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57 1997. 2. 1 (토)
현대문학상 수상작품 신경숙 '깊은 숨을 쉴때마다'
늘 읽고 싶었던 신경숙이었다.
근로계급에서 출발한 소설가라는 색다름이 호기심을 자극하였기 때문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신경숙의 소설에서는 어떤 경향문학의 냄새는 배어있지 아니하다.
여린 감수성으로 차분하게 인생을 바라보는 눈.
낮에는 여공으로 일을 하며 밤에는 산업체 부설 고등학교에 다니던 한 소녀의 투명한 눈에 어린 것은 문학의 푸르름이었다.
俊이 군대생활중, 아비는 승준이에게 어떤 교육방식을 생각한다.
俊이의 군생활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기억법과 자기 컨트롤법을 가르친다는.
편지로하는 통신강의.
재미를 유발시켜 가면서 스스로 머리를 쓰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유도하여 제대후 반드시 유용하게 쓰일수 있는 무엇을.
이런 아비의 뜻을 俊이에게 쓰다.
18258 1997. 2. 2 (일)
토요일 정오 지나 회사를 나와 대신동 동일교회로.
설계부 KJ헌 의 결혼식, 회사를 떠난 설계부 면면을 만난다.
교회에서의 결혼식이란 예식장이라는 저자바닥의 결혼식과는 격이 다르다.
코랄의 찬송가를 들으며 일찍 빠져 나온다.
맥주를 한아름 사들고 돌아와 마루에 퍼질러 앉아서 J가 솜씨를 발휘한 닭찜을 안주로 마신다.
시나브로 몽롱해져 가는 속에서도 임권택의 '축제'를 본다.
박철수의 '학생부군신위'와 흡사한 초상집이라는 소재의 영화.
죽음의 아름다움, 그것을 동화처럼 영상으로 담고자하는 감독의 의도는 잘 표현되었다.
늙으면 어린아이가 된다, 그리하여 죽음이란 자꾸 어려져서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축제의 장이다.
영화적으로는 '학생부군신위'가 낫지 싶지만 그 전하는바 감독의 메시지는 서로 다르다.
잘 만든 영화다.
오늘 다시 한번 더 감상해야겠으나 단지 하나, 주인공 안성기는 미스 캐릭터였다.
안성기가 포커스에서 벗어나 있을때 그의 눈동자를 보라.
눈동자가 완전히 풀어져 있다.
안성기에게는 심리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장의 절차와 그 내용을 기억술에 의하여 외워 버린다.
속굉, 임종, 고복(초혼), 사자 상차림, 부고 쓰기, 發喪, 명정쓰기, 염, 입관, 영좌(빈소차리기), 초경, 삼경, 발인, 천구, 노제, 하관, 실토, 반혼, 초우제.....
俊이에게 편지 띄우다.
18259 1997. 2. 3 (월)
션 코넬리,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 '더 록'.
예전 악명 높았던 감옥 섬, 알카트라스.
헐리웃의 물량과 아이디어와 제작기술.
엔터테인먼트는 그득하지만 조선 족속인 내게는 '축제'에 비하면 훨씬 재미도 감동도 없는 영화다.
J와 태종대를 한바퀴 돌다.
그리고 J는 英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일전 노동조합에서 산 압력밥솥 가지고 사직동으로.
일요일 오후, 나는 TV 화면에 눈동자를 고착시키며 전일 남은 맥주를 홀짝인다.
18261 1997. 2. 5 (수)
D동 조선의 부도.
부산 경남일대의 조선 기자재나 용역업체들은 연쇄 부도로 야단.
KO훈 이도 7천여만원, K.P.E 김사장도 1 억원이 걸려 있다.
쌍용중공업같은 대기업은 몇십억이 물려 있고.
D동 조선, 막대한 설비투자로 일신된 현대적 면모를 갖춘 조선소를 꿈꾸며,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처남이라는 사람이 세양선박이라는 조그만 해운회사의 계열사로 인수하였던 것인데 그 시설자금을 몽땅 유용해 버렸단다.
한보그룹- 십수년만에 국내 14위의 재벌로 성장할수 있었다는 기적은 아마 한국이니까 가능하였을 것.
그러나 지금은 독재개발의 시대가 아니다.
작금의 상황은 한보철강, 당진제철 따위의 큰 건에 신경 쓰느라 D동 조선에는 신경을 기울일 여력이 없어서 구제도 막연한 모양이다.
나는 우리 회사가 D동 조선을 인수하면 어떨까하는 강렬한 희망을 가져본다.
그리고 이런 뜻을 P상무와 H이사에게 피력한다.
오너에게 한번쯤 어필할수도 있는 건이 아닌지.
그러나 이런 의견은 오너의 생각 범위를 넘는지라 지레 겁을 먹는다.
18262 1997. 2. 6 (목)
俊이에게서는 여태 편지가 없다.
일주일전 전화 한통한 이후로는.
딴에는 홀로 극기를 하고 있을것이다.
설 날까지는 무슨 연락이 잇겠거니하고 기다리는 수밖에.
퇴근하여 마루에 앉아서 녹화된 중국영화 '붉은 가마'를 본다.
개방화되는 과정의 중국의 현실, 가난한 마을의 풍경화를 깊이있는 영상으로 그렸다.
살이의 형식은 사회주의의 모습이지만 이데올로기는 어디에도 없다.
그냥 삶의 현장, 봉건적 관습이 지배하는 살이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예고된 가운데 실제 예고한대로 살인이 벌어진다.
그 이유는 신부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
예전 읽었던 마르케스의 소설이 생각나는 소재의 영화다.
새벽 3시.
기도.
차마시기, 성서읽기, 자기최면, 그리고....
기도.
18263 1997. 2. 7 (금)
설 연휴.
예년같으면 죽네 사네하여도 설날이면 선물상자들이 오가고 무언가 없어도 풍족한 듯 폼들을 잡건만 올해는 확실히 다르다.
俊이에게는 연락이 없다.
뒤척이며 잠을 청하고 쉽게 잠이 찾아주지 않아 자기최면을 구사하여 잠을 청한다.
혼곤한 잠.
3시30분 깨어난다.
생일, 어언 만 50년이다.
그동안 내가 만들어 놓은 생명 두줄기 있으니 英, 俊.
그런데 지금 俊이는 멀리 추운 강원도 땅에 있다.
일단 목욕을 하고 체릴 스튜더가 부르는 슈베르트를 울린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신명기를 읽고, 불꺼 어둠에 잠겨 기도.
살아계신 분의 손길.
사랑과 온유와 중심.
俊이에게 새벽의 축복을, 긍정과 낙천을, 그리고 아비가 저를 사랑하듯이 저도 아비를 사랑하라는...
18264 1997. 2. 8 (토)
생일을 맞은 남편을 향하여 끊임없이 화를 내는 여자.
그 이유는 내가 술을 마신다는 단지 그것 하나.
어머니를 뵙고 문화회관 이승은 인형전 '엄마 어렸을 적엔'을 보고 英이의 옛 대학 근처에서 점심 먹고 영도 돌아와 할인마트 들러 산 맥주.
그것이 화근이었다.
진작부터 볼이 부었던 J는 그예 자동차 안에서 터뜨린다. 짱알짱알...
그예 무당짓을 뒤집어 쓰고, 나 또한 무당짓을 뒤집어 씌우고 차문을 박차고 뛰어 내린다.
여성이라는 단어는 내 운명에는 있지 아니하다는 절망감.
끊임없이 화를 내는 한 마리 증오덩어리.
그런데 그 증오는 타당한가.
그 증오는 과연 호모 사피엔스의 것이 맞는가.
원시인의 것은 아닌가.
LD찬 씨의 집, 2층.
술취하여 옷입은채 쓰러져 잠든 나를, 행여나 불편할세라 조심스레 들락거리는 형님 한분.
영문도 모른채 그는 생전 외박이라고는 모르던 나를 그저 걱정스레 바라볼 뿐이다.
설날 새벽, 태종대 LD찬 씨 집을 나서 어둔 영도거리를 걷는다.
망연하게 걷다가 목욕탕 불빛을 보고 찾아 들어가 옷을 벗고 빈 탕 속에 몸을 잠근다.
그러나 8시 넘자 명절날 어쩔수없이 들어서는 집이라는 곳.
18265 1997. 2. 9 (일)
어미는 폼잡고 안방에 드러 누웠고 英이 모는 차타고 그래도 사직동 처가는 간다.
돌아오는 차 속, 옆죄석의 아비에게 내 쏘는 싸늘한 냉기는 제 어미와 흡사한 폼.
무얼 아는가, 딸아.
무얼 네까짓게 알수 있단 말가.
다만 명절인데.
소식없는 아들 놈이 안타까운 명절...
홍곤히 젖어 명색 생일이며 명절을 내 의식과 함께 쓰러뜨린다.
18266 1997. 2. 10 (월)
곤혹스러움, 황당함, 절망의 설과 생일은 전일로 흘러갔다.
제 어미를 피해자로 생각하여 아비에게 뻣뻣한 英이는 교회에 가고 나는 집을 나선다.
시내, 시내는 휴일이라 더욱 붐빈다.
소설 염상섭 '삼대'.
비디오 테이프 '트위스터' '인디펜던스 데이' '디자이어'
토네이도란 직경이 1 MILE이나 되는 회오리 바람. 놀라운 자연 현상이다. 거기에 드라마가 얽히고.
그그저께 두 무당이 춤추던 날.
문화회관 이승은 인형전에서 산 두권의 책.
정치학교수 최명이 쓴 '소설 아닌 임꺽정'과 인형전의 카타로그.
최명의 책은 참 쏠쏠한 재미가 넘친다.
박학한 동양 고전의 지식을 훔쳐보는 맛도 그럴싸하고 임꺽정으로 한편의 걸직한 문명비평서를 읽는 재미도 좋다.
수호지등 중국 고전과 당시의 사회 계급 문화 풍속 사상등 온갖 것을 누비고 있다.
오직 '조선적 정조'라는 벽초의 암시로서. 조선적인 것 들을 누비고 다니는 최명 교수.
꿈- 박정희, 어린 박지만, 세라복 박근혜와 박근영, 나는 애매한 역할인데 그게 묘하다..
18267 1997. 2. 11 (화)
연휴의 마지막 날, 俊 방에 비디오 들여놓고 영화 한편 재미있게 본다.
'INDEPENDANCE DAY'
외계인의 지구 침공이라는 고답적인 소재를 아주 미국적으로 꾸며 놓은 영화.
뉴프론티어 정신, 서부의 정신, 남자다움, 정의, 용기, 정의, 우정, 사랑, 의무, 책임...
미국적인 덕목은 넘친다.
풍부한 화면과 적재적소에 박아놓은 이러한 덕목들이 때로 콧잔등을 시큰하게도 만든다.
미국문화, 이만한 규모와 짜임새로 융단 폭격을 하는데 어느 나라라고 당해낼수 있으랴.
국산영화 '48 + 1' 화투 얘기다.
영어로는 FLOWER CARD.
탓짜들의 얘기, 노름...
김명곤 박상민 출연.
J는 안방에 칩거하여 며칠째 싸늘한 빙벽.
그런데 늘 나는 먼저 지고야 만다.
왜일까.
J가 없으면 그렇게나 불편해서일까.
아니다, 아니다.
나는 나약한 평화주의자인 때문이다.
J는 스스로에 대하여 한조각 되씹는 법이 없으나 나는 부단하게 되색임질을 하여 필경 나약한 평화주의자로 돌아오지 않으면 스스로가 견딜수 없다.
18268 1997. 2. 12 (수)
연휴 끝나다.
날씨는 돌연 쌀쌀.
한보 정태수 총회장의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
그의 뻥긋하는 입놀림에 온 정치판이 전전긍긍.
한줌 도덕적 책임을 표명하고 나서는 인사는 그 어디에도 없다.
대통령이라는 작자 하시는 말씀인즉슨.
"장관이 권유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진 제철소 기공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런 말씀이 과연 대통령이라는 사람의 할 말씀인지 우습지도 않다.
18269 1997. 2. 13 (목)
이승은 허헌선의 인형전, '엄마 어렸을 적엔'
그것을 보고 오는 길.
아이러니칼하게도 가족이라는 애틋한 무엇을 보고나서,무당짓의 선춤을 춘 우리이지만 그 인형전이야 얼마나 사무쳤는지.
옛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던 인형전.
가난하였지만 정다운 얘기들이 소롯이 형태를 띄고 전시되어 있었다.
모든 인간들은 정다워야 한다는 보편적 가치가 지배하였던 시절의 얘기들.
물질적 풍요은 있으면 좋은 것, 그러나 그것이 없더라도 따스울수 있어야 하는 관계여야 한다는 당위성.
그 따순 정들... 정들...
잠시 운다.
점입가경의 한보.
근원적으로 정치란 다라울수밖에는 없는 숙명인가보다.
俊이에게서 편지.
형식적이고 간단한 내용, 검열인가.
그러나 한 사람의 군인의 체취를 거기서 읽는다.
18270 1997. 2. 14 (금)
나에 대한 Sh씨 의 독침은 거두어졌는지,
K.P.E 기성건, 부전지의 간인관계로 나를 부르지 않고 AG동 불러다 잔소리.
회사에는 지금 경영이라는 것이 없다.
어떻든 고정비를 카바하는 업무량은 확보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손익분기점을 뒤로 하는 원가절감과 생산성 향상으로 이익을 창출해야지.
그런데 당장의 비용절감, 기능직사원의 잔업통제, 당장 나가는 잔업수당만이 크게보일뿐인 경영자의 인식이다.
상근때의 임금성금액이 더 높은 사실을 왜 인정치 않을까.
상근의 원가에는 연장근무에 비하여 부가되는 부담이 더 많은데.
중식이다 작업복이다 복리후생성 급여다...
무능한 사장, 독선의 Sh씨 .
그리고 손비비기의 임원들...
俊이에게 편지 쓰다.
자기최면으로 수면을 유도하는데 방해꾼 하나.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왼쪽 아구 어딘가의 통증.
귀도 아니고 이빨도 아니고 잇몸도 아닌 그 어름의 부위.
새벽 목욕 기도
18271 1997. 2. 15 (토)
북한의 거물.
철학자며 주체사상의 철학적 이론을 세웠다는 황장엽.
북경에서 한국영사관에 망명을 요청하였다.
그의 망명은 쏘련에서 마르크스가 망명하는 격이라느니하고 세계가 야단이다.
영민한 눈매와 준수한 지성인의 면모가 풍기는 모습.
일흔 넘은 그가 동지와 가족들을 모두 버린채 다른 나라도 아닌 남한땅으로 망명을 결심한 그 뒤에는 범부로서는 상상못할 고민과 원대한 어떤 뜻이 있을 것이다.
그의 기록 곳곳에 배어있는 고뇌의 흔적들을 읽는다.
중국은 곤란한 지경에 빠지고 미국 역시 황장엽의 망명은 썩 맞뜩치는 않다.
무엇보다 자식을 전방에 둔 내게는 이런 식으로 긴장이 고조되는 것이 반가울 리가 없다.
남북의 위기조짐이 있을때마다 영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행여나 북한의 도발이 있으면 어쩌나?
비상이 걸리면 군무는 고달프게 마련이다.
이 사건으로 한보 수사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눈치.
국민은 모두 원한다.
확 까발려서 책임질 놈은 책임을 지고, 가둘 놈은 가두고 하여 이를 계기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개혁을 거부하는 때묻은 몸짓에게는 어떤 명분의 변설 기회를 주지 못하도록 임기말년에 취임초와 같은 플레이를 기대하는 것인데 김영삼 그도 역시 뒷심없는 속물짜리에 불과하다.
올 연말 대선에는 정말 전혀 새로운 인격이 혜성처럼 나타나야 하는데.
며칠째 술 마시지 않는다.
요즘 내 잠재의식을 신뢰하고 그것을 느낀다.
토요일, 기도.
18272 1997. 2. 16 (일)
英이는 무주 스키장.
무슨 부르조아의 딸처럼 제 돈으로 겨울 스포츠를 즐기려 간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의 제 회원 관리로 가는 것.
18273 1997. 2. 17 (월)
'이너써클'
스탈린 정권의 핵심부.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로 분한 톰 헐스가 크레물린의 영사기사로 권력 핵심부에 접한다.
스탈린은 당시 인민에게 있어서 전지전능한 신이었으며 자애로운 아버지고 사랑 가득한 천사였다.
주인공 '산신'에 있어서도 아내보다 더욱 사랑하는 대상은 스탈린.
조작된 우상.
스탈린은 레닌의 순수 이상을 오염시키고 말았다.
스탈린주의는 김일성 김정일로 이어져 황장엽의 망명으로 이르게 된 것.
스탈린이 죽었을때 미라가 된 그의 유해를 보려고 인민들이 몰려오는 통에 1500명이나 압사하였다는 터무니없는 사실.
집단최면을 구사하는 권력집단의 가공할 조작술.
꿈- 부산역, 어린 俊, 유격훈련하는 부산역, 역장실, 이길선, 최영희, 손철수
목욕하고 여호수아.
18274 1997. 2. 18 (화)
俊이 제어미게서 전화하여 면회를 열망한다고.
강원도 양구땅.
사무실에서 전화통을 쩌렁쩌렁 울리는 Sh씨 의 악다구니.
GJ수 모친 별세.
77세.
늦은 오후 P상무의 차를 타고 남천성당으로 문상 다녀오다.
혼잡한 도심, 정체 정체.. 차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어간다.
대연동 남천성당까지 근 2시간이 걸리다.
거대한 성당 건물, 지하에는 전문적인 장례식장까지 갖추었다.
18275 1997. 2. 19 (수)
부서장 회의.
기획, 기술영업, 영업, 구매, 수리선부 부서장들의 의견은 모두 일치한다.
원가상 외주 단가가 과연 6만 7천원인가.
외주 시장성으로 그 단가는 타당한가.
왜곡된 외주 의뢰공수는 타당한가.
직영의 8만 4천원 단가와 외주 6만 7천원의 단가를 단순 비교하여 직영의 잔업을 억제하고 외주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정책이 과연 타당한가.
상근시의 1시간과 잔업시의 1시간은 과연 원가적으로 어느 쪽이 과비용인가.
이런 사안에 대하여 나와 의견 일치.
다만 한사람, Sh씨의 고정관념을 깨지 못하여 이렇게 비효율적인 탁상공론을 늘어 놓는 부서장회의라는 것.
그 Sh씨라는 사람, 그가 귀 기울이는 사람은 오직 하나 Hw부장 뿐이다.
그 외에는 누구도 의견을 개진할수 없는 분위기.
회사는 멍들고 있다.
俊 면회를 계획하고 그 생각에 젖어있는데.
J의 말인즉슨, 주위 군대보낸 집들에서 들은바, 외박사병도 모두 귀대시키는 상황이라고.
이번 토요일 면회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미 편지를 보내 녀석은 기대로 들떠 있을텐데 정국이 이토록 어수선하구나.
비상이 걸린 군대.
김정일씨여.
진정하시고 우선은 인민들 먹여 살릴 일에 골몰하시고 도란도란 사이좋게 지내 봅시다.
통일문제일랑은 俊 제대한 연후에나 우리 진지하게 얘기해 보기로 하고.
여호수아.
여호와, 그는 정말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18276 1997. 2. 20 (목)
일기예보를 들어보면, 부산이 영하 1도 쯤 되면 춘천 쪽은 보통 영하 10도를 밑돈다.
J나 英이나, 줄곧 남녘에서만 겪는 겨울이니 그 추위를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정능, 문고리에 손이 쩍쩍 달라붙고, 방안의 자리끼는 아침이면 꽁꽁 얼어 붙는다.
골목을 휘몰아치는 칼날 바람은 어떻고.
쫄병 俊이는 그보다 더 한 추위 속에 닫고 뛰고 하는 것.
얼마나 면회를 고대할까.
18277 1997. 2. 21 (금)
출근하여 사무실 앉아있는 오전.
찾아오는 노오란 환상, 그 상상의 미망에 잠식 당한다.
저 밑바닥 리비도의 몸부림인지.
내가 이데오 모타에 의하여 묻는 대상은 이른바 슈퍼 에고이고 진짜 적나나한 내 자신의 무의식은 아닌듯.
유한평의 개념은 좀 모호하다.
그러나 내게는 나를 다스리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갈수록 업무의 의욕은 떨어진다.
나는 이제 전형적인 적당주의, 좀비 족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아무도 지적하여 질책하거나 새로운 동기를 부여해주는 사람도 없고 단지 AG동 을 비롯한 아래 직원들만이 이런 부서장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을 것.
그들 대하기도 이제 부끄럽다.
저녁.
俊이에게서 전화.
내 편지 받고 기대에 차서 전화한 것이다.
그 목소리에는 면회의 열망이 가득.
그러나 다음 다음 토요일인 3월1일 면회키로 한다.
미치코 우찌다가 연주하는 쇼팽의 소나타.
쇼팽의 정조는 누구나 척 들으면 그인줄 안다.
18278 1997. 2. 22 (토)
염상섭의 '삼대'
한국문학의 리얼리즘의 선구자라는 횡보 염상섭.
나는 염상섭을 떠올리면 수주 변영로가 한 말이 늘 뒤따라 떠오른다.
"글쓰는 횡보라서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나 술먹는 횡보라서 더욱 반갑다"라는.
그 분들은 얼마나 어울려 술들을 마셔댔을까.
호쾌한 고담준론.
횡보의 소설에서 무슨 경향적인 냄새라도 맡을양 킁킁거려봐야 맡아지는건 질펀한 살이 냄새.
일제시대의 서울, 그 때에도 고루함과 개화, 도덕 위선, 치정 갈등이 똑같이 넘실대는 세태의 살이였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더한 사회적 비윤리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하권의 종장을 읽고 있는 중이다.
18279 1997. 2. 23 (일)
토요일 12시 사무실 나와 영도 대평동쪽으로 한참을 걷는다.
영도도서관.
열람실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 어떤 이는 법전을 펴 놓고 아마도 고시공부중 인듯, 어떤이는 원서에다 밑줄을 그어가며....
나도 민법책을 펼처놓고 앉는다.
한 두시간 열중하다가 2층의 시청각실에서 영화를 본다.
개리 올드만 주연의'불멸의 연인'
베토벤은 아주 이기적인 인간으로 그려져 있다.
배경음악은 모두 내 익히 듣던 친숙한 곡들.
도서관이란 너무도 유용한 공간이다.
더구나 모든 것이 공짜이니.
돌아와 소주.
18280 1997. 2. 24 (월)
파열되는 뒷꽁무니, 홍건한 선혈 자욱.
음주때문도 아닌 것 같은데.
근래에는 독수리를 잡을때마다 첫 통과과정에서 힘들게 아팠다.
우선 변이 굵고 굳어 딱딱한 느낌.
가는 변보다 굵은 변은 좋다고 하는데 굳어 딱딱하니 탈이다.
밝은 빛의 빨간색이라 대장 쪽의 심각함은 아닌듯하여 안심은 되지만 되게 아프다.
일요일 여균동 감독의 '맨'이라는 국산영화.
컬트적, 퀜틴 타란티노의 아류.
이것저것 여러 장치와 세트를 마련하여 실험적 영상을 구사한 듯 하지만 재미는 젬병이다.
포르노적 상상력에 있어서는 나 또한 조예가 없지 아니한데, 여균동의 영화에서는 어디 하나 멋진 상상력이 엿보이지 않는다.
18281 1997. 2. 25 (화)
염상섭 '삼대' 완독.
암울한 시대 회색사상으로 일상을 영위하는 조덕기, 크리스찬을 표방하는 위선적 쾌락주의자인 그의 아버지 조상훈.
가문의 대이음을 생각하는 이조인인 대부호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의 정부였던 경애, 처녀 필순이.
俊이에게는 2월 28일 금요일날 올라가기로 작정.
그 날 SB-424 의 진수가 있지만 그런 따위 요즘 내게는 아랑곳할 대상이 아니다.
이동도서관에서 빌린 책.
단편소설집 한권, 여기에는 조성기의 소설도 들어있다.
김현철 '하고싶은 얘기, 듣고 싶은 얘기'
후딱 읽어치우는데 대통령 아들로서의 변명 나부랭이.
제 따위가 무엇이관데 이 따위 책을 내는가.
새벽.
발톱깎고 목욕하고.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기도.
18282 1997. 2. 26 (수)
P상무 사직서.
어언 30여년 청춘을 바처 그토록 열심히 뛰고 닫고 하더니 그예 그만두는 것이다.
이 곳 직장이라는 곳에서.
나와 가장 깊은 관계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첬던, 내 라인 바로 위의 사람.
단둘이 그의 방 마주 앉아 사직을 얘기하는 그의 눈에 붉은 기가 돌고 나 역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찌 되려느냐, 회사는.
나는.
마음이 영 착잡하여 일찍 사무실 빠져나와 돌아 온다.
俊이 책상 앞에 앉아 소주를 마신다.
18283 1997. 2. 27 (목)
사무실은 어수선.
내 기분도 어수선.
P상무의 떠남이 내게 어떤 파장으로 무엇이 되어서 닥칠런지.
H이사의 약한 카리스마로 거친 생산부서를 어떻게 이끌어 갈런지.
진수때마다 모아놓은 생산부 기금 4천여만원, 애써 모은 그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였는데 H이사에게 고스란히 인수인계하는 P상무.
3월3일 송별 회식키로.
나는 내일 강원도 땅으로 올라간다.
3월1일 俊이를 데리고 나와서 하룻밤을 함께 지내고 돌아올 것이다.
모든 것은 뒷전이다.
내일의 SB-424 진수도, P상무의 사직도, 추후 나의 처신도, 돌아온 다음에 생각할 내기다.
J, 들은 풍월의 상식들.
부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는 데리고 나올수 없다.. 밥을 해 먹여야한다.. 어쩌면 제 동료도 함께 챙겨줘야 할지 모른다..부대에 들여보낼때에는 전우들을 위하여 한보따리 챙겨줘야..
들은 풍월의 잡다한 상식들.
그러나 녀석에게 어미 아비의 체취를 느끼는 따뜻함 이상 윗길이 무엇이랴.
18284 1997. 2. 28 (금)
Sh씨는 말하자면 이 회사의 神이다.
무소불위하며 전지전능하다.
그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아니 그의 말에 한마디 대꾸한다는 것은 곧바로 독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그의 무소불위와 전지전능의 폼은 야시꼬움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바로 神이라면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회사일 뿐 내게 의미있는 직장은 이미 아니다.
회사를 위하여 분골쇄신 일하는 사람, 두 손 비비는 YES MAN이 아니면 하나씩 쫓아내고, 굽신굽신 무조건 옳나이다 옿나이다하는 무리만이 총애를 독점한다.
월차휴가를 내고, 어쨌든 3일간은 이 냄새나는 곳을 잊어버리자.
어젯 밤 俊에게서 전화.
3월1일, 될수록 일찍 와서 빼내 달라고.
잠시의 자유를 꿈꾸는 작대기 하나 짜리 쫄병.
어제 TV 프로, 락 음악에 미친 고등학생.
노래하고 연주할때의 그 자유와 행복감.
몸은 저절로 흔들어지고...
늙은 나도 소리소리 내지르며 미친 듯 몸을 흔들어대는 그 자유로움과 행복한 느낌은 상상할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