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26 1997. 1. 1 (수)
일만팔천이백이십오일을 살아낸 새해 첫날이다.
김교신 선생님을 흉내낸, 태어나서부터 하루하루 일련의 날수.
하나님께서 주신 목숨의 유한함을 일깨워 매일처럼 충일한 의미를 가다듬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하루하루를 의미없이 죽여 버리는, 일종의 KILL TIME의 나날은 아닌지.
진짜로 의미있는 날은 미래 어딘가에 있을거라는 환상이 있어.
겪는 오늘 오늘은 늘 의미없는 나날.
그리하여 기다림의 나날.
소풍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며 손가락을 헤는 어린아이처럼, 오늘이란 단지 그 날을 위하여 어서 지나가버려야 하는 하루일뿐.
그 안타까움은 올 연초에도 여일하구나.
이제 새해에는, 새해에는.
메마른 가시버시의 정이 되살아나고, 아이들이 사랑과 위로를 받으며 용기와 지혜와 힘을 얻는 샘터같은 가정을 이루는 꿈,
나의 관계들.
좁은 마음의 벽들을 허물어 새롭게.
어머니, 늙으신 어머니의 건강과 꼿꼿한 정신을 기원하며...
무엇보다 俊이 내 아들의 밝은 군대생활을 기원하며, 英이 좀 더 어른스럽게 가족사랑의 성숙함을 보여 줬으면 좋겠다.
오오, 그러나 무엇인가 그 모든 능력의 씨앗이 어디 있음인가.
바로 나 자신, 스스로의 황폐한 토지 속에 숨겨져 있음을!
매일이 새롭고 매일이 새로워라.
정초의 새벽.
이 기도처럼.
진실하고 경건하게
스스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18227 1997. 1. 2 (목)
새해 첫날.
어머니께 간다.
형은 통풍이라나, 왼발을 꼼짝 못하고 있고, 어머니는 한해의 첫날을 여전한 포즈로 껴안으신다.
가야숙모, D은이 내외 오고,
식구들 둘러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떡국을 먹는다.
떡국을 먹고있으려니 俊이 에게서 전화.
강원도 땅 양구에도 새해가 찾아온 것이다.
새해 첫날 제 가족들 큰집에 모여있을줄 알고 전화를 한 것이다.
俊이와 彦이는 멀리 군대라는 고장에 있는 것이다.
2사단,
사단까지 팔려가서 대기병 신세, 본대 배속을 기다린다고.
아들 놈 목소리가 어둡지 않음에 마음이 놓이는 새해 새아침.
英이 차를 타고 태종대로 하여 영도를 휘휘 돌아 집으로 돌아온다.
俊이 없는 쓸쓸함, 맥주마시며 셋이서 마루에 앉아 고스톱.
흐리고 바람불고 기온이 뚝 떨어졌다.
18228 1997. 1. 3 (금)
사단 보충대에서는 여유가 좀 있는겐지 어제 밤에도 집으로 전화한 俊이.
팀 로빈스감독, 수잔 새런든, 숀 팬주연의 '대드맨 워킹'.
데이트중인 소년과 소녀를 잔인하게 살해한 폰슬렛이라는 싸구려 깡패.
그 어떤 죄의식도 없이, 일종의 깡패의 영웅심리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면서도 그에게는 죄의식이 없다.
다만 자신의 죽어야만 한다는 심리적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
수녀 헬렌역 수잔 새런든과 폰슬렛역 숀팬의 연기.
사형집행장면과 범행장면을 가로세로 직조하면서 팀 로빈스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채 지성적으로 화면을 끌어간다.
약물을 주사하여 죽이는 사형 집행방식.
늘 나를 소름돋게 하는 주제, 사형.
계획된 시간에 계획된 죽음이란 사형말고는 없다.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경우도, 자살자 까지도 그토록 빈틈없이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죽음을 죽을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섯불리 사형폐지론자도, 사형지지론자도 될 일이 아니다.
깊은 천착과 궁구가 있어야 하리.
테네시 윌리암스 '유리 동물원'
아만다, 로라, 톰, 짐.
네사람의 등장인물.
내외가 심하여 마실도 안나가고 방에만 틀어박혀 자수에만 골똘한 수줍은 우리나라의 옛 누이같은 로라.
로라는 내 외갓집 두분 누이처럼 투명하게 아름답다,
도시에 나간 톰은 그 누이에게 종장의 대사를 한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누나가 어깨를 칩니다. 저는 몸을 돌리고는 누나의 눈을 들여다 봅니다. 오, 로라. 로라. 난 누나를 버리려 했어. 그럴 작정이었는데 한시도 누나를 잊을수 없는거야! 전 담배를 꺼내죠. 거리를 건너고, 영화관에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가까이 있는 낯선 사람에게 이야기합니다- 누나의 촛불을 끌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려는거죠! 왜냐하면 오늘날은 번개가 세상을 밝히기 때문이죠. 누나, 누나의 촛불을 꺼요.- 그럼 안녕."
로라는 서서히 촛불을 끈다.
그리고 암전되며 막은 내린다.
18229 1997. 1. 4 (토)
부산으로서는 제법 매서운 날씨.
진부하고 평이한 신년사를 들으며 시무식이라는걸 하고, 또 그 탁한 직장의 일과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내면의 무엇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낙천아 어디 숨었느냐, 나오너라. 새해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전방의 매서운 추위 속 쫄병 俊이도 간절하게 바랄터인 이 대사 또한 나 스스로에게 바라는 절실한 대사.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 류시영 '시쓰는 남자'
'몸과 말, 몸은 神이 만들어서 그 안에는 신의 속성이 깃들어 있지만, 말이나 정신은 그러하지 않아 자꾸만 미끄러진다... 云云'
72년생인 젊은이가 쓴 소설이 오십줄 사나이에게 이토록 난해하다.
그러나 한번 읽고서는,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읽을 흥미는 우러나지 아니한다.
18230 1997. 1. 5 (일)
경제가 어렵다.
경제 후진국으로 곤두박질 칠수도 있다고 예 제서 자꾸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불안한 분위기를 새록새록 풍기는 새해의 냄새.
노동법, 안기부법이 신한국당 단독으로 날치기 통과되어서 노동계는 들썩 일어났으나 어딘가 맥이 빠진 모습이다.
이런 불안한 분위기로 기가 죽은 탓인지.
잠수함 건은 북측의 사과로 고비는 넘겼으나 안심할 수는 없다.
강원도 양구땅, 4.2인치 박격포의 쫄병.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런 저런 거시적인 것들이다.
일요일 새벽.
불꺼 어둠에 잠겨 기도드리는데.
용서하소서, 깨끗이 하소서.
18231 1997. 1. 6 (월)
일요일.
부슬부슬 겨울비 내린다.
俊이 방 책상 앞 앉아서 류한평 '자기최면' 읽는다.
암시, 최면의 유일한 도구는 암시이다.
암시에 의한 반응은 의식의 검열을 피한다.
막바로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자율신경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데오 모터- 볼펜 끝단에다 실을 메어 추를 만들고, 스스로 암시를 걸어 실험하여 보니까 신기하게도 책에서 설명하는 것 처럼 된다.
흥미.
자기최면도 수련이 필요하다.
잠재의식의 요소중에서 긍정적이고 이쁜 것들을 끄집어내서 내 원하는대로 이용할수도 있을 것이다.
꿈- 형과 조카, J와 어린 英이 俊이, 해동병원, 충무동의 시외버스 터미널...
월요일 베토벤 5번 교향곡을 울리게 하여 놓고서 기도.
유장한 3악장의 선율이 가슴을 친다.
강원도의 추위, 내 아들 俊.
18232 1997. 1. 7 (화)
회사가 너무나 재미없어, 유난스레 회사에 대한 환멸이 엄습하는 월요일.
그러나 나의 속사람에게 힘을 주시는 존재를 의지하여, 혹은 자신에게 들려주는 암시로서.
늘 俊이에게 당부하는바 그것, 긍정과 낙천을 잃지 않으려 한다.
프로이트나 융등의 난해한 이론들은 추상적 개념으로서 지적 호기심의 만족을 주었다고 한다면, 그 지식들을 기초로한 최면이다, 마인드 컨트롤이다하는 방법론은 실용적인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율신경계의 훈련을 통하여 어느 정도의 자기최면의 수준에 다다르고 싶다.
자기최면이라는 매력적인 도구.
이런 조급함을 먼저 제어토록 최면하라.
강원도지방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는데, 2사단 31연대 최말단쫄병 군번76084033 짜리 이등병은 제설작업에 뺑이를 치고 있겠지.
부디 俊아.
긍정과 낙천...
이를 위하여 네 속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라.
18233 1997. 1. 8 (수)
영업상무가 주재하는 회의.
L이사의 능변은 실사구시가 아니라 자기현시를 목적으로 하는것처럼 느껴지는 달변이다.
3선대 선박건조에 있어서 병열건조의 문제가 핵심 사안이었는데, 생산은 생산대로, 설계는 설계대로, 영업은 영업대로 입장이 부딪쳐 단견만 쏟아질 뿐이다.
요즘 의기소침한 P상무는 그래도 정약용쯤의 실사구시의 정신은 있는데 웬일로 말을 아낀다.
헴펠 페인트사의 달력, 범선 유화그림 벽에 걸다.
퇴근후 자기최면을 공부 하려하나 참 그것이 지난하구나.
저녁 먹고나서 씻으면 9시, 이미 몸은 까부라질 듯 피곤하다.
그리하여 저녁시간은 내게 무엇도 할 수 없는 시간.
몇십년래 나의 체질은 새벽으로 바뀌어 버렸다.
4시 기상- 화장실 40분, 목욕 50분, 출근준비에 20여분...그러면 6시가 후딱 지나가 버린다.
그제서야 뜨거운 차를 홀짝이며 책상앞 앉는 것이다.
약 1시간 20여분 동안 책 몇페이지, 성경몇페이지, 기도, 일기쓰기, 꿈 적기...
18235 1997. 1. 10 (금)
전일의 음주로 육체는 곤비하다.
SB-428 공시운전.
날씨도 양호하고 예시운전때보다 선박의 컨디션도 좋다.
다시 읽는 '김형욱 회고록'
박정희는 후안무치의 파렴치한으로 묘사되고, 김대중은 제법 높은 식견과 경륜의 사나이로 평가되었으며, 자신은 반공정신 투철한 진정한 애국자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김형욱을 비롯하여 내게는 모두가 권력이라는 속성에 찌들린 덕지덕지 더러운 얼굴들이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정치 권력이라고 해서 완장 찬 시장통 경비원의 권력과 하등 다를바 없다.
권력의 속성이란 모두가 동일하다.
그런데 그러한 권력의 계통에 속해 있는 아들 놈.
군대라는 특이한 권력구조의 제일 말단.
예전처럼 동물적이고 맹목적인 무작정의 권력행사는 없을지라도 군대는 군대이다.
며칠 앞선 권력도 무서운 권력이다,
지극히 조직적이지 못한, 개인적인 취향의 기질이 강한 아들녀석에게는 견디기 힘든 층층시하의 권력들...
그러나 이제 俊아.
권력에 순응하라.
때로는 아첨하고, 때로는 이용하고, 때로는 편승하라.
이런 일련의 재능을 키움도 훌륭한 훈련이니라...
어서 봄이 왔으면.
俊이 안정된 군대생활, 그리고 첫휴가.
기도.
18236 1997. 1. 11 (토)
건설공사 외주기성 6건의 지출품의.
2억이 넘는 돈인데 호출이 없는 걸 보니 Sh 씨의 결재를 통과한 모양이라 마음이 놓인다.
요즘 그는 많이 조용한데 그게 감정적 소강상태가 아니라 이성적 점잖음이면 좋겠다.
개정된 노동법.
정부로서는 필경 해야할 것을 한 모양이지만 노동계에서는 야단법석.
그 야단법석에는 순수한 동기만이 작용하는건 아닐 것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밥그릇 싸움의 갈등 구조도 있음직.
이 나라에서의 명분이란 흔히 밥그릇 싸움을 위장한 修辭일 뿐.
그제 CBS 에 인터뷰하는 노동운동가 마누라의 말인즉슨 "김영삼 그사람, 노동자의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
나는 속으로 그 마누라쟁이를 쥐어 박는다.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 진정 구조적인 모순으로 고통받는 자들은 불루칼라 화이트칼라라는 식으로 구획하여 이분화 된 노동계급이 아니다.
고통받는 실존들은 따로 있단다, 이 여편네야.
18238 1997. 1. 13 (월)
일요일.
英이의 차.
앞좌석 英이 옆자리에 내가 앉고, J는 뒷좌석 앉다.
예전 내가 녹음한 팝송의 테이프를 울리며 세식구 차를 달린다.
부산에 몇십년 살면서 모처럼 가보는 동네들, 광안리해변, 달맞이 고개, 송정을 지나 달린다.
비 흩뿌리는 차창 밖 정취에 마음은 시나브로 젖는다.
청사포 횟집.
영도보다 비싼 회를 먹는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휴일 한나절 俊이 없는 세식구의 단란함.
英이는 직장을 옮겼다.
'JH이벤트'에서 'SIJIB'으로.
18239 1997. 1. 14 (화)
A회장의 부인이며 사장의 모친인 할머니 돌아 가시다.
사람 좋은 시골 할머니같은 인상이셨는데.
'자기최면' 진도는 더디 나가고 있지만 꼭 활용할 참이다.
이동도서관.
대학가 우스개 얘기들을 모은 서정범 '너스레 별곡'과 마이클 클라이튼 '다섯환자' 빌리다.
전자는 俊이에게 들려줄 우스개 소재를 베껴쓸 요량, 俊이는 이미 모두 알고있을지 모르겠지만.
俊이, 벌써 자대 배치가 끝났을 법한데 소식이 없다.
18240 1997. 1. 15 (수)
오전에 여사원에게 50만원 찾게 하여 봉투에 넣어 한무리의 부서장들, 승용차 나누어 타고 공원묘지.
영락공원- 시에서 운영하는 공원묘원과 화장장 그리고 장례식장.
드넓은 터에다 잘 만들어 놓았다.
현대식 건물에 잘 꾸며 놓은 조경, 편의 시설도 널찍넓직하다.
사장 모친, 서민적 풍모의 노인이었는데 83세의 나이로 영감님보다 먼저 가다.
俊이 소식이 없다.
그야말로 뺑이를 치고있는겐지.
18241 1997. 1. 16 (목)
俊이게서는 도시 기별이 없다.
사단을 거처 연대까지 떨어진 것은 알겠는데 정확한 소속을 알수없으니 녀석에게서 연락 오기전에는 편지 한통 보낼수가 없다.
나는 전방에 근무하여 본적이 없으니 알수 없으되, 들은 풍월로 유추해 보건데 전방의 포병이란, 나의 예전 후방 육군병원의 2,4종계 보직처럼 그렇게 할량한 것은 아님은 분명하다.
더구나 쫄병중 쫄병임에랴.
눈은 키만큼 쌓였을텐데.
편지 한통 쓸 틈없을 만큼 뺑이를 치고 있는 것이다.
새파랗게 시린 손을 호호 불면서 이리저리 뛰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면 안스러움에 가슴이 시리다.
KH호 과장, 석사논문 통과되었다.
'선박용 디젤기관의 NOx 배출물 생성과 규제에 관한 조사연구'
인쇄된 논문집을 한권 주는데 그 발문에다가 나에게 감사드린다는 글을 써 나를 부끄럽게 한다.
18242 1997. 1. 17 (금)
조카 彦이 첫휴가.
어느새 6개월이 지나 彦이는 첫휴가를 나왔다.
俊이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제 어미와 통화.
전해들은바, 목소리는 잔득 감기에 잠겨있고, 급히 당부하는 말은 아무것도 소포를 보내지 말고 편지도 자주 하지 말라는 얘기다.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최말단 쫄병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나는 전화 내용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
어서 이 겨울이 지나고 일병 계급장을 달아라.
강원도 양구군 남면 청4리 사서함 106-15
전투지원중대 1소대 이병 李承俊
우편번호 255-810
18243 1997. 1. 18 (토)
Sh씨, 요즘 무척 조용하다.
새해, 무언가 새로운 심경으로 경영방식의 변화를 시도하는 마음이셨으면 좋으련만.
P상무는 건설공사에 열중하면서 때로 H이사에게 영향력을 과시하려 하지만 그 기세는 예전에 비하면 반으로 꺾였다.
H이사는 지엽적인 문제에 잔소리만 늘고.
그리고 나의 근무태도도 지극히 소극적으로 바뀌어 버렸다.
꼭 해야 할 사안만 손을 대고 그 이외에는 손 대려 하지 않는다.
이른바 복지부동- 일 안하고 설치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이고 눈에 띄지 않으면 일단은 편하니까.
요즘 명예퇴직이다, 황당퇴직이다하여 회사를 그만둔 대기업 간부들,
라디오에 출연하여 토로하는 그들의 현실.
다른 쪽으로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평생직장이겠거니 하고 방심하는 사이 부장,차장,과장으로 쫓겨난 사람들.
퇴직금등을 털어서 시도해 보는 소규모 점포 장사.
그러나 언제 그들이 장사를 한번 해보았던가.
실패하여, 택시운전, 도장파기기술배우기등을 전전...
점점 마음들은 퇴락하여 예전의 명예니 자존심이니 하는 물건들은 고리짝 들어간지 오래다.
슬픈 얘기다.
이제 누가 직장이라는 곳에 애정을 갖으랴.
앞으로는 직장에서 의욕이니 성실이니 동료애니 애사심이니 하는 추상적이고 인간적인 요소는 죄 배제되고 시스템공학적인 요소만이 기업을 지배하고 이끌 것이다.
俊이에게 편지 쓰다.
18244 1997. 1. 19 (일)
토요일.
英이는 대학 친구와 약속있어 빠지고, J와 함께 시내나가 피자 사들고 어머니께.
엘리베이터 수리중이라 8층까지 헉헉거리며 올라간다.
노인네가 고층 아파트를 어찌 오르내릴까.
조카 아이들 없는 집안.
초인종을 누르니 망팔의 노인과 오십줄의 가시버시는 모두 게으른 낮잠을 즐기다가 문고리를 딴다.
彦이는 만화방, 대학들어간 哲이는 한창 신날때라 외출중.
어머니, 밀양의 병원에 가끔 다니시는 것이 즐겁다고 하고, 형의 통풍도 호전되었다고 하여 마음이 밝아진다.
나중 돌아 온 彦이는 22사단 해안초소 근무.
오히려 몸무게가 1KG더 불었다고.
俊이와는 편지를 교환하는 것 같아 그런 사촌끼리의 정이 반갑다.
18247 1997. 1. 22 (수)
올겨울 초, 독감백신을 맞았는데 그만 기침이 기습하였다.
필경 이것은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 아닐 것.
일종의 알레르기 아니면 천식?
'자기최면'을 읽으니 알레르기 같기도 하다.
"알레르기란 마음의 증상.
어떤 감정상의 커단 경험이 감기기침을 만들수도 있는데, 기침한다는 감기의 증상은 우는 것의 모방이거나, 기침 콧물 가래같은 것들은 신체로부터 무엇인가를 분출하려는 시도일수 있다.
어쩌면 하기 싫은 것으로부터 해방시킬 목적으로 이른바 꾀병이나, 동정으로서 나타날 수도 있다.
천식은 만성적이거나 단순한 불안일수 있고 자세히 관찰하면 평소와 다른 행동과 습관이 천식 발작중 보여지는데 호흡은 고정된 비율이고 발한과 빠른 맥박 경련 따위의 불안증상이 나타난다.
심리학자는 천식을 억압된 울음이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난 천식에 걸린 사람들은 어머니에게 집중된 갈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어떤 시절로 돌아가 보면 그 당시의 억제된 울음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새벽의 고요속에 조용히 앉는다.
추를 이용한 이데오 모타법으로 나의 잠재의식에 질문을 던져본다.
그리하여 나의 기침은 내가 서른살 무렵, 형의 신혼때 보생의원 5호실에서 형의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가 어머니께 충격적인 섭섭함을 당하였을때 사건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그 때의 억압된 감정이 내 기침의 원인.
나는 계속하여 잠재의식에게 질문을 던진다.
대답인즉슨 나는 나의 변형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할수 있으며 그런 유아적인 원망감정 따위는 충분히 이겨낼 능력이 있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리고 이제 늙은 어머니에게 더욱 성숙된 사랑으로 접근할수 있다고 추는 내게 대답하여 준다.
그리고 불을 꺼 어둠에 잠겨 기도하다.
성숙함을, 이 감정모체에 주님의 성숙한 사랑을 담아주십시오.
우리 관계에, 모든 관계에 성숙한 사랑을 끼처주십시오....
이사야 40장 2절.
18248 1997. 1. 23 (목)
종일 기침과 미열에 시달린다.
왼편 귀와 어금니를 연결하는 무슨 통로가 있는 것 같은데 그 기관도 아프다.
그러나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눈을 감으며 육체의 근육들을 이완시키는 작용으로 기침이 다스려 질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단지 잠시 동안이라도 마음의 고요한 평정을 지속시키는 것, 자기최면 이랄 것까지도 없는 것.
그렇다. 내 기침은 틀림없는 心因性이다.
퇴근하여 俊이 책상 앞 앉아 이데오 모타를 한다.
어머니를 유아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 YES.
그래서 자기처벌의 무언가 있지? YES.
기침은 바이러스에 의한 것인가? NO.
기침은 심리적인 문제때문이지? YES.
기침발작은 참지 못하는 건가? NO.
참을수 있어? YES.
참기에 힘든건가? NO.
쉬운거야? YES.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한 28살의 재일교포 여성, 유미리.
그녀의 인터뷰.
-당신은 무엇을 중시하느냐?.
-'없음'을 중시한다.
-부모의 이혼을 어떻게 생각하였느냐?
-어렸을땐 용서할수 없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 부모란 용서하고 안하고의 대상이 아님을 알았다.
-무엇을 계속 쓰고 싶은가?
-게속 '가족'에 대하여 쓰고 싶다.
부모란, 자식이란,
용서하고 안하고의 대상이 아니다.
18250 1997. 1. 25 (토)
금요일.
회사를 쉬다.
俊이에게서 편지라도 한통 왔으면.
씩씩하게 군대 생활 잘하고 있다는 소식 하나면 그것으로 우리 가족 큰 활력을 얻으련만.
18251 1997. 1. 26 (일)
어제 英이 생일.
졸업한 학교로 찾아가 동아리 선후배와 늦도록 어울리다가 늦은 시각 귀가.
俊이에게서는 소식이 없다.
俊이 친구 수만이로부터 J가 전화 받았다.
그 아이는 俊이보다 훨씬 먼저 입대하였는데 역시 전투지원중대의 4.2인치 박격포.
그 병과의 쫄병때의 고생은 대단한 모양이다.
간밤의 꿈에 俊이 등장, 훈련소 마치고 수십군데의 배출대를 전전한다. 육군의 모든 보직을 섭렵하는 俊이는 아비를 원망한다.
아, 공연히 M교의 자형인가하는 허풍선이의 솔깃한 말만을 믿고, 경박스레 俊이에게 미리 풍선을 띄었으니.
그런데 결과는 녀석이 제일 우려하던 바로 그것, 박격포에다 최전방 전투사단의 전투지원중대라니!
지껄이지 말자, 구차하다.
俊이는 잘 해낼것이다.
俊이에게 편지 쓴다.
보낼 주소는 모르지만.
18252 1997. 1. 27 (월)
제프 브리지스 주연 '공포탈출'
심리적인 주제로 다소 난해하게 만든 영화.
비행기 불시착 순간 극한의 공포 속에서 획득하는 자유(?)
나는 지엽적인 부분에 관심이 쏠린다.
영화에 출연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참 잉글릿 버그만과 많이 닮았구나 하면서 보았는데 영화 끝나고 흐르는 자막의 캐스트를 보니까 이자벨라 롯세리니, 바로 잉글릿 버그만과 로베르토 롯세리니 부부의 딸이다.
꼭 옛날 친하였던 누군가의 딸을 길에서 발견한 기분.
英이는 회사 사람들과 경주행.
J와 나는 어디선가 풍겨오는 봄바다의 냄새를 맡으며 태종대를 산책한다.
호젓한 숲.
푸드득 날아오르는 이름 모를 예쁜 새 한 마리.
목련은 이제 움을 틔운다.
그리고 바다는 초록빛으로 누워 있다.
TV 대담 프로.
작가 이호철과 대담하는 중국 연변의 조선족 작가 '김학철'
여든 넘은 노작가의 풍모에서 자본주의의 사람에게서는 맡을수 없는 진솔한 인간의 냄새를 맡는다.
인간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고 결코 사회주의의 이상을 잃어버리지 않은 꿈결같은 얼굴이다.
그가 좌절하는 것은 스탈린, 차우체스쿠, 김일성, 모택동의 독재가 지배하였던 일시적인 사회주의 현상이었지, 공산주의의 이상이 좌절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신중현의 다큐멘타리.
한 분야에 미친 사람에게는 자기세계의 확신에 빛나는 아름다운 얼굴이 있다.
俊이게게서는 여적 소식이 없다.
기침은 소강.
왼쪽 귀는 여전.
18253 1997. 1. 28 (화)
부차장회의 총무직을 기획실장 OS철 에게 인계하였다.
공연히 신경 쓰였는데 벗어 버리니 시원섭섭.
방어진 조선소 J사장님 부탁한 INSP. ITEM 우송.
노동법 이슈는 뜨아해지고 한보 이슈의 열기가 뜨겁다.
말년 김영삼 인기는 곤두박질.
그의 둘째 아들 김현철도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과연 한보특혜에 청와대 입김이 들어갔나?
왼쪽 귀의 아픔은 참 새로운 아픔이다.
필경 기침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요상한 경험이구만.
俊이, 잘 해내고 있을 것이다.
18254 1997. 1. 29 (수)
어제 저녁 俊이에게서 전화, 근 20일만에.
혹한 훈련중이라 잠시의 틈도 낼수 없었던 모양.
누나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전화였는데 녀석의 목소리는 감기기운 없이 씩씩하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마음이 어찌나 좋은지.
작년에 서울대학교 인문계 수석합격한 '장승수'라는 젊은이가 쓴 책 '공부보다 쉬운 것은 없었다'를 읽다.
별볼일 없이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그는 노가다등 거친 잡일을 섭렵하며 생활하다가
어느날 문득 공부의 재미에 빠지게 되었다.
참 대단한 젊은이.
공부재미- 아, 공부하는 재미.
젊은 나이에 그런 행운이 찾아온 그는 행운아다.
하고싶어 하는 공부인데 공부가 안될 리가 없다.
그 공부로 성공하지 않을 리가 없다.
내게 좀더.
英이에게 俊이에게
제대하면 俊이에게도 이 행운이 있기를 간구한다.
18255 1997. 1. 30 (목)
제법 차갑지만 바람이 없어 그다지 고생들은 하지 않고 SB-428 진수작업.
11시 30분, 2선대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나는 환생을 믿지 않는다'
미국 저명한 정신과 의사가 한 여성의 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최면의 연령퇴행으로 그 신경증의 원인을 밝혀보려 하였더니, 전생의 기억들이 나온다.
몇만년전부터 수십번 윤회한 삶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그리고 죽음을 맞고 다시 태어나기 위한 그 빛의 공간에서 만났던 지혜자들의 메시지를 전한다.
허황한 내용.
그 기억이 전생인지, 심리가 만들어낸 환상인지 어떻게 알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단호한 부정은 유보하자.
'티벳 사자의 서'.
그 책의 발문을 쓴 융은 순 엉터리는 아니지 않은가.
나 스스로도 느끼는 때로의 기시감, 아득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감정의 편린들....
유보.
나의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무슨 말씀이 계실 것이다.
꿈- 시골 거리, 초등학교, 큰 목욕탕, 자수성가한 노총각 선생.
18256 1997. 1. 31 (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지 못하고 노오란 망상은 미망의 밭을 헤메인다.
여자의 월거리처럼 아무 이유없이 찾아오는 이런 상태.
자기최면 기법은 모름지기 이런 경우 필요할 것이다.
스스로의 기분을 다스린다는.
그렇게 스스로 다스린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편만한 영적인 보편, 그 분의 손길이기도 할 것.
'티벳 사자의 서'에서 해설을 쓴 융.
"우리의 철학과 신학이란 단지 주장을 하고 설명을 하고 방어를 하고 비평을 하고 논쟁하는게 고작일뿐. 그것들을 가능케 한 그 '마음' 자체에 대하여는 토론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그것이 모두의 은밀한 합의사항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 속에는 신이 내재해 있다.
아, 이러한 개념들은 나의 하나님과 정녕 배리되는 것일까?
불교도 속에서 진정한 기독교의 영혼을 발견하거나 또는 그와 반대.
도그마는 파괴될지언정 예수그리스도만은 영롱하게 살아 있는 것, 보편 편만한 예수님,
프란치스코에게서 인도적인 영혼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모독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