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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3권 (25)

카지모도 2026. 5. 15.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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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근이와 황회는 그날 밤 묘옥이네 집에서 장쇠를 데리고 천마산에 올랐다. 장쇠가 온

것과 묘옥이가 장물 거간을 맡게 된 사실을 복만이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하였으며,달근이와

황회는 수단 있는 졸개들을 제 편에 차차 끌어넣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해 여름이 다 지날

동안 솔부리에서는 별 변화가 없었고, 황회와 달근이는 좀도적질로 가끔 원근에 나갔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묘옥이네 술집은 점점 번성하여 색주가로 전신하게 되며 달근이의 도움이

많았던 것이다.

가을로 접어든 금강산은 풍악산이란 별칭대로 천산만봉이 단풍으로 온통 타는 듯하였고,

골짜기의 깊고 얕음과 봉우리의 높낮이와 하천의 넓고 좁음에 따라서 그 붉은 색깔의 차가

천차만별이었다. 검정에 가깝도록 짙은 색으로부터 놀빛처럼 새빨갛게 타오르다가 엷어져서

노랑빛이 되는 나뭇잎의 변화는 마치, 천상 선녀가 섬세하게 수놓은 옷자락을 펼쳐놓은 것

같았다. 물빛마저 산 그림자에 물들어 속끝까지 젖어든 단풍의 빛이 일그러졌다가 펴졌다가

하면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길고 짧은 폭포에서 일어나는 물안개가 골짜기의 여기저기 뽀얗

게 드리워졌다.

길산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끝에 앉아서 이러한 산수를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

었다. 장안사에서 사십 리, 유점사에서 이십 리, 북록으로 들어간 만폭동 골짜기의 아득한

절벽가에 겨우 주추랍시고 닦아 세운 운부암에는 이제 추색이 완연하였다. 아침마다 좁은

마당에 서리가 엷게 깔렸고, 흩날려 떨어진 낙엽이 발밑에 밟혀 부서지는 것이었다.

몇 달 동안이나 길산이 혼자 지내다 보니 스스로도 사람 같지 않아 이제는 제 몸짓마저

구르는 잎새나 이끼 낀 돌이나 산짐승처럼 무심하여진 듯하였다. 처음에 얼마 동안은 나뭇

짐을 지며 어이 무거워라든가, 배고프네 밥이나 지을까, 또는 혼자 방안에 앉았다가 먼산에

서 포효하는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놈 참 울음 한번 장하고나, 하는 등으로 제 자신

과 얘기를 지껄여보고는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짓마저도 어느결엔가 잊어버려 모든 것에

무심하여졌다.

그는 뒷봉 밭에 내려가 조밭을 매거나 마를 캐어다 쟁이면서 하루해를 보내곤 하였다. 가

끔은 덫에 걸린 작은 짐승들로 고기 맛을 볼 때도 있었건만, 어쩐지 송구하여 암자 아래로

내려가 귀틀집에서 모닥불을 피우곤 하였다. 그는 거의 반년 가깝도록 운부를 대하지 못하

였고, 봄에 여기 왔을 때 한 보름 남짓 뵈었을 뿐이었다. 운부대사는 언제 온다 간단 말도

없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길산이 운부에게서 배운 바란 아무것도 없었다. 운부대사는

길산이에게 말도 몇마디 해준 적이 없었고, 처음 며칠은 줄곧 법당에서 참선하다가 뒷봉 너

머 밭에 나가 농사일을 며칠 하고는 어느날 밤에 없어져버린 것이었다. 길산은 자기가 제자

로 받아들여졌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운부대사가 돌아오면 높은 공부를 배우리라 벼르면

서 무작정 기다릴 뿐이었다.

길산이 단발령을 넘어 장안사에 이르러 일여를 찾으니, 그는 풍열스님의 서찰을 읽고 나

서 곧 배례하며 운부암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대사께서는 산사의 주지들을 싫어하시고, 그들 또한 당신을 기승이라 하여 질시하니 전

혀 내왕이 없으시고, 소승 같은 젊은 승려는 몇몇이 가끔 암자를 찾아가 뵙지만, 거동이 과

연 구름 같으신 분이라 종종 헛걸음을 치는 적이 많습니다."

만폭동 어귀에서 길산은 운부암을 찾느라고 반나절을 꼬박 허비하고 겨우 절벽 가녘에 아슬

아슬하게 올라앉은 퇴락한 암자를 찾아낼 수가 있었다. 길산은 오르는 길을 찾지 못하여 막바로 보이는 절벽에 겁도없이 대들었던 것이다.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돌부리에 매달리며 주르르 미끄러졌다가 간신히 올라 드디어 암자의 앞마당 쪽으로 기어오르니 팔꿈치는 모두 벗겨져 피투성이가 되었고 얼굴도 나무에 긁혀서 상처가 가득하였다. 숨을 헐떡이며 절의 꼬락서니를 보자니, 진흙에 이겨 바른 구들돌로 지붕을 이었고, 기둥은 껍질이 그대로 붙은 통나무요, 흙벽이 군데군데 떨어져서 다람쥐새끼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마치 거북의 등껍질 같은 지붕의 구들돌 기와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고총과도 같았다. 암자는 댕그라니 법당 한 칸뿐인데 불상도 없었고 향로도 없는 토방이었다. 그 토방 한가운데에 지붕 꼴처럼 여러 가지 베조각으로 누덕누덕 기운 걸승 차림의 노인이 고요히 앉아 있었다. 흰머리는 뒤러 치렁치렁 늘어졌고, 흰수염이 가슴께에 가지런하였다. 언뜻 보아서는 그가 중인지 속인인지 별 구별이 가

지 않았다. 다만 가사 장삼 모양을 한 누더기가 승복 비슷하여 중일 듯하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눈을 번 듯 뜨고 있건마는 앉아 있는 태가 바위처럼 굳건하고 엄중하여 감히 말을

건넬 기분이 들질 않았다. 길산은 그가 참선에 잠긴 것이라 믿고서 토방 아래 맨땅에 털썩

주저앉아 그가 물어오기까지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 식경이나 쭈그리고 기다려보

아도 말을 붙여오지 않았다. 길산은 번 듯 뜨고 있는 중의 시선을 따라서 그곳에 무엇이 있

는가를 바라다보았으나 절벽 앞으로 드높게 펼쳐진 만폭동 위의 빈 하늘만이 닿을 뿐이었

다.

"스님...스님!"

길산이 참지 못하고 불러보았으나 중의 그 바위 같은 앉음새는 고쳐지지를 않았다. 차츰

배가 고파지고 갑갑증이 났던 길산은 암자의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부엌이나 곡간은 물론

화덕조차 보이질 않았다.

"젠장 뭘 먹구 살길래 곡기의 흔적이 없나."

길산은 다시 법당으로 돌아가 안쪽을 기웃해보니 토방 구석에 바랑이 던져져 있는데 나무

탁발이 두 개 놓여 있건만 오래 쓰지 않았음인지 윤기가 없고 먼지만 수북하였다. 하는 수

없이 길산은 뒤편 길을 찾아보았는데, 암자 뒤의 보다 높은 바위 절벽을 간신히 돌아 나가

는 조도가 내다보였다. 어찌되었든 먹을 것을 찾아야겠으므로 조도를 따라서 봉우리를 돌아

나가니 움푹 꺼진 너른 분지가 나타났다. 그곳은 참으로 으슥하고 은밀한 곳이어서 아래편

에서는 다만 사방 주위로 삐죽삐죽한 연봉만이 보일 뿐이었고, 마치 그릇의 안쪽처럼 둥글

고 편편하였다. 그 넓이는 가히 한 부락을 이룰 만큼 아늑한 초원지대였다. 거기서 길산은

제법 널찍하게 일구어진 밭고랑들을 발견하였고 나지막한 귀틀집 한 채도 보았다. 화전갈이

인지 불탄 자취가 군데군데 검게 나타나 있었고 밭에서는 뭔가 푸릇푸릇 자라나고 있었다.

"화전꾼인가. 어디 찾아가서 뭣 좀 얻어먹을 게 없나 물어봐야겠다."하고서 길산은 초원으

로 내려갔다. 밭은 사방으로 네모반듯하게 가꾸어졌는데 호미의 자국이 생생하였으며, 골마

다 거름도 충실하게 뿌려져 있었다. 길산은 귀틀집으로 가까이 갔으나 인적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통나무의 문을 여니 안은 컴컴한데 맨땅바닥이요, 오래된 건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

다. 그러나 벽에는 버섯말림도 걸려 있었고 곡식 자루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자루를 열어보니 기장과 좁쌀이 그득하였고, 그외에도 잣과 밤이며 도토리 또한 독에 가

득 차 있었다. 아마도 지난해 가을에 갈무리한 모양이었다. 우선 시장할 대로 시장하였으므

로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밥을 지어 먹을 궁리를 하였는데 오지 그릇과 돌솥이 뒹굴어 있었

다. 길산이는 마당에 나와 퍼질러앉아서 밥을 지어 오지 그릇에 우선 한사발 떠놓고서 맛난

저녁밥을 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집이로군!"

그렇게 오래 지체하였건만 화전민인 듯한 귀틀집의 주인은 종내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길

산이 다시 운부암으로 돌아가보니 대사는 아직도 그 모양으로 움직이지도 않고서 어둠속에

앉아 있었다. 길산이 지어온 밥그릇을 토방 귀퉁이로 내밀면서, "스님 공양 드십시오."

라고 불러 보았건만 역시 대답이 없었다. 혹시 연로하여 앉으신 채 열반하신 게 아닌가 살

펴보았으나 아랫배께가 아주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으니 숨은 쉬는 모양이었다. 길산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법당 아래 자기도 꿇어앉아서 스승이 말을 붙이기를 기다려보았으나 아주

캄캄하여 먼 산사에서 쇠북소리가 들리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길산은 온몸이 근질거리

고 답답한데다 수마가 씌워서 눈꺼풀이 떨어져 들러붙고 도저히 견딜 재간이 없더니, 그대

로 모로 넘어져서는 드높이 코를 골면서 잠들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일을 겪기를 사흘이나

계속한 뒤에 길산이 잠을 깨어 일어나보니 그날은 곤했던지 벌써 해가 높직하게 떴는데 마

루 위에는 말뚝처럼 박혀 있던 대사가 보이질 않았다.

"어이쿠...이 어른이 날 떼칠려구 몸을 피하셨고나." 길산은 허둥지둥 일어나 운부암의 둘

레를 휘둘러보기도 하고 뒷길로 해서 골짜기를 내려가 만폭동 어귀까지 달음질쳐보기도 하

였으나 운부대사는 온데간데가 없었다. 길산은 울화가 치밀기도 하였고 또한 낙심이 되어

서, 제미랄 것, 이놈의 땡초를 붙잡기만 하면 아예 허리뼈를 분질러주리, 수없이 중얼거리

면서 암자로 되돌아왔다. 점심때가 가까웠는데 아직 식전이었으므로 문득 귀틀집 생각이

나서 그날도 다른 때처럼 밥을 해 먹으러 뒷봉을 넘어서 분지로 내려갔다.

귀틀집에 이르러 역시 좁쌀을 푸짐하게 내어 밥을 지으려고 불을 지피는데 문득 뒷전에서

불이 번쩍하는 것 같더니 정신이 아득하여졌다. 몽둥이로 사정없이 얻어맞았던 것이다. 길산

의 성질로는 당장에 한주먹으로 때려누일 것이로되 돌아보니 누더기의 대사가 눈을 부릅뜨

고 서 있었다.

"네 이 버러지보다두 못한 놈! 어찌 곡식을 축내려느냐?" 대사의 첫 번째 말이 바로 그

러한 일갈이었다. 길산은 하도 어이가 없어져서 입을 딱 벌리고 그 초라한 노인의 완고한

표정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일두 하지 않는 놈이 쳐먹으면 그 곡식은 누가 길러내겠느냐. 이놈...썩 없어져라." 길산

은 다시 호미 자루를 쳐드는 운부대사의 손짓을 피하여 냉큼 달아나면서 대답하였다.

"소인은 주인의 응낙을 받고자 하였습니다만, 주인이 돌아오질 않아서요." 대사는 흙이

묻은 제 옷을 털면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이 밭의 임자는 운부이니라."

"어이구 대사님, 그렇다면 진작에 제가 밭을 매어드렸을 겝니다." 운부는 다시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호미를 들고 밭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길산이도 함께 김을 매려고 뒤

를 쫓으니, 운부는 다시 호통을 쳤다.

"이건 내가 일군 밭이니라. 네놈은 네 밭을 일구어라." "예?"

"저어쪽 풀밭을 들어내고 흙을 일구어서 네가 먹을 곡식을 가꾸어라." 길산은 멍청해 있

다가 그제서야 운부대사가 하는 말의 뜻을 뒤늦게 깨닫고, 귀틀집으로 돌아가 농기구들을

꺼냈다. 오랜만에 허리를 구부리고 땅을 파헤치며 농사일을 하자니, 원래가 훨훨 싸돌아다니

며 재간이나 팔던 광대 성질에 참으로 배겨나기가 힘들었다. 정오가 되니 배는 고프고 허

리가 짓눌린 듯하였고, 땡볕에 땀이 비 오듯 하였는데, 건너편의 운부대사를 돌아보니 이제

는 재와 거름을 지고 밭고랑 사이를 내왕하고 있었다. 길산이 당장에 호미를 내던지고 욕설

이나 퍼붓고 돌아서고 싶었으나, 아무리 야속하다 하여도 만폭동 운부암을 찾았을 때는 단

단히 결심했던 바가 있는지라 감히 운부에게 밉보일 짓은 할 수 없었다.

"대사님, 소인은 아직 식전인데 밥이라두 지어 먹구 일을 하지요." 운부가 밭에다 거름을

뿌리면서 중얼거렸다.

"한 끼니 먹기두 어려운 세상인데 꼬박 세 때를 찾아 먹으려느냐. 하루에 두 번 먹어두

사느니라. 두어 사래 더 갈구 나서 밥을 짓도록 하여라." 길산은 별수없이 일을 계속하였

고, 밥을 짓기 시작했을 때에는 거의 배고픔을 잊을 정도로 허기가 졌었다. 밥을 지어 운부

대사와 마주 앉아 먹는데, 운부는 아까보다는 훨씬 고집이 풀린 듯한 표정이었다.

"어때...일을 하구 밥을 먹을 먹으니 좀 맛이 있느냐?" 길산은 워낙에 양이 큰데다 허기

가 졌으므로 조밥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하고는 다시 솥바닥에 남은 누룽지까지 긁었다.

운부는 바윗돌에 앉아서 길산의 그런 양을 웃음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쪽에는 차를 심어야겠구나. 아직도 이 묵정밭을 옥토로 만들려면 품이 많이 들어야겠

다."

길산과 운부대사는 서로 어디서 온 누구임을 밝히지도 못한 채 자연스레 한식구가 되었으

니, 길산이 운부대사에게 그런 말조차 꺼낼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길산이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입을 열었다.

"대사님, 큰 절루 내려가셔서 젊은 것들의 공양이나 받으시든지, 아니면 행자 두엇 데려다

가 인가에 내려가 시주를 거둬오게 하시지요."

운부는아까처럼 노염을 보이지는 않고, 고개만 흔들었다.

"일을 하지 않는 자는 먹어선 안된다. 승려가 참선을 하더라도 일을 하지 않고 한다면, 그

것은 참선이 아니라 도적질이니라. 송홧가루 한줌이라도 거저 먹어선 안된다. 모두 하늘이

낸 것이니 수고 없이 어찌 공으로 먹을 것이냐. 너는 무엇으로 생업을 삼았는고?"

"예...저 재간을 팔았습니다."

"음, 창우였더냐?"

"예, 문화 고을서 살다가 구월산에 있습니다. 풍열선사께서 대사님을 찾아가 공부하라 하

셨습니다."

"풍열은 아직 월정사에 있는가?"

"저희들을 늘 염려해주시지요."

운부는 별로 유념하지도 않는 듯이 보였다. 운부대사는 자기가 먹은 식기를 들고 도랑물

로 내려가 씻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불쑥 말하였다.

"내게 배울 것이 뭐 있겠느냐. 예서 배곯지 말구 내려가 농사나 짓거라." 그러잖아도 허

송을 하는 듯하여 답답하던 길산은 무슨 검술이라든가 기운 쓰는 비결이라도 얻어들을까

하였더니 점점 맹랭한 말이 나오는 지라 역증이 발칵 치솟았다.

"농사요? 아니 농투성이가 되러 금강산 만폭동 골짜기루 찾아오겠습니까?"하니 운부는 대

답이 없었다. 니미랄 것. 농사를 배우려면 어루리벌을 찾아가 머슴을 살 일이지, 얼턱이 빠

졌다고 금강산을 찾아왔겠나 싶었다. 제 따위 쇠어빠진 늙은이가 무엇을 가르쳐줄까 의심

스럽더니, 불목하니로 부려먹으려는 수작이 분명하다고 길산은 생각하였다.

"일손이 늘었으니 아주 잘되었다. 이 뒷봉 풀밭을 올해에는 모두 개간해놓을 참이다. 내년

부터는 사람이 많아질지두 모를 테니..."

운부는 다시 거름 바가지를 들면서 일어섰다.

"자아, 그만 쉬었으면 일을 시작해라. 네 밭을 일굴 때까지는 내게 얻어먹는 격이니까."

길산은 혼자서 한숨을 푹 내쉬고는 호미를 들다가 참지 못하고 말을 뱉었다.

"대사님...저는...높은 공부를 배우고자 여기에 찾아온 거올시다. 저두 맨손으루 댓 놈은 상

대할 재간두 있습니다."

운부는 못 들은 체 밭고랑 사이로 걸어가고 있었다. 길산은 밭 가녘에 서서 계속 이야기

하였다.

"실은 제 동무들은 모두 구월산 화적당이우. 소인은 그냥 도적놈이 되기보담은 대적이 되

어 큰 일을 해보겠다구 여길 왔는데, 묵정밭이나 개간하며 허송세월을 하란 말이우?" 운부

는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어리석은 놈...예서 썩 내려가거라."

운부는 밭고랑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또 일군이 온 줄 알았더니 아주 못된 도적놈이 왔구나." 길산이 비록 성품은 좋은

바탕을 갖고 있었으나, 운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니 그저 의심스럽기만 하였다. 마음은 성

급하였고 무엇인가 자기를 이루려는 욕심만 급급하였던 것이다.

운부대사의 단호한 말에 길산은 예도 올리지 않고서 돌아섰다. 그는 투덜대면서 법당으로

돌아가 봇짐을 찾아 들고 운부암을 내려왔다. 운부암을 내려와 만폭동의 귀를 가득 채우는

물소리 가운데 잠깐 앉았으니 심경이 착잡하였다. 어디로든 찾아갈 데가 없었고, 구월산에

이 꼴로 되돌아가 동무들을 대하기도 쑥스러운 노릇이었다.

"정학이나 찾아가서 이 울적한 심사를 풀고, 북관으루 올라가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단발령을 넘을 떄 만났던 고성 사는 정학이 제 동네 자랑을 하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

다. 서로 힘자랑 내기로 맞붙었다가 사귀게 되었던 터였다. 그는 만폭동 계곡을 내려와 유

점사 쪽으로 트인 길로 걸었다. 고성 수자리골의 정학을 찾아가 보려는 것이었다. 산길 팔십

리를 걷기에는 해가 짧았으나 길산은 유람이나 온 기분으로 느릿느릿 걸었다. 금성산 아

랫녘을 지나노라니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숲 가운데는 벌써 어둠이 가득 차기 시작하였

다. 그러나 혼자서 걸어오는 동안에 길산의 마음속에는 차차 운부대사의 백발이 또렷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땡초 같으니라구...가르칠 게 없으니까 농사나 지으라구?" 투덜거리는 길산이었으나, 한

편으로는 월정사 풍열선사의 일러준 말이 떠올라 운부의 괴이한 언행을 웃어 넘길 수가 없

었다. 어딘가 알수는 없지만,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고성포로 흘러가는 남강이 지는 해에 곱게 물들었는데 벌판에는 인적이 없고 해송들이 구불

구불한 자태로 드문드문 서 있었고 단정학이 흰 나래를 펴고 내려앉곤 하였다. 멀리 고성

외곽의 작은 마을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우선 한동안 민가를 보지 못하였던 길산은 반가

워하였다.

"에라! 오랜만에 술이나 실컷 퍼마셔야겠다."

길산이 비록 옥에 갇혔을 때에 천한 백성들의 고난을 보고 깨달은 바도 많았으며 그런 이

유로써 입산하였던 것이었으나, 어찌 갑작스런 깨달음이 일관될 수가 있으랴. 생각은 앞서

있고 몸은 따르지 못하니, 대개 제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것은 뜻에 합당하게 사는 일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용기가 있으나 너그러움이 없고, 어질지만 지혜가 없으며, 절개가 있으나

남을 포용 못하고, 신의가 있으나 여럿을 다스리지 못하고, 충절은 있으되 경륜은 없는, 이

러한 넘치고 처지는 사람의 일들은 모두가 제 뜻과 사는 일이 한결같지 않음에 연유하는 것

이다. 마치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은 낭이란 이리와, 그와는 정반대인 패라는 이리가 서

로 부축하고 걷다가 사이가 떨어지게 되면 서지 못하는 관계와도 같다.

길산이 수자리말을 찾아가려고 길 물을 사람을 찾노라 두리번거리는데 마을 어귀에서 울

고 섯는 아이를 만났다. 큰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은 아니지만 길가에 주저앉아 연신 소매로

얼굴을 닦아내며 어깨를 떠는 것이었다.

"총각 말 좀 물어보세."

했으나 아이는 고개를 파묻고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길산이 더 묻기도 민망하여 잠시

서 있는데 아이는 한참 뒤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왜 그러우?"

"수자리말이 어느 쪽인가?"

"저쪽 삼일포 쪽으로 나가요."

하고는 다시 고개를 떨구는데, 길산은 그냥 돌아서서 가지도 못하고, "무슨 일로 그리 울고

있나?"

묻고 말았다. 아이는 대답 대신 빈 자루를 쳐들어 보이면서 푸념을 터뜨렸다.

"아이구, 이젠 우리 식구 어찌 살거나, 꼼짝없이 죽게 되었네." "총각 무슨 일인가, 혹시

내가 도움이 될지 아나?"

"예, 우리 아버지는 지난해에 고기잡이를 나가셨다가 폭풍을 만나 돌아가시고 모친과 어

린 동생과 제가 밭 몇뙈기와 고공살이로 연명하여왔는데, 지금 보리가 여물기도 전에 양식

이 간데없수. 종자까지 죽 끓여 먹고 나서 굶은 지가 이미 사흘째인데, 구휼미라두 얻어볼까

하여 관가에 갔더니 호적에 들어 있지 않다고 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호적이 있는 강릉까

지 가려면 도중에 모두 굶어죽게 되었고 또한 곡식을 조금 타낸다 한들 여기 있는 밭농사는

누가 짓습니까?"

때는 바야흐로 진달래 먹고 목이 멜 보릿고개였던 것이다. 길산은 왠지 모르게 가슴 언저

리께가 싸늘해지는 것이었다. 누구보다도 굶주림의 고통을 잘 아는 길산이었다. 굶은 배를

간장을 탄 냉수로 채우고서 탈박 속에서 울음이 나오는 채로 온 기력을 다하여 춤울 추던

저자바닥이 한꺼번에 지나쳐가는 듯하였다. 길산은 두말 않고 보퉁이에서 엽전꿰미를 꺼내

어 총각의 발 아래 던져주었다. 그리곤 휘적휘적 걸어가는데, 아이가 꿰미를 주워 들고 그의

뒤를 쫓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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