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95 1995. 1. 1 (일)
새해.
새벽에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한다.
J는 잠들어 있고, 英이는 잠들어 있고,俊이도 제 방에서 제 친구와 잠들어 있고.
이른 새벽 홀로 집을 나선다.
태종대.
영하의 싸늘함.
그렇지, 새벽이란 이와 같이 싸늘해야 하지.
의식이 명징하도록.
새해.
아침.
주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새해.
새롭게 하소서.
17496 1995. 1. 2 (월)
신년 이틀째.
마루에 앉아서 맥주를 홀짝인다.
시나브로 의식은 홍건하게 젖어든채 J와 고스톱을 치고, 안성기가 나오는 시시껄렁한 영화를 힐끗거리면서.
초저녁 쓰러져 잠이 든다.
-시편 43-
17497 1995. 1. 3 (화)
앨런 폴섬 '모레' 2권.
그렇고 그런 미국 대중 소설.
토마스 해리슨 아류의 냄새도 짙다.
비디오 영화 'K 2'
산을 오르는 사람들, 깎아지른 절벽에 매달려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
자유를 추구하는 자는 행동하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실존이란 관념의 유희가 아니다.
자신의 존재의 모든 무게를 벼랑의 한줄 자일에 맡긴채 몸으로 행위하는 것.
K2란 세계 최고의 봉우리.
자유인, 그러나 어차피 한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
그는 결국은 내려와야 한다.
신문에 난 새해 한국의 '앞서 달려가는 사람들'
연예인은 최불암, 안성기, 김혜자, 이휘재, 최진실 순.
소설가는 이문열, 박경리, 조정래 순.
만화가 이현세.
기업가는 정주영, 김우중, 이건희 순.
바둑은 조훈현, 이창호, 서봉수, 조치훈 순.
산악인은 허영호.
컴퓨터는 이찬진.
연극배우는 손숙, 박정자, 윤석화 순.
드라마작가는 김정수(전원일기), 김수현 순.
꿈- 물, 헤엄, 그릇씻기 그리고 보생의원, 도배.
17498 1995. 1. 4 (수)
새해를 맞이하면 대부분의 조직체에서는 이른바 시무식이라는 행사를 한다.
말하자면 새해 새롭게 각오를 다진다는 의미일터.
비흩뿌리는 조회장을 피해서 자동용접장으로 장소를 옮겨 웅숭거리고 모여서서 사장의 신년사라는걸 듣는다.
무슨 실제적인 알맹이는 없는채 전년도 실적과 대비한 숫자 나열의 겉만 번지르르한 내용이다.
경영주의 철학이나 패기 혹은 비젼은 도무지 묻어 있지 아니하다.
기획실의 오세철이 기안했는지, 총무부 황부장이 작성했는지.
사장의 수준에 알맞는 그 수준일 뿐이다.
생산부의 예산안, 위험기계기구의 검사 건, 해상 크레인 계약건등 몇 건의 현안을 처리하노라니, 잠시 생경하던 정초의 사무실도 시나브로 익숙해 지기 시작한다.
가정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정립된 가정교육이 필요한 것인데, 내 집에는 아비의 엄격함은 물론 어미의 엄격함도 없을뿐더러, 아비의 자상함도 어미의 자상함도 없으니.
이도 저도 아니라면 재래적인 어떤 체질의 전승적 가풍이라도 없음이니.
이러한 바보들에게는 하나님의 중심이 필요할 것인데.
17499 1995. 1. 5 (목)
치과 들러 실밥을 뽑다.
11일날 심을 하기로 하였는데 경비가 만만치 않다.
의사라는 사람들의 애매모호함은 실력에 관계된 것인지 아니면 돈에 관련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당신의 병은 이러이러한 것이니 치료는 여차저차하여 진행하고 기간은 이만 저만큼 걸릴 것이며 그에 따른 경비는 저만 이만큼 들것이다하고 사전에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법이 없다.
사원기술원의 장의득씨.
품질기사협회라는 단체의 어떤 사람과 찾아와서 내 책상 곁에 앉아서 한참을 그야말로 썰을 풀고 가다.
ISO 9000, 그 친구의 장광설을 듣고있는 동안, 그것이 대선조선적 사고의 어떤 전환에 도움이 안될바도 없다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나보다 더 높은 곳에 줄을 대보려는 시도를 품지 않는 그의 스케일 정도에 미덥지 못하다.
고작 생산관리부서의 책임자만 붙잡고 앉아 열변을 토할 것이 아니라.
3일째 술은 마시지 않고 곧바로 퇴근.
英이는 이미 돌와 와 있었으나 근 20분을 전화통에 매달려 있어 야단을 쳤더니 잔득 볼이 부어서 제 방 문잠그고 들어 앉는다.
웬종일 밖에서 만나서 히히덕거리고, 집에 까지 와 밤중에 전화통 붙잡고 수십분.
아비짜리는 정말 마뜩치 아니하다.
그 써클이라는 곳.
17500 1995. 1. 6 (금)
앨런 폴섬 '모레'
중반까지는 제법 서스펜스를 유지하더니 후반 들어서자 007적인 모험소설로 바뀌어 종장은 비약한다.
신나치주의의 집단, 머리와 몸뚱이의 접합수술 운운...
지극히 시시하다.
일련의 미국 대중소설 작가들, 존 그리셤, 토마스 해리슨, 마이클 클라이튼, 스테판 킹등의 솜씨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앨런 폴셤이다.
俊이, 제 친구와 수산대학교 가서 접수하다.
영어영문학과.
俊이의 대학은 제 누나와 다르도록, 아비의 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목적의식을 끊임없이 고취하고 전공에 대한 흥미 유발을 유도해야 한다.
아비짜리의 중심이 확고해야만 俊이의 대학생활은 성공한다.
날씨 쌀쌀하여 지다.
퇴근하고 내 방 책상앞 의자에 책상다리하고 앉아서 소주 한병.
오늘 SB-414 진수, 크레인 조건부 합격에 대한 재검사.
俊이 이제 꼭 일주일 남다.
기도.
17501 1995. 1 . 7 (토)
SB-414 진수.
머리카락 자르고 목욕.
몇가지 사안과 신변잡사의 처리로 마음은 다소 홀가분해 진다.
수산대 영문과 2.6 : 1.
彦이 치르는 부산대 공법학과 1.3 : 1.
중심.
주님 중심을 잃게 마소서.
17502 1995. 1. 8 (일)
출근하자마자 형에게서 전화.
서울 홍서방의 보증.
느닷없이 전화를 하여서 당일중으로 화급하게 요구한다.
일단 형이 회사 앞 찾아와 서류에 서명하고, 다시 집에 들러 인감을 찍어가고.
재산세 납세증명, 인감증명등은 월요일 발급받아 속달로 부치기로 한다.
불쾌한 것은 보증의 문제가 아니라 동생네에 나의 수입명세등 그런 것들이 까발려지는 것이다.
온화한 날씨.
토요일 밤 긴 잠을 잤고, 다양하고 생생한 꿈을 꾼 듯 하지만 그 내용은 생각날 듯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는다.
기도.
나의 하나님.
중심을 잃게 마소서.
17503 1995. 1. 9 (월)
혓바늘- 혀의 왼쪽 영토에 혓바늘이 반란의 기치를 세운다.
일요일 오후.
소주를 마시고 깬 것도 아니고 취한 것도 아닌 불쾌한 혼미 속에 젖어든다.
삼빡 취해 버려서 깜북 의식을 놓아 버리던지, 아니면 명징한 이성적 행위를 영위하던지.
이런 어정쩡한 술취함은 참으로 불쾌하다.
까뮈의 유작 소설 '최초의 인간'을 소개한 조선일보의 기사.
"오후에 비낀 햇빛"
"젖은 꽃 냄새 저 뒤 먼 곳에서 지금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바다로부터 오는 소금끼 섞인 냄새" 라는 묘사.
이러한 묘사를 구사하는 한 줄 문장은 아주 신비한 곳- 그렇지만 전혀 낯설기만 하지는 않은 그런 영토로 나를 데려간다.
회색수면의 꿈.- 이길선, 서울거리, 함안댁, 마산고모, 빨간바지를 입은 어린이, 아직 젊은 그 아이의 엄마는 자식과 함께 자살하려고 아이를 찾아 헤매고, 나는 그 아이를 안은채 서울 변두리의 어느 돌밭을 도망다닌다.
월요일 새벽, 목욕하고 로드리고의 기타를 울린다.
기도.
17504 1995. 1. 10 (화)
출근하였다가 곧 동사무소로 가서 인감증명, 납세증명등을 떼어 우체국으로 달려가 등기속달로 부친다.
媛이와 통화.
珍이는 이화여대 경영학과 지원.
해상크레인 동원하여 SB-405의 선미블록 탑재하고, 크레인 안전검사 지적사항에 관한 소명자료를 사진찍고 어쩌고하여 만들어 안전공단에 속달로 부치고, 동아건설의 광안대교 STEEL CAISSON 제작방안을 P상무에게 정리하여 넘겨주다.
혓바늘 차츰 움츠러 들다.
엔도 슈사꾸 '예수의 생애' 다시 읽다.
TV 인간시대.
조그만 봉제공장의 사장, 두칸 셋방에 살면서 노모의 대소변 수발을 들고, 거리의 노인들에게는 빵과 도시락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제공한다.
국민학교도 나오지 못한 충청도의 진한 사투리의 그 분. 남을 돕는 것이 기쁨인 그 사람.
나는 과연 사랑을 할줄 아는가.
자의식의 늪에 잠겨 이토록 허우적거리는 내 인격에 남을 사랑하는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주님.
새롭게 도우소서.
17505 1995. 1. 11 (수)
내 꿈에 등장하는 정형화된 배경과 분위기.
복합건물-층층이 미로와 같은 구조 공간을 가진 건물.
그 건물은 아마도 보생의원, 어떤 여인숙, 내 기억 어딘가 남아있을 법한 서울 신설동 유년의 집, 또는 학교나 회사의 건물등을 데포르마숑하여 만든 공간이다.
그 공간 속에 갇힌 채 나는 무언가 때문에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보생의원- 급작스레 밀어 닥친 입원환자, 이층 다다미방에서 책보따리와 이불보따리를 들고 쫓겨나 일층의 어느 방이나 병원 방에 끼어서 자야하는 것이다.
중학교시절 자하문 밖의 하숙집- 그 일실의 코너에 있던 앉은뱅이 책상이 오롯한 나의 공간이었을까.
혹은 내무반- 제3육군병원의 본부중대 2층의 내무반이나 아니면 2,4종 창고의 공간은 어떠한가.
제대하여 비로서 내 방으로 할당된 보생의원 2층 5호실- 그곳에서 나는 내 정신의 어떤 불육부전을 반추하고 있었을까.
마스터베이션---
한줌 내 공간.
이러한 배경의 꿈을 천착해 볼 일이다.
그리하여 안절부절의 그 사슬을 끊을 일이로다.
기온 뚝 떨어진 새벽.
파스칼의 몇절을 읽고 기도.
17506 1995. 1. 12 (목)
치과- 지주를 해 박을 있빨에 드릴링을 하고 본을 뜨다.
내 육신의 일부에서 나는 소름 돋는 생경한 울림.
밖은 제법 추운 날씨이지만 사무실 안은 후덥지근하다.
잠바를 벗어 놓고 업무를 볼 정도.
SB-413 CHARTER가 결정되지 않아 출항하지 못하다.
俊 머리카락 자르다.
본고사- 시험은 내일이다.
모든 사안의 처리는 俊이의 대학 입학 확정후로 미루어 지는 기분은 어쩔수 없다.
기도.
17507 1995. 1. 13 (금)
俊이 어제 예비 소집.
오늘 드디어 본고사의 날이다.
하향지원이라 짐짓 느긋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마냥 안심할수도 없는 일이다.
2.6 : 1.
꿈, 꿈.
俊이의 대학문제가 여러 가지 형태로 데포르마숑된.
그런데 울퉁불퉁 돌산이 주는 메타포는 무엇일까?
오늘 출장도 핑계거리를 만들어 순연할 작정이다.
급할 것 없는 사안이다.
불 꺼 어둠 속에 잠겨 간절한 기도.
오늘 俊이에게 자신감과 침착함을 주십시오.
17508 1995. 1. 14 (토)
俊이 본고사.
입시한파라는게 있기는 있는 모양인가? 몹씨 치운 날씨.
그런대로 치른 모양인데, 영어에 자신이 있는 俊이는 본고사에서도 영어가 쉽게 출제된 것이 불만이다.
수능시험에서도 영어가 비교적 쉬웁게 나와서 손해 보았었다.
그러나 논술에 자신이 없는 俊이가 아비는 불만이다.
책을 많이 읽어 생각하는 훈련이 있어야 하는 논술이야말로 내가 바라는바 俊이의 자신있는 분야이어야 하는데.
내 꿈꾸는바 俊이의 대학생활은 나도 또한 녀석만큼이나 마음 설레인다.
전공에 대한 열정과 미래를 향하여 열린 비젼, 이를 위한 자기계발...
英이의 경우에도 이와 같았을진대, 그것은 참담한 실패였음을 아프게 되새겨 보는 마음...
95년도 시설장비 계획, 몇차례 실랑이를 해야 함이 뻔하다.
위험기계기구 안전검사 불합격품 재검사.
안성도장의 육교 도장공사 계약.
나를 서포트하여줄 유능한 과장이 아쉬워 이를 어필하여야 겠다.
나는 그렇다고 유능한가.
윗선에서 보면 그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업무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유능하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내게는 중요하다.
C급 수면,
꿈- 서울거리,형과 媛이, 왕성규...
오늘은 숭즌이의 면접 시험.
기도.
17509 1995. 1. 15 (일)
제법 매서운 날씨.
그래 봤자, 부산이고 영도이다.
俊이 면접 치르고 늦게 돌아 오다.
盡人事待天命.
이제 합격소식만을 기다릴 뿐이다.
이제 俊이는 입시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렸다.
새로운 짐- 이제 한 사나이로서의 힘찬 도정에 따르는 새로운 짐을 바꿔서 진 것이다.
토요일 오후.
퇴근하여 안방에 TV와 비디오를 옮겨 놓고, 중국집에서 시켜 온 튀김을 안주로 하여 소주를 홀짝이며, J와 英이와 함께 앉아서 영화를 본다.
스필버그 '주라기 공원' 과 정지영감독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시나브로 취하여 가는 머릿속에 눈을 통하여 입력되는 영상의 내용이 제대로 이해될 리가 없다.
俊이의 시험이 끝나서 그런가. 편한 수면.
일요일, 마가복음.
17510 1995. 1. 16 (월)
일요일.
다시 보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소설의 독특한 분위기의 감흥이 그대로 전달되지 못한 듯 하지만 나름대로의 완성도는 있다.
옛날 그 시절- 극장이라는 곳, 영화라는 것.
한 소년에게 있어서 영화관이란 소년의 영혼에 엄청나게 영향을 준 문화공간이었다.
특히 내게는.
극장 안에는 현실을 훌쩍 뛰어 넘은 환상과 꿈의 리얼리티가 있었고, 그것은 하나의 정신적 아편이었고, 문학이었고, 음악이었고, 미술이었으며, 그리하여 곧 총체적인 예술의 덩어리였다.
회억컨데, 그 음습한 3류 극장의 구석 자리에서, 단속 교사에게 걸릴까 조금은 전전긍긍하면서, 빨려들어간 스크린의 세계- 그 세계는 마스터베이션의 탐닉 그 이상의 세계였었지.
정지영감독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하나의 드라마적인 구도를 위하여 어쩔수 없었을 것이지만, 한 남자의 그 추상적이며 구체적인 탐닉의 분위기를 그려 내는데에는 실패하였다.
'주라기 공원' 디지털 기술로서 재현해 낸 공룡의 모습.
돈을 벌게 되어 있다. 스필버그는.
어쩌면 내 꿈이 연출하는 방법론은 바로 영화와 연관이 있었을법 하구나.
스런데 꿈에는 이중구조가 있다.
표면에 떠오르는 꿈의 영상과, 무의식의 욕동이 만들어 낸 심층심리의 현실은 다르다.
감시와 검열로서 왜곡된 자아...
심층심리의 그 거칠고 어두운 카오스의 소용돌이는 솔직하게 자신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17511 1995. 1. 17 (화)
치과- 포스트를 꽂았다.
이제 덮어 씌울 차례인줄 알았더니, 웬걸!
안쪽 어금니가 삐딱하게 기울어 있어서 덮어 씌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스크류 볼트를 이용한 죠인트를 한 다음, 두 개의 피스로서 덮어야 한다나.
이놈의 이빨 공사는 난공사도 난공사려니와 깨지는 돈도 어지간하구나.
이동도서관에서 신봉승의 '한명회' 1,2,3권 반납하고, 4권이 없어 5,6,7권을 빌린다.
俊이- 이런 완충기의 여가에 무언가 배웠으면 하는 아비의 바람인데.
기타나 올갠이나.
아니면 독서에 빠져 보던지.
녀석은 무력감에 젖은 포즈로 아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무거운 짐을 벗어난 후의 허탈감이 왜 없겠는가마는.
새벽, 안방 앉은뱅이 책상 앞에 불밝혀 앉아서 소리내어 갈라디아서 읽는다.
기도.
17512 1995. 1. 18 (수)
잇빨 하나에 20만원짜리 고급으로 하기로 한다.
허영이 아니라 어차피 잇빨 아니냐.
썪지않는 기념.
나와 함께 죽어 묻히지만 내가 묻혀도 금으로서 살아남을.
낙영, 황근 만나 만취.
상곤은 빠지고.
낙영의 아이들, 잘 들 키운 얘기.
큰딸 소영이의 기특함과 두 아들의 의젓함.
가정교육이라는 것.
낙영에게는 체질화된 어떤 유교적인 확고한 가치관같은게 있다.
그리고 그 아내에게는 여성적인 순종의 미덕이 있다.
이런 부러움을 그러나 나는 표명하여서는 아니 된다.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나는 나대로 유니크한 가정교육이라는걸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작취미성의 아침.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 아침.
아침의 뉴스.
일본 고베 지진.
천여명 사망.
왔는가? 그 분의 때가.
17513 1995. 1. 19 (목)
작취미성의 오전 일과.
정과장- 그 못난이의 어필은 그저 피곤할 뿐이다.
일본에서는 대지진이 일어 났다.
땅이 흔들려 도시는 쑥밭이 되고 사람은 3천여명이나 죽었다.
땅이란 굳건하고 굳세다는 믿음이 있는 것인데 그 믿음이란 얼마나 허망하냐?
속을 푼다는 핑계도 작용하여 만취한 다음 날은 더욱 술이 당기는 날.
퇴근하며 몇병의 맥주 마신다. 땅이 흔들려 속이 부대껴 마신다는 핑계의 수사는 어떠할꼬?
아이들 안방에서 제 엄마와 고스톱을 치고 나는 그 곁에서 혼곤한 수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꿈- 목욕탕과 똥덩이... 그리고 박영범,이광섭,김명희등과...
17514 1995. 1. 20 (금)
며칠째 목욕을 하지 않은 몸뚱이.
스멀거리는 그 느낌에 속박 당하는 수준의 내 정신이라는 것.
2공장 안벽의 수중 CAISSON 건, 도면 그리고 마무리하여 P상무에게 넘긴다.
俊의 대학, 발표는 아직 없는데.
TV에서는 국어논술의 채점 때문에 본고사를 치른 대학에서는 애로를 겪고 있다고 한다.
인원과 시간 모두.
사지선다형의 채점에만 익숙해 있었으니 주관적인 글의 채점의 어려움이 쉽게 상상이 간다,
고베 지진의 희생자는 4천명이 넘었다고.
에이즈에 걸린 변호사 이야기 '필라델피아'
톰 행크스, 덴젤 워싱턴 주연.
17515 1995. 1. 21 (토)
위험기계기구 안전공단의 검사는 모두 종결.
공단의 젊은 검사관 모시고 목장원에 가서 점심 접대. C대리도 함께.
남미의 슈라코스라나하는 고기요리의 풀 코스.
요래 조래 굽고 삶은 고기요리에 질려 버린다.
먹는 문화는 가히 창궐하고 있다.
이런 저런 음식들을 너도나도 예서제서 먹어 조진다.
먹는 것이 남는 것이다라는 속담도 있거니와 우리나라 사람들의 좀 생기면 먹어 조지는 습성은 아마도 옛날 굶주림에서 비롯된 강박의 소산일 것이다.
산더미처럼 싸이는 음식 찌꺼기들. 예전 밥알 하나라도 남기면 죄받는다는 그 미덕은 사라지고.
말사스는 오판하였다.
음식의 생산은 인구의 증가율을 앞선다.
그러나 비아프라, 르완다의 굶주려 뼈만 앙상한 흑인 소녀의 눈망울...
일본 고베의 대지진- 엄청난 재난의 와중에서도 질서를 지키고 평온을 유지한 그 나라 민족의 미덕을 매스컴에서는 어필한다.
아마 우리나라의 어느 도시에 그와 같은 재난이 들이 닥친다면 것잡을수 없는 패닉에 빠졌을 것이다.
꿈- 매우 잡다하고 많은 꿈을 꾸었으나 깨고나니 그 내용은 잊어 버렸다.
요즘 들어 섬망이 더욱 심하다.
꿈을 꾸는 순간의 그 생생한 액추어리티는 이토록 뚜렷이 느낌으로 남아 있는데.
주님.
새롭게 하소서.
17516 1995. 1. 22 (일)
두어시간 동안 눞혀 놓은채 마취하고,갈고, 끼우고,빼고, 바르고, 뜨고...
여하튼 다음 목요일 쯤이면 몇십년 동안 없이 살았던 오른 쪽 아래 어금니가 생기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 퇴근하여 아이들과 오손도손을 꿈꾸며 집에 돌아 왔으나.
J는 그러한 소박한 꿈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녀가 남편을 대하는 시각이란 결코 그런 꿈을 수렴하는 다소곳한 종류의 것은 아니다.
배려나 연민이나 하다 못해 한줌 동정의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가장으로서의 한 뼘 영토도 허락치 아니한다.
그녀의 두뇌의 LOGIC이란 극도의 단순함.
싸워 이기자, 무찌르자 오랑캐.
흐리고 빗방울 듣는 일요일 아침.
멍든 정신, 게으른 정신, 자포하는 정신, 마취하는 정신, 썩고자하는 정신.
그리하여 피흘리는 정신.
J에게 당한 정신이란.
17517 1995. 1. 23 (월)
가는 빗발 흩뿌리는 태종대 입구의 유원지.
도무지 시큰둥하여 나서길 싫어하는 俊이를 꼬시고, 협박하여 英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탁구와 당구.
녀석의 어설프고 쑥스러운 자세가 자꾸 눈에 밟혀 걱정스럽지 않지는 않지만 녀석은 제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하여는 제법 솜씨를 발휘할줄도 안다.
발동이 늦게 걸려서 탈이지.
낙지볶음으로 밥들을 먹이고, 나는 물론 소주 한병.
밥먹고나서 사격.
俊의 표적, 거운데 빨간 동그라미 안에 모두 명중.
이런 것도 아비는 얼마나 기쁜지!
혼곤한 잠.
꿈- 고층에 있는 휑뎅그레한 교실과 복도.
그곳 일실에 俊이와 나와 둘이서만 거주하고 있다.
어스름 저녁, 돌아와서 俊이의 귀가를 걱정하고 있는데 녀석은 벌써 돌아와 있으면서 어둠 속에 숨어서 아버지를 놀래키우려고 기다리고 있다.
꿈 속에서도 그 기특함이 기뻤다.
17518 1998. 1. 24 (화)
俊이 실패.
신문사 안내 전화를 통화하고 난 후의 철렁하는 심장과 당혹감과 허무감, 그 후에 남는 것은 고통.
떨어질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고통이다.
俊이의 아픔을 생각하는 것도 고통이고, 아비의 자존심 비스무리한 것이 상처받은 것도 고통이다.
제 2 지망의 경영정보학과, 지금 간절한 소망은 그곳의 추가합격을 바라는 것 뿐이다.
이중지원한 수험생들이 서울등지로 빠져나가서 결원이 생기는 것을 바라는 이 마음 역시 자존심 상하는 고통이다.
俊이. 녀석 특유의 삐딱한 자세로 하는 말인즉 재수하겠다고.
영문학과를 고집한 아비를 원망하는 투다.
재수? 고작 부산대학 따위에 들어가겠다고 재수를?
황금과 같은 청년기를 1년이나 낭비하겠다고?
모르지. 진정한 결기를 가지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의연한 자세로 "한번 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1년 동안 갈고 닦아서 내년에는 반드시 서울대학에 가겠습니다"라는 처절한 자기각오를 과시한다면.
2차- 부산 외국어대학교? 경영정보학과? 중국어과?
밤새 설친 잠, 꿈도 없이.
이 가난하고 척박한 마음들을 도와 주십시오. 주님.
17519 1995. 1. 25 (수)
俊이의 대학 실패.
이 사실이 이토록 참담하게 나를 지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들 놈에게 닥친 최초의 좌절, 녀석이 받았을 상처에 대한 염려와 연민.
결기를 돋구지 못한채 더욱 나약한 포즈로 기우뚱한 자세의 어깨를 바라보는 아비로서의 못마땅함.
남과의 비교의식에서 오는 자존심의 열패감 따위.
합격하였더라면 지금의 내 일상은 얼마나 기쁜 것이겠는가하는 단견의 감각주의.
그러나 이제 俊이의 장래를 위한 이성적인 어프로치가 필요할 뿐이다.
대학의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전공이 중요하고 이루고자 하는 정신이 중요한 것.
이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으되 俊이에게나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능력이 모자라다.
하나님.
개는 말을 할줄 몰라서 짖지만, 나는 짖지 말게 하소서.
俊이에게 말하게 하소서.
17520 1995. 1. 26 (목)
이제는 俊이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俊이의 상처.
녀석의 자존심에도 깊은 흠집을 남겼을 것이다.
기막힌 좌절의식도 있을 것.
녀석의 의기소침한 포즈가 너무나 안타깝다.
부산대학, 수산대학, 외국어대학.
그 차이는 과연 대단할까?
서울대학과 동의대학 쯤이라면 그 월등함과 열등함은 뚜렷할 것이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체득한 진정한 실력과 수능시험이라는 숫자의 성적이라는 것.
150점대는 부산대학, 140점대는 수산대학, 130점대는 외국어 대학이라는 분포가 대학의 어떤 수준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걸까?
도토리 키재기.
미약한 차이의 다른 도토리로 옮기기 위하여 황금같은 1년을 희생할 수는 없다.
그런 진부한 짓거리를 왜 한단 말인가.
俊아. 그것은 네 열아홉 청춘에 대한 모독이다.
헤아리자. 어떤 방법이 현명한 것인가를.
아비와 함께 지혜롭자.
주님.
좁고좁은 마음들, 아비의 마음, 어미의 마음, 자식의 마음을 넓혀 주소서.
17521 1995. 1. 27 (금)
俊이의 문제가 온통 지배하고 있는 내 의식은 며칠째 술마시기를 단연 거부하고 있다.
俊이도 나도 짐짓 아픈만큼 성숙하여라.
俊이의 성격, 의지, 남자다운 결기.
재수, 후기대학 혹은 수산대 경영정보학과의 요행..
요즘 나와 마주치는 것을 극력 피하고 있는 俊이에게 낮동안 제 엄마가 한참을 설득하였던 모양.
제 누나에게 돈을 얻어서는 원서사러 간다는 퉁명스런 말 한마디 던지고서 맨발에 운동화 꿰신고 집을 나섰다고.
그리고 9시 훨씬 넘어서 돌아왔는데 부산 외국어대학의 원서가 손에 들렸다.
새벽 3시.
안방 J의 옆자리에 앉은뱅이 상을 펴 앉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시편 서넛을 소리내어 읽는다.
17522 1995. 1. 28 (토)
俊이의 상처들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져 주었으면.
단지 열아홉의 감수성에 약간의 충격을 준 채로 슬며시 꺼져 주었으면.
아비를 향한 묘한 감정의 찌꺼기들도 바람에 날러가 버렸으면.
부끄러움, 섭섭함, 원망들이 어우러진...
나 역시 俊이의 대학실패에서 유발된 이번 한주일 동안의 성숙치 못한, 지극히 감상적인 이 감정의 편린들을 날려 보내야 한다.
두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다.
추가합격의 수산대 경영정보학과, 후기의 부산외국어대의 영어과.
어쩌면 경영정보학과는 영문과보다 보다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 두 번의 기회를 놓친다면 그 때는 재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미가 커다란 '재수'이다.
심기일전 더 높은 목표를 잡아야 한다.
재수에 돌입하게 되면 집안 분위기는 완전히 변해야 한다.
마루에 있는 TV 따위는 안방으로 밀어 넣고, 공부할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
아니 이따위 외형적인 문제가 아니다.
아비는 아비대로 어미는 어미대로 여태까지의 생활양식에 대한 사고방식 자체의 대변환이 있어야 한다.
俊이의 공부를 축으로 한 일상의 양식이 되어서 팍 팍 밀어줘야 한다.
부산대학 따위가 아니다.
더 높은 목표, 더 높은 목표.
17523 1995. 1. 29 (일)
설연휴.
내 주위에는 명절전의 들뜬 분위기.
俊이를 불러 내어 녀석을 위로하고, 어미 누이들 그동안 옴추렸던 마음들을 쓸어주고자 하였으나 녀석은 나오기를 거부하여 J와 英이 셋이서 생선회를 먹고 남포동으로 나간다.
인파, 인파.
국제시장, 백화점, 지하상가를 돌아 다니며 英이의 안경, 俊이의 잠바, J의 바지, 내 운동화를 쇼핑.
돌아오니 俊이는 외출하고 집에 있지 않다.
어제 새벽에는 어머니도 다녀 가시다.
일요일 새벽.
17524 1995. 1. 30 (월)
겉으로는 태연한척, 심상찮은 표정을 하고 있으나 녀석의 마음은 지금 쓰라릴 것이다.
저보다 훨씬 성적이 낮은 친구들의 이곳 저곳의 합격소식.
가엾어 마음이 아프다.
일요일 한낮 네식구 둘러 앉아서 고스톱을 치는데, 俊이 녀석의 아빠를 접하는 포즈에는 무언가 소원함이 역력하다.
수산대학 영문과를 강요한 아비를 향한 원망하는 녀석의 용렬함도 없지 아니할 것이지만, 그 보다도 실패한 아들을 진실로 이해하고 감싸주고 북돋아주는 무언가가 부족한 아비를 향한 섭섭함도 있을 것이다.
아,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수산대학 영문과를 실패할 줄을.
설 명절 연휴에 우리 부자 이토록 참담할줄을.
추운 날씨.
기도.
도우소서.
17525 1995. 1. 31 (화)
빨리빨리 한 열흘 후딱 지나가 버렸으면.
俊이 저 좌절의 늪에서 벗어나 수산대학 경영정보학과이든, 외대 영어과든 그도 아니면 재수이든 제자리를 빨리 찾았으면.
俊이 입술은 부르트고, 포즈는 더욱 삐딱해졌다.
왼종일 둘러 앉아서 네식구는 고스톱을 치고 아비는 히히덕거리지만 웃는 마음밭은 우는 마음밭보다 더욱 서글프다.
어디 야외나 산, 혹은 바다, 그도 아니면 박물관이나 극장 같은 곳에 데리고 나가고 싶은 열망 가득하여 줄기차게 꼬드겨 보지만 녀석은 일언지하에 거절이다.
이제 이 상황에서 무슨 대화가 더 필요하며 무슨 이해의 교류가 소용 닿을 것인가.
기다릴뿐.
녀석도 아비도.
설날 새벽.
목욕하고 슈베르트의 리트 듣는다. 헤르만 프라이.
주님, 나의 俊이를, 주님의 俊이를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