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1 1994. 6. 1 (수)
다시 읽는 일본소설.
나스메 쇼오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노일전쟁의 승리, 바야흐로 욱일승천하던 시절의 일본적 낙천주의가 흐른다.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해박하게 인용하는 문학적 에피소드들.
무대는 일개 영어교사의 집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물론 고양이지만 그 파트론은 영어교사이다.
그 시절 가히 일본은 전성기의 문예애호주의의 분위기가 물씬한 소설.
가와바다 야스나리 '설국'
애잔한 정서가 흐르는 아름다운 소설.
일본적인 엑조틱한 냄새짙으나 그보다 어딘지 모르게 엄습하는 허무주의의 달콤한 향기.
일부러 애매하게 설정한 관계의 설정과 구성에서 더욱 특이한 정감을 자아낸다.
수요일 햇살.
베토벤 전원교향곡.
오이겐 요쿰의 암스텔담 콘서트헤보.
17282 1994. 6. 2 (목)
잇빨.
잇몸의 염증부위로 통하는 터널입구에다 마개를 해박고서는 염증이 사라질때까지 약6개월동안 잇빨 해박는 것을 유보하기로 한다.
저녁 마루에 앉아서 한병의 소주를 앞에 놓고서 정신과의사인 이시형 박사의 강연을 듣다.
부모를 죽인 패륜 아들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이 주제이련만, 가부장적 윤리관에 입각한 정신분석학자 답지 않은 강연이다.
정신과의사라기보다는 성균관의 유학자적인 어프로치이다.
그러나 옳으신 말씀.
자유방임의 교육,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잔소리장이, 매를 드는 아비가 없는 사회 분위기.
프로이트가 모두 설명하고 해결하여 주는 것이 아니다.
이시형 박사- 그가 존경스럽다.
현학이 아니고 현실이고 현실은 현실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아직 완벽하게 검증되지 못한 정신분석적인 이론따위, 당분간 무시하자.
내 새끼, 내 부모 살려야지. 이 카오스의 세상에서..
가치관도 주관도 여물지 못한 아이에게 있어서 무작정으로 부여하는 자유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17283 1994. 6. 3 (금)
찬란한 유월의 햇빛.
사람의 감성이나 기분은 알게 모르게 계절이나 날씨에 영향을 받는다.
그 느낌은 감수성을 자극하고, 정서에 영향을 주어, 그런 정서가 축적되어 하나의 성격적 특색으로 자리잡고 그것은 이윽고 사상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둔감한 사람일지라도 그 이면을 잘 살펴보면 계절과 날씨에 의하여 각인된 어떤 흔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히 나는 더욱 그러하다.
17285 1994. 6. 5 (일)
술을 마시면서 문득 한때 나의 낭만을 채워 주었던 두사람의 작가를 생각한다.
아마도 회사에서 우연히 읽은 한수산의 수필에서의 연상일 것이다.
JN영에 의하여 접하였던 다자이 오사무.
'킬로친 킬로친 슈루슈루슈' 의미도 없는 이 건배의 노래는 다자이 오사무의 斜陽에 나오는 대사이다.
또하나 WS규 로부터 전이되었던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 나오는 라비크와 조앙 마듀가 칼바도스를 마시면서 하는 건배의 대사 '살루트'.
JN영과 WS규 의 어떤 감성적 기질도 이 두 건배의 언어에 녹아있음직도 하다.
다시 꺼내 읽는'사양', 역시 압권의 소설이다.
토요일 날이 어둡자, 내 책상 앞에 앉아 소주잔을 홀짝이며, 차츰 몽롱한 정신을 즐기면서 샤갈의 화집을 펼처놓는다.
도화지를 책상위에 펼쳐놓고 크레파스와 파스텔을 섞어가며 나는 샤갈의 환상을 모사한다.
몽롱한 것은 내 소주정신의 환상이기도 한데 샤갈 역시 몽롱한 환상.
그리고 나니 내가 모사한 것은 그의 아름다운 환상이 아닌 샤갈의 만화적 패러디일뿐이지만.
그 만화 속에서도 샤갈의 천재는 있으니 나는 기쁘다.
그리고 고흐의 광기를, 그 충일한 질서를 또한 모사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한낱 만화적 패러디.
그러나 그 만화 속에서도 고흐의 천재는 있으니 나는 기쁘다.
아, 누가 있었더라.
다자이 오사무, 레마르크, 김승옥, 테네스 윌리암스....
그리고 고흐, 샤갈. 제임스 딘..
또는 로렌스, 그리고 슈바이처, 프란치스코, 우찌무라 간죠......
나를 압도하였던 인격과 품성과 정신과 멋.
17286 1994. 6. 6 (월)
여가 때의 그 나른한 졸음.
일상의 의무감으로 부터 긴장의 끈이 풀어져서 일견 한가한 마음을 가져도 좋으련만, 여기저기 의욕의 설합 속에는요즘 펄펄 뛰는 생선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난삽하여 카오스의 상태이다.
이 카오스의 상태는 내가 개입할 성질이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졸음에 항복한다.
어제 그토록 바람이 불어 쌓았는데.
현충일, 바람은 다소 자고 뿌연 광막에 뒤덮인 저 공간.
17287 1994. 6. 7 (화)
현충일은 죽은 사람들의 날이다.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날이다.
이날 기림을 받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싸우다가 또는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들을 말한다.
내 아버지 죽은 날도 모르는 나는 이 날이 휴일이다.
이 푸른 계절에.
그러나 현충일은 휴일.
J와 바람부는 산록을 걷고 걸어, 초록기쁨 충만한 산 속으로 들어간다.
함지골, 호젓한 바위 나무그늘 속에 앉아서 차가운 물 한바가지 마시고, 프로이트의 몇장을 읽고, 물통을 짊어메고 영선동 쪽으로 내려온다.
줄곧 걸어서 옛 구청부근의 소문난 돼지국밥집, J는 돼지국밥 맛있게 먹고 나는 한병의 소주와 수육을 비운다.
다시 버스를 타고 사격장 앞에 내려서 아카시아집의 서쪽 바다가 훤히 조망되는 숲 속 자리에 앉아서 두병의 맥주를 마신다.
술을 마셨을지라도 이 아니 건강한 휴일인가.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내와 산을 걷고 함께 술을 마시고...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입문'
'잘못'의 장을 지나 이제 '꿈'의 장을 읽고 있다.
옛날에 프로이트나 융이나 에리히 프롬등을 천착하였더라면..
일찌기 나는 스스로 나를 분석하여 제어하고 관리할 수는 있었을까.
이제 이들을 섭렵한다고 하여 내 아지못할 저 어두운 창고 속을 정리할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숙면.
바람은 완전히 자고 화창한 화요일.
오늘 SB-411 공시운전.
17288 1994. 6. 8 (수)
SB-411 시운전 가고 난 사무실.
프로이트 '정신분석 입문'에 파묻힌다.
꿈- 여태 읽어왔던 단편적인 지식들 때문인지 전혀 낯설지 않고 쑥쑥 잘도 읽힌다.
그리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런데 내 임상에 비하여 다소 이상한 것들.
꿈의 시간성이라는 문제, 현재몽이 어떤 외부의 자각으로서 나타날 때, 이를테면 자명종이 울리는 소리를 천둥소리로 꿈을 꾸었다고 하면.
그 내용은 현재몽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게 마련일텐데. 꿈의 스토리는 그 종장을 향하여 통일되어 있음은 어떤 까닭일까.
꿈이란 시간개념이란 없는 것이 아닐까.
꿈의 길고 긴 스토리도 찰나의 순간에 압축되어 나타나는 어떤 순간적인 번득임이 아닐까.
그래서 그 꿈을 깨고 난 의식이 그 순간을 시간적으로 풀이하는데서 꿈의 어떤 오해가 비롯된 것은 아닐까.
간밤의 꿈- 어느 뷔페식당에서 만난 오세건, 매력적인 그의 아내는 순간적으로 내 입 속을 들여다보고 썩은 이를 발견한다.
나는 이 꿈을 해석할수도 있을듯한데, 도식적으로 프로이트를 적용할수도 있는 꿈이지만.
그러나 독특한 색깔의 간 밤 꿈의 선정적인 느낌은? 그 분위기는? 혹은 내가 주체적으로 느꼈던 그 정서는 ?
17289 1994. 6. 9 (목)
일과중 프로이트가 못 견디게 읽고 싶어서 화장실로 회의실로 사람없는 곳을 전전하면서 꿈의장을 모두 읽다.
프로이트의 그것은 그 당시 1910년대로서는 실로 경천동지할 신기원적 연구 발표였을 것이다.
그는 천재중의 천재였다.
정신의 실체를 밝히 드러내다니.
그 후 수많은 문학, 미술, 연극, 영화등 모든 예술 장르에서 프로이트의 영향은 지대하였고, 인문학뿐 아니라 이공학의 분야까지도 막강한 영향을 끼첬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지금도 부단하게 작용한다.
지금이야 예사로 무의식이니 정신분석이니 하고 지껄이지만 그 미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발견한 프로이트의 천재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간 밤의 꿈 3章- 하나, 청학동 제2공장 폐허가 된 옛 남고등학교 건물. 목공장에서 가구도장을 하는 쏘련 여자 세명.
둘, 영도 남항동,옛날 원이 영식이 집 부근의 동네, 통나무 야적장의 동굴.
셋, 허름한 2층 목재소에서의 총격전, 사람을 죽이고 자살하려고 물에다 얼굴을 처박았지만 체포되어 낯익은 형사에게 심문을 받는다.
17290 1994. 6. 10 (금)
P상무방.
건설사업부의 H대리 철구조물 도장공사 계약건에 대하여 어필하자 P상무의 고함이 터져나오고 서류가 공중을 나른다.
나는 그를 다독거리느라 진땀.
건설부의 일처리에 대한 불신의 선입견이 너무 굳은 P상무도 문제이겠으나 어딘가 구린내가 진동하는 건설부의 관행적 일처리에도 문제가 있다.
프로이트 '노이로제 총론' 읽기 시작한다.
간밤의 꿈-
미국서 귀국한 손철수(오세건이기도)와 그의 아내, 그리고 미국 이민간 기획실의 김수영과 함께 복잡한 시장을 걷는다.
대학의 구내 강당, 연극무대인데 나는 위험지역의 코키역(고도를 기다리며의 럭키역이기도)이다.
나의 꿈은 단순치가 않다.
며칠전 TV로 보았던 '고도를 기다리며'와 시운전의 도시락을 먹었던 사건들이 소위 낮의 잔상으로 배경이 되었음직하고, 리비도의 몸부림이 캐릭터를 만들고 사물의 형태를 빚었음음직도 하다.
그러나 내 꿈 속에 일관되어 흐르는 어떤 정서적 분위기는?
색깔, 느낌, 정서, 깨어난 후에도 아련히 남는 그 감상적인 느낌...
이것들은 무엇의 검열이며 무엇의 대치이며 무엇의 왜곡이며 무슨 소망의 충족일까?
천착해 보면 알수 잇을 것이다.
俊이 영어는 톱, 국어는 中, 수학은 中下.
17291 1994. 6. 11 (토)
짙은 초록색인데 그것은 짙으면서도 밝은 느낌의 초록색.
분홍색인데 그것은 엷으면서도 무거운 느낌의 분홍색.
내 뇌리에 깊이 박혀 잇는 일본적인 색감이다.
어린 시절- 나는 일본의 책이나 상품에서 접했던 그 색감으로 행복했던 적이 있었다.
또 좀더 자란 후에 나를 지배하였던 색감.
밀짚모자의 테두리의 천연색 영화필름. 그 브라운의 색감.
코닥이었나 이스트만이었나.
그것 또한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색감이었다.
어쩌다가 우연히 그런 색감을 접했을때 화들짝 놀랄때가 있다.
간판에서, 텔레비의 만화영화에서, 혹은 낡은 책의 표지에서, 상품의 포장지에서.
그리고 엄습하여 나를 휘감는 짜릿한 행복감....
내 무의식에 각인된 그 색깔에서는 의미심장한 내 정서의 진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토요일.
안개 자욱한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둘러쌓인 공간.
존재를 주재하시는 커다란 格.
기도.
17292 1994. 6. 12 (일)
문득 강렬한 어떤 정서 속으로 몰아 넣는 자극들.
그 자극은 오감을 타고 온다.
후각- 냄새는 참 직설적인 호소력으로 어떤 정서를 자아내게 한다.
어느 한적한 골목의 어떤 모퉁이를 지나다가 나무 썩는 냄새를 맡으면 곧바로 고가의, 비약하여 어느 성채... 그리고 기억과 책... 음악...어떤 그림의 영상...
시각과 청각보다 후각이나 미각에서 더욱 직설적으로 ....
촉각은 어떤지...
그리고 색감에서.
이러한 오감으로 느끼는 자극이 무의식의 창고를 더듬어 어느 설합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해당 자료를 끄집어내서 검열을 거처서 가장 알맞은 왜곡의 형태로서 의식의 영역으로 밀어내는데...
그 서립 속- 요술쟁이, 모든 것이 다 있다.
그것이 꿈이다.
17294 1994. 6. 14 (화)
SB-408 'YI FA' 출항.
ENGINR TELEGRAPH의 TROUBLE.
홍콩에서 처리키로.
해상크레인을 동원한 SB-412 의 M/E과 HOUSE BLOCK 탑재.
없었던 알레르기가 늦은 나이 생겨난 걸까.
얼굴에 발진이 생기고 가렵다.
팔뚝, 종아리도 가렵다.
꿈- 대선조선 드라이 도크 앞에 난장이 벌어졌다.
야시장 ... 6 창고 드넓은 공간에도 야시장들이 들어서고,,
오늘 SB-409 진수.
기도.
17295 1994. 6. 15 (수)
SB-409 진수.
거대한 덩치는 마술처럼 스르르 바다 위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진수작업- 2공장의 기능직사원들은 정말로 다루기가 어렵다.
LW규 차장, JM교 과장의 관리의 한계를 벗어난 느낌.
전쟁위기.
북한 IAEA 전격 탈퇴 발표.
미국과의 단독협상을 노리는 작전인가, 아니면 진짜 한판 벌리겠다는 건가.
J는 전쟁의 실감으로 위기를 느끼고 있는데 나는 그런 J의 포즈에 조금 우습다.
이제 전쟁이 난다면 그 형태는 무엇?
옛날의 6.25와는 양태가 다를 것이다.
여름은 무르익는데.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는 심오하고, 한반도를 둘러 싼 정세는 숨가쁘고, 프로이트의 진도는 나가지 않고, 俊이는 고 3 이라는 녀석이 12시 취침과 6시 기상을 고수하고, 英이는 시험공부 한답시고 매일 10시에 귀가한다.
17296 1994. 6. 16 (목)
이번에는 생뚱하게도 귓속이 아프기 시작한다.
건설공사 육교건 처리하고, 진수도 끝나고, 몇건의 품의건 종결하고... 느슨한 업무부하.
프로이트의 노이로제 총론 읽는다.
유아기의 성욕, 순치되지 않은 리비도의 참모습은 도치된 형태의 것이다.
마루에 앉아서 소주마시다가 英이와 충돌.
'부모는 네 인생에 있어서 엑스트라가 아니야.'
하는 내 고함.
'그럼 주연이에요?'
하는 英이의 대꾸.
17297 1994. 6. 17 (금)
햇빛 짱짱한 한낮.
회사를 쉬는 한적함, 귓병을 핑계로.
형의 생일이라고 J는 큰집으로 가고, 나는 TV 앞에서 맥주를 마셔가면서 소인배의 일락에 젖는다.
英이는 아비와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고 어제부터 이른 아침 학교 도서관으로.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 라잘 사중주단.
카터와 김일성 회담, 내일 월드컵 축구.
17298 1994. 6. 18 (토)
카터 특유의 두꺼운 입술의 웃음지으며 김일성과 마주 앉았다.
김일성의 아내라는 여자도 모습을 드러내고.
긴장국면으로 치닫던 북한의 핵문제는 일단 한시름 놓게 되는 듯.
나는 과연 북한의 핵이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
북한이 주장하는바 그것이 당연한 것이지, 유엔,미국,한국의 입장이란게 본질적으로 무엇인지?
과연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그토록 비도덕의 나라인지...
한쪽에서는 토요일 새벽부터 월드컵 축제.
한국과 스페인은 8시30분 부터다.
비 흩뿌리고 바람 몰아친다.
17301 1994. 6. 21 (화)
SB-408 인도 출항.
QC의 노재희기사를 GUARANTEE ENGINEER로 싣고 천진으로 떠났다.
SB-412 진수 FAT 도포.
이동도서관에서 황인경의 '목민심서'빌리다.
단숨에 1권 독파.
정약용의 이야기 들어가기전 홍국영의 흥성하였다가 몰락하는 과정의 이야기가 오히려 소설적 재미가 가득하다.
그 당시 우리 젊은 선비들은 천주실의등 서학의 지식을 접하고는 그 충격은 가히 대단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이라는 개념과 합리 논리적인 사상.
그런데 이 개념에 있어서는 의외로 쉬웠지 않았을까?
조선의 지식층은 다신교의 개념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유일신 사상은 우리 민족 정서상 아주 쉽게 접목되지 않았을까.
17302 1994. 6. 22 (수)
남과 북의 정상회담은 이루어질 것인지,
이데오로기적인 입장과 정략와 관념의 벽.
그 벽을 김일성과 김영삼은 뛰어 넘을수 있으려는지.
거의 반백년을 지도자로서 군림하여 온 노회한 김일성과 그에 비하면 어딘가 어려보이는 김영삼.
비젼을 끌어내고 비젼을 보여주고하여.
아, 내 아버지를.
P상무의 억지스러운 일방적 회의.
어찌하여 생산성 문제가 현업의 탓이어야만 한단 말인지.
'목민심서' 2권까지는 정약용의 이야기보다 궁중비화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처진다.
사도세자,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그토록 미워지기 시작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미움이 자의식이 되어 갈수록 이상 광포해진다.
정신분석적인 해석만이 설명할수 있는 부자간의 게임이다.
결국 쌀뒤주에 갇혀 죽는 아들.
이것은 무슨 종류의 강박들이 작용한 것일까.
궁궐- 그 특이한 사회.
한 개인의 정신병리적인 문제가 아닌 궁중이라는 특이한 논리와 가치관이 지배하는 분위기여서 그러했을 터인데.
17303 1994. 6. 23 (목)
이제 슬슬 여름장마가 시작되려는지 비 흩뿌리고 습기 가득하다.
상상력- 그것은 머리만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감이 전달받는 온갖 신호를 머리가 요리하여 만들어내는 푸짐한 음식이다.
장마철- 축축하고 음습한 대기 속에서 풍기는 그 냄새들은 얼마나 안온한 풍경화를 상상케 하는지.
안온한 풍경들을 예전에는 아주 자연스레 만들어 내고는 인생의 촉촉한 아름다움에 겨워한적도 있었건만.
이제는 그런 자연스런 연상이 불가능해저 버렸다.
억지로 끄집어 내어 어거지로 그런 기분에 젖어보는 것에는 하릴없이 봐야하는 한 편의 영화처럼 아무런 촉촉함이 있을리 없다.
나이 먹어 메마르다는 것.
이것은 바로 이 상상력의 고갈이다.
무미건조한 현실의식, 그 황량함만을 인식하여 생존하고 있는 것이 바로 늙은 모습.
17304 1994. 6. 24 (금)
퇴근하여 어머니께.
공연히 서러운 늙음.
어머니.
들려주시는 꿈얘기.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자주 꾸신다는데.
학교같은 곳에서 현관에 나서면 어머니는 신발만이 없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버렸는데 어머니만 가지 못한채 발을 구른다.
아, 나와 닮은 꼴의 꿈을 어머니도 꾸고 계신다.
시름겨운 술.
그리고 절망할수 박에 없는 에고이즘.
원죄란 바로 이 이기주의라는 것.
예수. 그는 이것을 전혀 지니지 않았으므로 예수다.
오늘, 볼리비아와 월드컵 축구.
16강이 결정되는 경기이다.
17305 1994. 6. 25 (토)
온 나라가 열광하였으나 볼리비아와 0:0 무승부.
막강 독일과 한판 승부를 남겨두고 있다.
그 경기에 이겨야만 16강 진출.
축구라는 발재간이 그토록 어려운 걸까.
일생을 그 발재간에 바치는 사람들과,
그 발재간이 엄청난 돈이 된다는 사실에 문득 어처구니없다는 생각도 든다.
英이 시험 끝나고 방학이다.
17306 1994. 6. 26 (일)
토요일 오전. 바쁜 일과를 보낸다.
칼라시트 교체공사의 도면작성, 공사내역 작성...
황인경 '목민심서'는 기대한 만큼의 감동은 없으나 열심히 쓴 소설이다,
그녀가 십여년 다산 정약용만을 천착하며 이루어낸 작품이라는데 대단한 노작을 기대하였지만 역시 여성으로서의 역부족이었을까.
어제 6.25.
며칠전에는 비무장지대의 옛 노동당 당사의 폐허를 무대로 열린음악회가 열렸다.
6.25는 어떤 역사적인 사건보다 내 실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역사의 수레바퀴였다.
아버지, 내 아버지.
아버지는 필경 이 세상 사람이 아닐것이지만.
얼마 전에 꾼 꿈- 평양 근교 한적한 주택에 새로운 가정을 꾸려 살고계신 아버지의 그 영상은 마치 내가 현실로서 경험했던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일요일.
컴퓨터 장애로 노심초사하는 꿈.
새벽 컴컴한 4시 몸을 일으킨다..
골로새서 소리내어 읽고 기도.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자욱한 안개.
17307 1994. 6. 27 (월)
일요일 오전 어쩌다 찾아온 잠시의 낮잠 속에도 꿈은 어김없이 파고든다.
내가 누구에겐가 미래에 대한 학설을 피력하고 있다.
미래의 나라는 섹스의 나라라는 나의 학설인데, 그 내용인즉슨 성도착의 일반화로 페라치오의 나라, 혹은 마스터베이션의 나라, 또는 동물과의 교접에 의한 개혼혈의 나라, 말혼혈의 나라등등...
아마 검열을 거치지 않은 꿈인 모양이다.
안개는 한낮이 되어도 걷힐줄 모르는 일요일 오후.
TV화면 속, 금난새가 지휘하는 ORCHESTRA 들으며 소주를 마신다.
英이는 교회, 俊이는 제 친구 지석이네 집, J는 英의 침대에 누워 개기고.
그러나 시나브로 취해 올라오는 취기에 눌려 마음의 촉촉한 사념은 없다.
英이 소백산 3박4일의 MT 보내달라고 부모에게 아부의 포즈를 취하느라 요즘 상당히 부드럽다.
월요일, 여전히 한치 앞도 식별할수 없는 안개.
목욕.
칼멘을 울리게 하고.
기도.
17308 1994. 6. 28 (화)
임금협상 타결.
쇠신하려는 분위기의 대동조선의 英향이 크다.
내가 스프레드 시트를 이용하여 만든 임금사정 프로그램, 유용성 발휘한다.
컴퓨터가 없었다면 관리과 직원 서너명이 며칠동안 밤샘작업을 해야 했을 것.
퇴근길, 멀쩡하던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동삼동 버스정류소 도착하니 빗줄기 쏟아진다.
물에 빠진 생쥐되어 숨을 헐떡이면서 현관문을 들어선다.
英이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에서 촬영하는 CM의 막간에 출연한다는데 J는 내게 쉿쉿, 나도 짐짓 모른척한다.
英이는 연예인이 되려는지.
꿈- 밀려오는 밀물의 해변을 등뒤로, 점점 차오르는 물결을 밟으며 방파제 위를 달려가는 나의 조감도.,
그 바다는 나의 무의식.
성욕의 욕동인지.
이 초현실주의적 한 폭의 그림은 심층심리의 풍경이 아니라 정감어린 서정 가득한 로맨티시즘의 풍경으로 느끼더라도 안될 것은 없다,
17309 1994. 6. 29 (수)
축구, 독일에 3:2패.
후반전 한국 선수들의 선전에 열광.
심판의 편파 판정과 우리 골키퍼의 실수만 아니었으면 이길수도 있었을텐데.
남북정상회담 7월 25일 평양에서 갖기로 하였다.
무언가 비젼이 보이고 있는 것일까?
英이 4박5일 일정으로 소백산맥, 단양팔경행- 배낭메고 새벽같이 루루랄라 집을 나섰다.
17310 1994. 6. 30 (목)
英이 없고 俊이 늦게 돌아오는 집.
S형 어머니 큰 딸, S온 의 결혼식.
J는 식장에는 참석치 않고 뒤치닥거리 도와준다.
그 분의 가정 대사에 우리 부부는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인데.
실로 그 분은 우리에게 많은 고마움을 베풀어 주셨다.
안개 자욱하고 비 흩뿌리는 아침.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