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5. 3

카지모도 2016. 6. 25.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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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4 1995. 3. 1 (수)


오전 부서장회의를 하고 있는 회의실 창 밖에 푸석푸석 눈이 내린다.

진눈개비.

오랜 가뭄이라는데. 되게도 오기 싫은 듯 내리던 진눈개비도 슬며시 그쳐 버린다.


고루하면 소극적이 되는 모양이다.

회사의 경영.

보수적이라면 어떤 원칙 하나는 뚜렷해야 할텐데 그마저도 없으니.

이런 환경에서의 순발력이란 몇사람의 비위를 헤아리는 순간순간의 눈치이다.


로빈 쿡 '바이탈 싸인'

나팔관을 일부러 막아 불임의 돈벌이, 황당한 아이디어인 듯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엔들 돈벌이로 이용되지 않으랴.


TV드라마 '모래시계'

장안에 화제를 몰고 다니는 드라마.

사형수 최민수는 카리스마가 있는 연기자이다.

최무룡과 강효실의 아들.


사형 집행 전 사형수의 대사.

'나 떨고 있니?'


삼일절 새벽,

어머니 출근하시는 길 들러 주시다.


17555 1995. 3. 2 (목)


俊이 오전 내내 소침하여 있더니, 11시쯤 벌떡 일어나더니 아비더러 산에 가잔다.

이토록 아들 녀석은 충동적이다.

이찌 가지 못한다고 할수 있으랴.

서둘러 복장을 챙겨 가지고 지하철타고 금정산 기슭으로 달려간다.

온천장에서 남문에 이르는 가파른 코스.

부자는 헐떡이며 산에 오른다.

하루가 틀리는 오십줄 사나이는 도저히 젊은이의 스테미나를 따라 잡지 못한다.

俊이는 의외로 강단이 있다.

이런 사실은 실로 아비짜리의 뿌듯함이다.

너덧번을 쉬며 숨을 고르고, 쉬는 짬짬 사진도 찍고하면서 드디어 남문 도착.

전날 내린 눈 때문에 질척거리는 산길을 도파 남문에서 동문까지의 평평한 길을 걷는다.

파전과 막걸리, 잠바를 입지 않아 추운 아비에게 俊이는 제 잠바를 벗어서 걸처준다.

俊이의 눈자위는 한잔의 막걸리로 어느새 놀이 지고 있다.


영도에 돌아와 집 밑의 노래방에 부자 퍼질러 앉아서 소리껏 노래를 부르고..

부자 우의 돈독히 한 가치있는 휴일의 하루.


오늘 俊의 입학식, 英의 개강.


17556 1995. 3. 3 (금)


英이 개강, 俊이 입학식.

동아리 활동에 들뜬 4학년짜리 늙다리 여자 대학생은 11시 넘어 들어오고, 이제 갓 들어가 설레여야 할 머스마 녀석은 입학식도 마다, 과의 선배 동기들과의 회식도 마다하고 일찌거니 집에 돌아와 몸을 눕히고 있다.

俊이, 저 낯선것에 대한 서툶을 어이 할거나.

어울려 즐길줄 아는 재주를 영 체득치 못하고 말것인지.


19557 1995. 3. 4 (토)


부산 상공회의소, 온종일 ISO 9000의 교육을 받다.

SGS라는 인증기관, 서두와 종장에 협성해운 왕상은회장의 눌변의 인사말.

그가 스폰서인 모양이다.


결국 상식이다. ISO 9000 이란.

효율을 기하는 첩경은 표준화, 생산성과 품질향상의 극대화.

대선의 풍토에 과연 이러한 시스템의 성공적인 접목이 가능할런지.


교육받으러 떠나기전 이른 아침부터 총무부 Hw부장, 디스켓 때문에 법석을 떨었는데, 정작 핵심적 사안들은 간과한채 이런 지엽적인 문제로 떠들썩하게 설처대는 분위기가 가능케 하는 것이 대선의 보편적인 풍토이니 이 아니 딱할손가.


俊이의 저 소극적인 성격.

제 앞에 닥치는 상황을 몹씨 두려워 하는듯한 저 포즈, FRESH MAN다운 호기심어린 패기는 찾아볼수가 없다.

대학의 선배 동료등 낯선 것이 아직 풀리지 않아서 그런건지, 아니면 그런 자의식이 스스로도 싫어서 저러는건지, 도무지 가리사니를 잡을수 없는 아비짜리의 안타까움.

때로는 끓어오르는 부아.


꿈- 장님 꼬마,청년들.

나는 俊이의 성격 어떤 면을 장애자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주님.

俊이를 도우소서.


17558 1995. 3. 5 (일)


SB-405 진수.

가는 눈발 흩날리는 차가운 날씨.

인도네시아의 대사도 참석한 이슬람식의 종교의식.

이슬람 목사의 기도 모습, 양손의 손바닥을 위로하고 들어올려 기도하는 독특한 포즈.


CNC 절단기는 일본 KOIKE의 제품으로 수입 결정, 구입품의서 만들다. 약 5억.


17559 1995. 3. 6 (월)


돋보기를 걸치지 않으면 가차이 있는 사물은 아무것도 볼수가 없다.

뵈지 않는 눈은 육체의 것이거니와 더욱 답답한 것은 뵈지 않아 짜증을 내는 수양되지 못한 급한 성품이다.

이런 것들이 나를 애 먹게 한다.


신앙, 교회...

피안에서 손짓하건만.


그예 일요일의 오후 마루에 퍼질러 앉아서 맥주를 마신다.


17560 1995. 3. 7 (화)


월요일 회사에서는 늘 핏줄이 그리웁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다시 저자거리에 파묻혀 있다보면, 그 진부하고 차가운 늪 속에 파묻히다 보면 이상하게도 아이들과 마누라가 그리운 것이다.

허무하여서 그럴 것이다.

허무한 가슴의 空洞 속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며는 그나마 관계의 따스함이 남아있는 핏줄의 부빔이 그리워... 외로움.


회사의 P/C를 만지작거리고 박세동과의 대화중에 깨달음, 집의 프린터가 안되는 것은 프린터가 불량하여서도 아니고 INTERFACE의 오류도 아니다.

단지 응용 S/W에서의 프린터 기종 선택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원인을 까닫고 난 후의 시원함이란.


俊이 어제는 웬일로 12시 다되어 귀가하였다.

과의 대표를 뽑고 둘러 앉아서 술 한잔들을 걸친 모양이다.

이것이 아비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녀석은 모를 것이다.


4시 일어나 화장실에서 황석영의 소설집 다시 읽는다.

밀살, 몰개월의 새, 낙타누깔, 돛대등...

목욕.


감사하게 하소서.


17561 1995. 3. 8 (수)


성큼 봄의 문턱으로 들어섰다.

계절이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란 지대하다.

살갗을 스치는 대기의 느낌, 눈에 펼처지는 풍광이, 그리고 대기에 스며있는 그 냄새들이...

정서를 자극하고, 자연에 대한, 인생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형성하여, 의식구조의 한 기층을 이루고, 그것이 정신을 자극하고 형성하여...


2공장 안벽공사, KC원 은 이제 훌륭한 일꾼.

무릇 일에 있어서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 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을 것이다.

서툰 삽질의 나도 거들었으나 KC원 ,CT용 ,KK곤 등의 솜씨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 뿐이다.


지방단체의 일꾼을 뽑는데 정당공천을 할 것이냐 말것이냐로 여야 충돌.

서민의 살이에 필요한 일꾼에 있어서도 정치성은 절대적인 작용을 하는 모양이다.

대통령은 유럽 순방중.

영생교라는 엉터리 종교의 사기 살인 행각.


퇴근하며 한병의 소주.

俊이도 英이도 일찍 돌아와 있다.


꿈- 유원지.

媛이, 주옥이등 친척들... 회사의 젊은 직원들, 열차...


17562 1995. 3. 9 (목)


늙은이가 되어 간다는 징후는 다른 것이 아니다.

노파심과 잔소리, 아이들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사안들의 그 일상이 늘 걱정이다.


아이들, 두녀석 모두 10시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아 잠을 이룰수 없다.


밤늦어 돌아 온 아이들, 英이는 교수와의 단합대회, 俊이는 과친구들과 호프에서 술 마셨다고.

그토록 俊이가 밖에서 주위와 어울려 즐겨주기를 바라건만, 정작 전화 한통없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이토록 부질없는 안달을 하는 것이다.

노파심과 잔소리- 나이 먹는 자의 슬픈 증후군.


어제는 또 출근하여 화장실 앉아 있는데, 이른 아침부터 느닷없는 Sh씨 의 호출.

마천공장에서 트레일러 제작에 관한 기획서 만들라는 ORDER.

앞도 뒤도 없는 그 독선적 ORDER 한마디에 뜬구름 잡는 구상에 매달린다.

회사의 트레일러의 촌법을 재고, 여기 저기서 트레일러에 관한 자료를 구해다가 전전긍긍 머리를 짜낸다.


오늘은 SB-414 예비 시운전, 오후부터 50MM 이상의 비가 온다는데.


17563 1995. 3. 10 (금)


단비 내리다.

SB-414 예비시운전.

전날의 Sh씨 의 ORDER, 이럭저럭 트레일러 생산 기획안 꾸며서 기획실 오차장에게 전달하여 주었는데, 웬걸, 전혀 엉뚱한 작업을 한 것이다.

Sh씨 는 전혀 사안의 핵심에서 벗어난 즉흥적인 자기 생각을 피력하여 그것을 명령한 것이다.

모름지기 늙은이의 단견적인 생각은 한번 확인하고 시작하라.


귀환하는 선박을 맞이하고 6시 조금 넘어 회사를 나온다.

모처럼 뚱집의 안방에 SJ엽 , 정시영등과 둘러 앉아 소주를 마신다.


俊이는 신입생 환영회로 표충사 간다고.


작취미성의 아침.

어김없이 주섬주섬 일어나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르고 집을 나서는 봉급쟁이는 훈련된 개.


17565 1995. 3. 12 (일)


SB-414 공시운전.

공시운전 선박과의 교신 때문에 토요일 오후 하릴없이 사무실 지키고 앉아 있었다.

잠시의 자리도 비울수 없는채 P/C 앞에 앉아 게임에 열중하면서.


俊이 돌아오다.

영남 알프스, 사자평.

나도 두어번 올라 보았던 갈대가 물결치는 산마루의 평원을 그려본다.


일요일.

나른한 몸살끼.


17566 1995. 3. 13 (월)


아, 과감히 생활의 양태를 바꿔 볼수는 없을까.

휴일의 진부한 그 습성.

늦으막히 세수하고 그예 소주를 비우고 일찌거니 잠자리 기어드는 휴일의 습성.


그나마 어제 잠시라도 무게 실린 일을 하였다면 俊이에게 한시간 남짓 컴퓨터 교육을 하여준 일.


일요일, 왼종일 TV를 해바라기하고 앉아있는 J에게도 진부함은 그득하고, 집안 어디에도 참신한 기풍을 진작시키는 그무엇 한줌 남아있지를 않으니.


신을 향한 경건한 마음의 기울임은 이 집안, 거미즐과 먼지 낀 분위기에서는 가능한 구석이 없다.

과감히 벗어 던지고 떨쳐 일어날수는 없는가.

너 진부한 정신이여.

나이 먹어 자꾸만 게을러지는 타성의 타성은 날로 더해 가는데, 이제 아주 그 진부의 늪 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그날을 기다리는지, 엄청나게 게으른 이 영혼아.


꿈- 넘치는 화장실의 오물, 똥덩이. 지하도...


주님.

새롭게 하소서.


17567 1995. 3. 14 (화)


俊이에게 긴요하게 쓰일 법한 경제용어등을 정리하여 D/B로 입력시킨다.

104개의 용어.

입력하면서 그것들을 개관하여 보니까, 현대 경영기법의 개념들이 손에 잪힐 듯 하다.

그 용어 하나하나를 실례를 들어가면서 俊이에게 설명하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

그러나 녀석은 아비의 이와 같은 진지함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축은 아니다.

그러나 英이보다는 다소 나을까.


로빈 쿡의 소설 반납하고, 이동도서관의 봉고차 옆구리 서가에서 대번에 두권의 책을 뽑아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

죽음의 세계를 탐험하는 이야기라는데 과연 전자오락 세대인 프랑스의 젊은 작가가 어떤 기발한 상상력과 지식을 동원하여 죽음 너머의 세계에 어프로치할런지가 기대된다.


한상혁부장의 동생 심장마비 사망. 마흔일곱살.

전혀 예측 불가능한 죽음의 순간, 그 분이 영혼아 오너라하면 꼼짝없이 가야하는 거기.

타인의 죽음은 그러나 또 얼마나한 피상인가.

한낱 부조의 돈봉투에나 신경 쓰일 정도의 그것이니.

죽음이란 오로지 자신의 것, 실존의 문제.


꿈- 의류매장, 빨간 넥타이, 좁은 골목, 언덕받이의 하숙 동네, 자하문쯤일까...

그런데 나는 여성이고 나의 남편은 늙은 목사이다. 그리고 시동생은 장님 목사이고.


주님.

새롭게하소서.


17568 1995. 3. 15 (수)


베르나르 베르베르 '타나토노트'

타나토노트란 말하자면 저승의 우주인이다.

타나토드롬, 모흐, 코마 플러스24분....

기발한 아이디어는 그 4차원 세계를 넘나든다.


곰곰 생각해 보면 인간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어디 있을까.

죽음.

진지하게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속샘은 아마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의 아지못할 영원한 단절의 그 검은 수렁이 두렵고, 창조하신 절대자의 뜻이 있다면 神性에 비추인 스스로의 죄가 두렵고, 역사 속 현실 속에서 영원히 떠나야한다는 그 철저한 소외가 두렵고..


그러나 파스칼은 말한다.

"넋이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고 또한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아무런 감정없이 살지 않는 다음에야 우리는 그 사실에 무관할수 없다. 희망할 만한 영원한 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아주 딴판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죽음 그 너머, 어떤 의식할수 있는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

베르나르 그 젊은이의 상상력에는 취 할만한 것이 많다.


꿈- 높은 성, 호텔. 높은 곳으로 던져 올려지는 관광객들.


"삶은 잠을 통해서 우리를 죽음에 길들이고, 꿈을 통해서 또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유태교 '앨리파스 레비'-


17569 1995. 3. 16 (목)


가정신문을 구상한다.

컴퓨터가 있고 프린터가 있고, 이와 같은 열망이 있는데 못 만들게 무어냐.

어머니,형네,媛네를 아우르는 가족신문.

이 도구로서 관계의 벽을 허물고, 이기주의의 숲을 태우고, 진실로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하는 커무니케이션을 이룰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신문의 제호는 '독립신문'이라고 생각하여 본다.

나름대로 이 독립이란 단어의 의미를 정신적인, 심리적인 의미심장함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여.


자의식으로 부터의 독립, 고정관념으로 부터의 독립, 미신과 우매로 부터의 독립, 감정적 시각으로부터의 독립,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으로 성취하기 위한 과정의... 그 독립.


나는 甲子, J는 乙子 , 英이와 俊이는 丙子와 丁子라는 필명으로 기사를 쓰고.

형네는 형네대로, 媛네는 媛네 대로.

나아가 보생의원의 자손들까지도 아우르는.

월간지정도로 편집하면...


퇴근하며 직원들과 어울려 대취.


비가 내리는 새벽.


15570 1995. 3. 17 (금)


진하게 술을 마신 다음 날, 알콜기의 그 현란한 디오니서스의 여운이 짙게 남아있는 육신과 정신.

결코 건강하지도 가치있는 것도 아니련만 이상스런 감정의 고양과 낙천이 하루를 지배한다.


俊이, 버스를 타고 먼 곳 학교까지 다니기가 딴에는 고단한 모양.

학처럼 가늘고 긴 몸뚱이, 하얀 얼굴.

나약한 포즈.

그런 자신의 육체를 단련시키고자 하는 의욕도 의지도 없는듯하여 가련하면서도 어떨때는 부아가 나는 아비짜리.


그러한가.

나는 내 아이들에게 과잉 기대를 가지고 있는 아비인가?

과연 그러한가.

내 기대만큼의 능력과 소양이 내 아이들에게 없단 말인가?

과연 그러한가.

단연코 아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내 자신을 임상한 결과, 내 정액에서 내 유전인자를 받아 태어난 내 아이들.

소질과 능력은 무한하다.

단지 부모짜리라는 사람들의 방법론이 문제일 뿐이다.

도우소서.


17571 1995. 3. 18 (토)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다.

꿏샘추위- 꽃을 시샘한다는 것인가, 꽃이 시샘한다는 것인가.

아마 꽃이 피어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는 추위가 심술을 부린다는 뜻일 것이다.


7시30분쯤, 통근버스 흔들려 퇴근하여 돌아오니 俊이는 벌써 제 방 불끄고 자리에 파묻혀 자고있다.

문을 두드려 문을 열게하고 내려다 보니, 몰골은 젊음의 그것이 아니다.

무기력, 의기소침, 무언가 겁내고 있는듯한 포즈.

남자로서 갖지 말아야 할 것들만 내비치고 있으니 부아가 나지 않을 아비짜리가 어디 있겠는가.


이토록 노심초사, 녀석에게 활달한 기상의 동기를 부여코자, 다독이기도하고 호소하기도 하고 또는 어떤 심성을 고취하려 우회적인 노력을 한다는 것이 녀석에게는 무망한 짓거리일까.

천품이 그러해서 그저 그렇게 빌빌대며 사나이 한 인생을 방기토록 내버려 두는 것이 차라리 녀석에게는 행복한 노릇일까.

밤새 속에서는 부아가 끓는다.


어떻게 산이라도 데리고 다녀야겠다.


주님. 저 빌빌이를 도우소서.


17572 1995. 3. 19 (일)


안전문제, 환경문제.

갈수록 법규는 빡빡해지고 감독체제는 강화되는데, 회사는 이런 부분에 돈 쓸 생각은 아니하고 피곤한 것은 당하는 실무자 뿐이다.


일요일 새벽.

俊이를 몰고서 구덕산 등산가려 하였는데, 가득한 몸살기운.


'세상밖으로'

문성근,이경영,심혜진 주연. 여균동 감독.

로드무비, 적나라한 대사의 쌍욕들, 제법 만든 국산영화다.


17573 1995. 3. 20 (월)


일요일.

휴일의 오전.

밀어 닥치는 허무의 느낌.

저토록 천연스레 누워있는 바다 탓이 아니다.

경제적인 구차함때문도 아니다.

아내의 여성다움 결핍때문도 아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아이들에 대한 못마땅함 탓도 아니다.

내 신앙의 엉거주춤 때문도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의미없는 삶에 대한 의식과, 때로 소름끼치도록 소멸하고 싶은 그 욕망의 본질은..


무언가 그 아득한 기분에서 벗어나고자 오후에 집을 나선다.

산행을 포기하는 대신 俊이와 태종대를 걷고, 하리 방파제에서 아나고를 사들고 아랫길의 어느 영양탕집에 마주 앉아서 아들녀석에게 개고기 수육을 사 먹인다.

이렇게 마주 앉아 부자간 얘기를 나누노라면 녀석에 대한 걱정은 한낱 기우라는 느낌이 든다.

이토록 준수하고 번듯한 아들 놈, 그리고 생각도 이토록 번듯한 것을..


소주에 취하여 잠이 든다.

꿈- 사다리, PP갑 .


새벽.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그것과 다르다.


17574 1995. 3. 21 (화)


기온은 봄날씨이지만 부산의 3월은 오히려 써늘하다. 바람.

동백교 재가설공사의 계약건 처리.

안전공단에는 가지 못하다.


40대의 대학교수, 학교 재단 이사장인 돈많은 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그것도 우발 충동적인 범행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침착하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외형적인 동기는 결국 돈이었다.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윤리의 끈을 끊어 버릴수 있는 그 엄청난 의지.

그 의지는 돈이었다.

고작 돈, 돈, 돈때문에.

슬픈 세상이다.

도무지 슬프고 구차한 세상이다.


英이, 요즘 영어공부에 부쩍 열을 올린다.

오늘부터는 이른 시각 학교에서 하는 토익 강좌 들으러 간다고.

우리 큰 따님께서 무언가 목표하는 바가 절실하신 것인지 기특하기 짝이 없다.


꿈- 전통이 있는 대가집, 나도 그집안의 저 끝 한자락, 김성태, 이길선. 그리고 야외 훈련장인지 야유회장인지, 박세동 혹는 손철수와 같은 분위기의 누구와.

대강당에서는 학예회인지 동창회인지가 열리고.


새벽.

쇼팽의 전주곡들.

아담 하라세비치의 피아노.


요한복음.

죽으실 전야에 예수님은 다변하셨다.


기도.


17575 1995. 3. 22 (수)


오전 CT용 이 모는 프린스타고 반여동 산업안전공단 방문.

설계담당 박재광씨는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다.

다시 오후에 20만원짜리 봉투 준비하여 택시타고 달려갔지만, 봉투를 어쩌고 할 계제는 되지 못하고, 다시 설계 변경하여 정기검사 받기로 협의하는 것으로 그치다.


요즘 부쩍 피로함을 느낀다.

왼쪽 눈의 멍울에서는 눈꼽이 끼고 눈물이 흐른다.

혓바늘 기색 완연하지만 소염제 기모타부로 사전 진압을 하매 기를 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비오티스를 하루에 한웅큼씩 씹어 먹는 덕분인지 배변의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고.


그런데 밤에 이루는 혼곤한 잠은 숙면이 아닌 모양이다.

한낮의 극심한 조름은 가히 살인적이다.


俊이, 1학년 마치고 군대 운운..

저 비쩍 마르고 퀭한 몰골의 녀석이.

어울림성이 너무도 부족한 저 내향적인 성격이.

요즘 군대가 아무리 예전과 다르다고 하여도 군대는 군대인데.


俊이가 그 시절 나 정도만이라도 뻔뻔함과 과장된 폼과 근력과 건강한 수준이더라도.


그러나 모른다.

제 새끼는 늘 꼬물꼬물한 새끼 강아지로 보이는 법이라니까.


요한복음.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시다.


17576 1995. 3. 23 (목)


SB-414 출항 순연되고 뚜렷한 업무방향도 정립하지 못한채 일과를 보낸다.

회의실 장의자에 길게 누워 부끄러운 환상에도 잠기고.


베르나르 베르베르 '타나토노트' 완독.

상상력과 익살.

죽음에 대하여 만화처럼 쉽게 접근하는 듯 하지만 나름대로의 깊은 천착이 있다.

고대의 여러 경전을 통하여 어떤 실마리를 찾고자하는 젊은 작가의 진지함도 있다.


환생과 부활은 그 의미가 극도로 다른 것이다.


동경의 지하철, 독가스 살포, 십여명이 죽고 수천명이 질식.

불특정 다수에게 행하는 맹목적인 증오.

그 증오의 감정 상태를 나는 이해할수 있다.

나의 악하고 비겁한 본성은 그것을 이해할수 있는 것이다.


英이 요즘 비로소 공부에 열을 내는가.

그런데 굼뜬 아들녀석은 제대로 된 써클을 모두 놓지는 것이나 아닌지.

아비가 그토록 써클, 써클 하고 염불을 하건만.


17577 1995. 3. 24 (금)


회사.

순응할 것.

순치되는 것이 아니라 순응할 것.

좋은게 좋은 것, 거스려 득 될게 아무것도 없다.

낫살이나 먹으니 이것이 진리임을 알게 되는 모양이다.

이런게 보수꾼의 기질, 안일과 익숙한 것에 함몰하는것.

머릿 속에서는 젊음의 질풍노도와 같은 생각이 있을지라도 밖으로는 언제나 보수꾼의 폼을 잡는 것.


내가 俊이에게 가르쳐 줄 그런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

처세의 지혜?

낚시로 한 마리의 고기를 잡는 법보다 그물로 왕창 포힉하는 방법론?


퇴근하여 몇병의 맥주.

찬넬2의 일본 방송에서 'WEST SIDE STORY'방영.

내게 있어서 뮤지컬의 영원한 고전.


아비의 등쌀에 俊이 영자신문 써클 'TIMES'에 시험보다.

붙어야 할텐데.


17578 1995. 3. 25 (토)


CT용 대리, 쇼트장의 크레인 검사 무사히 마치다.

KC원 대리, 2공장 안벽의 레미콘공사 무사히 마친다.

해상크레인 작업도 무사히 마친다.

SB-414 안벽을 뒤로 하고 무사히 줄항한다.


俊이 써클 시험마치고 밤 11시쯤 귀가.

잠결에 무슨 소리가 나는듯하여 英방 문짝에 귀대고 들어보니 모녀의 큰소리.

전화 한통없이 12시 넘어 귀가하는 딸네미를 걱정하여 야단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그런데 이 딸네미는 그런 잔소리 자체가 도무지 못마땅한 것이다.

모녀간 거친 언사가 오간다.

짐짓 모른척 다시 안방의 잠자리에 기어든다.


꿈- 어린 英이를 데리고 김순철씨의 안내로 중국연변 여행. 북한을 거처서 돌아가야 한다는 불안...


17579 1995. 3. 26 (일)


봄날은 너무나 더디게 닥아 오고 있다.

바다를 낀 도시의 봄마당은 바람만이 축제를 벌이는 마당이다.

제법 춥기까지 하다.


하고잡이 박인서상무.

그 냥반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의미는 바로 일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만들어 판을 벌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잠시라도 한가한 모습을 볼수가 없다.

건설부, 수리선부의 일까지도 오지랖 넓게 챙겨대는 바람에 피곤한 것은 조조군사.


그동안 그러한 P상무의 일에 대한 적극성이 전무의 신임을 획득하였는데 요즘은 그게 아니다.

그런 적극성이 조그만 늙은이에게는 또 위협으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꿈- J, J가 낳은 사생아, 그 아이는 제 엄마의 정부인 나를 증오한다.


17580 1995. 3. 27 (월)


俊이와 외출하는 일요일.

범내골 상공회의소, 글 워드프로세서 3.0 VERSION의 발표회.

대부분 젊은 학생들로 가득한 인파.

컴퓨터의 열기는 이토록 뜨겁다.

한국의 빌 게이츠라고 불리워지는 한글과 컴퓨터의 젊은 사장 이찬진씨.

그리고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V3 의 개발자인 의사 안철수씨.

화려한 영상의 데몬스트레이션.

가지가지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주변기기들 전시...

이런 젊고 뜨거운 열기를 俊이에게 전해 주려고 데리고 간 것이다.


부자 함께 국제시장의 돼지갈비. 그리고 생맥주.

'백범일지' 책한권,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반주로 디스카우가 부른 슈베르트 리트 레코드, 俊이의 등산용 스카프 두장, 그리고 위청수 한통 사들고 직행버스타고 돌아온다.


俊이와 많은 대화를 하였고, 녀석도 나름대로 아비의 뜻을 이해한듯하여 모처럼의 보람있는 휴일.


꿈- 좁은 HATCH를 여러 겹 통과하여 상층 갑판으로 올라간다.


월요일 새벽, 좀더 눕자 눕자하는 당나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목욕을 시킨다.


17581 1995. 3. 28 (화)


월요일은 늘 이상하게 마음이 허허로웁다.

살이에, 다투어 일궈내야할 그 살이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고 나약한 감정에 휩싸여.

이 능력없고 나약한 가장에 위탁하여 살이를 꿈꾸어 가꾸어 나가는 아이들이 가엾고, 마누라가 안스럽고.

저 가냘픈 俊이에게 무엇을 줄수 있겠는가.


가난은 단지 불편한 것 뿐이 아니다.

이 자본주의의 산업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있게 실존을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오후 빗방울 듣다.


꿈- 마산의 어느 호텔, 풍만하여 섹시한 어떤 중년여인을 안는다.


17582 1995. 3. 29 (수)


한진중공업의 저녁식사 초대에 가지 않고 정과장을 대신 참석시키고 나는 어머니께 간다.

어머니.

늙어, 어언 늙어 팔십을 바라보고, 자식들은 오십을 바라보며, 손자들은 군대를 생각해야할 나이들이다.

어머니.


哲이 중학때부터 결성했다는 8명의 써클, 거기를 탈퇴한다고 뭇매를 맞았단다.

이른바 다구리.

哲이에게는 彦이나 俊이에게는 없는 과장된 떠벌림이 있고, 순진한 적극성이 있다.


어머니 곁을 물러나 족발사들고 돌아와 베란다 내 방에 앉아서 두병의 맥주를 마시고 곯아 떨어진다.


술로 인하여 고양되는 정신, 그 마비.

가짜배기.


17583 1995. 3. 30 (목)


이동도서관.

'퇴마록' 3권 빌리다.

순식간에 후루룩 넘겨 개관하는데.

무슨 심령소설도 아니고 무슨 무협소설도 아니고, 그야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기로 가득 채운 소설.

하이텔에 띄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엉터리 소설.

이런 류를 재미있다고 사서 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수 없다.

무슨 환타지가 있다고 하는데 두 눈 까 뒤집고 보아도 환타지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지.


俊이 내일 신체검사.

군대문제가 눈 앞에 닥아 왔다.

녀석은 은근히 이 군대라는 것이 강박이 되고 있을 것이다.

俊아.

힘 내거라.

너는 황금의 젊은이다.

아들놈을 생각할때면 때로 답답하고 때로 노엽고 때로 가엾고 때로 귀엽고 때로 대견하다.


꿈- 별자리.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俊이를 도우소서.


17584 1995. 3. 31 (금)


비, 흩뿌리는데 細雨다.

스팀이 들어오지 않는 사무실은 한겨울보다 오히려 더욱 춥다.


1학년만을 대상으로 하여 치른 토익 시험.

俊이 1등.

얼마나 기분 좋은 소식이냐.

영어실력이 이토록 뛰어난데 어떻게 해서 써클 'TIMES'에는 낙방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영어 이외의 어떤 것들이 낙방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俊이의 성격- 녀석에게서 주눅이 들게 하는 분위기여서는 안된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요소를 자극하여 신명을 북돋아주는 동기부여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와 같은 동기부여에 의하여 사소한 것에서부터 성공을 거두면, 그것이 또 다른 동기가 되어 다시 성공을 거두고, 자꾸 그렇게 에스컬레이트 되어가는 그런 상황.


운도 따라야 할 것인데, 그 운이라는 것은 온전히 주님의 것이다.

기도가 필요한 이유.


오늘 俊이 신체검사.

새벽같이 일어난 俊이의 표정은 어둡지 아니하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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