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00 1993. 12. 2 (목)
이문열 '황제를 위하여'.
중반에 접어들다.
이문열답지만 괜찮은 소설이다.
동양적인 동키호테.
동키호테와 다른 점은 황제에게는 논리적인 동양적사고로 무장된 의식체계가 있다는 점이다.
행간에서 때로 작가의 얼굴이 드러나는 것은 역시 이문열적.
날씨는 온화하고
목요일 새벽, 수탉이 운다.
오늘 SB-395 공시운전의 첫날.
내 방.
로마서와 기도.
온유와 사랑, 변화된 내 의식
그리하여 내 사는 세상은 내게 대하여 변한다.
17102 1993. 12. 4 (토)
SB-395 공시운전 2일차.
비교적 상태 양호.
9일부터 10일 양일간 AUTOMATIC SYSTEM의 시운전.
독일,노르웨이등 MAKER ENGINEER에게 초청 FAX. 발송.
물론 영문 기안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영업의 J과장 손을 빌린 것.
P상무 의 일에 대한 정력은 알아주어야 한다.
마치 기관차처럼 지치지 않고 밀어 부친다.
'황제를 위하여' 종장에 접어들다.
정감록에 흠취된 일종의 망상체계의 정신병자일시 분명하지만 사랑스런 주인공.
이문열- 그의 서걱거림이 때때로 행간에 내비치고 있지만, 동양고전에 대한 해박함과 천착하는 자세는 대단한 소설가라는 느낌을 불식할 수는 없다.
타인이 볼 때 망상인데 스스로는 진실로서 행위하는 철학을 갖고 있는 황제.
실제로 근대에 그런 사람이 있었을법도 하다.
17104 1993. 12. 6 (월)
일요일 왼종일 P/C 앞에 앉아 있는다.
P/C의 기능을 십분 활용하자.
글을 쓰는, 글을 만드는 재미가 워드에는 있다.
글을 제련해 내자, 이 도구를 이용하여.
겸손한 글쓰기를 배우고, 진솔한 글솜씨를 익히자.
17105 1993. 12. 7 (화)
예전에는 12월 들어서기 무섭게 거리의 음반가게의 스피커에서, 또는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고는 하였는데 이제는 성탄절이 닥아 와서야 반짝하고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때에는 물질적인 빈곤이 지배한, 다양하지도 풍성하지도 못하였던 시절인지라 일년중 크리스마스가 유일한 찬란하게 떠들썩함의 날이었을 터.
그러나 그 때가 그립다.
방울소리 같은 즐거운 12월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비롯되었던.
英이와 俊이는 시험중.
우르과이 라운드, 쌀시장 개방.
바야흐로 세계는 진정 코스모폴리탄이 되려는지.
아니면 더욱 교묘한 형태의 쇼비니즘으로 옴추려 드는건지.
17106 1993. 12. 8 (수)
SB-403 공시운전, TOWING TEST.
내일은 SB-395 자동화 SYSTEM 시운전.
11일에는 SB-404 예비시운전.
그리고 그 다음날 중국 천진해운의 2차선 SB-400 의 예비시운전. 다음날 공시운전.
18일에는 SB-406 진수.
다음 주말까지 신조선 공정은 숨돌릴새 없이 바쁘게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각종 실적과 계획의 년말 업무.
게다가 여기저기의 회식들.
망년회란 이름의 타성화된 술자리...
俊이 시험 끝나다.
뒷꽁무니 빨간피 내비친다.
플라치도 도밍고 OPERA GALA.
벨칸토, 기름진 목소리의 아리아를 듣노라면 인생은 참 살만하다고 느껴진다.
17108 1993. 12. 10 (금)
SB-395 자동화 SYSTEM 시운전 이틀째.
BOW THRUSTER를 제외한 나머지 ITEM들은 순조롭게 진행.
무선 교신하는 P상무 의 목소리가 밝다.
느끼거니와 음주후의 회복기간이 예전과 같지 아니하다.
술에서 찾는 즐거움과 일락은 드디어 내 것이 아니게 되었는가.
이러한 현상이 하나님의 내게 대한 관심의 현상이기를.
"너는 시인에게 부어준다.
희망, 젊음, 생명을.
-그리고 自尊, 이 赤貧의 보배.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어 神들과 비기게 해주는 自尊을!"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신다면, 그 분의 확신과 그 분의 도취의 세계에 잠길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 자존을 포기하리라.
17110 1993. 12. 12 (일)
이제 Sh씨의 늙은 권위주의의 잔소리를 받아주는 역할이 내게 맡겨 졌는지.
P상무 대신 노상 나를 찾아 재끼는데 미칠 지경이다.
붉은 카페트 깔린 그의 방에 들어서면 우선 주눅부터 들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경우 불려들어가면 독선과 아집, 상대의 말은 들어볼 염은 아예 먹지 않은채 무지막지한 제 생각의 단견이 언어의 폭력이 되어 쏟아진다.
옆에 서서 보는 그의 프로필은 바로 노인의 추레함이다.
문득 가엾다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정녕 그런 인격이 싫다.
잠의 늪 속에 푹 잠긴 간밤 이었지만 일요일 새벽 잠이 깬 육신은 감기 기운 가득하다.
찬송가를 틀어놓고 구두를 닦고 우선 세수부터하여 신변잡사부터 처리하여 놓는다.
엎드려 고린도 전서.
17111 1993. 12. 13 (월)
자우룩한 감기 몸살기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
저항력이 이토록 없을까.
난방도 되지 않는 일요일의 사무실들렀다가 거리로 나간다.
신문에서 본 '좋은말 사전'과 '속담 용례사전'을 사려고.
인파, 인파.
상품, 상품.
그 인파를 유혹하려고 가게마다 손님끌기의 치열함이 눈 부실 정도다.
책들은 어찌 그리도 많은지.
하루에도 아마 수백종의 신간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이 무수한 것들중에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고른다는 행위.
홍수와 같은 정보속에서 필요한 것을 고를수 있는 능력이 지혜가 되는 세상이다.
일본 대역 소설 한권 골라들고, 열이 올라 나른한 몸을 이끌고 휘적휘적 돌아온다.
맥주를 들이 붓고 초저녁부터 침대에 기어든다.
혼곤한 잠.
그러나 새벽 몸살은 이미 온몸을 점령하였고 목구멍은 기침을 하지 않는데도 벌써부터 따갑다.
17113 1993. 12. 15 (수)
다스려지지 않는 기침.
지난 번의 기침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치유하였는데 이번에는 하나님께로의 마음가짐이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病人은 자신을 괴롭히는 그 病에 대한 끊임없는 적개심으로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그 적개심은 곧 스스로의 불운에 대한 한탄을 동반하고.
그 반복 속에 병은 점점 깊어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는 자신의 병을 긍정하고 그것을 수렴하고 그것과 타협하게 된다.
그런 연후에야 병을 극복할수 있다는 그런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바 있다.
프란치스코....
17114 1993. 12. 16 (목)
한밤중 전기가 나가버린 암흑의 집안.
우리집만 정전인데 도무지 원인을 알수가 없어 고칠 염도 먹지 못하고 촛불로 밤을 지낸다.
답답함.
옛날 호롱불이 조명이던 시절은 어떻게 견뎠는지 기억은 있으나 실감은 나지 않는다.
한번 중독된 문명의 편리함은 버릴수가 없다.
낮에 최대리를 집으로 보내 고치다.
간단한 고장이었던 모양인데 나는 전기에 대하여 문외한.
늦은 시각 퇴근하여 양주를 홀짝이며 俊이와 얘기를 나눈다.
대화, 대화.
부단한 대화의 필요성.
양주가 독하기는 독한 모양이다.
기침은 쏙 들어갔는데.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호시탐탐 목구멍 근처에 잠복해 있다.
17115 1993. 12. 17 (금)
SB-395 U.M.A 시운전.
UNATTENDANCE MACHINERY AUTOMATION.
연말의 일거리는 산적해 있는데 똑똑 매듭지어 정리되지 않아 답답.
아직 영업 SIDE의 판매계획마저 확정되지 못하고 있고.
Sh씨의 무례함은 정도가 지나치다.
그의 전화 예의는 본시 형편 무인지경이라, 퍼부어 대는 폭언은 상대의 인격을 깡그리 짓밟아 버린다.
英이 또 지리산 가겠다고 떼를 쓰다가 엄마 아빠의 단호한 불승낙에 볼이 부었다.
어울려 웃고 떠드는 그것보다 어떤 진지한 대상을 향한 천착의 자세를 보여 주었으면.
17116 1993. 12. 18 (토)
느닷없이 내게로 화살이 돌아오는 SB-395 의 선주 COMMENT사항의 CLEAR 문제.
그리고 Sh씨의 포악에 당하는 하루.
나의 부정적인 측면.
훌훌 털고 허허 웃으면서 쉽게 털어버리지 못하는 성격.
마음의 상처들이 켜켜히 먼지를 뒤집어 쓰고 심층심리의 창고에 쌓여서 무슨 심인성 질환 속으로 발현되는..
英이 지리산 포기하고 어제밤에는 제 방에 들어 앉아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
그런 英이의 모습이 이쁘다.
꿈- 꿈의 무대는 안톤 체홒의 '벚꽃 동산'.
그 장원의 저택은 보생의원이 되기도 하고, TARA의 스칼렛 오하라의 저택이 되기도 하고.
공작부인은 어머니가 되기도 하였는데.
몰락이라는 그 그림자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17117 1993. 12. 19 (일)
SB-406 중국 천진해운의 컨테이너선 진수.
날씨가 그다지 춥지 않고 2공장 선대의 혹독한 바람이 잦아 원만하게 진수작업 이루어진다.
P상무는 2공장 입구에서 승용차를 회전시키다가 택시와 충돌 사고.
사람은 다치지 않았으나 두대의 차는 크게 부숴졌다.
토요일 시내나간다.
인파, 강물같이 흐르는 인파.
거리거리를 골목골목을 지하상가에도 넘실대며 흘러간다.
미화당 앞에서는 우루과이 라운드 쌀개방 반대 집회.
집회의 사람보다 주변에 깔려있는 전경들의 숫자가 훨씬 많다.
17118 1993. 12. 20 (월)
일요일의 게으름 속에 몸을 뒹굴다.
J는 어느 집 김장 도우려 가고, 英이는 원주 만나러 외출, 俊이는 지석이 집으로 외출.
나는 테이프로 옛 노래를 듣는다.
노래 속에는 지난 시절 어느 순간의 정감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다웁게 비추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리네.'
내 유년의 겨울, 내 눈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동요.
한소절의 멜로디에 실려있는 순간의 기억이 음습한 창고에서 몸을 털고 표면으로 떠오른다.
17120 1993. 12. 22 (수)
태종대 관광호텔 연회 예약.
코모도 호텔의 부차장회 망년회.
Sh씨도 참석하여 30만원을 찬조한다.
총무인 나는 120만원을 찾아 돈 쓸 준비를 하였으나 모두 시큰둥하여 뷔페 50여만원의 1차로 끝내다.
추운 날씨.
17121 1993. 12. 23 (목)
신조선 공정의 숨가쁜 고개를 넘자, P상무 는 회의를 소집하여 예의 그 특유의 뚝심으로 후속공사를 챙기고 밀어 부친다.
날씨는 제법 싸늘하고 바람도 몹씨 불다.
英이는 제 엄마와 시내나가서 코트를 사다.
롱 코트, 그것을 입은 英이는 바야흐로 한 사람의 성숙한 여인이다
俊이는 오늘부터 방학.
헛되지 않은 방학.
무언가 이루는 여가를.
17122 1993. 12. 24 (금)
사무실 책상 정리.
묵은 서류들을 찢어 발기고, 이리저리 모을건 모으고 흩을건 흩는다.
마음먹고 정리하고 나면 마음마저 개운한 것을.
SB-395 인도 SIGN.
대학교수라는 사람들의 상업성은 장사꾼보다 더하다.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
예수님은 오셨다는데...
전통과 상징의 안개.
그 너머 진정한 예수님이 호젓이 서 계신다.
TV에서 본 청량리 오팔팔의 목사님과 그곳에 계신 예수님...
17123 1993. 12. 25 (토)
연휴의 첫날.
옛날처럼 크리스마스의 반짝거림은 찬란하지 않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
퇴근하여 J를 불러낸다.
탕수육을 먹고 케이크를 사들고 어머니 뵈러 간다.
쭈굴쭈굴 칠십넘은 노인의 손을 잡는다.
이렇게 늙고, 새롭게 늙고, 늙어..
俊이 웬일로 교회의 새벽송.
17124 1993. 12. 26 (일)
성탄절은 회사의 창립기념일.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빙그레 웃고 있는 돼지머리.
그 앞에 개기름 흐르는 사장은 넙죽 절하고, 그 졸개들은 뒷편에 무리지어 궁싯거리고들 있다.
방생이랍시고 비실거리는 장어를 다라이에 담아 부선거 옆 바닷물에 쏟아부은들 그 고기들은 살아 날 것 같지도 않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수리선부 윤부장도 어쩔수 없이 돼지머리 앞에 엎드릴 수밖에.
2공장 식당에서의 조찬.
떡국은 맛있었다.
17125 1993. 12. 27 (월)
일요일.
J와 함께 태종대 숲길을 걷는다.
날씨는 온화한 것 같지만 바다는 온화하지 않다.
선더미같은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포말이 되어 부숴져 스러지지만, 지치지 않는 파도는 연이어 달려든다.
먼 곳의 바다는 짙은 허무의 색깔을 띄고 누워있고.
술이 없는 무위의 여가란.
기분은 허무에 감싸이고, 보이는 사물은 풀이 죽는다.
술이 없어도 언제나 허허롭지 않는 것.
창조주의 손길을 느끼고 그 피조물의식으로 언제나 기뻐하는 것.
드라마 '엄마의 바다' 끝나다.
모든게 HAPPY ENDING, 기가 막히게 잘도 풀려 버린다.
17126 1993. 12. 28 (화)
생산관리부 망년회.
英이보다 어린 여직원 JH주.
그 아이의 제안으로 중국집의 요리를 먹은후 ROYAL HOTEL 17층의 나이트 클럽에 몰려간다.
젊은 아이들의 현란한 몸짓과 귀를 멍멍하게 하는 락 음악의 울부짖음, 번쩍번쩍 번개치는 사이키 조명.
젊은 아이들은 몸을 흔들고 펄쩍펄쩍 뛰어 대면서 괴성을 지르며 춤들을 춘다.
억지로 후로아에 끌려나간 나도 어쩌지 못하고 어설픈 동작으로 땀을 흘린다.
수십만원의 돈, 신용카드를 내어 사인을 하는 나는 모처럼 호기를 내는 구두쇠 부서장.
호프집에서 마감을 하고 12시 넘어 택시타고 돌아와 곯아 떨어진다.
늦잠.
7시 넘어 몸을 일으킨다.
내가 일어나 깨우지 않으면 J도 英이도 俊이도 아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서장회의, 기금의 결산서를 회람시켜 돈에 대하여는 딴 말이 나오지 않도록 단도리한다.
이런 종류의 수완이 내게는 없는 편이 아닐 것.
17127 1993. 12. 29 (수)
덕성여대 이원복 교수.
전공은 산업디자인, 서양미술사를 공부하고 오래 유럽생활을 한 만화가.
실체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을 만화로서 능숙하게 전달하는 작가.
그의 '현대문명진단'이라는 만화를 사려고 시내 대형서점을 뒤졌으나 눈에 띄지않는다.
어딘가 꽂혀 있었겠지만 종업원에게 묻기 귀찮아 영도의 집근처 책방에서 구입하다.
俊이 학원 나가기 시작하고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받는다.
英이는 토플 수강하러 매일 등교하고.
너희들, 공부해야 할 때, 스폰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여라.
그 지식이 영양가가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는 나중 너희의 살아가는 년조로서 깨달아 질것이고.
많은 것들을 섭취하라.
호기심을 잃지 마라.
17128 1993. 12. 30 (목)
세밑.
1993년도의 막바지.
해가 바뀐다는 것은 인문적인 달력의 개념만 아닐 것.
창조의 질서가 숨어있다.
해와 달의 순환과 절기의 어김없음.
절묘하게 구분되는 1년이라는 단위.
나무의 나이테를 보라.
정확하게 한해 하나씩의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너는 몇해짜리 목숨이다하고 예정해 놓으셨다.
그 예정기간이 차게 되면 너 생명아 오너라 하고 부르신다.
17129 1993. 12. 31 (금)
생산부 송년의 밤.
젊고 늙은 가시버시들과 병아리 같은 꼬맹이들, 100여명 태종대 관광호텔의 8층 그릴에 모이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노래하고 꼬맹이들 재롱에 웃다가 11시 넘어 연회는 끝이 났다.
이 행사의 기획과 관리, 예산 집행을 모두 맡은 나는 분위기에 신경 쓰이고 이것 저것 신경쓰느라 분주할수 밖에 없는 입장.
그러나 J도 참석하여 뿌듯한 진행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께에 팔을 두르고 양희은 '두사람'을 불렀다.
그야말로 세밑.
일찍 돌아와 자리에 눞는다.
새해에 아아, 나는 무엇이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