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3. 1

카지모도 2016. 6. 2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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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65 1993. 1. 1 (금)


새해 새아침 밝았다.

시간이란 조금도 쉬지 않고 영속적으로 흐르고 있지만 그래도 92년, 93년하고 연호를 자꾸 뇌이다보니 마치 어제의 태양과는 전혀 다른 태양이 오늘을 뜨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꿈-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 할아버지, 병무청, 예비군훈련.

그리고 어머니.

그리고 똥무더기.


새벽, J와 아이들 흔들어 깨우다.

英이와 J는 새해 첫날 깨끗함을 위한 목욕탕 행.

나도 일찌거니 목욕을 하고나서 새해 아침에 어울리는 음악이 무엇일까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얹는다.


싸늘한 새벽대기.

俊이는 게임에 몰두하고, 나는 하나님에 몰두한다.


16766 1993. 1. 2 (토)


정월아침, 어머니께 가려 하였는데 어머니가 전화하여 오지들 말라고.

왜일까?

정초부터 무슨 썩 좋지한 무엇이 있는 모양인가.

이런 어머니의 메시지는 늘 나를 아프게 한다.


청량한 공기속에 잠긴 태종대를 J와 아이들과 함께 걷는다.

푸르른 바다는 거기 그렇게 잠자코 누워있고 태고의 바위는 억겁의 나이테를 드러내고 거기 그렇게 잠자코 버티고 섰는데, 한낱 백년도 안되는 목숨들은 이렇게들 번잡하구나.


등대의 절벽을 내려가 바닷가 바위 위의 천막 속에서 회 한접시와 소주.

태종대를 나와서 버스를 탄다.

목화그릴에서 아이들 돈까스, 나는 2000 CC의 맥주로 정초의 술마시기를 마감.


英이와의 대화, 俊이와의 대화.

아버지와의 대화는 아이들에게 유익하다.

아이들과의 대화는 아버지에게 유익하다.


16768 1993. 1. 4 (월)


일요일마다 자신이 다니는 禪房에서 요가를 하고 산행을 하자는 PS곤의 제안으로 J와 나는 버스에 흔들려 초읍으로 간다.

PS곤 , JN영 , KH근 , J 와 나는 덕산선방이라는 도장에 흩어져 앉는다.

관장이라는 사람의 강의와 요가.

색다른 경험이다.

선체조, 요가, 명상.

결가부좌를 비롯하여 몇가지 동작은 내 육체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수가 없는데 J와 친구들은 곧잘 해내고 있다.

동양적 수행, 자기응시, 자신의 내면과의 정적인 관계 유지.

그리고 죽염이라는 소금의 신기함.

그런데 그것은 상당한 고가이다.


여기에 유일신의 기독교적인 다이나미즘은 없더라도 이것 역시 지고한 평화로움의 세계가 깃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PS곤 이의 친구를 위한 헌신적인 뜻으로 시작하는 것인데.

KH근의 차타고 범어사로 가서 거기서부터 산성 북문까지 등산.


돌아와 목욕하고 선방에서 구입한 순수소금을 물에 타 마신다.


첫출근날, 피로하지만 마음은 평온.

주님, 나의 하나님께 기도.


16769 1993. 1. 5 (화)


불과 1시간 남짓의 선체조였는데 온 삭신이 쑤신다.

정적인 그 동작이 실은 상당히 격렬한 운동이라는 걸 느끼게 한다.

스스로를 다스린다는 방법론, 자연스러운 호흡에 육체의 리듬을 맡기는 것.

그리하여 얻어지는 평정과 조화의 경지.

그 경지에서 느끼게 되는 여호와 하나님.

무언가 어색한 논리이지만 배리된 것은 아니다.

명상함으로 도달하는 여호와의 세계.


무조건적으로 무작정 기다리는 성령의역사, 완벽한 자기포기, 자신을 제물로 삼는 신에의 헌신.

이런것만이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적극적인 신찾기의 섭리가 숨어있을런지도.


업무개시, 사장의 출근이 늦어서 시무식은 연기.

웃기는 社主이다.


화요일 새벽.


16770 1993. 1. 6 (수)


신년, 새롭게 맞이하는 새해에 사람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무언가를 계획하여 새롭게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수일도 지나기 전에 그 새마음은 또다시 진부한 일상 속으로 퇴색해 꼬리를 감추어버리고 만다.

매해마다 슬픈 이 반복을 거듭하면서 그렇게들 늙어가는 것이다.

나는 당초 새마음의 각오는 없었거니와.

그렇게 다시 진부한 일상 속으로 서서히 함몰해 가고 있다.


PS곤 이에게서 빌여 온 이상한 책 '하얀 파리'

'박일'이라는 사람이 지은 형이상학적 소설.

도사의 책.

초자아는 무애하게 시공을 넘나들다, 니체의 냄새도 나고 때로는 섬뜩한 혜안이 있는듯도 하고.

그러나 요령부득이다.


생산부 신년회.

직반장을 포함한 70여명의 사람들이 뷔페식당의 한층을 빌어서 먹고 마시다.

나는 어김없는 행사위원장.


다소 일찍 마치고 최석교 차를 타고 동삼동에 돌아와, 목회그릴에서 SJ엽 , KH호, KO훈등과 맥주로 마감한다.


덕산선방에서 구입한 순백의 순수소금.

숙취를 가라앉힌다.


16771 1993. 1. 7 (목)


지난 일요일의 PS곤에 끌려 간 선방에서의 경험때문인지 그 경험에 나는 제법 영향을 받았나보다.

동양적 사고의 신비함.


소금만 해도 그렇다.

시사춘추의 특집으로 꾸며진 소금에 대한 기사를 찾아 읽었다.

현대의학은 소금을 위암, 동맥경화등의 주범으로서 취급하는데 이는 대단한 오해라고 한다.

천일염으로 제조한 진짜 소금은 임상실험 결과 오히려 암이나 동맥경화에 뛰어난 효능이 증명되었단다.

나 역시 숙취의 속을 한잔의 소금물로 거짓말처럼 다스렸지 않은가.


그러나 소금의 가격이 만만치 않다.

아무리 제조과정이 복잡하고 정성이 깃들어 있다지만, 죽염은 250 G에 10만원 이상이고, 전번 구입한 소금 역시 500G에 2만5000원이나 한다.

일반 정제염의 250배의 가격.


천일염을 사다가 책에 나온대로 만들어 보면 어떨지.


어느새 신년도 일주일이 후딱 지나가고 있다.

목요일 어두운 새벽, 밖의 비는 그쳤을까?


오늘 아이들과 어머니께 가려한다.


16772 1993. 1. 8 (금)


비가 내리고.

어머니께 다녀온 날은 슬프고, 어쩌면 기쁘고, 어쩌면 안타깝다.

늘어진 얼굴의 주름, 의기소침, 자식과 며느리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포즈....


'어머니'라고 불러 볼때에는 가슴이 더워지는 것.

그것은 머리의 생각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 고동치는 피무리가 부르는 것이다.

그 피무리는 자궁에서 나라는 존재가 형성되어 생겨났다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발음 속에 천상을 넘나드는 태고의 기억들이 용해되어 있는 보편성의 발음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세월이며, 새로움이며, 그리고 관계 관계 관계가 만들어 내는 그 가변성이여.

어머니께 다녀온 날은 나는 언제나 슬플 것인가.


슬플 때 느끼는 예수는 말할수 없이 슬프다.

기도.

나의 주님, 예수. 예수. 예수.


16773 1993. 1. 9 (토)


청주의 5층짜리 상가아파트 3동이 폭삭 내려 앉았다.

프로판가스가 원인이 된 화재 직후에.

TV에 비추이는 건물 해체작업 광경, 부실공사의 현황을 보여 주는데 세멘트는 순전히 자갈투성이, 철근은 손가락보다도 가늘다.

기둥과 들보는 서로 결합되어 있지도 않고.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고 또 그냥 그렇게 끝나 버릴텐가.

얼렁뚱땅.

눈속임, 오직 돈만들기.

성실한 직업의식은 박제가 되었고, 원칙은 욕심앞에 왜곡되고, 양심은 돈버는데 가시일 뿐이다.

자본주의- 이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선한 역할은 끝나버리고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악의 역할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俊이 몸살끼.


16774 1993. 1. 10 (일)


잔뜩 찌푸린 토요일.


KK곤 의 결혼식.

부산역 새마당 예식장.

부근에는 차량과 사람의 범람, 그리고 예식장 안에는 돛대기 시장이 섰다.


중앙동 뒷골목을 Y부장, S과장, P과장등과 걸어오다가 중앙동 부산대교입구의 우량수육집에서 소주 마신다.

外飾의 신앙인, P과장과 논쟁.

영도 들어와 S과장과 목화 그릴에서 맥주로 마감한다.


16775 1993. 1. 11 (월)


올겨울은 되우 추울거라는데 아직까지 추위는 오지 않는다.


비흩뿌리는 일요일의 현장, 해상크레인 동원하여 SB-395의 선미 BLOCK 전도하여 탑재.

11시 30분경 회사를 나서 집으로.


SYSTEM TROUBLE로 죽어있던 게임 FALCON-3를 俊이가 살려 놓았다.

이런 솜씨는 명민한 두뇌가 없이는 어려운 것.


16776 1993. 1. 12 (화)


걸프만에 다시 전운이 감돌았는데, 사담 후세인의 막판 빠지기 작전으로 고비를 넘긴다.

미국이라는 강자의 논리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우리는 강자의 논리만을 접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과연 그럴까.

확실하게 후세인은 악한이고 망나니일까.

이슬람권에서는 대단한 존경을 획득하고 있는 그는, 복잡다단한 중동의 상황에서 어떤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아랍민족주의라는 편협한 쇼비니즘을 벗어나, 현 상황의 세계 질서에서 그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무실에서 일과중 서너번 녹차를 타 마시는 것은 자그마한 즐거움.


16777 1993. 1. 13 (수)


회색수면과 음주와.

그래서 형편없이 느껴지는 육체의 컨디션.

이런 상태에서 오전을 빌빌대다가 오후들어 집중하여 일에 몰입한다.

F/D 사고보고서와 외주처리문제.

집중하는 동안에는 육체의 저조한 컨디션따위는 전혀 느낄수가 없다.

오전에 여기저기 전화하고 K대리를 동원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퇴근 무렵 이를 취합 종합정리하여 마친다.


그리하여 퇴근 무렵에는 형편없던 컨디션의 느낌은 사라지고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란 지푸라기를 정신적인 집중력으로 올곧게 세우시기도 하신다.


따뜻한 겨울 아침, 베토벤의 합창환상곡.


16778 1993. 1. 14 (목)


모처럼 부산의 하늘에서도 눈이 내리지만, 땅에 닿자 금새 녹아버려 질퍽질퍽한 길바닥만 만들어 놓고 만다.


아침 뉴스는 온통 미국의 이라크 공격 소식.

세계는 또 전쟁 게임에 열광하고 미국에게 손뼉을 친다.


16779 1993. 1. 15 (금)


女性性을 향하여 끝없이 끌리는 마르지 않는 샘.

여성이라는 매혹은.

리비도의 발현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적당치 않다.

늙어서 온 몸의 호르몬이 다 빠져나가도 남는 그것.

파우스트, 가와바다 야스나리.

여성성을 향한 그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꿈- 꿈의 제목은 백두산 이야기

여자유격대, 까마득하게 걸려있는 출렁다리, 느닷없는 KR G검사와 PM철 도 등장...


닭우는 소리.

아, 우리 동네에도 닭우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16780 1993. 1. 16 (토)


우연히 KC원의 책상밑에서 발견한 한권의 책이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 부담스럽다.

오쇼 라즈니쉬가 쓴 '달마'

이런 류의 책들은 이제 읽지말자 읽지말자 하면서도 그예 그 책을 손에 잡고 만다.

'禪' 'ZEN'의 세계.

부처의 오의,절대 無의 경지, 절대 자유, 절대실존, 그 절대 조건의 영역.

면벽 9년.

달마가 획득한 그 정신은 결국 아무 깊이도 없는 하나의 허무이면서 하나의 완전한 충일.

내 어찌 이를 감득할수야 있을까마는, 그것은 긍정할수있는 어떤 관념으로 나를 충동질한다.


아아, 절대 인간을 추구하는 영혼은 가여운가.


俊이 어제 시험.


올들어 가장 추운 날, 길가에 얼어붙은 얼음도 단단해 뵌다.


16781 1993. 1. 17 (일)


토요일, 아이들과 J를 불러내 함께 저녁이라도 먹을까하였는데 아이들의 완강한 거절.

고루한 아비와는 어울리기 싫다 이거지.


해를 넘길수록 세대차는 절절하게 느껴진다.

회사에서도 젊은 축들에게서 여러 면에서 깊은 GAP을 느끼고는 쓸쓸해 지곤 한다.


튀김닭 사들고 집에 돌아와 다시 맥주를 마시고는 꼽다시 취하여 버리고.

침대에 거꾸로 누워 잠이 든다.


16782 1993. 1. 18 (월)


쨍하는 소리가 들릴 것같은 매서운 새벽이다.

정신도 얼음짱같이 냉철하여....


달마를 생각한다.

인간은 과연 그토록 완전한 무엇을 스스로 간직하고 있는 존재일까.

정말 부처는 누구에게나 있는 보통명사인가.


부처를 소유할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각고의 수행을 겪은 자인가.

깨달은 자, 자신을 객관적으로 괸조할수 있는 자.

자아를 깨뜨려 벗어난 자


깨달은 자는 어디 있는가.

과연 인간이 그토록 강인하여 그 경지에 도달할수 있을까.

그런데 막연하게 느껴지는 피조물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란 말이냐.

노예근성인가, 나약한 품성인가, 비겁한 자의 무의식의 발현인가.


쨍하는 의식의 소리에 잠겨 쨍하는 대기에 잠겨 나는 나의 존재주인 하나닙에게 기도를 드린다.

나는 나약함을 택하겠고, 나는 비겁한 피조물의식을 택하겠고, 내 감정은 사로잡히는 노예 쪽을 택하겠다.

나는 완전한 인간이기를 포기하노라.


16783 1993. 1. 19 (화)


MBC '인간시대'

64세의 자식과 아흔 넘은 아버지.

이 시대 마지막 선비라는 아버지가 죽다.

늙은 아들이 늙은 아비를 봉양하는 그 지극함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감동적인 윤리 제의이다.

죽은후 공자의 격식을 따라 모든 절차를 추호의 흐트러짐없이 봉행하면서, 아버지를 떠나 보낸 죄인으로서 오열하는 그 격식의 슬픔은 실로 감동적이다.

잃어버린 그 격식의 정과 격식의 슬픔을 이제 어디서 찾아보랴.

그 형식의 아름다움도 그립고 그 정경의 슬픔도 그립고.

형식의 생명화, 관계의 생명화, 너무 아름다운 슬픔이고 너무나 아름다운 관계이고 너무나 아름다운 진실이다.

그 안에 숨쉬고 있는 것은 유교의 어떤 도그마가 아니다.

관계를 생명으로 만들어, 그 생명을 살아 숨쉬게 하는 제의의 아름다움이다.


16784 1993. 1. 20 (수)


부산날씨치고는 기특할 정도로 춥다.


걸프전- 부시는 퇴임을 앞두고 3차 공습을 단행, 이른바 유종의 한방을 때린다.

그런데 사담 후세인은 콧방귀를 뀐다.

아마도 다음의 클린턴과의 새로운 국면을 노리는 모양이고 그 전략은 성공할 듯 싶다.


전쟁의 TV 게임 중계에 인상적인 여성.

MBC 이진숙특파원.

직업정신 투철한 용기와 자신감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일과중 몸을 빼내 서면 PS곤 이 가게까지 가서 설날 어머니께 드릴 죽염을 산다.

자그만치 큰 성냥곽정도 크기 한 통에 12만원.


동삼동 英이를 길에서 기다리게 하여놓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 겨우 잡아 탄 택시도 길이 막혀 거북이 걸음.

무려 40여분을 英이는 추운 길바닥 위에서 기다렸다.


16785 1993. 1. 21 (목)


며칠째 영하 4도를 밑도는 추위, 이 정도의 추위에 엄살떠는 내 감각은 이미 수십년간 부산 영도의 기후에 길들여진 탓이다.


유년- 정능의 겨울.

문고리에 손이 쩍쩍 달라붙는건 당연하고, 그래도 그 쌩쌩한 바람 속에서 썰매를 지치고 팽이를 돌리는 재미는 내성적인 유년의 나라고 해서 다를 리가 없었는데

군대의 겨울은 또 어떤가.

살벌한 삭풍 부는 종교대의 훈련. 걸핏하면 빤스바람 집합, 낮도 밤도없이.

육군병원 중대본부 뒤꼍에서 연탄을 찍고, 한밤중의 보초근무.

그 시절 쫄병은 늘 추웠었지.


'새롭게 하소서'

관절을 앓는 42세 장애 여인.

어떤 보수도 없는데 다른 환자들에게 하는 헌신적인 봉사,

음식을 씹어서 환자의 입에 넣어주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환자 곁에서 낮밤을 보낸다.

그녀에게 이러한 천사를 깃들게 하신 분은 예수다.


새벽, 하이든 현악4중주.

俊이 방.

기도.


16786 1993. 1. 22 (금)


죠반니노 과레스끼의 '신부님과 읍장'

커단 덩치의 다혈질 시골 신부와 빨갱이 읍장.

그리고 예수가 등장하는 우화적인 리얼리즘.

어떤 사상적인 의도의 냄새도 풍기지만 재미있다.


섣달 그믐.


16787 1993. 1. 23 (토)


명절, 축일, 카니발.

술과 춤과 노래와 어울림의 기쁨.

설은 관계들의 축일이다.

오늘 설날.


날씨는 많이 풀리다.


16788 1993. 1. 24 (일)


설날 어머니께.

가야숙모와 D은이.

J은이는 호주에 있고.

나는 어머니께 죽염, J는 손바닥의 氣를 살린다는 철구를 드린다.

늙고 늙으신 어머니.


직행버스 흔들려 사직동.

장인 장모님도 이제 많이 늙으시고.

중년티 완연한 두 처제들.

조카아이들 T기, J기, S기 .


형과 양주, 처가의 정종.

다시 집에 돌아와 맥주.


쓰린 속과 갈증.

새벽 눈을 뜨다.

엔도 슈사꾸의 '예수의 생애'를 펴들고 오랜 시간 화장실.


정지용의 시를 이동원이 부른 '향수'.

시도 시거니와 김희갑이 작곡한 곡도 너무나 좋다.

정말 게으른 금빛 황소의 울음이 들리는것만 같다.


16789 1993. 1. 25 (월)


J와 종일 고스톱.

천원짜리와 동전이 오가면서 가시버시의 친교는 무르익는다.


오늘 내딸, 생일.

열아홉번째.


감사하라.

내 방 싸늘한 새벽에 잠겨 기도.


16790 1993. 1. 26 (화)


어제 안과.

눈꺼풀 속 돌맹이는 왜 생기는 걸까.


시내- 젊은이들 물결. 광복동의 그득하게 들어찬 인파, 극장앞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코오롱 크린스사고, 책방 들러 안정효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산다.

일전 TV에 출연한 안정효란 작가는 성실한 인상이었고, 한때 굉장한 영화광이었고 그것을 소설로 그려냈다는데 흥미가 끌리지 않을수가 없다.


따뜻한 연휴의 마지막 날 대낮에 나는 아무도 없는 집안의 내 방 책상 앞 앉아서 맥주잔을 기울이면서 독서의 일락에 젖는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바로 나의 옛 빛바랜 흑백 사진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황량한 그 시절 그 풍경화 속에는 내가 들어 앉아 있다.

안정효는 나보다 여섯 살이 많다고 하지만 그의 그 시절의 환경과 감수성은 바로 나의 것과 똑 같다.


16791 1993. 1. 27 (수)


'새롭게 하소서'

고아 아닌 고아, 부모의 학대 끝에 버림받고, 어머니에 의해 팔려다니고, 호적도 없고 한글도 깨치지 못한 여자.

일생동안 어떤 형태의 사랑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사랑이 어떤것인지도 느껴보지 못한 그녀.

뭇 남성에게 농락당하면서 죽음이 가장 행복할거라는 생각 속에서 살아온 그녀.

그녀가 홀연 하나님을 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하나님이 창조한 고귀한 존재임을 의식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줄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경제적인 성공을 이룬다.

그리고 봉사의 삶을 산다.

농아를 데려다 키우면서, 자신을 희생하여 사는 그성이 그녀의 진정한 행복인 것이다.

라디오에서 자신이 겪어 온 그 지옥의 역정과 사랑의 역정을 얘기한다.

이 여자에게 있어서 스스로의 깨달음으로서 도달한 무엇이 있을수 있겠는가.

그녀에게 내면을 궁구하여도달한 어떤 부처를 읽을수 있는가.

은총, 존재하고 역사하는 절대자의 섭리만이 그녀에게 작용한 것이다.


하나님.

너희 뭇 못숨들아. 그 분의 은총을 구하라!


16792 1993. 1. 28 (목)


지난 12월, 압도적인 지지로 노조위원장에 당선된 JS봉.

대단히 과격하다. 노사관계를 철저한 대결구도로 몰고간다.

유언비어를 조작 살포하고, 의도적으로 회사를 자극한다.


근거없이 퍼뜨린 그의 어떤 사안을 빌미로 회사는 그를 을종인사위원회에 회부한다.

다섯명으로 구성된 인사위원회- 총무상무, 총무부장, 구매부장, 현임 노조위원장 그리고 나.

난감하다.

이제 나는 검사가 되어 그를 신랄하게 논고하고, 징계가 결정되면 그는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게 되어 당선취소가 되는 수순이다.


비디오 테이프 빌려보다.

그것이 알고 싶다 '김보은과 김진관 사건' .

의붓아버지로부터 국민학교 2학년때부터 15년간 성폭행 당한 피해의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그 아버지란 사람의 성격구조나 행동양식의 그 짐승성에 대하여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변태성욕자, 성격파탄자, 파렴치한 인간이 검찰 고위직이었다니.

증오스러운 놈, 그런 놈은 좀더 고통 속에서 죽어도 좋으련만.


16793 1993. 1. 29 (금)


며칠째 영하 5도를 밑도는 추위.

英이는 동아리 일로 다시 생기가 돌아 이 추운 날 난방도 되지 않은 학교 써클실로 출근하고.

개학이 가까운 俊이는 彦이와 약속하여 외출.


俊이 방학숙제.

김성한, 오탁번, 한수산, 오영수, 전상국, 김정한 중 3 편을 골라서 감상문 쓰기.

집에 있는 책중 한수산 '부초' '안개', 전상국 '외등', 오영수 '갯마을'등을 골라준다.

그리고 '부초'를 읽으라고 준 게 며칠 지났는데도 俊이는 그 한권을 아직 완독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하룻밤이면 장편소설 두어권은 읽어 낼수 있었던 그 때였는데.

요즘 아이들에게는 독서란 진부한 무엇일까.

온갖 시청각적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


한권의 소설은 다 읽어버리기가 아까워 아껴 아껴 하룻밤 조금씩 읽었었던 그 때와는 천양지차의 아이들.


그러나 俊아, 책은.


오늘 후기대학 입시, 이 강추위는 역시 입시추위인가 보다.


16795 1993. 1. 31 (일)


俊이 독서감상문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다시 읽는 소설들.


오영수 소설의 세계에는 악인이 없고 비범한 인물도 없다.

갈등이 없이 잔잔하다.

고렇게 고렇게 가난한 세상을 자그마하게 살아가는 따뜻한 정의 세계, 인간긍정의 표본.


한수산 '부초'

써커스- 윤재,하명,지혜,석이엄마...

칠룡이는 특히 감동적이다.

써커스, 지는 해의 애잔함, 쓸쓸함.


토요일 오후, 날씨는 많이 풀리다.

J와 아이들 불러내 하리 횟집에 가서 생선회를 먹는다.

의외로 英이도 생선회를 맛있게 먹는다.

좀 싼 음식이라면 자주자주 사 먹이고 싶은 마음.


돌아 와서 나는 맥주를 마시고, J와 아이들은 안방에 둘러앉아서 돈내기 트럼프를 한다.

俊이가 판돈을 쓸어가는 것을 보다가 나는 잠 속으로 빠져 든다.

아들놈은 미시시피의 갬블러..


일요일- 이제부터 우리집은 현미밥을 먹는다는 J의 선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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