룩 칠해 논 것만 없어도 덜 무섭겄등만, 왜 사천왕

은 저렇게 꼭 뿔겅 푸렁, 벨라도 막 요상시럽게 왼 몸뗑이에다 무당맹이로

칠갑을 허고 있당가잉? 어매에. 나는 그리로 안 들으갈라네이. 자네 혼자

가소. 나는 부처님 전으다 절 허고 불전 바치는 불제자라도, 그 사천왕 앞

에는 안 가고 자프네. 뒷모갱이 잡우땡길 것맹이고잉. 팍 뚜드러 갖꼬 나를

거시랑(지렁이)맹이로 대롱대롱 들어올려 불먼 또 어쩌 꺼이여? 저 손아구

는 솥뚜껑 저리 가라고 큼지막허게도 생겠그만. 아아따아, 심란시러라. 멋

헐라고 저러고 눈은 기양."

"어어이구 참. 알었응게 저리 가드라고잉? 넘의 뒤꼭지 딸음서 무단히 애

민 년끄장 부정타게 허지 말고."

"아 내가 머 없는 말 했어? 본존에 부체님은 노오러니 금물만 발릉게로 점

잖도 허시고 얼굴도 잘생기겼등만, 원 세상세나 사천왕은 당최."

입이 싸고 말 못 참는 것도 타고난 업인가.

아낙 둘이서 나란히 천왕문 쪽으로 오다가 하나는 나부데한 얼굴에 조신한

기색을 띄우며 안으로 들어오고, 하나는 까무름한 낯색의 도톰동글한 얼굴

을 발딱 제낀 채 천왕문을 빗겨 그냥 옆구리로 간다.

하나는 평순네고, 하나는 옹구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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