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9 1994. 3. 1 (화)
무위로움과 허무함의 휴일 다음날, 회사에서의 일과는 노상 서늘하게 외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게 한다.
짐짓 일에 열중하는 폼을 잡고 정신을 기울여 선각부문 외주 기성현황을 PC앞에 앉아 작업하여 출력한다,
중심없는 삶.
가치관을 상실한 삶의 양태.
필경 공허할 수밖에 없는 타성의 삶.
지난 날 열중케 하였던 그 대상들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주관적인 색채가 퇴색하여 객관적인 피상체로 전락한다.
그것은 그 대상에게서 본질적인 참모습을 바라볼수 있는 시각을 잃어버렸거나, 그 대상이 실은 무가치하다는 깨달음에 도달했기 때문일 것인데.
밖으로 향하는 의욕은 차갑게 식는다.
내면으로의 침잠, 그런데 그 내면은 황량한 벌판, 서늘한 바람이 불고 앙상한 가지는 삭풍에 떨고 황무지의 모래가 날리는 달리의 풍경화.
필경 그 황량한 풍경화 속에 등장하여 내 앞에 우뚝 서야 할 그 분.
삼일절.
새벽, 안방에 앉아서 소리내어 요엘, 데살로니가 후서와 시편 몇편 읽는다,
기도.
17190 1994. 3. 2 (수)
혼곤한 낮잠, 나는 낮잠을 자는 타잎이 아니건만.
자다가 깨다가 '개미'를 읽다가 공휴일의 한낮을 그렇게 보낸다.
저녁나절.
J와 俊이를 이끌고 어머니께.
할아버지 추도모임.
가야숙모가 없으니 예배의 형식을 갖출수가 없고, 아직 퇴근하여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도 없이 형네와 둘러앉아서 저녁을 먹는다.
형과 2병의 소주를 비우고 요즘 풍속의 정석대로 형, 俊, 彦, 哲이와 노래방.
아이들의 노래 솜씨.
다시 큰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뵐때는 이미 가뿐하게 취하여 있다.
17191 1994. 3. 3 (목)
아직은 싸늘하지만 저만치 봄이 있다.
"봄" 하고 발음하여 보는 그 느낌은...
부활, 따순 공기, 행복, 푸르름, 아기, 웃음, 향기, 나른함, 나래, 구름, 아지랑이....
그러나 진부한 회사로 진부한 출근을 한 날,
진부한 부서장회의와 진부한 Sh씨의 진부한 포악을 진부하게 당하고.
진부한 표정들 속에서 하루 일과를 보낸다.
17193 1994. 3. 5 (토)
'이펑호' 공시운전.
交信하랴, 보고하랴, 수시로 울려대는 전무의 전화받으랴, 사직하는 박영범의 자료들을 챙기랴 정신이 없건만 정작 PY범의 사수인 JS영 과장은 오불관언.
그 못나빠짐은 끝간데를 모른다.
PY범의 송별회식.
그예 취하고 만다.
12시 넘어 돌아온다.
곤히 잠든 고3짜리 아들놈의 얼굴.
안스러운가, 아비짜리는.
17194 1994. 3. 6 (일)
한라중공업 음성공장.
PY범은 여기저기 악수하고 대선에서 떠난다.
그리고 소폭의 인사이동.
예서 제서 보따리를 싸고 새로운 사무실 새로운 책상 찾아 자리들을 옮기고.
타율에 의해서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
직장이라는 곳.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직장 동료라는 의미.
그러나 그 관계의 의미는 각박한 것이다.
토요일, '서편제' 비디오 빌려 돌아오다.
길고 편한 잠.
일요일 아침, 英이가 침대 곁에 앉아서 아비에게 강한 어필.
귀가시간에 대한 부모의 간섭을 배제하여 줄 것을 호소하며 그 눈에 언뜻 눈물이 내비친다.
불쌍한 것.
못나빠진 부모를 만나서...
그런 감정에 공연히 코끝이 찡한 마음 약한 아비짜리.
17195 1994. 3. 7 (월)
J의 무례한 발버슴새는 아이들 앞에서 무참하다.
'서편제'
恨, 조선의 情調.
내게도 어떤 유전인자로 숨어있을 그 정서가 새록새록 피어난다.
눈먼 딸의 소리- 그것은 한, 그 한은 관계의 정, 그 정이라는 것은 슬픔, 핏줄의 슬픔.
황톳길 그 언덕을 넘어 떠나는 흰 옷 입은 어머니의 영상....
그 어머니를 향하여 오열처럼 터뜨리는 소리, 판소리 가락.
시장바닥, 길가에 앉아서 꽃,새,나비등을 그리는 혁필화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 솜씨에 넋을 잃고있는 어린 상헌이를 나는 그려 본다.
월요일.
곧 비 듣을듯한 잔뜩 찌푸린 하늘.
기도.
17196 1994. 3. 8 (화)
'개미' .
재미있다.
어쩌면 개미의 세계를 그토록 세밀하게 관찰할수 있을까.
그리고 개미에 관한 그 지식은 방대한 백과사전적이다.
그 관찰력과 지식으로 버무려 낸 상상력은 또 얼마나 기발한지.
지하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여왕개비가 바뀌는 바람에 식량이 끊겨서 위기를 맞고, 크리푸니 개미여왕은 사람인 손가락들을 절멸할 야심을 품고, 지상에서는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흥미를 더하며 중반에 접어든다.
겨울가뭄.
아, 달게 비 내린다.
17197 1994. 3. 9 (수)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반복작업이 손가락의 관절을 자극하여 그 신경줄이 손목의 관절에 전달되고, 다시 그 신경줄은 팔굽의 관절을 자극하고, 드디어는 어깨의 관절까지 이르러 우릿한 통증을 유발한다.
그러나 팔의 통증이 두려워 컴퓨터를 멀리할 내가 아니다.
몸뚱이- 그 당나귀에 대하여 겁은 많으면서도 기실 그 당나귀에 대한 배려가 없다.
내게는 육체를 정신의 下位에 두고자하는 지극히 문약한 선비적 의식이 있다.
어느 한 대상을 향한 양면성의 감정.
지극히 싫은 요소와 썩 괜찮게 느껴지는 요소가 그 대상에 함께 내포되어 있을 때.
그 호오(好惡)의 느낌이 중화가 되어 중화된 느낌이 창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 대상을 대하는 상황에 따라 어떤 때는 좋다가 어떤 때는 싫다가.
조울증의 요소를 닮았다.
시편 119
기도.
17198 1994. 3. 10 (목)
한심한 회사의 생태.
근로자의 날이 5월 1일로 국회통과되었다고 3월 10일이 휴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 오후 3시가 되도록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젼에 의한 SYSTEM이 작용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장과 전무 두 사람의 즉흥적이고 독단적인 의사에 의하여 나오는 한마디가 곧 결정이다,
참 개같은 체질의 회사다.
어쨌든 오늘은 휴무일이다.
비온후 다시 써늘해진 날씨.
17199 1994. 3. 11 (금)
나는 나만의 공간에 갇힌 고즈넉한 그 한가함을 사랑한다.
침묵- 혼자서 듣는 음악도 어차피 침묵이다.
혼자서 책을 읽는 그 사념의 세계도 어차피 침묵이다.
나는 고독한 침묵을 사랑한다.
그러나 오, 소인배의 일락이여.
업보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타성의 서러운 술마시기여.
술마신 정신은 이미 침묵의 세계가 아니다.
바다는 푸르게 누워있고 하늘은 해맑게 드리워 있는데 소인배의 일락은 이토록 어수선하구나.
꿈- 어느 고급 호텔, 김경곤이 모는 차를 타고 그곳에 묵고있는 유럽의 바이어를 찾아간다.
양말을 신으려다가 엘리베이터를 놓치고 호텔 마당을 헤맨다.
돌연 그곳은 회사의 본관건물, 그 옆에 건축된 학원건물이 우르르 무너진다.
17200 1994. 3. 12 (토)
혓바늘은 피로나 수면과는 상관이 없다.
몸도 곤비하지 않고 간밤 숙면도 취하였으나 슬몃 혓바늘이 돋아난다.
H代海上의 L사장이라는 친구.
해상크레인의 임대료를 올리고자 교활한 수작을 걸어와 따끔하게 대응하였지만 씁쓸한 뒷맛.
말하자면 해상크레인 한척의 사양능력의 우수함을 빌미로 하는 독과점적 횡포이다.
꿈- 벌레가 방바닥에 가득 꿈틀거리고 있다.
수면중에 심한 가려움증, 엉덩이 넓적다리를 긁어대며 잠드는데 이것도 꿈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토요일.
비 흩뿌리고 있는 밖.
17201 1994. 3. 13 (일)
나라를, 회사를, 공동체를 위한다는 폼을 잡고 지사연하지만, 그 속샘은 기실 개인적 이기주의의 냄새를 여실히 맡을수 있는 부류가 있다.
그의 명분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도구에 불과할 뿐.
더러운 위선자.
차라리 자신의 욕심을 쑥스럽게 내비치며 솔직하게 접근하는 사람이 얼마나 고운가.
꿈- 높은 곳의 사무실, 외부 돌출된 사다리로 오르내린다. 곡예를 하듯이.
17203 1994. 3. 15 (화)
황석영 '무기의 그늘' 반납하고 정치판 뒷얘기를 그린 '남산의 부장들' 빌려 읽는다.
권력의 속성은 어느 깡패 집단의 속성과 하나도 다를게 없다.
국가를 관리한다는 권력집단의 실권자의 자질은 동네 깡패조직을 운영하는 양아치의 자질만 있으면 될 수도 있겠다.
그 권력근처에 빌붙을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런 저런 연을 찾아 줄 잘서기.
왕초 형님의 눈길을 끌만한 운이 따르면 된다.
참 웃기는 나라였다.
지금도 참 웃기는 나라일 것이다.
오늘 SB-407 진수.
17205 1994. 3. 17 (목)
의무실의 간호사 미스 A.
예쁘고 참한 처녀아이.
승용차를 몰고 가다가 과속 버스에 들이 받혀서 뇌를 크게 다쳤다.
생사를 넘나들고 있다는데 살아나더라도 식물인간이 된다고.
그리고 그녀는 PY범과 장래를 약속한 그런 사이라는 뉴스도 내게는 뜻밖이다.
PY범은 그녀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인가.
결국은 이기주의, 죽는 사람은 죽는 사람이고 산 사람들은 필경 일상의 디테일이 만들어 내는 안일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PY범이도 필경 그러 할 것이다.
쓸쓸한 노릇이지만 달리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인지.
낭만주의 소설처럼 현실은 그렇게 짜임새있는 아름다움의 세계는 아니다.
17206 1994. 3. 18 (금)
아슴프레 봄의 냄새.
두꺼운 커튼을 재치고 창문을 열면 싱그런 대기의 냄새.
이제 무거운 외투일랑은 벗어 고리짝에 개켜놓고.
봄이 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봄.
읽어갈수록 징그럽고 따분한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책.
박정희- 공작정치, 헌법위에 선 무소불위의 권력, 인간의 걸레화, 아부와 빌붙음의 속물들의 도정.
오늘 SB-411 진수.
그리고 SB-406 'YI FENG, 호 출항.
GJ수 과장이 2개월간 개런티 엔지니어로 승선하여 출국.
하리 베라폰테.
녹슨 듯 싄 목소리에는 애수가 스며 있지만 칼립소 풍의 노래 자체는 낙천이 넘쳐 흐른다.
칼리브해의 낙천.
17207 1994. 3. 19 (토)
SB-411 진수.
해군중령 출신의 GY식 차장, 배가 미끄러져 내려가자 나를 보고 "바로 이 맛에 배를 만드는 것 아니겠소?" 한다.
FAT 진수는 역시 조선의 꽃.
SB-412 기공식.
돼지머리 앞에서 중국사람들도 한국사람 모양 큰 절을 올린다.
퇴근하면서 P상무는 과장급이상을 불러 모아 회식을 베푼다.
동삼동 하리 횟집.
회식마친 8시쯤, P상무 차를 타고 JM교, PD성 과 함께 동아대학병원 영안실 들린다.
KT경 의 부친상.
늘 노인이 돌아가신 상가에 가면 떠오르는 얼굴 있으니, 어머니...
17209 1994. 3. 21 (월)
베르나르 베르베르 '개미' 완독.
개미의 세계.
유기적인 집단관계로서의 객체만 존재하는 그곳의 세계.
이기주의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집단을 위한 자기희생은 당연한 그들의 존재양식이다
개미의 삶의 양태와 인간의 삶의 양태가 대비되어 그려지는 후반.
곤충학의 깊은 지식과 관찰력, 그리고 상상력과 치밀한 구성력으로 모자이크한 소설.
월요일.
하늘은 스산하게 낮아있고 어슬어슬한 바람이 분다.
기도.
17212 1994. 3. 24 (목)
英이가 머리를 잘랐는데, 오른 쪽과 왼쪽을 비스듬이 경사를 주어 자른 헤어 스타일.
TV 나 여성 잡지에서 보았음직한 스타일이다.
그것이 영 못마땅한 보수꾼 아비짜리.
제 젊었을적 방자함은 모두 잊은 듯.
英이 방의 소설, 죤 그리샴 '펠리칸 브리프' 재미있게 읽고 있다.
마국이란 사회, 정치판, 법률이라는 잣대.
다비 쇼라는 매력적인 주인공 여대생
백악관, FBI, CIA, 신문사등 현대의 권력 중추들이 맞물려 긴박한 서스펜스를 이룬다.
따뜻한 아침대기, 해가 솟았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안네 소피 무터의 아르키.
카라얀.
17213 1994. 3. 25 (금)
요즈음은 잠들려고 잠자리 누워서 한시간여를 뒤척이며 잠이 찾아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한 30분여만 기다리고 있으면 수면이 찾아준다.
수면의 질이라는 문제를 차치하고서, 얼마나 고마운 현상인지.
나이를 먹으니 이렇게 좋은 쪽으로 변하는 것도 있구나.
엇그제의 CBS의 '새롭게 하소서'
사생아로 태어나고, 어린시절에 실명하였다가 희미한 시력으로 식모살이.
그녀가 지금은 불쌍한 노인들을 모아서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다.
어제의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하였던 방송작가.
이혼과 홀로서기, 외아들과의 갈등.
지금은 조그만 신앙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들.
17214 1994. 3. 26 (토)
아카데미 영화상의 제전.
그 세레모니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엔터테인먼트.
현대영화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서정성 짙은 옛 영화들의 필름도 영상으로 비추이는 가운데 이제 73살, 어머니보다 2살 적은 데보라 카는 특별상을 받는다.
품위있는 아름다움은 간곳없이 늙어 쭈그렁뱅이 노파에 불과한 데보라 카.
목소리조차 갈라진 쇳소리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인다.
그런 데보라 카보다 두 살이나 많은 내 어머니.
17215 1994. 3. 27 (일)
3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세월은 살같이 흘러가고 있는데 사람의 수명은 육십이오 강건하면 칠십이라.
일생의 막바지에 꿈꾸는바 그것들을 모두 일구어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는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
유한한 실존의 인간의 꿈이란.
불완전한 삶이기에 하나님께서 마련하여 주시는 다른 개념의 존재함이 필요하다는 당위성이.
殺身成仁-
제 몸을 바처 인을 이룬다...
이 仁이란 내세에 대한 보상의 관념이다.
아직 서늘한 대기.
이 속에 봄은 숨어있다.
봄의 숨결, 생명의 숨결.
그 숨결은 지표면 가차운 곳에서 빛의 느낌을, 창조자의 숨결을 느끼고 부활의 예감에 몸을 떨고 있다.
그가 꿈꾸는 초록의 노래와 기쁨의 아지랑이.
토요일.
모처럼 외출하지 않은 英이와 마루에 앉아서 비디오를 빌려다 본다.
'秦俑'.
장예모, 공리가 출연한 영화인데 그 신비한 제목에 어울리지 안은 범작의 오락영화.
몇천년을 땅 속에 묻혀있었던 長安의 진시황 무덤 속, 수천의 진흙사람 군단을 상상하면, 아, 고대의 역사는 얼마나 신비한가.
그 신비함이 지금 눈앞에 펼처지는 순간, 고고학자는 무척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로빈 윌리암스 주연의 '토이즈'
영화의 내용은 시나브로 소주에 취하여 가는 의식 속에 남아있을리 없다.
일요일 새벽.
고개 숙인다.
17216 1994. 3. 28 (월)
'말콤 X'
덴젤 워싱톤이라는 멋진 흑인배우의 연기.
얼마전 그의 연설문집을 읽었을때, 알렉스 헤일리가 기록한 그의 자서전적 얘기를 읽었을때, 말콤 엑스는 하나의 전율이었었는데.
영화에서는 그 전율이 한참 덜하지만 그래도 그 흑인 사나이의 카리스마는 진하게 전달된다.
17217 1994. 3. 29 (화)
월요일 일과중 감성밭은 늘 을씨년스럽다.
소위 월요병은 아닐 것이다.
경건과 자기개선의 시도없이 무위의 휴일을 보낸 다음날의 일종의 자괴감과 초조함도 섞여 있는 허무한 감정.
이동도서관에서 백시종의 '왕회장 돈황제'를 빌린다.
단 숨에 1권을 읽어 버린다.
주인공 왕득구회장은 바로 정주영 현대재벌의 회장.
백시종은 현대그룹 기획실인가에서 정주영을 가까이 접하고 그에 대한 환멸의 싹을 키웠나보다.
부도덕적인 왕회장도 역겹고, 유아독존의 독선적인 성격은 힘없는 자를 깔아뭉개고, 그의 유일한 가치는 돈이다.
그리고 근본 무식한 그인데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영리해 진다.
봄은 성큼 왔는데.
나의 신앙, 우리 집의 신앙의 부활은?
17218 1994. 3. 30 (수)
부산의 봄은 항상 이 모양이다.
3월 말의 스산함은 한겨울 유리알같이 투명한 차가움보다 오히려 더 하다.
게다가 바람은 사계절중에서 봄철에 가장 기승을 부린다.
바다 역시 칙칙한 색으로 우울하게 잠겨있다.
바이오 리듬인가를 보니까 신체,지성,감성 지수가 모두 저조하니까 다음을 기약하고 오늘은 움츠려 있으란다.
그런데 바이오리듬 따위는 내게 맞지 아니하다.
내게는 나만의 독특한 사이클이 있다.
만일 이를 쭉 기록하여 두었다면 나만의 그라프를 만들수도 있었을텐데.
'돈황제'
2권에서 그리는 왕회장의 행각은 더욱 과장된 풍자어법으로 그려진다.
작가의 그에 대한 혐오감이 그대로 노정되어 과장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50% 이상은 사실일 것이다.
돈쟁이의 오만함과 더러움.
나 또한 돈의 숭배자일 것이지만 그것이 있다고 해서 그토록 절대적 오만에 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
17219 1994. 3. 31 (목)
Sh씨 쏘련 출장가서 열흘가량 회사를 비우고있는 요즘.
회사에서의 나는 어딘지 모르게 여유로운 기분이다.
한 인간의 존재가 내 의식을 그토록 억압하고 있었구나.
퇴근하여 치킨과 딸기 사들고 어머니께.
아파트의 현관에서 이제 조그마 해진 한 노파가 나를 맞는다.
형은 부산에서 근무한지 두달가량 되었다는데 여태 그것을 모르고 있는 이 형제의 격조함이란.
형수는 교회에 가서 없고, 어머니는 쟁반에 식은 밥을 차려서 들고 계시고, 형은 빵조각에 국물을 찍어 소주를 마시고 있다.
쓸쓸한 분위기의 형네. 나의 마음도 쓸쓸해 진다.
어머니를 보고온 종장에는 취할수 박에 없는가.
형네에서 소주를 마시고 돌아와 마루에 앉아서 맥주를 마신다.
그러면서 TV화면에 나오는 쇼팽 연주를 딴에는 열중하여 들여다 보다가 그예 취하여 쓰러진다.
깨어난 아침.
어렴풋한 쇼팽의 흔적이 남아있고, 어제 어머니의 말씀 하나 기억에 남아있다.
"너도 벌써 딸년 시집걱정 할 나이."
6시 넘어 기상.
주님, 도우소서.
나와 그리고 나의 사람들.
덧없는 목숨, 다 하기 전에 영원한 가치의 본령에서 흘러나오는 한줌 빛을 잡아야 할텐데.. 잡아야 할텐데.. 잡아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