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61 1994. 2. 1 (화)
비 흩뿌리는 월요일.
폐기품 정리 LIST UP하여 실사에 참가한 부장들의 연명서명을 받아 폐기처리 품의 올리다.
전무의 닥달이 있을 경우, 그화를 분산 시키려는 나의 교활한 작전이다.
400여가지 이상의 장비, 공구들.
회사 창사 이래 이렇게 정식으로 대량 폐기하자고 나선 것은 처음이리라.
오후4시.
전무까지 올라간 서류.
오너라 가너라하고 시달림 받을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쉽게 결재가 떨어지다.
보유 재산을 내다 버리자는데 너무나 의외의 허락이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17162 1994. 2. 2 (수)
SB-395 해양대학교 실습선 '한나라호' 드디어 출항.
많은 사람 애를 달구고 말썽을 피우더니 하얀 선체의 웅자를 돌려 순양함형 선미를 보이며 FUNNEL에서 연기를 뿜어 올리면서 회사의 안벽을 떠나갔다.
서울 媛이네 珍이는 재수하기로 결정하였다고.
哲이는 광명고등학교 배정.
새벽잠 곤히 든 J의 곁, 앉은뱅이 책상을 펴 앉아 상 위에 스탠드 불빛 밝혀놓고 중국어를 공부하고 누가복음을 읽고 기도드리는 남편.
아내의 단잠을 방해하는 남편짜리의 자기중심주의.
이를 잠시 투정하다가 이내 잠에 빠져드는 J.
아내여 이해하라.
이 누가복음은 당신의 수면께 드리는 남편의 새벽 헌사이다.
17163 1994. 2. 3 (목)
폐기건- 이사회 부의 안건으로 총무부 송부하고, P상무와 마주 앉아서 시설 장비계획 최종 정리 확정하여 기획실 송부.
큰 건들이 마무리되다.
이제 俊이 개학 며칠 남지 않았다.
그런데 독후감 숙제로 해야한다는 '마지막 선택'이라는 책은 낯설다.
아마 지구 환경에 관한 책인 듯 싶은데 쉽게 구할수도 없는 이런 책을 숙제로 내준 선생에게 내 특유의 부아를 터뜨린다.
17165 1994. 2. 5 (토)
Sh씨 방에 불려가서 근 1시간여 닥달을 받는다.
재료조서에 자재소요일 지정 때문에.
"지금 세상에서는 1시간마다 변해야한다고, 이 돌대가리야!"라고 고함을 질러대는 그에게 그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기만 한데, 물론 찍소리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즉흥적이고 단세포적인 사고로 똘똘 뭉친 권위주의의 화신.
전무에게 당한 날의 참담함.
17166 1994. 2. 6 (일)
토요일 저녁, 서면서 PS곤, JN영, KH근이 만나다.
술과 노래방.
모아놓은 곗돈 KH근이가 차용해 쓰겠다고.
12시가 훨씬 넘어서 택시타고 돌아오다.
작취미성의 일요일.
설날은 며칠 남지 아니하고.
17167 1994. 2. 7 (월)
나이 먹고 때묻고 찌들어 젊은 에스프리는 흔적없이 사라져 점점 개성을 잃는 사람들.
열정이 아닌 타성으로 감성을 추스리는 사람들.
늙은이들.
새벽 깨어 일어나니, 식탁 위에는 아이들의 선물이 놓였다.
俊이- 진로소주 4병과 한권의 책.
英이- 제라르 수제가 부른 슈베르트의 리트 LP.
내 새끼들.
이제 마흔 일곱인가. 마흔 여덟인가.
늘 옆구리가 허전하게 비어있는 나날, 이루는 것 없이.
17169 1994. 2. 9 (수)
명절 연휴 전날의 들뜬 분위기.
보너스가 지급되고 선물꾸러미가 오가고.
고향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들에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힐리 없는 배달 민족.
5시, 돈봉투와 구두티켓들을 안주머니 챙겨넣고, 양주 꾸러미를 손에 든채 중국을 떠나와 홀로 명절을 보내야 할 김순철씨와, NJ희, KK곤, KC원등과 함께 동동주와 빈대떡을 시발로 마시기 시작한다.
천진에 있는 아내와 학교 다닌다는 딸네미가 그리워 그의 눈자위는 잠시 붉어지기도 한다.
2차, 3차, 그예 나도 취하고야 만다.
고향도 없고 고향을 향한 그리움도 없는 나는 눈물을 보일 턱이 없다.
명절 전날.
J는 부엌에서 전을 부치느라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나는 한껏 게으른 오전을 보낸다.
17170 1994. 2. 10 (목)
연휴 첫날 자다가 깨다가 소설 읽다가...
'죽음의 시간'
어린 딸을 강간한 두명의 백인을 재판중 법정 밖에서 살해한 흑인사내.
그에 대한 재판과정이 법정 밖의 흑백 대결 양상의 사회문제로 비화한다.
KKK단의 섬찟함.
나의 설날.
울긋불긋 설레임도 없고, 피붙이를 향한 벅찬 반가움도 없으며.
형해화되어 씁쓰레한 儀式같은..
그래, 내게는 고향이 있지 아니하다.
군거적 순종이 지배하는, 그 편안하고 벅찬 고향의 그림과 관계를 지배하는 윤리의 아름다움이 내게는 있지 아니하다.
외로워 어느 산모롱이 헐벗은 나뭇가지 사이로 창백한 하늘을 바라보는...
아 내게는 없는 그 관계의 설이여.
17171 1994. 2. 11 (금)
바짝 추워진 설날 아침.
어머니 곁에 둘러 앉는 설.
홀짝이며 들이킨 양주에 어느새 흐물흐물 취한다.
형과 사내 녀석들 노래방 몰려가서 노래도 부르고.
택시 타고 사직동 도착했을때에는 이미 얼근하게 술이 올라와 있다.
17172 1994. 2. 12 (토)
싸늘한 날씨.
거센 바람에 빗방울이 창문을 후려친다.
俊이 방 따뜻함에 잠겨서 중국어 공부를 하는둥 마는둥, 낮잠을 자는둥 마는둥, TV를 보는둥 마는둥, 소설을 읽는둥 마는둥.
英이가 산 소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기상천외한 발상, 냄새를 주제로 한 소설.
냄새의 천재 그루누이, 혁명 전 극도로 빈곤한 파리를 배경으로 악마적인 분위기 가득하게 전개되는 이 소설에는 참다운 미학이 있다.
이제 첫 번째 살인하는 대목까지 읽었을 뿐인데 대단한 소설이다.
17173 1994. 2. 13 (일)
어제 미장원 문을 열었다고 하여 이른 아침 개시손님으로 파마를 하다.
비디오 영화 '붉은 사슴비'
제목만큼은 근사하지 않은 인디안 이야기.
'香水'
비천하고 추악하고 저주스럽게 태어난 한 생명에게 신은 놀라운 감각 하나를 주었다.
천의무봉의 예술감각, 냄새에 대한 능력.
장 밥띠스뜨 그루누이.
사악한 살인자이기 이전에 그루누이는 구도적인 예술가이다.
후각의 능력, 냄새의 미학, 냄새의 예술.
그는 결국 향기로운 관념의 고기가 되어서 뭇 부랑아들에게 뜯어 먹히우고 만다.
어두운 새벽 대기 속.
목욕을 하고 제라르 수제가 부르는 리트를 올려놓고 안방에 앉아서 중국어를 학습한다.
17174 1994. 2. 14 (월)
연휴의 마지막 날.
내일의 출근과 저자거리의 어수선한 삶을 생각하면 씁쓸해지고 암담한 기증 같은걸 느끼곤 하지만.
J와 겨울산을 오른다.
거센 바람이 얼굴을 때리더니 산모롱이를 도니까 따숩기 그지없다.
함지골 위쪽의 약수터까지 올라 시린 물을 마시고 물통을 메고 다시 한차례 땀을 흘린다.
전국노래자랑 영도편.
거칠고 활달하고 유치한 듯 하지만 정이 많은 몸짓을 하는 사람들.
영도의 갯가 사람들.
내 이웃.
俊이와 얘기나누는 가치있는 시간.
역사얘기, 사회얘기, 군대얘기, 대학얘기들....
나는 적어도 俊이에게 만큼은 俊이 삶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는 아비짜리이어야 한다.
새벽.
그리그 피아노협주곡.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17175 1994. 2. 15 (화)
다시 업무의 시작.
7시부터 시작하는 중국어 강의에도 어김없이들 모여든다.
직장인이라는 사회적 동물들.
회사를 떠나 오래 있으면 무엔지 불안하고 무엔지 초조하다.
회사에 있어야만 안도하는 조직 속에 순치된 짐승들.
이동 도서관도 어김없이 대교국민학교 앞에 전을 벌린다.
황석영 '무기의 그늘' 빌린다.
월남전 이야기.
황석영에 대한 기대는 늘 빛이 바래지 않는 정의로운 정신.
17176 1994. 2. 16 (수)
일상의 타성은 타성으로서 또 무르익게 마련.
부서장 회의의 진부해 빠진 대화들도 여전하고, JS영 과장의 어리석은 짓거리도 어김없고, 타워크레인 수리건에서 모부장의 이기주의 또한 변함이 없다.
북한의 핵 때문에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돈다는데, 체코에서는 사르비아 보스니아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데, 일상의 타성은 그저 타성으로서만 무르익는다.
황석영 '무기의 그늘'
역시 황석영이다.
믿을수 있는 상표.
그리고 그저 껄렁한 에피소드를 모아서 책이랍시고 펴낸 '서울대 기숙사'
맞춤법의 오류 투성이, 지금은 이런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한심한 세태이다.
英이 이번에는 F학점이 없다.
고맙다.
17177 1994. 2. 17 (목)
TOWER CRANE 상부구조물을 HYDRO TIER CRANE 2대를 동원하여 하륙하다가 큰 사고 날뻔 하였다.
TIER CRANE의 한계로 포기하고 부랴부랴 해상크레인을 수배하여 보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구해지는 물건인가.
의장과 KO훈 과장 사직서 제출하기로 한 모양.
더 늙기전에 일단 회사를 떠나 조선관련 업종을 창업한다는.
훌훌 벗고 회사를 떠나는 그 자유로운 모습을 향한 부러움.
그보다는 아마 그 자신감이 부러울 것이다.
날씨는 흡사 4월의 봄날씨.
어제 조카 哲의 졸업식, J도 참석하여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였다.
17178 1994. 2. 18 (금)
연일 따스한 날씨인데 내 마음밭은 스산한 바람이 인다.
매일 한건씩 회사의 누군가와 부딪치는 사건이 발생하고, 기분은 무언가 음울한 징조에 짓눌려있다.
느닷없는 喀血.
아주 고운 색깔의 피가 목구멍을 넘어 하얀 세면대의 陶器바닥에 대비색도 아름답게 얼룩진다.
가슴이나 인후의 따가움도 없이 아주 멀뚱하게 토해내는 피.
언젠가 아침에 허리가 아파서 뒹굴며 괴로웠던 것처럼, 잠시후 언제 그랬냐싶게 멀쩡했던 것처럼... 그런 것인가.
그런데 느끼거니와 날로 육체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눈이 그렇거니와 입 속도 역시 그렇고, 뒷꽁무니가 그렇거니와 뱃속 역시 그렇고, 수면이 그렇거니와 머릿속 역시 그렇다.
그리고 일과중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 갑작스런 피로감.
내게 주신 당나귀는 이제 급속하게 노쇠하고 있는 것인데.
느닷없는 喀血에는, 원인제공을 하는 오장육부 어딘가의 원인이 없을수 없다.
17179 1994. 2. 19 (토)
조마조마하였으나 한번의 객혈후 객혈은 없었다.
일시적인 현상, 일종의 경고였을까?
새벽 늘 고개숙여 기도의 흉내를 내고, 때로는 절실한척 예수님을 묵상도 해보고, 영혼의 J를 간구하여 눈물을 흘리는 척도 하여 보는 것이지만.
예수는 내 일상에 늘 함께 하시지는 않는다.
7년여전,
꿈결처럼 취하여 호흡의 순간에도 그 분을 느꼈던, 그 기적과 같은 나날들은.
그 감동의 순간순간들, 성경의 구절구절이 비수가 되어 심령을 찌르고, 달디 단 생수가 되어 영혼을 노래하게 하였던 나날들은.
뚜렷한 계기도 없이, 우연히 마태복음을 들척거리다가 홀연 나를 휩싸고 나를 송두리째 삼켜버렸던 그 순간.
그 때 나는 진정 나의 창조주를 내 온 존재로서 인식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내 온 실존으로서 신앙하였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신앙하는가. 신앙하는가.
새벽 늘 고개숙여 기도의 흉내를 내고, 때로는 절실한척 예수님을 묵상도 해보고, 영혼의 J를 간구하여 눈물을 흘리는 척도 하여 보는 것이.
신앙하는 것인가. 신앙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느끼고자 이 새벽, 눈을 감고 엎드린다.
17180 1994. 1994. 2. 20 (일)
이른 아침, 김순철씨의 중국어 강좌.
다소 늦게 거들먹 거리고 나타나 앞자리에 앉아서 오만한 어투로 되지도 않은 질문을 해대어 진도를 방해하고, 수업 끝난후 마치 전능자의 눈길로 수강생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조그만 사나이, Sh씨.
때로 그의 방에서 뒤집어 쓰는 그의 고함지르듯하는 포악의 구정물.
세계가 변하고 국제관계가 변하고 경제가 변하고 기업이 변하고, 시간마다 변하는데 너같은 돌대가리는 云云...
그 말은 그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하는데.
제대로 된 보수주의의 가치관도 갖지 못하는, 다만 오너의 친척으로서의 카리스마만 기승을 부리는.
그러면서도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만이 회사를 경영하고 발전시킨다는 착각.
독선과 무식함.
그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그 어떤 것도 용서하지 못한다.
오직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절대적인 법칙이고 진리이다.
그에게 반대하는 언어를 농하였다가는 그는 거품을 물고 기절할 것이다.
회사의 비극.
일요일 오전.
흐린 하늘.
英이는 오늘 교회 빼먹고 졸업 송별연 한다고 학교로.
俊이는 독서실 행.
俊이 방에 J는 누워있고, 나는 빌립보서 소리내어 읽는다.
17181 1994. 2. 21 (월)
일요일 오후에 중국어를 공부한다.
중국어의 단순한 구조는 쉽게 느껴지고, 또한 뜻글자이므로 의미의 이해도 빠르게 된다.
어학에 대한 흥미와 재능이 내게는 있다.
俊이도 나를 닮아 그러한듯하여 다행이고.
이것은 내게 몇 안되는 長技중 하나.
월요일 새벽, 목욕.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현악사중주 F장조.
그 3악장, 죽음을 긍정하는 경지의 놀라운 정신의 깊이가 있다는 3악장.
좀 난해하다.
그러나 낮은 음색은 묵직하게 영혼을 가라 앉힌다.
17182 1994. 2. 22 (화)
어제 잠들기 전,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다.
단절, 미지의 그것.
두려움, 신앙의 확신 속에서도 한줌 두려움이 없을까.
매일 매일 그 느낌을 반추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노인들, 불치의 환자들, 사형수들.
아아, 어머니, 장인 장모님. 나의 피붙이 노인들.
노인이 아닌 나 또한.
신앙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은.
죽음의 극복,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소망.
예수 그리스도의 오의는 바로 죽음의 초월이다.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죽음을 맞는 것.
신앙.
죄와 사망과 부활.
사이비 종교와 맞서 싸워왔던 탁명환씨 괴한에 피습 사망.
17184 1994. 2. 24 (목)
SB-406 경사시험.
하반기부터 서서히 신조선의 업무량 소진되기 시작하는데 영업팀들은 장기적인 기획이 부재하다.
기획력이 없이 그때 그때 경영자라는 사람의 순전히 주관적인 판단을 순발력으로 하여 활동하고 있는 회사.
도무지 일관성이나 뚜렷한 경영원칙이 부재하다.
俊이 어제부터 봄방학.
어제 퇴근하여 돌아오니 이미 독서실 가서 없었는데 지금 다음날 아침6시인데 녀석은 여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제 어미는 제 방에서 걱정에 겨워 밤을 꼬박 밝혔는데.
그렇게 무심한 녀석은 아닌데 전화 한통 없으니.
17186 1994. 2. 26 (토)
PY범 한라중공업 공채 합격하여 사직하겠다고.
젊은이의 비젼을 만류해야할 어떤 근거도 대선은 갖고 있지 않다.
공정파트의 일꾼인데.
俊이, 친구 두어명과 경주행.
다녀와서 심기일전하겠다는 소년의 의지를 한번 믿어볼꺼나.
토요일 싸늘한 새벽의 대기.
날계란 세 개로 아침을 떼우고.
17187 1994. 2. 27 (일)
황석영 '무기의 그늘'
일개사병이 무슨 정보부대의 대단한 역할을 맡아 이끌어가는 스토리전개는 좀 과장이 있다.
나의 군대와는 너무 틀린 끝발있는 군대.
월남파병 전야의 한 병사의 의식을 담은 빼어난 단편 '몰개월의 새'나 월남에서 귀국 첫날의 이야기를 그린 '낙타눈깔'에 비하여 문학의 냄새는 덜한 대신 미국이라는 거대 제국주의와 베트남이라는 참혹한 역사 속의 현장을 대비시키는 역사적 메시지 강한 내용.
英이가 빌려온 책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읽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곤충.
개미의 세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