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24 1993. 3. 1 (월)
커다란 유리창문 너머로 너르게 펼처진 공간.
짓푸른 바다는 천연스레 누워있고, 산자락은 넌지시 엎드려있고, 하늘은 도도하게 푸르른 풍경화이지만, 또한 가슴 시린 허허로움이 가득한 풍경화이기도 하다.
허허로움이 가득찬 풍경화로 비추이는 정서는 내 일상에 유모어가 메마른 탓이다.
술마셔 과장된 몸짓으로 남발되어 곧 소진되고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일상중에 자연스레 배어있는 유모어감각.
긍정과 낙관과 인생에 대한 신뢰에서 그런 유모어는 싹이 트는 것임을 나는 아는데.
J의 말.
"내 몸 속에서 무언가 자꾸 메말라가고 있는걸 느껴요."
이것은 육체적 상태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어떤 소진감, 이제 지는 해를 바라보는 년배의 갱년기적인 허무감이 배어있는 허무로움의 한마디가 아닐수 없다.
프랑스 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
'아담스 패밀리'와 같은 톤의 영화.
피카레스크 취향의 괴기스런 얘기지만 그곳에는 유모어가 있다.
삼일절, 할아버지 기일.
16825 1993. 3. 2 (화)
휴일 회사나가서 몇가지 일을 처리하고 오후에 비디오 하나 빌려들고 큰 집으로.
'마이 걸'
매력적인 소녀의 성장이야기.
나스타샤 킨스키의 어린 시절이 연상되는 눈도 크고 입도 크고 시원하게 어여쁜 여자아이.
어머니는 늦게 돌아오시고, 가야숙모등과 둘러 앉아 예배.
英이는 나중 밥을 먹는중에 어슬렁 나타난다.
아이들 오늘부터 새학년 신학기.
英이 대학생활을 공부쪽으로 돌리기.
俊이 수학과목에 대한 자세 바꾸기.
기도.
16826 1993. 3. 3 (수)
Y과장 없으니 당장 혼란이 생긴다.
해상크레인 임대관계의 서류 찾는다고 법석.
바쁜 일과 보내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英이에게 고함을 지른다.
학점관리등에 대하여 묻는 아비에게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태도.
아침도 먹지 않고 눈물을 훔치며 학교로 나서는 英이.
그리고 그것이 안쓰러워 남편이 원망스러운 J.
16827 1993. 3. 4 (목)
결재함에 가득 가득 쌓이는 서류들.
많은 ORDER와 도면들, 도무지 진전이 있을법하지 않는 산적한 사안들, 그리고 계속 걸려오는 전화들로 일과는 바쁘다.
그러나 내마음은 다른 것으로 초조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수산대학 전화.
英이가 가르쳐준 번호는 엉터리이고, 교환을 통하여 어렵사리 연결된 미생물학과 사무실.
조교는 학점은 가르쳐주지 않고 본인을 과사무실로 보내달라는 얘기인데, 그의 어투에서는 무언가 찜찜한 암시가 느껴진다.
당장 학교로 쫓아가고 싶은 충동을 가라 앉히려고 일에 몰두해보지만 일이 손에 잡힐리가 없다.
英이 귀가시간 맞추려고 인사과장과 술을 마시고 돌아와 英이를 앞에 앉힌다.
딸네미의 변명이라고 하는 얘기인즉슨, 성적표 성적표하는 아빠에게 가짜로 학점표를 만들어 주었고.. 어쩌고...
어디까지 딸네미 말을 믿어야 할지.
암담한 심정으로 쓰러져 잠든다.
거짓말 투성이.
英이 대학생활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지.
무언가 비젼이 있는 것인지, 그저 쾌락만 좇아 희희덕거리다가 그나마 졸업도 못하고 학사경고나 받는 것은 아닌지.
아비라는 놈은 그저 괴롭기만 하다.
16828 1993. 3. 5 (금)
英이 방만한 대학생활이 마음을 짓누른다.
낭만을 즐기고, 때로는 노래부르고, 때로는 벗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뇌하여 흐느껴 울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전제되어야 할 명제는 공부에 대한 진지함이다.
내 대학생활의 실패가 바로 거기에 있었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있는 것이다.
英아, 제발.
두 부류.
대학이라는 곳을 철저하게 놀이마당으로 인식하는 철없는 쾌락주의자들.
다른 하나는 미래를 위한 도장의 장으로 인식하는 진지한 공부꾼들.
英이가 前者일 뿐이란 말가.
英이 진짜 학점표를 받아들고 또다시 아연하다.
2과목이 F.
B,C 투성이.
그러나 더욱 한심한건 야단치는 아비에게 어필하는 英이의 태도.
무어 그런걸 가지고 야단치시느냐는 듯한 불만 가득한 포즈.
뒤척이며 헤매는 꿈, 꿈.
기도.
나의 주 하나님.
16829 1993. 3. 6 (토)
언제까지 英이 학교문제에 골을 썩일수는 없는 일.
딸네미의 약속도 있고하니 믿어볼 밖에.
산업은행 자금신청 서류를 경리부에 넘기고 한숨 돌린다.
SB-395 해양대학교 실습선은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단장한채 4일후의 진수를 기다리고 있다.
K대리에게 맡긴 FAT진수 작업이 어딘가 불안 불안하지만 어쩔수 없지 않은가.
이스라엘 작가, 에이프라임 키죤이라는 사람의 소설 '가족'.
우스개 이야기들, 그 에피소드의 배경에는 새로 건국한 이스라엘의 사회상이 비춰져 있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후의 10여일간, 그의 돋보이는 면모는 정직하고 깨끗하다는 점이다.
임명한 장관들의 부도덕성이 곧바로 언론에 드러나 여론을 반영하는 것도 부정적일수만은 없다.
토요일.
기도드리는 아침.
도우소서.
중심없음을.
16830 1993. 3. 7 (일)
웬 쇼킹한 사건들이 요즘 내 주변에서 속속 터지고 있을까.
LD찬 씨 아내, 심장마비 사망.
아무도 없는 집안의 싱크대 앞에 숨이 멎어 쓰러져 있는 것을 10여시간 지나 퇴근한 남편이 발견하였다.
새 집을 지어놓고, 네명의 아이들을 훤칠하게 키워놓고, 막내는 고려대에 합격시켜 놓고, 괄괄괄하는 목소리의 마음 좋은 이형의 아내는 그렇게 죽어 버렸다.
J와 함께 문상, 죽은 이의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한 J는 빈소 앞에서 흐느낀다.
이형. 이제 이형에게는 어머니같은 아내없이 어찌 살려오? 이형.
빈소를 나와 JM교 와 우리집 거실에서 맥주잔을 기울인다.
JM교 의 처형 사건은 또 얼마나 기막힌 것인지.
Hw사장 은 그렇게 지독하게 아내를 괴롭힌 모양이다.
JM교 를 위로하는 것인지, 나의 저급한 호기심 탓인지 꼬치꼬치 묻는...
일요일.
찌푸린 날씨.
LD찬 씨 아내의 출상 가려하는데 媛이로부터의 전화.
서울 작은 외숙모 돌아가셨다고.
자그마한 서울여인, 아아, 외숙모님.
이렇게 내 주위의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는데.
아아, 나는 몽롱한가, 나는 몽롱한가.
16831 1993. 3. 8 (월)
마산 시립 화장장.
죽은 사람의 유택은 산을 깎아 층층이 들어차 있고, 화장장의 굴뚝에서는 쉼없이 연기가 오른다.
LD찬 씨 아내.
두시간여만에 한 줌 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하나뿐인 딸네미 인숙이의 울부짖음.
인생은 무상하고 삶은 허무하다.
장의 버스는 부락, 마을, 도시를 지나는데.
모여앉고 기대앉아 끼리끼리 관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짐승의 속성.
관계가 관계를 낳고, 그 관계와 또 관계와 얽히고 섥혀서 관계 속에서 호흡하는 관계의 슬픔들.
화장장으로 가는 버스 칸에서부터 소주를 마시기 시작하여 돌아와서는 함빡 취하여 버린다.
16832 1993. 3. 9 (월)
무언가 어수선한 기분의 월요일 일과.
전무의 이미지는 독선이라기 보다 심술의 이미지.
세태는 달음박질 치고있는데 이 보수덩어리 회사는 도무지 오불관언이다.
전능의 폼을 잡은 권위주의의 밀어부치기 식의 관리방법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벽3시.
진수작업을 위하여 5시까지 현장으로 가야한다.
긴장된 작업.
기도.
16833 1993. 3. 10 (화)
새벽 5시 정각, TIME SCHEDULE에 의하여 활대 가중수 제거를 시발로 진수작업 개시.
1시간30분 동안 WEDGE를 박고, 간격피스를 제거하고, 반목들을 하나씩 하나씩 제거함으로써 거대한 쇳덩어리의 선체 중량을 온전하게 진수대 위로 옮겨 놓는다.
8시50분, 해양대학교 상선학과 학생들이 하얀 예복을 입고 도열한 가운데 총장이 '한나라'호라고 명명을 하고, 역시 정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상선학과 여학생이 도끼를 찍어 선체는 서서히 미끄러져 바다를 향한다.
흰 부라우스에 넥타이, 정모를 쓰고 정복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여학생.
그 애들의 반듯반듯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슬쩍 내 딸 英이를 생각한다.
질서 속의 반듯함, 저애들은 규격화된 기숙사 생활과 군대에 버금가는 훈련을 받는다.
자유분방함이 아닌, 리버럴리즘의 색채가 배제된, 하이델베르그의 고뇌와 낭만과는 거리가 있는 대학생활.
나는 英이가 군대와 같은 규격 속의 대학생활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와 같은 반듯함이 너무도 부러운 것은 사실이다.
아이들을 길러낸다는 부모짜리는 필경 한 마리 보수꾼이 되는 것이다.
비약하거나 엉뚱하지 않고 모나지 않게, 반듯반듯한 규격의 삶.
그러나 아이들은 그것을 뛰어넘거나 우회한다.
보수꾼의 부모를 거부한다.
英아.
미생물 실험실.
하얀 가운을 입고 플라스코가 늘어선 실험대 앞에서 무슨 세균 배양에 몰두하는 네 모습.
그것을 보여줄수는 없겠니? 내 딸 英아.
16834 1993. 3. 11 (수)
비디오 'THE BELT'빌려 본다.
그것이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원작 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에로틱한 영화라서 골랐을 뿐이다.
마조히즘.
내게도 숨어있을 피학성 쾌감.
그것은 성적인 차원에서 머무는 감각이 아니고 더 깊고 깊은 실존적인 차원의 세계로 확대되는 의미일지 모른다.
때로 꾸는 나의 꿈.
지하의 고문실, 음산한 한 사나이가 나를 고문한다.
하나씩 하나씩 뼈를 분지르고 살가죽을 벗기는, 일련의 행위는 마치 어떤 엄숙한 의식을 치루는 듯.
가학자인 그나 피학자인 나 사이에는 어떤 계약을 이행한다는 진지함과 엄숙함이 있다.
형식의 아름다움과 심지어는 둘 사이에는 어떤 애정의 분위기도 흐른다.
반듯반듯하고 깨끗한 밝은 세계와 흐트러진 혼돈스런 어둠의 세계.
데미안의 정신 세계도 그러하였다.
이 양면성의 정신세계가 있음으로 인간을 역동적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반듯한 세계이다.
16836 1993. 3. 13 (토)
조선공업협회의 산업별 QM 모기업 추진본부, 서울 회의에 참석하라는 ORDER.
아니, 아무런 준비도 답변자료도 없이 참석하라니.
대부분의 중형조선소들은 미진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데,지지 않아도 좋을 짐을 지겠다는 꼴이다.
정작 문제의 핵심을 간과하고 있는 임원들의 생각, 답답한 사람들.
오후에 2382를 KK곤 에게 몰게 하여 도심을 지나 덕포의 국제화학.
진수 도포 비누의 상태는 농축이 되어 많이 좋아졌다.
돌아오는 길의 쭉 뻗은 낙동로, 고속으로 달리면 드라이브의 기분이 나는 도로.
英이 10시 넘어 귀가.
실습이 9시까지 계속되었다고.
16837 1993. 3. 14 (일)
북한, 핵확산 금지 조약 탈퇴.
그곳에는 과연 핵폭탄이 제조되고 있는건가.
김영삼 대통령, 역대의 여늬 대통령과는 다르다.
정직하고 청렴하다.
속속 공직자들은 재산을 공개하고 있는데, 그 내역에 신빙성이 있는가라는 문제는 차치하고, 이와 같은 풍토 조성은 바람직한 것.
기득권 세력의 반발, 개혁의 거부.
이런 역류를 능란하게 헤쳐 갈수 있다는 것이 바로 김영삼의 정치력일 것이다.
정주영 그 미친갱이가 했다는 말 '내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큰일 날뻔 했다'던가.
토요일, 일찍 퇴근하여 J와 이런저런 얘기 나누며 마루에 앉아 술을 마신다.
그 얘기들은 英이에 관한 것들.
늙어가는 가시버시의 가슴 속에는 딸네미 걱정에 무거운 돌이 앉아있다.
토요일, 英이는 아침 간곡한 아비의 당부를 무시한채 어둠이 내리고서야 귀가한다.
끓는 속을 참는다.
딸아이는 지금 부모를 자극하여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16838 1993. 3. 15 (월)
일요일, 마치 전능한양, 회사의 고민은 다 짊어진양 현장을 걷는 Sh씨의 모습.
역겹다. 그 역겨운 인격이 나의 생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억울해 죽을 지경이다.
존경할수 있는 웃사람을 갖고 있는 직장생활은 큰 축복일 것인데.
점심, 휴일 출근자들과 푸짐한 중국음식을 먹고 3시경 돌아온다.
밝은 대낮에 집에 붙어있는 英이가 참 반갑고 고맙기도 하다.
월요일 새벽.
오늘 俊이는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데, 이게 웬일일까.
밖에 비바람.
기도.
16840 1993. 3. 17 (수)
俊이 수학여행중인데 음산하게 바람불고 기온도 뚝 떨어졌다.
어제 제 엄마에게 전화하였다는데, 그 곳 설악산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단다.
여행을 꿈꾼다.
J와 함께 어디 먼 곳, 낯선 풍경화 속에 서 있자.
낯 모를 사람과 어울리고 귀에 선 사투리를 들으며 혀에 익지 않은 음식을 먹고 새로운 바람을 맞아보자.
英이는 여봐란 듯이 9시 넘어 귀가.
그런 英이를 바라볼때마다 스스로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그 도전적인 포즈..
俊이처럼 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
낯 선 바람 속에 서 있고 싶다.
16841 1993. 3. 18 (목)
俊이 집 떠난 지 3일째.
눈 덮힌 설악산도 좋겠지만 또레의 어울림이 더 가치있는 법이다.
공동체의 삶에서 뒤떨어지지 말 것.
이것은 俊이에 대한 간곡한 소망이다.
북한의 핵확산금지 조약의 탈퇴로 전쟁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전쟁, 전쟁...
김수현의 수필 '삶의 가운데서'읽다.
삼빡한 글솜씨.
외딸을 키우며, 지지고 볶고 하는 이야기에서 서울 중년여자 풍성한 냄새가 난다.
16842 1993. 3. 19 (금)
'새롭게 하소서'
여성을 향한 남성의 공격성, 그 성의 실체는?
그 성적인 것 때문에 불행해지는 여성.
여성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슬픈 실존인가.
여성 운명의 도박성, 남자 잘 만나 운운...
이제 세상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 딸 英이....
俊이 돌아오다.
매일밤 여관방에 들어 앉아서 고스톱만 쳤다고.
하하.
英이의 뜅한 포즈는 여전하다.
아빠의 잔소리, 그 속박이 싫어 죽겠다는 표정.
내일 1박2일의 신입생 환영회, 송정간다고.
16844 1993. 3. 21 (일)
어떤 일에 함몰되어 차츰차츰 깊이 들어가 온 영육이 그 속에 침잠하여 변화하는 것.
그 어떤 일이라는 것이 슈바이처의 숭고한 것일수도 있고, 사드 백작과같은 사악한 어떤 것일수도 있다.
그런데 그 양갈래의 함몰이 동일한 심리적 동인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그 리비도의 역동성은 동일한 것?
과연 이렇게 단정지을수 있을까.
고상함과 추악함이라는 관념의 구분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뚜렷하다.
리비도는 동일할지라도 그에게는 분별력에 의한 선택의 여지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선악과의 의미이다.
성경은 말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20-
16845 1993. 3. 22 (월)
봄이 오려는 휴일.
英이 침대에 J, 英이, 나 가족들 둘러앉아서 트럼프를 친다.
英이의 이런 밝은 표정의 어울림은 집안의 얼마나 큰 기쁨인지.
俊이는 친구와 독서실행.
오후, 俊이가 설악산에서 사 온 머루즙을 소주에 타서 홀짝이며 P/C 앞에 앉아서 QUATTRO라는 스프레드 시트 프로그램을 익힌다.
16846 1993. 3. 23 (화)
월요일은 대체로 쓸쓸하다.
사무실 앉아있어도 마음은 공연히 마누라와 자식새끼들에게로 달려간다.
웬지 모르게 내 피붙이들이 안스럽게 느껴지며 그 정이라는 다순 울타리가 그리웁다.
월요일이라는 또 하나의 진부한 일상 속에서 느끼는 부질없는 사념이다.
사람이 어떻게 사무치는 정 속에서만 살수 있을손가.
퇴근하니 英이는 벌써 돌아와 있다.
이쁜 아이.
J와 함께 '인간시대'본다.
전위예술가 임경숙.
카페- 낭만이 흐르고 예술의 분위기 넘치는 분위기.
내가 사랑하였으며 지금도 꿈꾸어 마지않는 그런 분위기.
랭보우가 노래한다.
오 랄라 내 꿈꾸어 오던 찬란한 사람들아.
J를 움직여 무언가를 운동케 하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맹렬하게 늙어가고 있다.
주님, 나의 하나님.
16847 1993. 3. 24 (수)
SB-397의 DELIVERY 무렵.
어김없이 안벽의 船上은 전쟁터가 되고만다.
또한 어김없이 P상무 의 벗겨진 옆이마에는 퍼런 힘줄이 불끈거린다.
홍콩 선주들 앵커 때문에 법석.
설계부의 무책임.
현장을 떠난 나에게 그런저런 문제들은 방관자의 입장이어도 좋겠지만, 대선의 생리는 모든 문제가 총체적인 것이어서 짐짓 관심있는,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한다.
오른 팔의 통증.
오른 손으로는 키보드를 두드리지 말자고 작정을 하였어도 그게 잘 되지를 않는다.
오체중 하나를 잃었을 때, 그 불편함은 어떠할까?
누구나 그런 가능성을 갖고 있음에 장애인을 향한 관심을 가져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어제밤 媛이 에게서 전화왔었다고.
어머니가 심장이 벌떡벌떡하여 죽을 것 같다고 딸에게 하소연했던 모양.
그 이야기를 듣는 나의 심장도 벌떡벌떡.
오늘 어머니 뵈러 가야겠다.
16848 1993. 3. 25 (목)
늦겨울인지, 봄인지.
추적추적 비 내린다.
회사는 SB-397 예비시운전 준비로 시글벅쩍.
공사진척은 더디고 기술적인 문제들은 속출한다.
공직자 재산공개, 국회의장이라는 작자가 부동산투기로 떼돈을 벌었고.
그 이름 박준규, 사퇴는 당연하다.
그러나 법적인 하자없이 당시의 사회적 풍조를 따랐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매도해 버린다면 과연 현금의 지도층인사들중 누가 자유로울수 있을까.
이 시점에서 요구되는 바는 바로 김영삼대통령의 정치력, 관록의 현명함일 것이다.
어머니, 잠을 주무시지 못한다.
하얗게 밤을 지새고, 그 불면에 전전긍긍.
형은 울산으로 전보되고, 아이들은 학원으로 독서실로.
텅 빈 집에 고부만이 남아서, 잠 못드는 시어머니에 노심초사하는 며느리.
병원을 그만 두시라고 작은 아들 놈은 권고하지만, 칠십다섯 노인의 의식세계를 사십일곱먹은 아들 놈이 감득할수 없다.
겨우 일어난 아침, 회사는 빼먹기로 한다.
비는 그쳤지만,아직도 내 마음엔 비가 내린다.
16849 1993. 3. 26 (금)
어머니께 전화드리다.
간밤에는 수면제를 복용하여 조금 주무셨다고.
다소 마음이 편편해지다.
16850 1993. 3. 27 (토)
돌덩이같이 단단하게 굳은 똥.
그것이 항문을 지날 때 필경 찢어지는 아픔을 동반한다.
변비는 배변의 고통일뿐 아니라, 배설 못하는 더부룩함은 심리적으로도 강박이 된다.
그리하여 하나의 정형화된 꿈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중인 환시리의 배변, 변소 아닌 곳에서의 싸 재낌, 더러운 변소등이 연출되는 꿈은 아마도 변비에 연관이 있을 듯 싶다.
수면장애, 배변장애.
이것은 내 육체의 가시인데, 여든 바라보는 어머니 연세에 불면은 웬말인지.
전화드리니까 간 밤에는 약의 도움없이 3시간쯤 주무셨다고.
16851 1993. 3. 28 (일)
SB-397 예비시운전.
만족한 상태로 6시경 회사 안벽으로 귀환.
시운전 선박을 기다리는 토요일 오후.
엄지발톱을 잘 못 잘랐을 때, 안 쪽 모서리에 남아있는 날카로운 발톱의 끄트머리가 발톱이 자람에 따라 주변 살을 찔러 파고들기 때문에 여간 아프지 않다.
그래서 발톱을 자를때마다 고 놈을 제거하려고 애를 쓰지만 번번히 실패하는데 어제는 만족하게 고 놈을 제거하였다.
이어서 미장원에 가 머리카락 자르고, 목욕탕에 가 때를 벗긴다.
사무실 의자에 깊이 앉아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켓에 호밀을' 읽다.
크리스티 소설에서 범인은 언제나 의외의 인물이지만 중반쯤 읽고 부터 나는 범인을 짐작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제밤 약의 힘을 빌어 3시간 30분 수면.
16852 1993. 3. 29 (월)
스스로를 죽이는 일.
에고를 버리는 일.
소유에서 벗어나는 일.
이것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길이다.
다른 사람의 언행이 가시가 되지 못하고, 타인에게 굴종한다고 하여 그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으며,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행복하여 지는 경지.
휴일, 이것을 꿈꾸고 있다.
벗어나지도 못하고, 상승하지도 못하면서.
꿈꾸는 버러지.
경부선 하행 무궁화호 열차 탈선 전복.
68명 사망.
월요일의 다소 싸늘한 새벽.
슈베르트 '악흥의 순간'과 '방랑자'를 울리게 하고, 싸늘함 속에 잠겨 기도.
어머니는 간 밤 좀 주무셨는지.
16853 1993. 3. 30 (화)
스팀이 나오지 않는 사무실.
부산의, 영도의 봄추위는 뼈마디에 더욱 춥다.
수화기 너머 듣는 어머니 목소리.
완전히 기가 빠져있다.
어머니의 수면장애, 그 잠 못자는 심리의 근저에는 죽음에 대한 어떤 心因도 있으실 것.
아, 나는 이제 태연히 어머니의 죽음을 얘기할수 있구나.
봉고차에 신간서적을 가득 싣고 영도지역을 순회하면서 무료로 책을 빌려주는 새마을 이동 도서관.
참 바람직한 지역 문화사업이다.
조성기의 연작장편 '에덴의 불칼'중 2권을 빌린다.
'라하트 레헤렙'과 '가시나무 둥지'
이 두권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에 출간한 '야훼의 밤'을 제목만 '에덴의 불칼'로 바꿔 붙인 것이다.
조성기는 안정효에 비하여 어딘지 여성스럽고 스케일이 좁게 느껴진다.
그가 천착하는 신앙의 세계는.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16번.
라살 사중주단.
16854 1993. 3. 31 (수)
나약한 느낌은 있을지언정 조성기는 성실하고 진지한 작가이다.
그의 신앙의 역정은 치열하고 결코 나약하지 아니했다.
담담하고 나직한 문체로 얘기하는 그이지만,나는그 치열한 신앙의 도정을 그의 소설의 행간에서 읽어낼수가 있다.
봄의 써늘함은 오히려 작정하고 맞는 겨울 추위보다 더욱 스산하다.
난로가 그립다.
수화기너머 힘이 하나도 실려있지 않은 노파의 목소리를 가슴 한쪽에 묻고 있는 내게는 더욱 스산하다.
딸, 훌륭한 딸로 키워낸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 가정의 교육 몫이다.
반듯하고 따순 어머니에게서 교육받은 딸은 결코 가슴이 차지 않고, 사려깊고 엄격한 아버지에게서는 마음이 좁고 편협한 딸이 있지 않다.
주 나의 하나님, 나의 속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