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이 달려왔다.
"또 한사람 나가네."
"이거 의원두 소용없으니...이러다간 모두 죽고 말겠군. 혹시 우리까지 고택골 가는 거 아
니우?"
"신이는 어디 갔어?"
"헌경이 아저씨께 유학님 분부 전달하러 갔는데."
"하는 수 없지. 나하구 같이 들구 나가세."
길산이 거적과 나뭇가지로 엮은 들 것 위에 시체를 누이고 앞에서 들었으며 정학이 뒤를
들었다. 토담 안으로 최헌경이 들어섰는데, 그뒤에는 사람을 등에 업은 정신이가 보였다. 최
헌경은 마루 위에서 조제를 하고 있던 설유징에게 말하였다.
"유학 어른, 야단났소이다. 어계원들이 모두 돌아가버려서 꽃재엔 마을 사람들뿐입니다.
모두들 마을로 내려오겠다면서, 집에다 불을 지른 놈들에게 앙갚음을 하겠다구 야단입니다."
설유징은 침착하게 물었다.
"어찌하다 일이 그리되었소?"
"예, 아까까지두 아무 일이 없었는데, 저녁나절에 환자 한 사람이 생겨났지요. 시름시름
오한이 있다고 드러눕더니 갱신을 못하구 앓기 시작했소. 모두들 귀신이 꽃재까지 붙어 올
라왔다구, 소란이 일어나 계원들은 말릴 새두 없이 하나 둘씩 빠져 달아났습니다. 그리구 마
을 사람들두 기왕에 병에 걸려 죽을 것을 집 잃고 한데서 고생하지 않겠다며 술렁입니다."
"그 사람이 오늘 앓기 시작한 환자인가?"
설유징은 정신이 업고 들어왔던 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그런데 또 누가 앓게 될지 모를 일이올시다."
"예방을 철저히 하고 조금만 조심하면 걱정없네. 병독이란 입으루 들어가는 게니까."하고
나서 설유징은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는 다시 토담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더니, "몰려들 오
는군. 어리석은 사람들 같으니..."
하는 설유징의 말을 듣자 최헌경과 정학 형제와 길산은 모두 담 밖으로 나가보았다. 어둠속
에서 움직여 오고 있는 무리들이 보였다. 설유징이 말하였다.
"내가 저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얘기하지. 만일 듣지 않으면 장서방 하구 정서방 형제가
맡아서 적당히 몽둥이 찜질을 해줘두 좋아."
설유징은 벗어두었던 중치막을 입고서 꾸역꾸역 몰려오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로 걸어갔
다. 그뒤를 길산이와 정학 형제가 뒤따랐고, 최헌경이는 설유징의 왼편에 나란히 따라갔다.
설유징이 그들을 막아서서 말하였다.
"왜들 내려오나?"
꽃재말 사람 중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우리는 이미 살기는 틀린 사람들이우. 병독이 퍼져서 모두 앓아 누울 판인데 이제 이슬
을 피할 집까지 잃었으니, 어디 타다 남은 집에라도 찾아들어가야겠소." "식구들을 데려갈
테야요."
"이러다간 모두 죽고 맙니다.|
제각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잠잠히 듣고 있던 설유징이 고함을 크게 내질렀다.
"예끼! 이 어리석은 놈들 같으니. 염병이란 병독이 옮아서 퍼져나가는 병이니 성해 보이던
자도 갑자기 앓게 마련이다. 또한 앓던 자도 병마와 싸워 이기면 살아날 수가 있지. 이제 너
희들이 이렇게 동네루 내려와서 섞이면 그야말루 모두 병에 걸려 죽게 될 게야. 활인은 우
리에게 맡기고 한 달포쯤만 동네에서 떠나 있으라구 그랬잖느냐." "달포 동안 뭘 먹구 살
란 말이우."
"내가 내일 여기 최서방과 함께 관가에 가서 군수를 만나 구휼미를 더 풀어내도록 할 터
이다. 어서들 올라가지 못하겠느냐!"
마을 사람들이 술렁이는데 그중 제법 혈기 남은 자가 있었던지 불끈거리며 나섰다.
"우린 못 올라가겠소, 죽어도 동네에서 죽을 테유."
"어째서 남의 동네에 들어와서 감 놓아라 배 벌려라 한단 말이우. 염병두 우리가 걸려서
우리가 죽을 텐데..."
"당신들이 무슨 관원이요, 상전이요?"
설유중은 앞에 섰는 마을 젊은이들이 떠들어대는 것을 보자, 옆으로 물러서면서 중얼거렸다.
"장서방, 치도곤이를 좀 해주게."
정학이가 먼저 나서더니, 그중 시끄러운 자의 멱살을 잡아서 벽에다 힘껏 밀쳐버렸다.
"말 안 들을 테여? 정말 죽구 싶다면 내 보내주까."
길산이도 옆에 섰던 자의 가슴팍을 거세게 밀어내었다.
"말 듣구 올라들 가시게."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린 자들이 더구나 힘깨나 쓰는 정학 형제와 길산을 어찌 당하랴. 슬
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물러가버리고 만다.
"어서 안심들 하구 며칠만 올라가서 고생들 하게. 이제 두고 보아, 모레쯤 되면 여기서 다
나아서 그리루 올려 보낼 사람들이 많이 나올테니까."
마을 사람들은 다시 꽃재 쪽으로 물러갔다. 설유징은 그들을 안돈시키기 위해 최헌경을
보내어 잘 타이르도록 하고서 정학 형제를 딸려 보냈다. 길산과 어계 총대가 교대로 밤을
새우면서 환자들을 돌보았고, 설유징은 마루 끝에 기대어 앉아 졸다가는 증세가 나쁜 환자
를 돌보고는 또 잠들면서 밤을 지새웠다. 아침에 설유징은 진미를 청원하러 관가에 가기 전
에 최헌경과 의논을 하였다.
"내가 안창 고을에서 왔으니, 군수가 나의 청원을 몹시 고까워할지두 모르겠네. 그렇지만
드러내놓고 화를 내거나 하지는 못할 터이지."
"저희 같은 상한이 얘기하는 것보다야 낫겠습지요. 고성군수는 부임이래 선정은 하나두
하지 못한 아주 용렬한 사람이올시다. 송사를 가리지 못하여 처리에 공평하지 못하였고, 공
연히 가벼운 죄를 범한 양민을 끌어다가 장형을 가하여 몇 명이 목숨까지 잃었다는 것입니
다. 특히 환곡을 빌려주었던 일이 트미하고 구휼미도 쓸데없는 일에 낭비한 것이 틀림없소
이다. 그리고 끛재말 사람들게 들으니, 진영의 수군역이 혹심하여 돈으로 무명을 사서 대납
한다는 것이오. 이러한 비위 사실이 있으니, 낱낱이 알아두셨다가 만약에 군수가 구휼미를
낼 뜻을 보이지 않으면 은근히 뒷전으로 협박을 해두 좋을 듯합니다." 설유징은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게 용렬한 자일수록 뒤는 질긴 법이니, 만약에 구휼미를 내어주고 나면 동네 사람들
을 시켜 선정가라도 지어 부르게 하지. 겉으로 모른 성싶어도 뒤에 가서 까탈을 부릴지두
모르잖겠나. 꽃재말말고도 산협에 기민은 많을 걸세. 자네두 함께 가겠나?" "그러지요. 이
마을 촌장두 데리구 가도록 하시지요." 구휼미를 더 청원하기 위하여 설유징과 최헌경과
촌장이 관가로 나갔고, 길산이와 총대와 정학 형제는 하루 종일 환자를 돌보았다. 열이 내린
환자가 있더니 저녁나절부터는 차츰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꽃재에서 가족을 데려다
상면시키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병이 나은 듯한 모양을 보고는 기뻐서 부여잡고 우
는 것이었다. 두어 사람이나 열이 내려서 모두 가족을 데려다 뵈었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설유징 일행이 돌아왔는데 의외로 일은 수월히 해결된 모양이었다.
총대가 물으니 최헌경은 대답하였다.
"조목조목 따져 들어가니 사또가 좌불안석이더구만. 설유학 어른이 참...말씀은 청산유수더
라구. 사또가 책방을 시켜서 군내 부호들을 모두 끌어들여 진미를 재량껏 내게 하더군. 지필
묵을 내어놓고 적어대라 하니 허는 수 있는가. 모두들 적어내데. 내일 아침까지 하인들을 시
켜서 미곡을 보내올 걸세. 사또 눈치가 진미를 낼 것이 창고에 있긴 하지만 부호들에게서
빼내구 관곡은 제가 착복할 기미더군. 우리야 무슨 상관 있나, 구휼미만 타내면 되었지." "
어이구 공연히 성님께 부추김당해 쫓아와가지구 제대루 좋은 일두 못하구, 오늘은 여차직
하면 팽개치구 달아날 참이었소."
정학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말했고, 길산은 설유징에게 오늘 원기를 회복한 환자들이
있어 분부대로 가족을 데려다 보여주었다고 말하였다. 설유징은 그자들에게 가서 진맥을 해
보고 나서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이제 병후 조리만 잘해낸다면 이 사람들은 완전히 쾌차한 사람들일세. 내가 독서하는 틈
틈이 익힌 의술이지만 이처럼 보람을 느낀 적이 없었네. 참으로 좋은 일을 시켜주어 자네들
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네."
열흘쯤이 지나서 네댓 명이 더 죽었으나 시초부터 병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대
부분 쇠약해진 대로 염병을 떼쳐버린 듯하였다. 아직 앓는 이들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았으
니, 병후 조리를 제대로 못해낸 탓인 듯하였다. 그동안 함께 활인에 나섰던 설유징과 최헌경
과 길산과 정학, 정신 형제들 사이에는 각별한 정이 생겼다. 꽃재말 사람들도 유학 어른이라
부르며 무슨 일이든 가지고 와서 상의하였고, 최헌경이는 특히 노인네와 아이들이 좋아하였
으니 옛말 재조가 구수했기 때문이었다. 원근 사방에는 꽃재말에 역병 돌았단 말과 도사가
와서 활인했다는 과장된 소문까지 떠돌았다. 처음에 내빼버렸던 고성포 어계 사람들도 나중
에는 하나 둘씩 되찾아와 마을에 새 집을 세우는 일을 도왔다. 정학 형제는 그냥 헤어지기
가 못내 섭섭하다며 길산과 최헌경과 설유징을 수자리골 제 집으로 데려갔다.
간혹 형제가 집에 왕래는 하였어도 농사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건만, 사정을 아는 어계 동
무들이 품을 내어 밭을 갈고 두엄도 내고 하였었다. 정신이가 먼저 가서 어머니를 도와 닭
을 잡고 소주를 걸러 손님맞이 준비를 했고, 점심때쯤 하여 그들은 수자리골로 나갔다. 집에
당도하니 오랜만에 맡아보는 고기 냄새라 그들은 회가 동하였다.
"살진 마늘에다 톡 쏘는 소주를 마시면 장내가 시원히 뚫리겠네."하면서 최헌경이는 주먹
코를 킁킁거렸고, 설유징도 술 생각이 간절한 모양이었다.
"허허, 술 냄새를 맡아본 지가 벌써 십 년은 되는 것 같군." 부엌에서 도마질을 하던 학
의 모친이 바깥을 기웃이 내다보니 하나는 유건 쓴 선비 행색이요, 또 하나는 갓 쓴 양반
차림인지라, 주눅이 들어 뭐라고 맞이할 말을 찾다가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 눈치를 채고서
최헌경이 주변 좋게, "자당께서 이런 걸귀들 치레하시노라 욕보십니다."
라고 풀어놓았다. 그제서야 학의 모친은 웃음기가 돌며 건성 치마를 싸쥐고 물 묻은 손을
닦는 시늉이었다. 설유징이 두 손을 맞잡고 공손히 인사 올리니, 모친은 매우 당황하였다.
"태산 같은 아드님을 둘이나 두셔서 얼마나 믿음직하십니까." "아직 철이 없지요. 나으리
께서 꾸짖구 가르쳐주셔요." 설유징은 아직도 그 공손한 태도를 고치지 않고서 말하였다.
"저는 정서방의 동무 되는 사람입니다. 비록 먹물은 조금 먹었다 하나, 나으리란 말씀을
들을 위인이 아니올시다."
설유징이 껄걸 웃자, 정학의 모친은 더욱 송구스러워서 연신 허리를 구부렸다. 정학이 다
시 길산의 어깨를 밀면서 말하였다.
"어머니 들으셨지요? 지난번에 공수원서 매부를 살려주신 성님입니다. 왜 나허구 기운자
랑 했다구 그랬지요."
"오라 장서방이로구나."
하는데 길산이는 맨땅에 넓죽 엎드려 문안 인사를 드렸고 모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게. 땅바닥에서 큰절은 원..."
이렇게 수월하고 편하게 인사가 오가는 모습을 보고 최헌경과 설유징은 얼결에 눈을 맞추
었다.
"얘야, 그런데 아까 관가에서 나졸이 왔더라. 꽃재에서 아직 안 돌아왔느냐구 묻던데..." "
제놈들이 우린 왜 찾어...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 앉읍시다. 어머니, 아무거나 빨리 좀 주시
우. 출출해서 회가 요동이우."
"너는 나와서 물 좀 길어라."
모자간의 오가는 말을 들으며 그들은 형제들의 방에 들어가 앉았다.
"헛허, 뭐니뭐니 해두 효도하려면 우리 정서방 얼른 장가가야겠군." 최헌경이가 그리 깨
끗하지 못한 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말하였다.
"밥 잘 먹구 일 잘하겠다, 인물 훤칠하구 기운이 장사요, 사내 중에 사내인 학이를 내가
중신이나 좀 들까아?"
빈 상을 들고 오던 정신이가 최헌경의 말을 듣고 끼여들었다.
"어유 말씀 마시우. 우리 언니는 처자만 보면 염라국의 귀졸이 되지요." "아니...그러면 정
서방이 부끄럼을 탄다는 말인가?"
설유징도 웃으며 한마디 하니 정신이 손을 홱홱 내저었다.
"그 반대입죠. 우리 언닌 여자를 뱀보다두 싫어합니다. 그래서 애꿎은 저까지 몽달귀신 될
모야이우."
물을 긷고 손을 닦으며 들어와 앉던 정학이가 아우를 타박하였다.
"얘, 참말 내 평생에 어디 너 장가드나 두구 봐야겠다." 술과 안주와 밥이 들어와 객쩍은
농담이 잠깐 끊기는데 밖에 더그레자락이 보이더니 나졸들이 쑥 들어선다. 뒤를 따라서 갓
쓴 채수염쟁이가 헛기침을 하면서 들어섰다.
"정서방, 책방 어른 오셨네."
정학이 한참 국밥을 뜨다가 엉거주춤 일어나며 허리를 굽신해 보였다.
"아니 어르신이 우리 집엔 웬일이슈?"
책방은 다시 밭은기침을 하고 나서, "손님이 오셨다지?"
"그러우...이거...올라와 점심 좀 드시지요."
"손님들 중에 어느 어른이 유학님이십니까?"
하다가 책방은 설유징의 머리에 얹힌 유건에 눈이 멎자 허리를 급히 숙이고 머리는 치키면
서 말하였다.
"문안이오. 소생 이 고을 사또의 책방으루 지내는 송가올습니다." 설유징은 소주잔을 기
울이면서 말하였다.
"그런가? 자네가 어째 나를 찾나?"
"예,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꽃재에서 병자를 진휼 활인하신 것을 사또께서 아시고 좀 뵙
자 하십니다. 관의 일로 그리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시회나 함께 하면 뱃놀이를 가시자는
것입니다."
설유징은 멋쩍게 픽 웃었다.
"모를 일이로군. 사또께서 이미 내 청원을 들으시구 구휼미까지 거두어 주신 터에 부르실
일이 어디 있겠나?"
"그저 샌님과 교유를 하자는 뜻입니다."
"내야 원래 안창에 잠시 머물고 있지마는 글이나 읽는 사람이 고을 수령과 교유하다니...
안될 말일세. 사또의 후의를 감사드린다구 자네가 잘 아뢰어주시게." 책방은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글쎄요, 사또께서 요즘 군내에 돌아가는 공론을 들으시고 샌님께는 공명의 계자를 내리
신답니다. 그리고 저희를 비롯한 향리들이 이번 진휼에 관한 사또의 선정을 기리는 비를 세
울까 하여..."
책방의 말이 거기까지 갔을 때에 설유징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최헌경도 빙긋 웃고
있었고, 책방은 영문을 모르겠던지 멀뚱한 시선으로 설유징을 쳐다보았다.
"그래! 내게 계자를 내린다면 직함은 무엇이라던가?" 웃음을 그치지 않고서 설유징이 묻
자, 책방은 얼김에 따라 웃으며 말하였다.
"예, 풍헌을 드린다 하옵니다."
"그리고 사또게서는 선정비를 세워드린단 말이렷다." "지금 좌수와 아전들이 전곡을 염출
하구 있습니다. 선정비에는 샌님과 최서방 등의 일도 올라갈 것입니다."
거칠게 어깨를 떨며 웃어대던 설유징이 웃음을 뚝 그쳤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책방을
노려보았다.
"이리 좀 가까이 오게. 내 자네에게 줄 것이 있어."
책방은 가까이 다가가서 상놈들 사이에 동저고리 바람으로 동석하여 술을 마시고 있는 이
괴이한 선비의 곁에 고개를 내밀었다.
"네 이놈!"
다짜고짜로 욕설이 떨어지며 설유징이 책방의 채수염을 힘껏 죄어 잡았다.
"아...아...이게 무슨..."
책방은 하도 놀랍고 창피하여 눈을 희뜩이며 입을 벌렸다.
"네 이놈 듣거라. 이 설유징이가 꽃재말에 가서 진휼한 것은 한고장 사람 사이의 의리로
한 짓이요, 전혀 허명을 탐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환로에 나가는 것조차 버린 내가 글깨
나 읽는 유자로서 공명의 계자를 얻겠느냐, 내가 무슨 초상집 개라더냐. 이것은 필시 너희
사또의 생각이 아니라 너 같은 쥐새끼들의 간계이리라. 나라의 하늘 같은 녹을 받고 백성을
자식같이 아실 관장께서 그런 용렬한 안을 내실 리가 없다." "아...이것...놓구 말하시우."
"가만히 있거라, 더구나 선정비를 세운다고? 아무리 명관이 다스리는 고을이라 하더라도
폐단이 있게 마련이다. 이미 관장 된 자는 자기의 잘못을 드러내어 고치고 잘한 것은 스스
로 감추는 법이다. 어버이가 자식 사랑한 것을 자랑삼는 꼴을 보았느냐. 대개 선정비나 세우
는 짓은 백성들의 피와 땀을 그것으로 가리워보고자 함이다. 벌거벗고도 제 눈만 가리면 수
치스럽지 않다는 어리석은 짓이다. 너희 아전 향품배들이 쥐새끼처럼 나서서 남징하려는구
나. 이것도 필시 사또의 뜻이 아닐 게다. 위로 임금을 섬기고, 학문을 쌓아 관직에 오른 사
람이 그렇게 뻔뻔할 수는 없다. 내가 네놈의 똥이 가득 찬 뱃속을 청정한 샘물로 씻어줄 터
이니, 보약인 듯이 좀 마시구 가거라."
하고 나서 설유징은 곁에 놓였던 대접을 들어 책방의 수염을 힘껏 당긴 뒤에 벌려진 입에다
사정없이 부어버렸다. 꿀꺽이며 묘한 소리를 내면서 냉수 한 사발이 책방의 목구멍을 넘어
갔다. 설유징이 수염을 탁 놓아주니 책방은 얼른 소매로 입언저리를 닦아내고 숨이 찼는지
열이 났는지 거칠게 헐떡이더니 재빠르게 달아나버렸다. 이윽고 여럿의 웃음이 한꺼번에 터
져나왔다.
"보았나, 보았어? 꼭 홍수 때 건져낸 새앙쥐 꼴이더라, 눈알도 동글동글하고 코는 뾰죽,
수염은 성긋성긋, 영락없는 쥐새끼여."
"쥐가 아니라 고게 여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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