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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3권 (26)

카지모도 2026. 5. 16.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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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돈을 그저 받을 수 있습니까. 은인의 함자라두 알아얍죠."

"나는 그저 놀러 다니는 놈이니 자네가 알 거 없네. 쌀이 되나 반찬이 되나 그걸루 가족 부양하구 연명하게."

자꾸 붙드는 총각을 뿌리치고 걷는 길산은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귀밑이 뜨듯하였다. 급한

마음으로 운부가 글이나 무술이나를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성을 냈던 자기가 참으루 운부의

말대로 버러지보다도 못한 놈인 듯이 여겨졌다. 길산은 굶주림을 알지언정 곡식을 얻기 위

하여 땀을 흘리는 일의 고된 것은 채 느끼지 못하였고, 수업에는 몸 공부와 마음 공부가 있

음을 알지 못하였고, 따라서 운부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광대란 흘러 다니는

자이니 몸도 마음에도 뿌리가 없으며, 살기 괴로우면 훌쩍 떠날 따름이었고, 따라서 울음보

다는 냉소가 어울리는 셈이었다. 광대란 유동하는 자이니 굳건한 땅과 이웃이 있는 마을을

알 리가 없었다. 그가 밥 먹고 잠자는 방안 또한 저자바닥과 무엇이 다르랴. 우선 농군이 되

는 수업을 하여야만 마을의 사정을 알고, 마을의 사정을 알아야만 백성의 참사정을 겪어서

아는 것이 아닌가. 광대에게도 고통은 있으되 자기를 파는 자로서의 씁쓸한 자조가 있을 뿐

이다.

"운부대사는 내 궁둥이를 꾹 눌러두려는 모양이여..." 길산은 수자리골에 이르러 정학의

집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벌써 저녁때가 지난 즈음이라 관솔불이 기둥에서 까물대며 타

고 있었고 웬 건장한 사내가 외양간 앞에서 쇠죽을 쑤고 있었다.

"여기가 정학이란 사람의 집이우?"

길산이 묻자, 그는 여전히 쇠죽을 저으면서 대꾸했다.

"우리 가형이신데, 왜 찾수?"

"동무 되는 사람이유."

"읍내 나가셨는데...뉘십니까?"

"길산이라구 허우. 금강산에서 왔다면 알 게요."

떠꺼머리는 벌떡 일어서더니 주춤거리며 되물었다.

"운부암 기신다는 길산이 성님이슈?"

하고 나서 떠꺼머리는 마당에 넙죽 엎드렸다.

"우리 언니가 성님 말씀을 여러번 하셨습니다. 저는 신이라구 하우." 길산이 당황하여 함

께 엎드리려다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일으켰다.

"언니께 성님뻘 되시니 제게는 큰성님 되지요. 제가 얼른 읍내 나가서 모셔오겠수."

"아닐세...그럴 건 없구 함께 가보지."

"그게 더 좋겠군요. 학이 성님은 포구에 계실 거유." 길산이 정학의 아우 정신의 모습을

보니, 학이처럼 기골이 장대한데 그의 형보다는 훨씬 쾌활해 보이며 아우답게 가벼운 데가

있는 듯하였다. 두 사람이 포구로 나가자니 어촌이 나오는데 어딘가 주막이 있는지 왁자지

껄 사내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주막이 있는가?"

길산이 물으니 정신은 바닷가에 되따로 떨어진 기다란 초가집을 손가락질해주었다.

"저어기 어계방이 있수. 뭐 주막이나 매한가지유."

그들은 고성포의 어계방으로 들어갔고, 안에는 칠팔 인의 사내들이 떠들썩해서 탁주를 돌

려 마시고 있었다. 갑오잡기를 했던지 지패가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고, 그 가운데서 정학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헌경이 성님, 그 구수한 얘기나 소리 한가락 해보우."

"압다, 투전판에서 무슨 옛말이여?"

"최서방이 안 왔다면 모를까, 기왕에 어려운 걸음 했는데 그냥 보내?"

"허긴 그렇군. 원주에서두 이름난 전기수를 공으루 보낼수야 있는가." 이런 말들이 시끄럽게 오가는데 신이가 나서면서 말하였다.

"언니...길산이 성님이 왔수."

정학은 술잔을 쳐들다 말고서 아우의 등 너머로 고개를 기웃해보더니, "아이구 이게 누

구요. 아니 성님이 산에서 공부는 않구 어찌 이런 속세엘 다 내려오셨수?"

법석대면서 일어나 길산의 손목을 덥석 잡아서는 좌중의 가운데로 질질 끌어가는 것이었다.

"농번기에 팔자들 늘어졌네."

"어촌에서야 농사철 따루 있습니까. 고기데 몰려올 때가 제철입지요. 인석들아 인사들 올

려라. 내가 늘 얘기하던 천하장사 길산이 성님이여."

"장사는 무슨...내 기운이야 아우님보다 훨씬 못 쓰지."하며 대강들 인사치레를 차리고 나

니 길산이보다 방금 앞서 들어왔던 갓 쓴 자는 덤덤히 말이 없다.

"참, 두 분 인사허슈."

정학이 나서서 소개를 시키는데, 길산은 그자의 머리에 쓴 갓이 고까워서 선선히 인사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그러한 눈치를 채고서 학이는 웃으면서, "하하, 이제 보니 갓 쓴 양반

인 줄 알구 그러시우. 고작해야 [소학]권이나 뗀 불상놈이우. 소싯적에 양주목에서 통인

노릇을 한 적이 있어서 관가 냄새가 조금 배었지."사정 두지 않고 지껄여대니 갓 쓴 사내는 열쩍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과연 정서방 말이 맞소. 나는 작년에 삼일포에 이사온 최헌경이란 사람이우." "장길산이오."

최헌경과 길산이 인사를 하고 나니, 곧 다른 사람들이 떠들썩하며 최헌경에게 얘기를 하

라고 성화였다.

"세상에 공것이 어딨나?"

"제길...아, 얘기를 팔면 우리가 산다는데 그러슈."

최헌경은 살집이 좋고, 코는 감자처럼 둥글고 투박해 보이는데 작은 눈이 영리하게 반짝

이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댓쯤 되었을까?"

"내가 다른 일루 여길 찾아오긴 했지만, 그러면 딱 한 자리만 하구말 테요."

"에이 기왕에 보따리를 풀려면 세 자리는 하셔야지." 잠깐 좌중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최헌경은 몇 년 동안 전기수의 노릇을 해본 입담으로 얘기를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객주라면 저어기 송파 거여 객주가 제일이지. 추석 대목이 코앞에 있는지라 손님들이 갯

것전에 쉬파리 끓듯 하였지. 그래놓으니 나중에는 청마루에까지 손님을 받았는데, 늦게서야

신혼으로 보이는 남녀가 또 객주를 찾아왔거든. 방 있습니까, 하룻밤 묵어 갑시다 하니까...

아이구 방이 다 찼소이다. 요즘 추석 대목장이라 그렇지요. 내외분이시니 청에서는 주무시지

못할 테고, 하면서도 손님을 놓치기는 싫었단 말이여. 아니나다를까, 거여거리의 객점이 모

두 그러하니 신랑 되는 자가... 청에서라두 자구 가겠소, 병풍이 있거든 하나 가려주시우. 이

부자리하구요."

하고 나서 최헌경은 탁주를 부어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의 뜸을 들이는 것이었다. 사내들을

킬킬 웃기 시작하였다.

"객점 주인은 손님이 그렇게 청하는 바에야 마다할 수가 있나. 그래서 병풍을 마루 구석

에 둘러쳐주니까, 젊은 내외는 그 병풍 뒤에 이부자리를 깔고 들어간단 말이렷다."

"거 요정낼 판이로군."

"허허, 병풍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것들이 옷을 척척 벗어서 병풍 밖으로 걸어놓는데, 아낙

네의 속치마까지 걸리는 게 아닌가. 이러니 집 떠나 고적하기가 이를 데 없던 봇짐장수 생

홀아비들이 참을 도리가 있어야지. 그중 숫기 좋고 장난 좋아하는 보상 두엇이 서로 눈을

끔쩍이더니 모기작모기작 병풍 곁으루 기어갔거든."

최헌경은 얘기를 끊고 담배 한 죽을 담는데, 듣는 사람들은 재촉도 못하고 침만 꼴깍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온 마루에 있던 사내들이 한놈 두놈씩 기어가서 병풍 밑틈으로 들여다보질 않

겠나. 그뿐야, 무슨 구경거리가 있는가 싶어서 이방 저방 누웠던 젊은 사내들이 이놈 저놈

또 기어와서 병풍 아래를 들여다보려고 서로 머리를 들이미니, 어깨가 부벼지고 다리가 뒤

엉켜 병풍 밑은 틈도 없는 대만원이 되었거든. 그때 제일 늦게야 알고선 한놈이 저두 좀 구

경해볼까 하여 기어왔는데, 이놈이 아무래도 주변머리가 없었지. 병풍 밑에는 아무리 끼일려

두 비좁아서 못 끼겠으니, 에라 모르겠다. 체면 불고하고 벌떡 일어서서 병풍 너머로 넘어다

봤다네그려. 그러니 아래서 대가리 싸움하던 놈들은 참지 못해 킥킥거리고, 서로 더 많이 보

려고 어깨를 부벼대니 그만 병풍을 밀어서 사정없이 자빠져버렸단 말이지. 젊은 내외가 한

창 재미를 보려다가 병풍이 내려덮쳐 파흥이 되니 자네들이라면 성이 안 날 텐가? 사내가

벌떡 일어났지. 제 서슬에 놀란다고, 병풍 밑에서 들여다보던 놈들이 모두 그 자리에 발딱

뒤집혀서 자는 척하노라고 코를 더럭더럭 골았거든. 코고는 놈들을 바라보고 사내가 더욱

성이났지. 이놈들아 병풍 쓰러뜨리고 무안해서 자는 척하려고 생코를 고는구나, 하는 중인데

아까부터 서서 병풍 너머로 들여다보던 놈은 하두 갑작스런 일이라, 넘어질 사이가 없어가

지고 그만 그 자리에 선 채로 눈을 감고 코를 골거든." 어계방에 모였던 자들은 모두들 배

를 잡았고, 길산이도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최헌경 본인은 멀뚱하니 과연 전기

수의 능청은 대단하였다.

"그래 사내가 서서 코고는 놈에게, 너는 왜 서서 코를 고는가 물었더니 서 있던 놈이 입

맛을 다시면서, 나는 내일 아침에 갈 길이 바빠 일찍 떠나려구 서서 잔다. 왜 잘못되었냐?

하더라네."

어계방의 분위기는 점차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거 이야기 한자리 더하세."

"투전돈 걷어드리께."

하며 제각기 떠드는데, 최헌경은 담배만 뻐끔대며 태우더니 놋재떨이에 탕탕 떨고는 앉음새

를 고친다.

"실은 내가 여러분 손을 좀 빌릴려고 찾아온 겔세. 꽃재에서 괴질이 발생하였다네. 우리

마을에두 한 집에 환자가 생겼는데, 우선 꽃재마을에 불을 지르고 성한 사람은 이주를 시켜

야겠는데, 모두 한식구들이니 쉬쉬 하구 있단 말여."

"소문 비슷이 듣긴 하였으나, 꽃재에는 경친 놈들이 내쳐서 저희끼리 살아가는 부곡이나

진배없는데, 누가 갈려구 하겠나."

"관가에는 알렸수?"

"며칠 전에 아전 몇이 들러보구 갔다지만 별 대책은 없구, 동구 밖에 번을 드는 나졸 두

엇이 통행을 막는다네."

정학이 최헌경에게 말하였다.

"그럼 성님은 뭘 바라는 게요. 우리가 도와드릴 일이라두 있겠수?"

"음, 우선 환자네 가족을을 산으루 내몰구 마을에 불을 지르기 전에 환자들만 추려서 움에다 몰아넣고, 시체는 집과 함께 태워버리잔 말일세. 그냥 두었다가는 고성 일대는 아주 쑥밭이 될 테니까."

"관에서 못한 일을 우리라구 해서 뭣하게?"

"그래야 고장을 지키지. 한 사날 앓다가는 열이 가라앉으면서 피를 토하구 죽는데 한번

걸렸다 하면 가망이 없는 모양이여."

"우리까지 옮으면 어쩌게..."

"그야, 다 예방이 있으니 내 말만 듣소."

최헌경이 끝내 꽃재말을 쓸어버려야 고성은 안전하다고 우겨대었다.

"가십시다. 까짓 것, 인명은 재천이라는데 설마 뒈어질까." 정학이 선선히 말하였고, 몇사

람도 쾌히 응낙을 하였다. 달리 더 사람들을 모아보기로 하고서 두엇은 포구마을로 풀려나

갔다. 정학이 길산이에게, "성님은 우리게 사람이 아니니 어서 우리 집에 가셔서 신이 하구

놀다 올라가슈. 내 변변히 대접두 못해서 죄송허우. 만폭동으로 놀러 갈 테니." 길산은 차

마 운부대사께 꾸중을 듣고 하산하였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나두 가보겠네.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야지." 길산이 말하니, 최헌경이는 감자코를

만지작거리며 사람 좋게 웃었다.

"그럼, 하나라두 더 손이 필요한 판인데, 모두들 관솔 횃불을 준비들 하게. 그리구 무명

수건으루 입들을 막고, 시체는 절대루 다쳐선 안되어. 환자들도 손대면 안되네." 마당에 어

계 사람들과 농부들이 모이니 여남은 명은 족히 넘을 듯하였다. 제마다 무명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손에 손에 싸리나 관솔의 횃불을 들었다. 그리고는 작대기며 낫이며를 들었으니, 누

가 보기에도 그 서슬이 무서운 화적떼들 같았다. 그들은 최헌경이를 앞세우고 괴질이 발

생한 꽃재말로 몰려들 갔다. 꽃재말은 불빛 한점 없이 캄캄하였고, 번을 드는 군사들도 어디

로 꺼져버렸는지 동구 밖은 쥐죽은 듯하였다. 마치 도개비가 나올 듯싶은 마을에는 질병의

암울하고 음산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듯하였다. 최헌경이 말하였다.

"장로네 집으루들 가세."

그들은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의 골목길에 횃불빛이 휘황해지니 놀란 마을 사람들이 뛰쳐

나옴직도 하건만, 집집마다 불이 꺼진 채 적막하기만 하였다.

"누가 촌장의 집을 아나?"

"아무 집에나 들어가 끌어내어 인도하랍시다."

"넨장할 이렇게 괴괴할 수가 있나."

그들이 마을 복판에서 술렁대고 있는 참인데, 드디어 골목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 둘

씩 나타났다. 그들도 수군거리며 접근을 꺼려하였고 이쪽에서는 더욱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

하여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최헌경이 횃불을 들어 그들을 비춰보면서 몇

걸음 나아가 외쳤다.

"우리는 포구 어계 사람들인데, 이 마을 장로를 만나야겠소." 그들이 다시 수군대더니,

한 사람이 맥없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촌장께서는 어제 작고하셨소이다."

"그러면 아무나 마을을 대표할 사람과 의논을 좀 해야겠소." 다시 그들끼리 뭔가 수군대

는 것 같더니 질문에 응하였던 자가 물어왔다.

"어계 분들이 꽃재엔 무슨 일루 오셨소이까?"

최헌경은 헛기침을 하고 나서 누누히 일러주었다.

"우리 고장에서 꽃재말이라면 수자리 따라왔다가 면천한 사람들이 모인 동네인데, 하여간

에 내왕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고성 땅의 같은 백성일세. 이제 듣자하니 이 동네서 괴질이

창궐한다는데 관가에서도 속수무책이요, 의원도 기피한단 말을 들었네. 고뿔이나 배탈도 아

니요 역병임이 적실한즉, 꽃재만의 화가 아니라 우리 고성의 화라 할 게여. 아무 방비두 없

이 있다가는 다른 마을로 번져갈 것인데 이 마을을 폐하려고 왔네. 의논이 정해져야 할 테

니 어서 마을 총대 될 사람과 만나게 해주소."

그들은 말없이 횃불 든 사람들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의 등뒤로 아낙네들의 그림자가 어른

거리고 있었다.

"의논을 않겠다면...우리 뜻대루 할 테여."

일행 중의 누군가가 거칠게 말하자, 마을 사람 하나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부르러 갔수."

이쪽은 일렁이는 불빛 아래 몽둥이며 농기구를 들었으니, 모양이 더욱 험상스럽지만 어둠

속에서 산 송장처럼 흐늘거리며 움직이는 듯한 꽃재말 사람들이 더욱 흉하게 느껴졌고 오히

려 건장한 사람들 쪽에서 두려워할 만하였다. 이제 꽃재말은 캄캄한 명부와도 같았던 것이

다. 잠시 후에 노인 한 사람이 그들 속에서 걸어나왔다.

"의논할 말씀은 무엇인지요?"

"마을의 촌장 되시우?"

"나이로는 제가 기중 연장이오만..."

최헌경이는 횃불을 들어 그를 비춰보았다. 수족이 삭정이처럼 깡마른 노인이 잔약한 몰골

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병에 죽은 자가 몇이나 되오?"

노인은 잠시 뒷전에다 묻는 듯하더니, "오늘까지 스물둘이외다."

"시방 환자는 몇이오?"

"우리네가 서른두 가호인데 한 마흔 명은 되는갑소. 한 사람두 앓는 이가 없는 집두 있소."

"장사는 어찌 지냈소?"

"집집마다 다르긴 하오만 뒷산에다 버려두었지요. 바람맞이를 해줘야 된다기에...역병도 역

병이지만 이젠 꼼짝없이 굶어죽는 판이외다. 화전갈이두 못했거니와 관가의 구호도 없지요."

"어떻소? 우리가 십시일반으로 구호곡도 거둬 내고, 나중에 마을도 다시 세워줄 터이니

여길 떠나겠소?"

"여길 떠나서 어디루 간단 말입니까. 우리말이 한두 해에 생겨난 것두 아니우."

"우리계에서 모두 의논이 정해져서 이렇게 몰려온 게요. 이 마을은 이미 괴질의 병독이 속속들이 범하였으니, 태워버려야겠소. 그리구 환자들은 나올 때까지 식구들과 따로이 지내게 해야 됩니다. 마을 사람들게 이 뜻을 알리고 우리 의논에 따르시우. 만일 듣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사정없이 불을 지를 테니깐."

최헌경이는 조금치의 틈도 보여주질 않고서 단호하게 말하는데, 곁에 섰던 포구의 장정들

이 제각기 으르딱딱하였다.

"다 죽게 되는 판인데 사정 볼 거 있나. 타 죽기 싫으면 몰려나올테지..."

"말 안 들으면 아주 물고장을 내버릴 테여."

이렇게들 두런대니, 맨주먹으로 맞서지 못할 판에 굶주리고 병약한 사람들로서 뭐라고 대

구할 엄두가 나질 않는 모양이었다. 저희끼리 둘러서서 얘기하는데 따르자거니 못한다거니,

제법 격론이 오갔고, 아낙네들의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이쪽의 뒤편에

서 있던 길산이는 그 울음소리를 듣자 어쩐지 낯익은 기분이 들었고, 설움이 척추 끝까지

스며오는 듯하였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최헌경의 처사가 이치에 닿는 일이라, 역병을

막자는 뜻이고 보면 매정하달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꽃재말 사람들이 당한 환난이 지겹

도록 싫어지는 것이었다. 길산은 이 자리에 잘못 끼여들었다고 후회하였다.

"어서 결정을 하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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