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5. 2

카지모도 2016. 6. 25.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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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6 1995. 2. 1 (수)


설날.

俊이만 집에 남고 J와 英이와 어머니께.


彦이는 부산대학 공법학과 합격, 그것도 장학생으로.

자랑하는 형의 얼굴이 빛난다.


어머니 곁에서 포도주에 얼근한채.


이번에는 俊이도 함께 택시타고 사직동.

그곳에서 다시 정종에 흠뻑 취하여 큰처남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J,英이, 俊이 안방에서 고스톱 치는 동안 나는 다시 세병의 맥주로 마감하여 쓰러진다.


다시 날이 새다.

이인화 '영원한 제국'


17527 1995. 2. 2 (목)


俊이의 초췌한 얼굴.

아랫입술은 부르터 있고.

딴에는 무척이나 힘든 것이다.


그런 몰골을 대하는 아비의 마음은 갈수록 아픔의 더께만 쌓여가고.

답답하여 J와 함께 태종대를 한바퀴 돌고서 '투캅스'란 비디오 한편 빌려다가 아이들과 보는 것이지만..


'투캅스' 이 정도 수준의 영화가 센세이셔널한 히트작이라니.

본격 코메디가 되려면 아직 요원하고, 스토리 전개도 어설프고, 다만 두 캐릭터만이 사 줄법하지만 그마저도 썩 삼빡한 것은 아니다.


이인화 '영원한 제국'

먼지 쌓인 古宅의 벽장 속.. 곰팡이 내음.. 한권의 서책..

옛날을 살다간 인물들, 그 관계와 관계들의 부스럭거림..

옛날 이 땅을 숨쉬었던 어떤 사실의 부활.

이인몽.. 정조..심환지..서용수..정약용..

이인화라는 작가를 주목하라.


연휴의 마지막 날은 밝고.

새벽 목욕을 하고.

흐린 날씨.

누워있는 바다와 섬의 풍광은 그저 페이소스의 풍경...


17528 1995. 2. 3 (금)


英이는 학교로, 俊이는 제 친구와 외출.

연휴의 마지막 날.

호젓한 태종대의 산책길.

히끗히끗 눈발 날리다가, 흐린 스크린과 같은 하늘은 붉은 해를 번진 물감처럼 후줄근하게 물들이고 있는, 저 아래 거대한 광장으로 누워있는 바다.

J와 한바퀴를 걷는다.


입구의 음식점에서 낙지볶음과 한병의 소주와.

그리고 노래방 들어 앉아 가시버시는 노래를 부르면서.

무엇엔가 쫓기듯 그렇게 작위적으로 우울을 날려보려 하는 것이지만..


英이 성적표, 또 하나의 F.

딸년은 도대체 대학이란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의 하나님.

俊을 도우소서.


17529 1995. 2. 4 (토)


첫출근.

俊이 수대 경영정보학과 추가합격에의 괴로운 열망.


잔인한 요 몇주일의 시간들.

俊이의 대학 실패.

후기대학은 10 : 1 이 넘는 경쟁률이다.


올, 俊의 대학 실패는, 너무나 안일한 아비의 잘못이었으며, 작전 미스였고, 俊이의 운수 사나움이었다.

143점의 수능점수로 수산대학 따위를 실패하다니!


俊이를 도우소서.

도우소서.


17530 1995. 2. 5 (일)


고맙고도 고마운 일.

주님께 감사하고.

俊이를 좌절의 늪에서 끄집어 내고, 아비 어미를 참담한 나락에서 건져 내신 섭리 있음.


토요일 오후 집에 돌아와 쓸쓸한 심경으로 俊이 빌려온 중국영화를 보고 있던중 한통의 전화.

경영정보학과 추가합격을 통보하는 아마도 교무과장쯤 되어 보이는 늙수구레한 목소리.

월요일 2시 등록금 준비하여 최종 통보를 기다려 달라는 한마디의 복음.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지.

후기대학 원서를 접수하고, 예비소집에 가고, 면접을 치르고, 합격발표를 기다리는 그 일련의 끔찍한 시간들은 그 소식 한마디에 단번에 사라져 버린다.


아,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요일 아침.

일찌감치 목욕하고 안방의 컴퓨터를 俊의 방으로 옮겨 놓는다.


17531 1995. 2. 6 (월)


간사한 마음은 나약한 마음이다.

그 분께 감사를 드려야한다는 간사한 마음, 하지만 나약한 마음.


英이와 교회 나간다.


그러나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니다.

늘 내 영혼 속에 그 분은 함께 계신다.

기도.

고마우신 나의 하나님.


俊이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모양이다.

컴퓨터를 제 방에다 가져다 놓은 것도 즐거운 모양.

나는 소주를 마시고, 다시 맥주를 사 와 홀짝이며 俊이 방에서 俊이와 함께 컴퓨터 당구 오락을 하며 아들 녀석과 히히덕 거린다.


MS-DOS를 녀석에게 가르쳐 주려 하는데 녀석은 벌써 PATH 명령어를 금새 이해하여 활용하는 것이 아닌가.

靑出於藍이라나, 문자 속도 흥얼거리고.


그동안 안방 한구석을 괴물처럼 차지하고 있던 컴퓨터를 치우니 안방도 한결 안온해졌다.


월요일 아침.

죤 서덜랜드가 부르는 비올렛타.

기도.


17532 1995. 2. 7 (화)


혹시나 하는 오전의 초조함은 나보다 J가 더 극심하게 겪었던 모양이다.

1시 30 분경 사무실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린다.

J의 전화, 등록하러 간다는.

휘유하는 한숨과 함께 나도 모르게 절실하게 터져 나오는 혼잣말.

'감사합니다'


수산대학교 경영대학 경영정보학과.

영어영문학과를 피하게 하신, 우리 俊이의 장래를 예비하신 어떤 뜻이 있지 않을까 하는 설레임이 있다.

일반 경영학과 전산 시스템과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학문.

나 역시 M.I.S의 개념쯤은 쬐끔쯤 알고는 있다.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


전공에 정진하고, 부디 대학이 재미있거라. 俊아.


어머니와 형에게서 전화 오다.

축하의.


화요일 새벽.

생일.

무릇 몇 년인가. 그려진 나이테가.

그리고 이제 남아있는 그것은 또 얼마쯤일까.


주님.

새롭게 하소서.


17533 1995. 2. 8 (수)


俊의 대학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일상이 장미빛일 것 같더니만 그것은 그 당시의 기분일 뿐이다.

사람이란 이토록 간사하고 나약한 존재이다.

일상이란 늘 새로운 시름들을 쉬지않고 창출해 내는 화수분이다.

영원한 속박.

내 성격의 일단의 작용이 클 것으로 결국은 스스로의 탓이다.

낙천주의를 위하여.

주님께 이를 기도해야 한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를르, 상레미, 오베르시절의 불과 3년동안 고흐는 작열하였다.

훨씬 후대에 와서 평가되었던 것이지만,

그 작열하였던 시기에 그는 안정과 통일의 예술 세계를 이루었다.

고흐의 그림 어디에 미치광이와 혼돈의 흔적이 있단 말인가.

그는 진실로 안정과 조화와 통일을 성취한 예술가였다.


그에 이르는 과정- 늘 열중할 대상을 발견하려 하여 그 대상을 향한 열중과 헌신 때문에 배반 당하는 패턴의 되풀이.

비참한 환경 속에서 밖에 불타 오르지 않는 사람.

부단한 간질병의 발작, 과로로 예민해진 신경의 괴로움, 환청과 피해망상, 자기징벌적 육체의 훼손.


불꽃이었다. 그의 생명은.

낙천주의와 고흐...

살이라는 것, 일상이라는 것.

불꽃은 일상을 살지 못한다.


새벽 3시 기상.

목욕하고,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알레그리 사중주단.

기도.


17534 1995. 2. 9 (목)


컴퓨터라는 기계의 현란한 기능.

또한 낯선 것에 대한 탐구심에 내게 있음을 고맙게 생각한다.

여러 어플리케이션의 기능을 익히면서 나의 업무는 몇배의 효율성을 즐긴다.

조직도와 업무의 프로우 차트등도 일목요연하게 쉽고 멋지게 만들고.

외주실적 정리분석도 스프레드시트를 활용하니 엄청나게 멋진 출력이 되어 나온다.


이웃의 한진중공업, 어제 수리선 도크에 입거중인 한진부산호에서 불이 나 20여명이 죽다.

조선소 사고로서는 대형사고다.

기관실 F.O LINE의 절단과정에서 발화된 모양인데 매스컴의 보도는 사뭇 다르다.

조선소로서는 검찰, 경찰, 신문기자등 조선 엔지니어가 아닌 비전문가에게 기관실이라는 공간과 복잡한 배관라인의 계통을 이해시켜 납득하기 보다 어떤 상식적이고 도식적인 줄거리로서 납득시키는 편이 쉽고 편하였을 것이다.


'브레이크 없는 벤츠'라는, 정치에 뜻을 두고 있을 법한 전직 검사의 책을 읽었는데.

그 내용에서 아, 검찰이란 고작 이런 것일뿐이구나하는 한심함을 느낀다.

정의, 무엇이 정의인지.

법대로, 무엇이 법대로인지.

과연 정의는 법에 의하여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하게 발현되고 있는가.


17535 1995. 2. 10 (금)


며칠 온화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퇴근 무렵에는 바람이 불고 돌연 스산해 진다.


俊이의 대학문제가 해소 되고나자 이번에는 녀석의 삐딱한 자세와 어딘지 ABNORMAL한 성격이 돌연 아비 눈에 클로즈업 된다.

준수한 얼굴의 번듯한 용모, 늘씬한 키, 그리고 결코 낮지 않은 지능과 사고력도 갖춘 아이인데.

이런 하드웨어의 조건들이 그만 삐딱한 소프트웨어 때문에 그 빛과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소프트웨어를 손질하고 개선하고 교정하고 가꾸어야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비짜리의 책무이다.


한진중공업 앞에는 또 전경의 버스들이 도열해 선다.

산업현장에서 경제활동을 하다가 사람이 죽고, 유족들은 상실된 경제적 손실의 반대급부를 위하여 산업적인 울부짖음과 산업적인 데먼스트레이션을 행함으로써 산업적 사건의 산업적 해결을 산업적으로 도모한다.


지극히 산업적인 협상과 해결만이 있을 뿐이다.


17536 1995. 2. 11 (토)


배치과의 의사는 어느 정도는 염치가 없다.

잇빨 하나 살리자고 8개월 동안 기다려, 잇몸을 절개하여 심을 박고, 암나사 숫나사 어쩌구하며 금잇빨까지 만들었으나. 정작 그 잇빨을 끼워보니 아파서 견디지를 못하겠다.

그리하여 어제 그 금잇빨을 뽑아버리고, 결국 이웃 이빨에 걸처서 시공하는 수밖에 없게 되어 한개의 잇빨을 다시 만들어 씌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의사의 말씀인즉슨 이렇다.

추가되는 한 개의 잇빨값 2십만원중 5만원은 자신의 판단 착오로 공제하고 십오만원만 내라는 것이다.

자신도 손해보았으니까 감수하라는 투.

그러나 어쩌랴, 예까지 온 마당에.

끽소리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彦이도 P/C를 구입하여 어제 俊에게 와서 GAME을 복사해 가다.


꿈- 성규,상곤, 낙영, 황근 등장. 버스와 진흙밭, 체첸의 유태인들.


새벽 목욕하고.

베토벤 피아노 3중주 '대공'


욥기읽다.


17537 1995. 2. 12 (일)


토요일 12시 땡 치자마자 사무실을 빠져 나온다.


俊이를 만나 父子의 나들이.

지하철타고 세진 컴퓨터로.

컴퓨터라는 단일 품목으로 컴퓨터 유통구조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는 세진 컴퓨터의 매장.

프린터- 앙징맞은 각종 제품들, 컬러 프린터도 4-만원 미만이다.

디스켓을 사고, 프린터 모델들을 노트하고.


쎄일하는 옷 매장으로 간다.

俊이의 외투, 등산조끼, 등산화를 산다.


그리고 영도의 횟집.

부자 마주 앉다.

이런저런 저런이런 아비의 지껄임- 대학, 전공, 누나의 대학이란, 성격, 친구, 연애, 미팅, 멋....


俊이를 사랑한다.


17538 1995. 2. 13 (월)


참 오기 싫은 것을 억지로 오는듯한 비.

꾸무적 꾸무적 흩뿌릴 뿐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겨울비의 정취는 스며 있다.


일요일 무려 4시간여 머리에다 한보따리 뒤집어 쓰고 미장원에 앉아 있다.

마려운 오줌보를 움찔거리며 파마.

그 덕에 신변잡사의 숙제 하나는 해결되었다.


오후 彦이에게 가서 컴퓨터 교육을 한다.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을 설명하고 연습시키다.


일요일의 형네.

비 흩뿌리는 한낮, 어머니는 안방에 모으로 누우셔 낮잠을 주무시고, 형도 역시 소주 한병 비운 몽롱함으로 소파에 누운채 낮잠, 형수도 그 곁에서 낮잠.

일요일의 게으름들은 어느 집이나 다를바 없구나.


17539 1995. 2. 14 (화)


유럽에서는 홍수가 나서 난리라는데 한반도는 가뭄이 들어 비명이다.

어제 내린 비는 감질나게 땅거죽만 적셨을뿐 해갈에는 어림도 없는 모양.


2공장 포크레인 동원하여 안벽보수 공사 착수.

모처럼 2공장에 가다.

LW규 씨 승용차를 에스페로에서 프린스로 바꾸었다.

고작 대선조선의 차장으로서 골프다, 고급차다하는 그의 재력과 능력이 부럽기만 하다.


俊이 컴퓨터 주변기기들을 이모저모 구상한다.

도트 프린터 136 칼럼짜리, 2배속 모뎀, 메모리 확장과 RAM 용량 확장은 저에게 맡기고, CD ROM DRIVER는 더 나은 품질과 COST DOWN의 여지가 있는듯하여 기다리기로 잠정 마음을 먹는다.

퇴근하니, 俊이는 제 엄마가 사온 콤비 상의를 입고 마음에 들어하고, 英이도 일찌거니 돌아 와 있다.


TV 프로 신인간시대.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송성일 선수.

위암 투병을 사망에 이르기까지 다큐멘타리로 방영.

암- 그 고통의 생생한 장면에 J는 줄줄 눈물을 흘린다.


17540 1995. 2. 15 (수)


俊이는 이제 완전히 명랑함을 찾았는가.

이제 시작될 대학생활의 기대감으로 설레어 하는 포즈인가.

요즘 낮에는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책을 빌려다 밤늦도록 읽으면서 활기가 넘친다.

이 아니 흐뭇할손가.


나는 이런 아비를 꿈꾸지만 아, 너무나 내 품성은 모자르다.

느티나무와 같이 듬직한 俊이의 성장과 성숙을 위하여, 의젓함과 의연함과 지혜로움과 어짐과 남자다움을 주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


대보름날과 발렌타이 데이.

이 두가지 날에는 상징적인 무엇이 있다.

전통과 답습과 보수의 세시명절과 다만 감각적인 상업주의만이 상큼하게 묻어있는 이른바 X세대의 축일.


오곡밥과 부럼.

英이는 동아리 아이들과 해운대 달맞이고개에서 11시 넘어 돌아왔다고.

스물을 성큼 넘은 英이, 둥글고 둥글어 빙그레 웃는 달님을 향하여 무슨 소망을 빌었을까?


오늘 俊의 고등학교 졸업식.

이제 사춘기 소년의 질풍노도, 카오스, 그 미망의 사슬은 끊어버리라.

더 크고 더 복잡한 새 카오스, 그 빛 속으로 성큼 들어서라.


꿈- 俊에게 투사된 나, 나에게 투사된 俊이.

그 대학생활의 면면이 데포르마숑된.


욥- 하나님을 인식하는 그 철저한 피조물의식.


17541 1995. 2. 16 (목)


회사의 새마을금고 대출.


퇴근무렵 회사를 나선다.

버스를 타고 러시아워의 도심을 지나 세진컴퓨터.

프린터와 컴퓨터 테이블과 모뎀을 사서 배달의뢰하고.

디스켓을 사고 소모품류등을 구입한다.

俊이의 컴퓨터는 이제 화려해 진 것이다.


다시 영도로, 김명희의 퇴사 회식.

그것은 명목일 뿐이고 모처럼 모여서 먹고 마시고 떠들 뿐이다.

착한 아이들, 여사원.

새로 입사한 아이는 英이보다 훨씬 어린 아이.

처녀 아이들을 대할때면 英이가 늘 눈에 밟힌다.


어제 俊이 졸업식.


작취미성.

날은 밝고.


17542 1995. 2. 17 (금)


俊이가 빌린 책.

김주영 '활빈도'

전작 '객주'의 아류.

플롯이 억지스럽지만 김주영다운 입심은 있다.

옛날에 이 땅에서 말하여졌던 언어라는 것은 정답다.


전일의 음주의 여운은 아직 알콜을 완전히 증발시키지 못한채 핏줄을 돌고 있다.

정시영과장, 한진 BLOCK건으로 제법 일께나 하는 폼을 잡고 설친다.

나는 그나마 그런 그가 대견하여 친절하게 대해 주게 된다.


俊이, 제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밤새 부스럭 부스럭거리더니 책상을 옮기고, 책장을 옮기고, 컴퓨터를 옭기는둥 하여 방의 어레인지를 확 바꿔 놓는다.

그 무거운 것들을 밤새 끙끙대며 이리저리 옮겼을 것인데.

여하튼 녀석은 신기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다.

오늘 프린터, 책상, 모뎀을 가져 올 것.


17543 1995. 2. 18 (토)


프린터서껀 들어오다.

俊이 그런 장비들을 다루는 솜씨가 너무 능숙하여 나는 아들놈의 두뇌가 우수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여사원, 이제 여상을 갓 졸업한 아이.

이 곳에서 사회생활에 부대껴가면서 자신의 살이 방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그 아이의 언니가 수대 英이의 학과인데 英이보다도 학년이 아래이다.

그러나 당장 김명희의 하던 일을 햇내기가 어떻게 처리하려는지 미상불 걱정이 아닐수는 없다.


동성개발의 이전무, 티켓을 건내준다.

俊이를 불러낸다.

구두를 사고, 블레이저 상의를 사고 하여 俊이의 입성을 꾸미고 싶은 아비의 열망에 녀석은 시큰둥.


여윈 俊이, 본시 살이 찌는 타잎은 아니지만 너무나 여위어 보기 안타까운데...


英이는 자동차 운전 학원 등록.


17544 1995. 2. 19 (일)


토요일 오후 돌아와 俊이와 함께 컴퓨터의 CPU를 뜯어내고 MODEM을 갈아 끼운다.

컴퓨터의 내부는 의외로 단조롭다.

기판들이 몇 개 이리저리 장착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쬐그만 칲 속에 숨어있는 엄청난 능력.


꿈- 날이 밝아 7시가 되면 나는 교수형을 당해야 한다. 마지막 관물정리, 그리고 신앙의 의연함을 유지하려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다가 죽었는지...


일요일 새벽.

새벽의 고요.

이제 俊이를 깨우려 하고, 俊이와 태종대를 뛰려 한다.


17545 1995. 2. 20 (월)


일요일의 아직 깜깜한 새벽.

俊이와 태종대를 달린다.

오십을 바라보는 몸뚱이는, 가동을 자주 하지 않아 녹슨 마디마디는 삐걱거리고, 숨은 차고, 무릎 근육은 당기고, 귓속이 얼얼하게 아프다.

곁에서 달리는 젊은 俊이.

그 씽씽함이 아비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해장국으로 부자 마주 앉아 새벽 동자를 먹는다.

俊이의 기분은 착 가라앉아 있어 일견 우울해 보이기도 한다.

추측컨데 녀석의 어울리기 싫어하는 성격은 오늘의 첫 오리엔테이션이라는게 몹씨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낯선 친구,선배,교수들과 새로운 괸계의 설정에 관한 부담이 녀석의 기분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아들녀석의 낯선 것에 대한 서툶은 필경 아비짜리로부터 유전된 성격의 일단일 것인데, 어찌하랴.


김주영의 '활빈도'

2권째 읽다가 계속 읽기를 포기하고 만다.

구성이 어설프고 '객주'를 재탕하여 우려먹은 찌꺼기같다.


P/C의 디스켓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彦이에게 카피해 줄 프로그램들을 압축 BACK UP 시켜 놓는다.

P/C통신도 만지작거리고, P/C 통신 책을 안방에 펼처 놓고 앉아 필기해 가며 공부도 한다.


꿈- 해양대 실습생들, 오세건, 중학교때 친구들, 행진, 기차... 나는 일탈자.

俊이와 동일시 되는, 아비와 아들의 겹침, 서로를 향한 투사...


17546 1995. 2. 21 (화)


동양시멘트의 허과장등 시멘트 연구소의 젊은 친구들 실험기구 싣고 찾아와 2공장 안벽 시공중인 특수 수중 세멘트의 데이터를 수집하여 간다.


俊이 오리엔테이션.

퇴근하니 俊이는 돌아 와 있는데, 녀석의 표정은 무엇 씹은 떫은 표정이다.

발랄함과 기대에 찬 밝은 얼굴로 부모에게 이것저것 들려주는 폼은 아예 꿈을 꾸지도 않았으나 너무나 의기소침한 녀석의 포즈에는 화가 날 지경이다.

온통 세상살이가 탐탁치 않다는 녀석의 표정...


꿈- 속상함은 열등, 소외 따위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이야기를 꾸민다.


주님.

俊를 새롭게 하소서.


17547 1995. 2. 22 (수)


2공장의 안벽 보수공사.

불분리 세멘트, 동양세멘트의 기술진이 대여섯명이나 와서 설쳐대는 가운데 타설하였으나 만족치 못한 결과.

오늘 다시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파도막이 구조물을 깨 부신후 일반 레미콘으로 타설하기로 하다.


J의 막 지껄이는 언어- 생각지 말자.

俊이의 웅크린 자세- 생각지 말자.


시간이 흐르면 그녀도 착하여 지고 녀석도 어른이 되겠지.


술- 작취미성의 아침.

그러나 깨어 부스럭거려야 하는 산 것들.


새롭게 하소서.


17548 1995. 2. 23 (목)


한진의 대형 안전사고로 조선소 특별 안전점검.

노동청과 안전공단의 합동 점검.

몇대의 크레인이 지적을 받았다.


俊이 제 친구 주홍이와 합천 친구의 고향에 들러 가야산 등산한다고 베낭을 꾸린다.

녀석의 개인적으로 떠나는 첫 여행, 첫 등반.

이런 俊이가 얼마나 기쁜 것인지.


英이도 어제 내원사 산행을 다녀 왔다.


꿈도 어둡지 아니하고.


17549 1995. 2. 24 (금)


俊이 어제 이른 아침에 베낭메고 아빠가 사준 등산화의 신들메를 단단히 조여 묶고 떠나다.

어제 밤 늦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합천 시골의 친구집 근처에다 주홍이와 텐트를 쳤다고.

내일은 가야산인가 어딘가의 산에 오를 것이라고.

그 목소리는 집안에 웅크리고 있던 俊이의 목소리가 아니다.

아,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

내 아들 열여덟짜리 사나이의 목소리는.


미우라 아야코의 '운명'읽다.

그녀의 신앙에 근거한 확고한 교육관이 드러나고, 인간의 보편적인 罪性이라는 주제의 다소 시시한 소설.

그러나 일본인들이란, 거듭 느끼건데 관계에 있어서 성실함이 넘친다.

그 인간적인 성실함으로서도 일본인은 우리보다 우수한 민족이다.


박세동이 회사 것을 빌려와 주어서 통신 프로그램 '이야기'를 INSTALL.

통신- 커무니케이션, 담 허물기, 대화.

俊이에게도 나 역시도 이 주제는 필경 도가 터야할 대상이다.


꿈- 김영삼, 청와대.

회색수면.


17550 1995. 2. 25 (토)


전날의 C급 수면. 몸이 저 밑으로 밑으로 가라 앉는듯한 그 기분나쁜 느낌.

그러나 번잡스럽지만 그 또한 파묻히고 나면 집중케 되는 업무를 진행하는 동안 시나브로 그 기분나쁜 느낌은 꼬리를 감춘다.


코리아 타코마의 오종칠 부장 내방.

느린 충청도 사투리의 여전한 떠벌림, 제 아들 인하공대 건축과 입학의 자랑스런 되뇌임.

그가 부러운 것은 갤로퍼를 몰고 다니는 그것도 아니고, 아들을 인천까지 유학보내어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경제력도 아니고, 다만 저토록 능청스레 세상을 살아가는 그의 살이를 영위하는 태도가 부러운 것이다.


오후, P상무 모는 차를 타고 장림, 기장과 곽정수과장의 부친상 문상.

78세 노인, 지난 밤에 감기가 걸리신 듯 하더니, 아침에 인사를 하려 들여다 보았더니 그대로 운명하셨더라고.

바로 그 곁에 자고 있던 중풍의 노모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중풍의 마나님을 수발하다가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버리신 것이다.

임종 못한 자식들은 짐짓 슬프더라도 그렇게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한 죽음이 아닐까.

막내인 곽정수가 사업가와 의사인 형들이 모시지 않는 부모님을 8년째 봉양하고 있었다는 그것이 곽정수를 새삼 다시 보이게 한다.


俊이는 벌써 2박3일 째.

어제 밤10시쯤, 동대구역에서 제 엄마에게 전화하였다고.

오늘쯤 오려나?

씽씽한 폼으로.


17551 1995. 2. 26 (일)


俊 돌아오다.

합천의 추운 겨울밤, 시골의 맨마당에 텐트를 치고 주홍이와 둘이서 침낭에 몸을 말고 첫날밤을 지냈는데, 추워서 죽는줄 알았다고.

다음날 가야산 1400고지 정상을 정복하고, 달랑 2만원 들고 나선 여행길 돈이 떨어졌는데.

고령에서 대구까지의 무전여행, 수완 좋은 주홍이는 어느 철학관에 들어가 돈 몇푼 얻기도 하여, 어느 교회에서 하룻밤 얻어자기도 하였다는 무용담.


대견한 俊이.

지치지도 않는지 녀석은 오자마자 샤워를 하더니 휭 밖으로 나가서 제 친구 지석이와 만나 12시가 다되어 돌아온다.


꿈- 폐허의 성, 그것은 보생의원, 그리고 어머니..


17552 1995. 2. 27 (일)


여행은 젊은이들을 살찌운다.

관계를 객관화하여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고 관계를 향한 용기를 얻는다.

묵은 관계의 끈을 늦추고 새로운 가능성의 관계를 응시할수 있다.


집을 떠나 낯선 곳을 떠돈다는 것은. 아.

아들 녀석의 축처짐에 상한 마음은 깨끗이 사라졌다.


QC 이성태의 결혼식.

해양대학의 선후배 무리들, 중국 선주들.

저자바닥 같은 근처 음식점.

브라스밴드가 연주하는 예식은 색 달랐지만 천편일률적인 저자바닥의 예식문화는 도무지 내 입 맛에는 맞지 아니하다.


아랫배와 뒷꽁무니 상태가 썩 좋지 아니 하건만 또 맥주를 마신다.


꿈- 좁고 울퉁불퉁한 산동네, 층층의 셋방들, 하수구와 수챗구멍, 음습한 곳의 벌레들, 누추한 방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연탄가스.

이 꿈의 내용의 메타포는 분명하다.

나는 육체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소화기관과 배설기관들의 느낌이 만들어 내는 영상들.


요하네스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안네 소피 무터


17553 1995. 2. 28 (화)


이동도서관, 미우라 아야코 '운명' 반납하고 로빈 쿡의 '바이탈 싸인' 대여.

이른바 메디칼 스릴러.

로빈 쿡은 실제로 의학박사이다.

아시모프나 로빈 쿡같은 작가의 소설에서 보는 탄탄한 구성과 충실한 내용은 이와 같은 기초물리학이나 기초의학의 전문지식의 농밀함에 기대고 있다.


외주분석 정리 완료.


J는 장모님 아프시다고 사직동행.

英이는 운전교습행.

일과중 집으로 전화 걸어보니 P/C 앞에 혼자 앉아있는 俊이, 아비에게 이것저것 S/W에 대하여 묻는다.

이렇게 묻는 俊이가 얼마나 기쁜지 녀석은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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