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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3권 (28)

카지모도 2026. 5. 18.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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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산과 총대가 기웃하여 들여다보니 역시 종이에 자디잘게 씌어진 것은 아녀자들의 내간

비슷하여 보이는 언문체였다.

"어디 영매시라두 기십니까. 먼 데루 시집을 가셨나요?"하면서 글자를 짚어보다가 총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농사잡록이라...어이구 이건 편지가 아니라 농사책이 아닙니까?" 설유징은 책상위에 펼

쳐져 있는 종이들을 마저 곱게 접어서 문갑에 넣었다.

"강희맹의 사시찬요는 사실은 중국의 한악의 그것을 가려서 엮은 것인데, 근년에 신속의

[농가집성]도 훑어 보았건만 시대적으로두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실제의 농군들 사

정과도 다르고, 도 지세 산세에 따라서 달라야 할텐데 한결같이 취급하구 있네. 그래서 내가

전에 정선 살 적부터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유의해 보았지." 총대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이 머리를 기우뚱거렸다.

"유학 어른께서 의리 염치에 대한 공부는 않으시구, 뭣하러 그런 농투성이의 일에 골몰하

십니까?"

"자넨 흙 먹구 사는가?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두 몰라." 총대는 자기도 모르게 방자한

콧소리를 내고 말았다.

"펫, 예가 어디라굽쇼. 전장이 드넓은 고장두 아니구 비옥하기는커녕 바닷바람과 소금기에

제대루 되는 곡식이 있나요. 그저 산간에서 화전갈이하여 조나 서속밥 먹는 것이 고작인뎁

쇼. 고성서 철에 따라 이밥이라두 놓치지 않구 먹는 건 둔전붙이 해주는 작인들 몇일 게유.

정학이네가 대대루 둔별장하구는 가까웠으니까. 딴 놈들은 모두 명태잡이나 나가면서 풀칠을

합디다."

"음, 그래서 내가 논을 산간에다 만드는 법과 척박한 땅에 콩과 보리를 심을 궁리를 하구

있었네. 책이 묶어지면 몇권 더 베껴서 동계마다 돌릴 작정일세. 그래 이젠 어디 그 괴질 내

력이나 듣지."

"예, 실은 깜박 잊구 있었구만유."

총대도 그가 안창골에 왔던 이유를 그제야 깨닫고 제 무릎을 두드렸고, 설유징은 농을 던

졌다.

"사람이 실없기는...꼭 중하구 옷 바꿔 입은 과객 본세로군. 어제의 계장되는 이가 그러하

니 독 있는 고기를 먹구 모두들 그 고생을 했지."

"어유 우리네는 얘기에 팔리다 보면 정신이 이렇게 대추를 홀딱 삼키듯 하오. 헌데 거 무

슨 약인지 신통두 합디다. 복통을 일으켜서 우리 어계서 떼과부가 날 뻔했습죠." "별게 아

닐세. 까막사리 열매를 우황에 개어 환을 만든 게야. 육류해독의 처방이라구 본초강목에두

나와 있지. 그나저나 도대체 괴질 내력은 언제 꺼내려는가?" "어...또 대추시를 넘겼네!"

이제까지 뒷전에 물러앉아 입을 다물고 있던 길산이 얘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고뿔처럼 앓다가 차츰 열이 나고 피를 쏟으면서 헛소리를 하다가 죽는다고 합

니다."

설유징의 눈에 긴장의 빛을 띠며, "입에 허연 백태가 끼고, 아구창이 터지며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고 토하고 설사하지 않든가?"

"예, 그런 사람을 보았습니다."

설유징은 눈살을 찌푸리고 입맛을 다셨다.

"허허, 그 참 탈이로구나! 보통 역질이 아니라, 그게 바루 염병이여. 올여름까지는 고성에

큰일이 나겠구먼."

두 사람 모두 놀랐다. 염병이라면 가족의 씨를 말리고 사방 십 리에 인적을 끊어놓는다는

무서운 재앙이 아니던가. 총대는 말이 떨어지자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여...염병이라면...이거...우리는 손으루 만지구 끌어내구 하였습니다."

"그 동네서 뭘 먹은 건 없겠지?"

"그러믄요. 저희는 모두 식전이라 시방 아귀가 될 판이올시다." "하면...그 옷을 벗어서 마

당에 널어두게. 아예 삶아도 좋을 것이고. 그리구 앞내에 가서 말끔히 씻구들 오게."

두 사람은 엉거주춤 서 있었다. 설유징은 갑자기 엄하게 소리를 질렀다.

"이자들이 지금 얼이 있는 게야 뭐야. 귀신 붙었으니 빨리 부정을 떨어내야 한다!" 퇴창

문을 밖으로 차면서 설유징이 다시 외쳤다.

"부인 거기 있으면 다른 데루 좀 피하시오."

길산이와 어계장은 엉거주춤 마당 가운데로 쫓겨났다. 설유징이 다시 쫓아나오더니 마당

에서 그가 짜두었던 자리를 걷어 세워주면서 재촉했다.

"어서 바지두 저고리두 벗으라니..."

길산이와 어계장은 귀신의 부정이 붙었다는 기분 나쁜 말만을 듣고서, 후다닥 몸놀림도

잽싸게 저고리를 벗었다. 상놈의 의복이니 바지와 저고리를 벗어젖히면 속곳뿐이라 금방 덜

렁 두 쪽이 되어버린다. 설유징은 나무엮음 송곳으로 중간에 두 번 찢고서 두 사람의 머리

위에다 헐렁하니 씌워버렸다.

"어여 앞내에 그대루 뛰어가서 말끔하게 씻구 와."

총대가 앞에 서고 길산이 뒤를 따르니 돌연한 메 남생이 한 마리가 웅기적웅기적 기어가

는 꼴이었다. 둘은 우선 하반신을 감추는 일이 급하여 수초 사이로 풍덩 뛰어들자마자, "에

그그그 차거워라!"

하며 자지러지고 말았다.

"사내 대장부들이 까짓 봄개천이 무에 차거워. 낭심을 차게 해주면 양기에두 좋은 게야."

따라나온 설유징은 너털웃음을 웃는 것이었다. 아무튼 기왕에 옷 벗고 개천에 뛰어들었으니,

목욕을 않을 재간이 있나. 퉁탕거리며 개천에 잠겨 있자니 제법 신명이 나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는 조금 숫기가 생겨서 두 사람은 천천히 설유학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방안에 들어서자 설유징이 또 밖에다 외치는 것이었다.

"거 밖에 벗어놓은 옷들은 푹 삶아주오. 그리구 농에서 내 헌 옷가지 있으면 두 벌 꺼내

오구."

마당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벌거숭이 몸으로 방안에 섰자니 송구하기도 하고

우선 체면이 말이 아니라 두 사람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설유징은 연신 즐거운 모양이

었다.

"이 사람들 귀신에 부정이 붙었다니까 돌집 하인 뒷간 가듯 하데그려." "우리가 무슨 콩

가루 훑은 줄 아십니까. 뒷간엘 가게요." 밖에서 미적미적하더니, 자신없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옷이 여벌루 딱 한벌 있기는 한데요. 너무 누추해서..." 선비의 아내가 문틈으로 밀어넣

은 옷을 보니 누덕누덕 기웠는데 너무도 낡아서 손가락만 닿아도 푸석하며 찢어질 듯하였

다.

"음, 이건 아주 훌륭한 옷이고, 또 없소?"

"예, 베잠방이가 있어요."

"그거라두 가져오시오."

"요즘은 입을 수가 없습니다."

"어 괜찮아. 아무래두 저녁녘에 나갈 테니, 춘풍에 다 마르겠지." 베잠방이가 또 들여졌

다. 둘이서 제각기 주워 입은 꼴을 보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래도 손위라고 어계장이 바

지 저고리를 입었는데 어깨가 좁아서 가슴이 곧 터질 듯하고 소매가 팔굽 근처에까지 껑

충 올라갔다. 그 대신에 기장은 늘어져서 사타구니까지 덮을 만하였고, 바지는 숫제 몇걷

이를 해야만 되었다. 마치 막대기에 끼운 개꽁지 빗자루 꼴이었다. 그래도 그 몰골은 조금

나은 것이, 길산의 모양은 더욱 꼴불견이었다. 달랑 잠방이뿐이라 무릎 위로 올라간 바짓가

랑이는 다리 근육에 찢어질 듯하였고, 속곳이 없는지라 밑천이 훤히 들여다보일 지경이다.

웃통은 아예 벗었으니, 더구나 체모있는 선비의 공부방에서 결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둘

이 어리둥절 서 있는 사이에서 설유학이 먼저 폭소를 터뜨렸고 급기야는 길산과 어계 총대

도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웃었다.

"자 이쯤 되었으니 벌써 이놈에 방안은 잡놈의 방이 되었네."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유

학 어른."

"어허 이 사람아, 잡놈의 동무는 잡놈이 아니라던가. 자아, 이젠 슬슬 요기나 해볼 참인데

이거 우리가 이런 꼴이니...내 집이 집이 아니로구먼. 내외 술집해야겠어." 설유징은 다시

밖에다 대고 외쳤다.

"이보우 부인, 요기는 뭐가 있수?"

"나물죽이나 끓일까요?"

"아니야, 메밀이 있을 게요. 그걸루 국수나 눌러 주오. 술은...가만있자 당신 안집에 가서

소주 한 병만 걸러오구려."

"집에두 탁주가 조금 있어요."

"글쎄, 그건 의당 내오구. 소주두 가져오라니까요."

"아버님만 드시는 걸, 집안 어른들 눈치두 있는데 어떻게 내옵니까?" "글쎄 가져오라면

가져와요."

설유징의 아내는 딱했던지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쉬고 돌아서는 기척이 들렸다. 입장이 난

처했던 둘 중에 어계장이 말하였다.

"아니 저희 같은 불상놈이 술의 청탁을 가려서 마십니까. 너무 그러시면 황공합니다." "

그따위 술 가려 먹을려구 무리한 일을 시키는 게 아닐세. 자네들 독을 씻어줘야 되니까 그

러네."

둘은 역시 잠자코 앉아 있었다. 한참 기다리자니 모두 말이 없는데, 설유징은 딴에는 좀

서운한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처가살이가 할 짓이 못되는 건 누구나 잘 알 게야. 더구나 장인 어른께서는 아직두 나를

모르시는 겔세. 얼마 전에는 돈 삼십 냥을 내주시면서 행상이나 나가보라구 하데. 허나,

내가 물화를 팔아서 상리를 남겨 돈푼이나 쥐었다구 해서 무슨 큰 이익이 되겠나. 글 읽는

자는 글 읽는 구실이 있는 법일세. 나두 자리를 짜다 내다 팔아서 근근히 양식두 보태구 처

갓집 담배밭을 매어주기도 하네만, 도무지 사나이는 불편한 살림이라네." "그만한 학문을

꿰시구 어찌 과거를 안하십니까?"

하는 어계 총대의 맹한 물음에 침울해 보였던 설유징은 빙긋 웃었을 따름이었다. 점심상이

들어왔는데, 방금 목판틀에서 빼낸 메밀국수가 비벼져 나왔고, 무짠지와 탁주 한동이, 그리

구 소주 한 병이 얹혀 있었다. 설유징이 빈 대접을 달래서 갖다 놓고는 소주를 콸콸 부어놓

고 약봉지를 내려 백반 한 덩이를 꺼내서는 옴폭 팬 박달나무 음판에 양바퀴로 눌러서 빻았

다. 곱게 빻은 백반가루를 소주에 타서 한참 젓고 나서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자, 한모금씩 물고 양치질을 하게. 넘기지 말고 목 넘어 턱까지 보냈다가 다시 입안에 물

고 흔들기를 다섯 번 하게."

둘은 시키는 대로 하는데 소주의 쏘는 맛과 백반의 신맛으로 온 입안이 우그러지는 듯하

였다. 그리고 설유징은 깨끗한 백지를 네모반듯하게 접어서 대접의 것을 흠뻑 묻혀서는 두

사람의 손을 깨끗이 닦아 내었다. 그리고 자기도 그렇게 했다.

"이젠 예방이 다 되었네. 귀신 부정은 멀리 달아났을 게여." 설유징과 길산과 어계장은

국수에 탁주를 들면서 뒤늦게 각각의 말들이 나오게 되었다.

길산이 통성명 뒤늦은 것을 사과하고 내력없이 그저 금강산의 운부 앞에 공부하러 와 있단

말을 비치자, 설유징은 수저를 멈추었다.

"운부라고...운부대사!"

하고는 그는 잠깐 천장 쪽에 시선을 두고 몇번 더 중얼거려보았다. 길산이 말 꺼냈음을 후

회하며 머뭇거리는데 설유징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계장은 자작하여 마시느라고 그들 사

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가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부터 잘 아나?"

설유징이 묻자, 길산은 부끄러움을 참으며 시원하게 대답해버렸다.

"아니오, 이제 금강산에 들어간 지 열흘도 못 되어 제가 어리석은 탓으로 쫓겨서 내려오

구 말았수."

그러나 설유징은 혼자 중얼대는 것이었다.

"그렇지...내 스승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그때에는 소백산에 계신다더니...내가 그분의 내

력을 조금 아네.자네들이야 붕당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설유징은 문득 탄식하면서 한숨

을 깊이 내쉬었다.

"대저 세상이 암울할수록 숨어 있는 인재가 많은 것은 고금에 걸친 일이어니와, 더욱 지

금 세상이 그러하네! 웅대한 포부와 경륜을 지닌채로 산산에 숨어 헛되이 일생을 마친 이들

이 얼마나 되었을꼬...말 좋아하는 자들 중에는 그런 이들의 은거를 가리켜 명리를 바라는

짓이라거나, 보명이 나약한 처세라고 비웃기도 하지. 하나 그러한 포부를 지닌 이가 그릇된

제도 속에 들어가 어찌 살기를 바라며, 경륜을 펴지 못하고 절개나 버려져서 드디어는 썩은

제도의 제물로 되고 마는 것이 통례인즉, 차라리 초야에 앉아 백성의 고락에 동참하는 편이

깨끗하지. 선비로서 말을 달리고 칼을 뽑아 구세하는 길은 택할 수가 없으니, 민생을 위해서

학문을 쓰고 펴갈 수밖에 없구먼."

설유징은 두 사람이 전혀 안중에 없는 것만 같았다. 그는 천장을 우러르며 혼자 중얼거리

는데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하더니 곧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길산은 설선

비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분명히 알 수가 없었으나 뭔가 깊은 인상을 받게 된 것이었

다. 더구나 운부에게 쫓겨 내려온 그로서는 설유학이 운부의 속세 내력을 안다 하니 귀가

번쩍 트일 정도로 이야기에 집중되었다.

"운부대사님을 아신다구 했수?"

"그이가 강진 사람이시고 전에 소백산에 계셧다면 틀림없을 걸세." 길산은 풍열선사가

일러주던 말을 기억해내어 맞장구를 쳤다.

"본향이 강진이랍디다. 소문에는 당사람이라구두 한다지요. 대명이 망한 뒤에 배를 타구

건너왔다구 하데요."

설유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켜고 나서, "오랑캐가 중원을 유린한

뒤 대명의 망국민을 자처한 이가 하나 둘인가. 그이가 워낙에 재주 있는 기인이라서 수도

승이 된 뒤에 기담 좋아하는 이들이 조작해낸 이야기일세. 나는 정선 살 제 내 스승님을

찾아오신 그분을 먼발치서 뵈온 적이 있었네. 그때 이미 누더기 장삼에 송낙을 쓰고 계셨지."

설유징은 거기서 말을 끊고 한참 동안이나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그의 스승 이수는 환로에 나갔던 초년에 주상께 직소하여 삭탈관직되어 귀양을 갔다가 낙향해서 끝내 벼슬에

다시 나가지 않았다. 설유징의 외가 쪽과 연줄이 닿아서 그의 조부가 교육을 부탁했었고, 그

에게 과거의 무망함을 깨우쳐주었으니 기실은 부모가 바라던 스승은 아니었던 셈이었다. 설

유징과 동접으로 용인사는 조종석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과거에 실패하였으나, 그들을

아는 선비들은 모두 재주가 아깝다고들 소문이 자자하였던 것이다. 운부의 속명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가 김씨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의 조부가 서애 대감 쪽의 사림에

들었었고, 왜란 때에 의병으로 분기하였다가 순사하였는데 부친은 광해조에 벽지인 강진으

로 이사를 왔다 한다. 강진은 즉 격변의 시기에 벼슬길에서 쫓겨나 귀양온 자들이 한번씩

거쳐서 가는 고장이 되었으니, 그들과의 교류가 또한 없었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유

징의 스승 이수가 그때로부터 강진에 묻혀 있던 선비의 풍문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한통속이라는 말이 있듯이, 남인계의 인맥이 닿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설유징의 스승 이수가 정선에 틀어박혔을 때 태호 이원진과의 교류가 있었고 원진이 삼사

를 거쳐서 부사로 오를 적에도 인편으로 가끔씩은 안부를 물을 정도였던 것이다. 설ㅇㅎ징

은 가끔 그의 스승이 몰하기 전까지 얘기해주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 환로에도 나가보고 여러 사림의 인물됨도 접하여보아 알지만, 일찍이 놀랍고도 두려

운 수재들은 두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태호의 조카 되는 유형원이라는 선비와 강진

출생의 승려 운부이니라."

유형원이 광해군 십사년 임술에 나고 운부가 인조대왕 사년 병인이 났으니, 네 살 차이가

되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수같이 의를 신조로 살아온 대쪽 같은 선비의 눈에 당대의 천재로

비쳤던 두 사람은 과연 어떠하였는가. 유형원은 서른두살의 젊은 나이로 과거를 퇴하고 전

라도 부안에 숨어 살다가 책을 쓰는 것을 유일의 일로 삼아 깨끗이 목숨을 거두었다. 운부

는 삼십여 세가 되도록 지사 노릇으로 연명하다가 삼 년 동안을 전국 각지를 방랑한 뒤에

예송이 벌어지던 경자년에 입산, 승려가 되었으니 그때가 삼십 오세였다. 일찍이 승려로서

양생을 잘했던 탓이었을까, 그러한 울분의 세월 속에서 기맥을 잃지 않아 수를 누리는지도

몰랐다. 설유징은 그러한 얘기를 밖으로 꺼내어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세상의 얘기를 하자면 그들에게 조정의 얘기를 해야만 되었고, 썩어빠진 구중궁궐

의 탐욕서런 권세다툼에 관하여 얘기해주기에는 너무도 순박하고 무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

이었다. 그들은 양반의 연원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붕당의 유를 모르는 것이다. 그저 태

어나면서부터 엄청나게 짓누르는 신분의 숙명적인 중압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꿈결처럼 나

라의 소문에 접할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자기의 나라가 아니라는 느낌을

가진 데에 있었다. 난리가 터지면 벼슬아치의 집과 왕궁에 불을 지르는 백성들이었다. 이게

어디 내 나라냐, 양반놈들의 나라지 하는 감정은 변방에 이를수록 더욱 심하였다. 마치 조정

에 있는 자들이 백성들의 나라를 독점하고 빼앗은 것과도 같았다. 글 아는 자의 소임이 있

으니, 백성들이 빼앗긴 나라를 그들에게로 되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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