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집들이 세 채가 나란히 있었는데 그 양쪽 가녘에 횃불을 비춰든 놈이 둘이 서 있었
고, 가운데 마당에는 활 모양으로 벌려 선 달마산 패들이 번득이는 환도며 장창이며 쇠몽치
들을 겨누고 다가들었다. 백운산패 다섯은 첫봉이가 정면 가운데 서 있는데, 오른편에 변가
왼편에 둘봉이 그리고 양쪽 가녘에 두 사람의 졸개가 허술한 농기구를 잡고 막아섰다. 달마
산 패서리의 부두령은 드디어 마음이 놓였는지 껄껄 웃어젖혔다.
"허허허, 난 또 저승사자가 온 줄 알았더니, 백운산의 들쥐새끼들이구나. 그뒤에 제법 깊
은 골짜기가 있으니 하나씩 뛰어내려 육젓이나 되어라."
하면서 좌우에 손짓하여 벌려진 열을 죄었다.
"모두 무기를 버리구 그 자리에 꿇어앉으면 살려주겠다."
부두령이 자신만만하게 얼러댔는데, 그때에 뒤쪽에서 찌렁찌렁한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누가 살려달라는가 두구 보자."
모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거구의 장정이 저희 두령 수돌이의 목덜미를 빈 자루 잡듯이
가볍게 쳐들고 한 손에는 몽둥이를 건들거리면서 섰다.
"모두 항복하지 않으면 이놈을 선 채루 꺾어버릴 테여."
수돌이는 아랫도리를 벌거벗었고 뒷결박에 입막음을 하고 있었는데, 장정이 덜미 잡은 손
을 우쭐거릴 적마다 발끝이 달싹달싹 쳐들리는 것이었다. 부두령이란 자, 하 어이가 없어져
서 멀거니 바라보다가 그래도 병장기 잡고서 한번 휘두르지도 못한 채 내던지기는 싱거웠던
지 담보도 크게 열에서 빠졌다.
"이놈은 내가 맡을 테다, 너희는 저놈들을 밀어붙여라."
"어, 그놈 과연 배알이 있는 놈이로다."
선흥이가 아직도 몽둥이를 건들거리며 태연히 선 채로 중얼거렸고, 부두령은 장창 자루를
쥔 양손에 침을 한번 뱉고서는 슬슬 겨누면서 걸음을 떼었다. 마당에서 첫 합이 붙는지 환
도가 서로 부딪는 쇳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격려라도 받은 듯이 부두령이란 놈이 장창을
좌우로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며 선흥이에게 달려들자 횃불 들고 쇠몽치 들었던 양편의 두 놈
도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병장기 들었으되 무술이 따로 있나, 그저 휘두르고 찌르고 내려치는 것이 고작인 바에야
힘센 놈이 염라 태수렷다. 선흥이가 휘두르는 참나무 몽치가 어찌나 세었던지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는 듯하며 허공에서 빡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부두령의 펄떡거리던 몸짓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자는 버얼써 면상을 얻어맞고 박살이 나서 땅에 처박혀 있었다.
"또 덤빌 테냐?"
선흥이가 고함을 지르니 달마산 패들은 모두 멈칫하였다.
"대항하는 놈들은 모두 이 꼴이 될 게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장연의 강선흥이란 사람이
다."
도적들 사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선흥이는 참나무 몽둥이도 땅에다 내던지고
두 손을 툭툭 털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였다.
"손에 든 걸 모두 내버려라."
하나씩 둘씩 환도와 장창이며 몽둥이를 발 아래 떨어뜨린 달마산 패들 사이로 첫봉이와
변가가 헤치고 들어가 그것들을 거두어들였다. 선흥이가 말하였다.
"나두 일찍이 양민으로 굽히고 살려구 애를 쓰다가, 관의 침탈을 피하여 만부득이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몸붙일 곳을 찾던 중에 너희 산채가 기중 든든하고 포실하다기에 주인이 되
러 올라왔으니, 내 수하가 될 놈들은 여기 남을 것이요, 싫은 놈은 다른 곳으로 떠나거라.
해치거나 막지는 않을 터이다."
병장기를 모두 내던진 달마산 졸개들이 우물쭈물하더니 뭔가 얘기가 오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하나 둘씩 무릎을 꿇었고 그중에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다시 절하며 말하였다.
"저희들은 이미 식구들과 이별하고 고향을 떠난 지가 수삼 년이 되었습니다. 아니면 죄를
짓고 경을 친 놈들이라 다시는 양민이 될 수 없습니다. 저희 중에는 남의 사노로서 주인집
을 도망 나온 놈들도 많습니다. 모두 근거를 잃은 사람들이니 이제 어디루 누굴 찾아가겠습
니까. 바라옵건대 강장사께서 우리를 거두어주신다면 모두 수하가 되어 산채에 살고자 합니
다. 저희 두령이 되어주신다면 기꺼이 모시겠습니다."
선흥이가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모두의 생각이 그러한가?"
이어서 예, 하며 달마산 졸개들은 소리를 합하였다. 선흥이는 다시 앞으로 나섰던 자를 가
까이 오도록 불렀다.
"네 이름이 무엇인가?"
"업복이라구 합니다."
업복이란 사내는 제법 나이꼴이 들어 보였는데 아직 소두령이었던 모양이었다.
"양식은 충분한가?"
"예, 두어 달치는 장만되어 있습니다."
"학령말구 또 목 지키는 데가 있나?"
"신천 다락내 못미처서 한 군데가 있고, 해주 지경 문산 고개에 또 한 군데가 있습니다만,
역시 학령목이 제일 짭짤합지요."
첫봉이와 변가가 선흥이 곁으로 올라왔다. 선흥이가 업복이에게 일렀다.
"아직 날이 새지 않았으니...... 모두들 재우도록 하여라. 인사는 나중에 서루 나누기로 하
고......"
"이놈들이 두 마음을 품지 않을까?"
변가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는 모양이었다. 곁에서 업복이가 흘리는 말이었다.
"이제 산채가 장사님들 손에 쑥밭이 되어 임자가 바뀌는 판인데, 어느 누가 감히 대적하
려 하겠습니까. 모두들 직심은 있는 아이들이니 염려 놓으십시오."
뒷전에 나와서 서성대던 고만이가 첫봉이를 발견하고 반색을 하며 달려들어 소매를 부여
잡았다.
"어디...... 다친 데 없수?"
"응, 임자는 수돌이허구 신접살림 재미를 좀 보았는가."
"아이 이런 능청 보아. 제 계집을 써서 묘안을 내고서도 미안하단 말은 없구......"
지분덕거리는 고만이를 밀어 세우며 첫봉이가 중얼거렸다.
"가만있자, 이 사람이 안 보이는걸."
"누구요...... 아니, 그러구 보니까 우리 오라버니가 어디 가셨나?"
첫봉이가 변가에게 다그쳤다.
"변서방, 칠성이는 어찌되었수?"
변가는 할말이 없는지 돌아서면서 중얼거렸다.
"당했소이다."
"뭐예요...... 어찌되었다구요?"
고만이가 갑자기 변가에게 달려들어 저고리 자락을 잡아당겼다. 선흥이가 고만이를 떼어
첫봉이에게로 밀어주었다.
"죽은 사람이야 지금 와서 애통해해두 소용없어. 자, 업복이하구 몇이서 시체를 수습허지."
고만이가 몸부림을 치면서 곡을 터뜨리고 첫봉이는 위에서 꽉 껴안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서 연신 달래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다 험한 산사람 노릇을 하려니 저승이고 이승이고 창졸간에 오락가락하지 않
아. 내가 있잖어. 나두 식구를 하룻밤 사이에 잃은 사람이여."
첫봉이는 고만이를 껴들고 초가의 뒤꼍으로 데리고 갔다. 선흥이가 결박된 채로 마당에
나둥그러져 있는 수돌이를 내려다보면서 걱정하는데 변가가 불쑥 나섰다.
"그 자식일랑 내게 맡기시우. 내가 그놈께 포한이 많소이다. 온갖 설움을 당하며 쫓겨다녔
으니 이번엔 내 손으로 목을 쳐야겠수."
"허...... 벌써 반죽음이 되어 손대구 뭐구 할 필요가 없겠네."
선흥이가 그래도 보기가 딱하여 한마디 던지자 변가는 환도를 주욱 뽑았다.
"아니오, 이놈은 성정이 간사하여 그냥 두었다가는 화근이 되고 맙니다."
"둘봉아, 네가 데리고 가서 계곡에다 던지구 오너라."
선흥이가 이르니 둘봉이는 짜른 칼을 집어들고 다가서서 수돌이의 결박을 풀었다. 그리고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우니 수돌이는 비틀거리면서 걸었다. 둘봉이는 수돌이의 꼴을 보니
차마 칼날을 날릴 생각이 사그라지는 것이었다. 수돌이는 달마산 산주라기엔 너무 초라하였
고, 머리가 깨져서 처참한 몰골이 되었으니 그냥 내버려두어도 성한 몸이 될 것 같지는 않
았다. 둘봉이는 수돌이를 앞장세워서 계곡의 끝에 보이는 풀숲으로 데려갔다. 다리 옆에 서
서 발길을 한번 냅다 지르면 수돌이는 낙석 구르듯이 떨어져 급한 물살에 쓸려 내려갈 것이
었다. 그는 칼을 이손 저손으로 옮겨 잡으면서 망설였고, 고개를 돌려서 그런 양을 보던 수
돌이가 목이 콱 잠긴 소리로 애원하였다.
"살려주."
"나두 내 뜻이 아니니 원망 말어라."
"그냥 보내주시면...... 다시는 산채에 얼씬을 않겠습니다."
둘봉이가 칼을 내려뜨리고 스스로 혀를 찼다.
"젠장할...... 나두 모르겠네."
하는데 수돌이가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았는지 둘봉이의 아랫배를 무릎으로 쳐올리고는 외
나무다리를 향해 뛰었다. 둘봉이는 숨이 턱 막혀서 뒤로 넘어졌다가 간신히 일어났다. 그가
칼을 집어들고 쫓으려는데 벌써 수돌이는 외나무다리의 중간을 뒤뚱거리며 건너는 중이었
다. 둘봉이가 이제는 놓쳤구나 하는데 뒤에서부터 장창이 날아가 수돌이의 등을 꿰었고 그
는 소리를 지르며 다리 아래 어둠속으로 먹히어 들어갔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군."
둘봉이의 뒷전에서 변가가 말하였다.
"아무래두 아우님이 살려 보낼 것 같아서 내가 뒤를 따라나왔소. 탑벌서 백운산에 올라온
이래로 우리가 저놈 등쌀에 하루도 편하게 발뻗고 자지 못했고, 학령 같은 좋은 목까지 빼
앗겼지. 칠성이두 목숨을 잃었는데 수돌이놈을 살려 보낼 수야 있나."
그날부터 달마산에는 주인이 바뀌었건만 누구도 선흥이에게 대적하거나 모반하려는 눈치
는 보이질 않았다. 졸개들은 그야말로 천하에 몸붙일 데 없이 세상을 등진 자들이라 누가
통솔을 하건 관계하지 않았으며 또한 선흥이가 성질이 수더분하고 마음 씀새가 굵직하여 졸
개들께 너그러웠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미더워하였다. 선흥이와 첫봉이들은 애초부터 계획
해왔던 불타산의 심백이네 산채를 들이칠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 선흥이네는 이제 백운산과
달마산 식구들을 합하여 그 가솔까지 친다면 근 삼십 남짓 되는 도당을 이루게 되었다. 비
록 작은 형세라 할 수는 없으되 불타산의 심백이네 일당은 그래도 사노와 중놈들이 반이 넘
으니 기강이 제법 서 있었고, 또한 심백이가 두령통솔을 잘하였으므로 섣불리 넘볼 수는 없
는 노릇이었다. 불타산 지리와 사정을 잘 아는 달마산의 소두령 업복이와 백운산 변가가 선
흥이, 첫봉이에게 많은 허실을 알려주었다. 특히 첫봉이와 변가는 함께 이마를 맞대고 계교
를 짜내는데 둘의 묘안은 속내가 잘 맞아떨어졌다.
일찍이 불타산에는 견불사, 천불사, 해림사, 자비사, 임해사, 칠봉사 등의 절이 있었는데,
특히 임해사는 청석산 봉수대에서 고산 사거리에 이르는 너른들을 사찰 전장으로 소유하고
있어서 부유하였고 천불사는 불타산 기슭 창암골에 있었는데 목감원과 용두원 근처에 토지
가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주지들은 고을 수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몰락한
사류나 향족보다는 제법 권세가 있었다. 창암골 서쪽 불타산의 높다란 바위 봉우리가 모여
서 대를 이룬 곳에 불타산성의 유지가 남아 있었다. 산성 안쪽에는 임진란 때에 많은 사람
들이 피난하였던 깊숙한 바위굴이 있었으며, 곁에 천년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물론 인근 사람들은 그곳에 수상한 자들이 살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산성 가운데 통
나무를 잘라 찱덩굴과 진흙으로 세운 귀틀집들이 몇채 서 있었고, 암자에서는 가끔 법석이
는 가무 소리가 들릴 뿐 예불을 드리는 기색은 없었다. 이곳이 바로 심백이 일당의 산채였
던 것이다. 관에서도 소문에만 접하였을 뿐 실제로 충돌을 일으키거나 관인을 상해한 적이
없으므로 오히려 덧들일 것만 걱정한 터수여서 심백이네는 옹진, 강령 등지로 나아가서 부
잣집 털이를 하였고, 백주에도 가사장삼을 하고 노상에 섰다가 등짐장수나 차인패를 벗겨먹
기도 하였다.
심백이에게는 실로 중요한 자가 있었으니, 일찍이 수양산 망해사의 보경선사 밑에서 행자
노릇을 때려치우고 떠날 때 짝패가 되었던 십년 연상의 법호라는 걸승이었다. 심백은 여환,
묘정과 더불어 보경선사의 제자였다. 묘정만이 불가의 정도 수행에 들어섰고, 여환은 민간의
잡도라 하는 것과 섞여 들어갔으며, 심백은 스스로도 파계승임을 자처하였던 것이다.
심백이 사노의 소생임은 이미 알려져 있거니와, 보경선사는 특히 도망쳐 나온 노비들을
불제자로 많이 거두었는데 묘정이 그러했고, 여환이 역시 사노였으며, 훨씬 전부터 종적을
알 수 없는 길산의 친아비 보라는 이도 그의 구제를 받았던 것이다. 심백이 행자 노릇을 때
려치운 것은 보경선사가 지적한 대로 속계에 대한 원한이 깊이 사무쳐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중이 민가에 재를 올린다는 구실로 드나들며 젊은 과부와 사통하여 생겨난 생명
이었다.
그들은 갓난 심백이를 절에 맡기고 행방을 감추어버렸는데 절의 밥붙이들이 천덕꾸러기로
길렀다. 그러나 심백이는 자라나면서 눈치가 빠르고 행동에 조심스워서 곧 노승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으며, 말년에 쓸쓸히 보내는 노스님들께 어리광을 부리며 손자처럼 자라나다가 자
연스럽게 동승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승려들로부터 그 몸이 원래 불륜의 씨요, 천
한 사노들에게서 자라났다 하여 조롱과 멸시를 받았고, 철이 들면서는 아무와도 친분을 나
누지 않는 음울한 자가 되어갔다. 심백이는 그러나 겉으로는 조용하고 행동이 조심스러운
승려였다. 그가 수양산 망해사에서 수양중에 보경선사께서 그를 평하기를,
"심백은 총명하여 화두를 던지면 즉시로 깨닫고 답하는 듯하나, 실지로는 겉으로만 그럴
듯 꾸밀 뿐이요 알맹이가 없다. 진심이 빠져 있으니 법의를 걸치고는 있으되 그것도 시늉뿐
이로다. 원한이 가시면 크게 깨우칠 것이요, 그대로 지닌다면 스스로에게나 중생에게나 독약
과 같은 자가 될지도 모른다."
하였다는 말이 있었다. 과연 그 평은 심백에게 꼭 들어맞아서 재령 묘음사의 태자원에서 주
승을 살해하고 재물을 탈취하여 법문을 일단 떠났던 것이었다.
그와 짝패가 되었던 걸승 법호는 일종의 기인이었으니 체구가 왜소하여 팔다리가 짧고 머
리는 앞뒤로 튀어나와 남보다 컸으며, 늘 말없이 염주알만 헤아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늘고
긴 눈은 언제나 반짝이며 주위를 끊임없이 살피는 듯하였다. 그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
으나, 관북의 세습 무녀의 자식이라는데 대단한 야심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두통
을 앓고 있어서 뒤로 벌렁 자빠져 발작을 일으키고 몸서리를 치다가 깨어나곤 하였으니, 이
런 고질병이 법호가 한군데 몸담고 수행하지 못하고 객승으로 떠돌아다닌 이유가 되었을 것
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음울한 성정이 서로 통하였던지, 심백이는 법호가 발작을 일으
킬 적마다 곁에 붙어 앉아 간병을 극진히 해주곤 하였다. 심백이가 걸승과 사노 몇 명을 이
끌고 불타산 계곡을 찾았을 적부터 법호는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있었다. 심백이
는 우선 천불사 주지라는 자가 도가 높거나, 바르게 수행하였다면 그런 일이 없었겠으나, 자
기도 밑이 구리고 불자로서 차마 하지 못할 부녀자 사통을 하고 있었으니 어쩌지 못하고
심백의 행패를 감수하였다. 심백은 천불사의 암자인 창암골 천년암의 승려들을 쫓아 내려보
내고 들어앉아, 한편으로 법호를 보내어 주지를 달래었다. 탐욕스런 주지는 법호의 권유대로
심백을 절 장토의 마름으로 삼았다. 천불사의 토지를 소작해 먹는 양민 가호가 용두원에서
마리포까지에 삼십여 호나 되었으니 수완 있는 마름이 필요하기도 하였다.
심백이는 다시 임해사 주지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한편 핍박하고 법호를 보내어 구슬려서
고산 사거리 근처의 사찰 장토를 관할하게 되었다. 심백이는 그로부터 천불사, 임해사 두 주
지들의 멱통을 딱 움켜쥐었고, 불타산 기슭의 양민들까지 그 생살 여탈권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그야말로 불타산의 천왕이 된 심백이는 천년암을 본거지로 하여 옹진, 강령 등지를
드나들며 벌이를 하였고, 장물을 처분하기 위해 송도나 양주까지 원행을 나가는 형세를 이
루었다.
법호가 지난번에 마바릿짐을 싣고 양주로 나갔다가, 화승총 다섯 자루를 구입하여 왔으니
활이나 창, 칼 따위가 고작인 예사 화적패와는 비교가 안되게 병장기를 갖춘 셈이었다. 심백
이는 이제 비좁은 산골짜기를 벗어나 해안으로 뻗어나가기를 원하고 있었고 조니포와 소래
골이 밀상의 목임을 알고는 우선 첫봉이네를 덮쳤던 것이었다. 그는 법호의 권유대로 마리
포 쪽에 배를 대어놓고 송도의 예성강과 강화의 경강 어귀와 평양의 대동강 어귀를 오르내
리는 주상들을 덮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아직 형세를 불리기에는 불타산은 별로 좋은 자리
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서를 달리는 연봉은 해서에서 가장 길었지만 골이 깊지 못하
고 높은 주봉이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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