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85 1997. 3. 1 (토)
이곳은 양구.
부산 동부터미날에서 J와 함께 10시 30분 출발.
날씨는 무척이나 따뜻하다.
대전을 넘어서니 주룩주룩 내리는 비.
고속도로를 버스는 달리고 차창엔 김이 서린다.
원주를 지나고 홍천을 지난다.
대한민국의 어느 곳이나 도식화되고 정형화 된듯한 엇비슷한 시가지 풍경.
집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는 데에는 그곳에 살 사람들의 어떤, 삶의 방식이나 특성같은것을 논의하고 궁구하여야 한다는데,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규격화된 집이며 도시구조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의 방식 까지도 규격화될수 밖에는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시가지를 벗어난 산야의 풍광은 곳곳마다 고유한 풍경화를 연출한다.
7시간 넘어 걸린 저녁 6시가 넘어서야 춘천에 도착.
다시 양구가는 버스를 찾아 탄다.
깜깜한 밤길, 꼬불꼬불 구절양장의 산길, 첩첩산중이다.
몸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버스안에서 J는 지쳐간다..
2시간여 걸려 겨우 양구 도착.
하, 멀기도 먼 동네. 부산서 이곳까지 10시간여.
J는 그만 녹초가 되어 버린다.
여관잡아 들다.
목욕탕과 함께 운영하는 여관.
널찍한 목욕탕, 수건 비누등은 공짜로 서비스는 부산보다 윗길이다.
이제 남면 청4리 8203부대를 찾아서 아들을 보러 가야 한다.
나의 하나님께 기도, 여관의 한방.
가시버시는...
18286 1997. 3. 2 (일)
양구군에서 택시로 한 20 여분 거리.
2사단 31연대.
俊이 만나다.
껑충한 키의 녀석, 건들거리며 저만치서 걸어온다.
입술끝에는 부르튼 버짐이 있고 얼굴은 새까만 쫄병 한 놈.
위병소의 인상도 좋고 위병소까지 俊이를 데리고 나오는 소대장과 분대장의 인상도 좋다.
그동안 상상만으로는 최전방 첩첩산중의 철조망이 둘러친 그런 곳이었는데.
정말 면회오기를 잘하였다.
작년 10월 17일 입대한 이후 처음으로 영문 밖을 나와 보는 俊이.
그 해방감에 녀석은 말이 없다.
다만 행복하고 행복할 뿐.
그 행복에 겨워하는 그 모습이라니.
제 어미는 눈물을 짠다.
일절 구타는 없고 다만 훈련이 고된 모양이다.
양구군, 온통 군인들 군인들.
전형적인 군인의 도시다.
가지고 간 트레이닝을 갈아 입히고.
녀석은 장시간의 목욕.
군복을 세탁하고, 소등심을 먹이고, 아비와 당구도 한게임 치고.
노래방을 세식구 들러 소리도 지른다.
돌아온 여관방.
아비 어미 사이에 잠이 든 행복한 이등병.
18287 1997. 3. 3 (월)
참 많이도 먹는다.
초콜렛 수십개를 부대로 부터 양구군으로 나오는 택시속에서 뚝딱 먹어치우고.
등심 몇인분을 처분하고, 빵에 과자에 떡볶이에 김밥에.
끊임없이 입 속으로 무언가가 들어간다.
이런게 이른바 이등병의 먹성인가.
그토록 먹어대는 녀석인데 살은 조금도 찌지 않았다.
그리고 이 녀석은 이상할 정도로 군인같지가 않은 것이다.
말씨나 자세 어디서도 군인의 티는 없다.
어미 곁에서 네 활개를 펴고 잠든 녀석, 언제부터 코고는 버릇이 생겼는지 코고는 소리도 자못 요란하다.
俊이의 군대생활은 바로 지금이 고비이다.
다음달 작대기 하나 더 달고 왕고참들이 왕창 제대해 나간다고.
그러면 녀석은 일등병으로 중고참이 되고, 휴가나오고 하는 중에 야금야금 세월은 흐를것이고, 어느 때쯤에는 내 입에서 '휴가 자주 나오지 마라'고 할 날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연대 직할의 지원중대라 혹독한 첩첩 시집살이가 아니고, 4.2인치포는 무한궤도 차량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그다지 혹심한 중노동도 아니란다.
전우들은 연대 서울대등 수준들이 높고 내무반의 환경도 무지막지한 그런 것은 없단다.
한결 놓이는 마음,
이번의 먼 양구땅 면회는 俊이에게도 행복한 시간을 주었을테지만 그 보다도 부모에게는 더욱 큰 위로와 안심을 주었다.
내려오는 길, 근 11시간을 버스의 좁은 좌석에 갇혀 있었다.
녹초가 되어서 밤 10시 넘어 겨우 집에 돌아왔으나 큰 따님은 아니 계신다.
2박3일의 기간 몸은 피곤하나 정신은 밝다.
俊이 녀석, 집에 전화하니 아무도 받지 않아서 큰집에 전화하였다고.
부대에 잘 들어 갔다는 전갈.
18288 1997. 3. 4 (화)
아아, 직장.
약 80페이지에 달하는 P상무 인수인계서를 만들어 H이사에게 넘겨주고.
俊이 만나고 온 2박3일후의 첫출근, 이 황량한 직장에서 俊이의 긍정적 상황은 내게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일과 마치고 P상무의 송별 회식.
횟집에 둘러 앉는다.
나이트 클럽.
요란한 음악 속에서 KH호 가 내 귀에 대고 악쓰듯 소리친다.
P상무 계열을 정리한다는 얘기.
그 1호는 바로 나라는.
일단 2공장으로 전보발령.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빠르다.
아아, 결국 직장은 이런 식으로 그만두게 되는구나.
나는 나의 안에 계시는 그 분께 고하노니 정녕 두렵지 아니하다.
18289 1997. 3. 5 (수)
두려워 말자.
척박한 직장을 벗어난다는 이 사실을.
족쇄를 풀고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푸른 마음을 갖자.
신천지를 향해 떠나는 프론티어의 용기와 낙천성.
자존심 또한 상할 것 전혀 없다.
그동안 스스로 벗어 팽개치고 싶은 열화같은 열망을 다스리기에 얼마나 노심초사하여 왔던가.
흐트러짐없이 업무를 마무리하고 이달 말 날자로 사직서를 던지자.
상황이 이 달말까지 허락지 않는다면 내일이라도 떠나자.
거듭 다짐하거니와 두려워 말라.
토끼같은 새끼들과 여우같은 마누라의 눈길을 두려워 말라.
도약.
나의 마음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나의 능력과 의지와 성실을 믿자.
의연하고 침착하게 나의 잠재의식을 달래 길들이자.
거듭 마음 속으로 외치노니 두렵지 아니하다.
18290 1997. 3. 6 (목)
P상무 떠나다.
아직 P상무는 자기방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미 떠난줄 알고 Sh씨 거들먹거리며 정근 상무를 거느리고 그 방에 들어섰다가 P상무를 보자 멋쓱.
파괴된 인격.
그 인격에 대한 야시꼬움이 극에 달했을때 나 또한 떠나니, 이것은 쫓김을 받는게 아니라 내가 그 인격을 발로 걷어차고 뛰처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참 빠르기도 하다. P상무 그만 둔 바로 그 다음날 공적 제1호로서 내게다 칼을 들이 대다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2공장 전보 발령의 공문이 날아온다.
그 공문을 앞에 놓고 내게 어렵사리 말을 꺼내 더듬거리는 H이사.
그 모습은 오히려 내 쪽에서 연민이 일어날 지경이다.
다음주중 잔무를 정리하여 KH호 에게 인계하고 이 달 말경 사직하겠다고 오히려 그를 위로하듯 말한다.
유종의 미를 보여주자.
야비한 인격의 독선을 향하여는 성숙된 인격으로 대응하자.
그러나 마음 저 밑바닥에서 일고 있는 한줄기 비애는 어찌하랴.
그러나 술을 마셔서는 아니된다.
술에 취하여 자칫 감정의 고양으로 과장된 감상이 일어나서는 아니된다.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서 이 상황을 수렴해야 한다.
아내에게, 英이에게, 며칠전 본 俊이에게, 의연하고 낙천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회사, 나와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남아있는 내 사랑하는 선후배 동료들에게도.
18291 1997. 3. 7 (금)
참 무섭게도 분위기는 돌아간다.
P상무의 자리를 겸임한 수리선부 J상무가 P상무 방을 차지한다.
소문난 손비비기장이인 그는, 곁의 막강 후원자 Sh씨의 취향에 맞추어 모인 부차장들에게 변설을 늘어 놓는다.
Sh씨, 바로 전날 그만둔 P상무를 그야말로 형편없이 폄훼하면서 곁의 J상무를 치켜 올리는 발언.
물론 그 석상에 뻔히 앉아있는 나를 빗댄 비꼬임의 언어도 난무한다.
내게는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저럴수가 있을까.
30 여년 최선을 다하여 회사에 봉사하고 엊그제 떠난 사람한테.
그것을 직수굿이 듣고 앉았는 불쌍한 관리자들.
아, 이제는 그러나 어차피 남의 일.
내게는 관계없다.
마음 상할 것도 없고, 공문 종이쪼가리에는 그냥 코웃음치면 그만이다.
나중 H이사는 당분간 참고 2공장 근무하면 상황이 바뀔것이라는 얘기를 한다.
겉으로 하는 말이겠으나, 나는 아주 너그럽고 밝은 표정으로 나 때문에 마음 쓰시지 말고 당신 입장을 곤란하게 하는 일은 없을거라고 오히려 내 쪽에서 그의 무릎을 두드린다.
서랍정리, 서류정리.
20년 넘어 근무한 흔적들.
파일 박스 구석구석, 서랍 여기저기, 로카의 선반에 쌓인 23년 흔적의 쓰레기들.
각종 자료며 봉투며..
정리하다 보니 예전 대우에 취업시키려 가져온 죽은 풍이형의 이력서도 나온다.
커다란 박스 하나 가득 찢고 버린다.
비애, 착잡함, 불안이 왜 없으랴.
오래 전 대리로 근무하다가 그만둔 PC경 씨, 퇴직하여 이런 감정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면중 심장발작으로 사망하고 말았었다.
나는 결코 이겨 내리라.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서 이겨 내리라.
18292 1997. 3. 8 (토)
봄날처럼 포근한 날씨.
2공장 방문하여 LW규 와 마주 앉아서 한참을 이야기한다.
짐짓 사직을 만류하고 버텨 보라는 그이지만 내 사직의 당위성을 그는 충분하게 인식하고 있다.
남아있는 그들도 과연 얼마나들 버텨낼는지 모두 진지한 자신의 문제로서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명예퇴직이다 무어다하는 것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행태, 오직 한사람의 잣대, 일흔 가까운 늙은 독선가의 자신의 취향과 자신과의 親疎여부에 따른,
한 2주일 2공장 가서 개기다가 훌훌 털고 나오는 것이다.
낙영에게서 전화.
TIMING도 이상하다. 그도 백수가 되어서 이것저것 장사 아이템을 궁구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내달초 만나기로 한다.
당분간 정신적 안정이 필요하다.
J, 그녀가 위로와 용기와 자신감의 근원이 되도록 바랄 뿐이다,
빠른 시일내 태종대라도 걸으면서 얘기할 참.
술은 마시지 않는다.
감정의 고양은 금물.
오늘 어머니께 가려한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둔다는 얘기를 입밖에 내는 것은 금물.
의연하고 예사롭게.
속으로는 아무리 파도가 거셀지라도.
기도.
18293 1997. 3. 9 (일)
토요일 인수인계서 작성하여 KH호 에게 설명.
공정 SYSTEM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니 고개를 설레설레 젖는다.
그도 한 2, 3개월 견딜라나.
석사학위를 취득한후 KH호는 지금 적극적으로 외국계 선급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짐을 일단 2공장으로 옮겨 놓다.
복도에서 나와 마주친 Sh씨 , 애써 시선을 피하는 그.
그러나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준다.
저녁 어머니께 간다.
나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어머니.
망팔의 년륜으로 차츰 흐트러지는 사고의 어머니.
형은 안동서 못온다고 하고, 哲이만 나중 돌아왔다.
짐짓 웃고 명랑한척 떠들다가 돌아온다.
기도.
살아계신 그 분의 손길.
18294 1997. 3. 10 (월)
완연한 봄기운.
J와 태종대를 걷는다.
흐드러진 목련.
바다는 그저 봄빛으로 누워있다.
태종사 절을 돌아 오솔길을 걸으면서 회사의 얘기를 들려주다.
남편의 심정이 어떠한지에 대한 헤아림이 다소 부족한 아내짜리 이지만, 긍정하고 수렴해 주어서 일단은 고맙다.
18295 1997. 3. 11 (화)
어제부터 2공장으로 출근.
주룩주룩 비는 내리는데, 다만 며칠간이라도 접촉하여야 하는 사람들.
LW규 씨, 나에 대한 배려가 고마웁고.
고등학교 동창인 KI용 으로부터 뜻밖의 전화.
간드러진 녀석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니 마치 이를 알고 하는 듯, 여기저기서 생각지 못한 연락들이 닿는다.
?KK탁 과 통화.
KH근 과도 통화.
늦은 오후, 비는 그치다.
허벌허벌 2공장 정문을 나서 돌아오는 쉰살의 사나이.
18296 1997. 3. 12 (수)
사직하는날 기다리기가 더욱 고통스럽다.
2공장의 일을 조금이라도 도와주면서 시간을 떼우는게 마음도 편할뿐 아니라 끔찍하게 나를 배려하는 공장장 LW규 에게도 얼굴이 서는 일이라 몇가지 사안을 정리한다.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으나, 살벌하고 유치한 공문들이 내려온다.
월차휴가 사용장려, 될 수 있으면 회사를 쉬라는 얘기다.
다른 회사에서는 월차를 반납하고 상여금도 반납한다는 따위의 유치한 단어들은 왜 나열하였는지.
그 짓거리들을 곁에서 아웃사이더로서 바라보는 나는 아, 그만두기를 잘하였다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여기저기서 전화 쇄도.
외주업체의 사장들, 거래처의 사람들, 다른 부서의 부서장들,
그리고 고등학교 친구들, 일부러 타이밍이라도 맞춘 듯 연락들을 해댄다.
그제 3학년 6반 반창회를 하였는데 나를 찾는 친구들이 많았다고.
나이 먹어 가면서 슬슬 친구들도 만나고 해야지 웬 은거생활이냐고.
신무성, 강일용, 옥영재, 강기탁, 윤행구...
모두 오십 넘은 중늙은이들이 되었구마.
다음 주말쯤 여섯놈만 따로 만나기로 한다.
천경해운의 공무감독으로 2공장 선주실 나와있는 KMS 의 박감독.
예전 대동조선 검사부 차장시절 말도 못하는 술꾼이었는데, 그는 이제 도인이 되어 있다.
무슨 氣功의 도사.
하루 한끼의 식사만 하고, 지리산 정도는 반나절이면 오르 내린다는,
그에게서 정말로 옛날의 흔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맑은 얼굴의 온화한 표정, 몸놀림도 마치 깃털과 같다.
그가 운영하는 강좌가 있다는데 5월달에 12기 교육이라는.
흥미가 솟는다.
18298 1997. 3. 14 (금)
2공장 사무실 책상앞 앉아서 책을 읽는다.
직장을 그만두고 5평짜리 분식점을 시작으로, 8년간 8개 업종 16개의 점포를 내어 1000만원으로 시작한 매출액이 지금은 월 10억이 넘는다는, 김찬경이라는 사람이 쓴 '돈버는데는 장사가 최고다'
많은 도움과 용기를 얻다.
적은 자본.
경험부족.
나이.
과감한 패기야 젊은이들 따라갈수 없겠지만 나는 내 나이가 많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내 감각은 아직 젊으며 감수성 또한 무디지 아니하다.
오히려 내 좋아하는 것을 향한 열정은 오히려 젊은사람 보다 뜨겁다고 자부한다.
아, 두려울 것이 없다.
성공만을 생각하자.
소식없는 俊이 녀석이 어미는 공연히 걱정스럽다.
기도.
18299 1997. 3. 15 (토)
추적추적 비내리는 2공장.
어느새 일주일이 흘렀다.
LW규 의 처세론- 자신의 처세 역정을 피력한다.
그는 처세에 능하면서 인간미가 풍부하다.
점심 때 보신탕 집으로 초대하는 그.
둘이 마주 앉아서 비싼 수육을 먹으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사람을 잘 사귄다는 것, 이것은 큰 자산이다.
적어도 상대에 대한 두려움,쑥스러움,어색함등이 전혀 없이 접근하여 그로부터 호감을 살수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품성이다.
하나 하나.
신중하면서 과감하게.
나의 것을 창조하자.
돈이 없어 두려워 말고, 모호한 대상을 두려워 말자.
오직 적극, 긍정 그리고 사명감과 치밀함으로 도전하자.
사무엘상.
사울은 왜 그토록 기를 쓰고 다윗을 죽이려 하였는지.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그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하나님이 만드신다.
그래, 마음이란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다.
기도.
18300 1997. 3. 16 (일)
3월인데 기온은 뚝 떨어지고, 영동에는 폭설이란다.
면회후 소식 한통 없는 俊이, 무슨 일이야 있겠나마는 무심한 녀석이다.
KC원 앉혀 놓고 사직서 쓰기를 종용.
그는 4월말부로 사직하겠다는 생각이다.
H이사는 자꾸만 KC원 의 사직서를 받아내라고 독촉인데.
18301 1997. 3. 17 (월)
몹시 바람불어 선듯한 추위.
미니공원 부근 매립지에서 운전연습.
英이는 베테랑 선생이고 나는 서툰 학생이다.
자연스런 감각과 순발력으로 클러치, 악세레이터, 브레이크를 다루어야 하는데 도무지 서툴기만 한 학생은 선생에게 쿠사리를 먹는다.
무언가 배워 익히는 것에는 남보다 자신이 있다는 나인데, 운전에 있어서는 그 서툶이 여간 답답한게 아니다.
꿈- 봉래 시장통의 단골술집, 그 집 꼭대기 층의 너른 방, KM희등 여사원들이 이불 덮어 눕고ㅡ 한켠에는 KK곤등 남자사원들이 누웠다, 오리엔트시계 외판원, 단추같은 녹음기, 공짜로 주는 시계...
18302 1997. 3. 18 (월)
하늘은 잔득 찌푸려있고 바람은 매서운 냉기를 품고 있다.
때로 빗방울도 듣는다.
회사를 쉬고 보건소로, 은행으로, 경찰서로 다니며 운전면허 적성검사 갱신신청을 마치다.
영도경찰서를 나와 바람부는 영도다리, 넘실대는 검푸른 물결을 내려다 보면서 다리를 건넌다.
문우당서점의 지도 센터들러 부산시 전도를 구입.
지하의 남포문고에서 김규태 '점포성공의 모든 것'이란 책을 구입.
국제시장에서 디스켓을 사고 부평동 깡통시장에 가서 오래 전부터 갖고 싶었던 소형 소니 녹음기를 산다.
돌아와 녹음기 기능을 파악하고 지도를 벽에다 걸고 신문에서 각종 프랜차이스 광고를 오려 놓은 것들을 스크랩한다.
어제 俊이에게 엽서를 띄었다.
18303 1997. 3. 19 (화)
예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기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각종 프랜차이스 광고들- 먹는 것, 입는 것, 대여하는 것들...
불경기라는 작금, 대기업은 물론이고 조그만 구멍가게도 불황이라는데 이런 프랜차이스의 창궐은 바람직한 현상인지 모르겠다.
일단 그런 광고들을 스크랩하여 두지만 신중해야 한다.
서적을 통하여, 기사들을 통하여, 사업설명회가 있으면 빠짐없이 참석하고.
그리고 빨리 운전을 익혀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녀 보고 배우고 익히고 해야 한다.
당초에 사직서를 던져 버렸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있을만큼 2공장에서의 무위로운 일과는 곤혹스럽다.
그 시간 또한 아깝기도 하다.
18304 1997. 3. 20 (목)
정오에 2공장을 나선다.
서면으로.
번화한 거리의 갖가지 상점들, 간판과 쇼윈도우, 생긴 형상등이 이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롯데호텔 42층.
호텔의 웅장한 화려함은 드나드는 소시민을 주늑들게 한다.
이든타운 미디어의 사업설명회.
20여명 참석하여 사장 최의두씨의 설명과 VTR을 본다.
이른바 인쇄사무 편의점이다.
컴퓨터를 이용한 인쇄와 사무지원 시스템.
장비는 할부금융이 가능, 작은 점포와 소자본으로 가능한 첨단업종이라는 메리트가 없지 아니하지만 날로 UP GRADE되는 컴퓨터 장비들이 아닌가.
그 감가상각을 고려하면?
사장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듣고 하였으나 4도 색상의 명함을 프린트하는데 그 느려터진 속도도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
LW규 와 늦도록 마신다.
동삼동 보신탕 집을 시발로 종장에는 그의 집까지 가서 그의 아내가 차려주는 맥주상을 받다.
LW규 , 그의 인간성의 폭은 좁지 않지만 사고의 폭은 넓지 아니하다.
18306 1997. 3. 22 (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다.
나의 내적인 것들이 중요하다.
불안심리를 다스리고 낙천성을 키워야 한다.
자신감을 코에 달고 다니자.
남편으로서 아비로서의 의연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무장된 열정을 갖자.
마음 다스리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무엘하.
다윗은 반역한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한다.
18307 1997. 3. 23 (일)
토요일.
J와 함께 서면, 롯데호텔 42층 넓은 홀.
키즈포토 사업설명회.
한 3백여명 빼곡히 들어찼다.
어린이 전문 사진관.
동화적인 그림의 배경,
마진은 약 30-40%.
기기는? 그리고 기기보다 비싼 배경막은?
점포를 제외하고 장비와 인테리어와 간판 모두 합처서 4500만원의 소요 자본.
사진이란 내게 맟선 분야가 아니다.
영도 상권- 동삼동은?
J와 지하철에서 헤어지고 나는 초량의 중국요리점 '사해방'
아! 얼마만이냐?
수십년만의 동창들, 강기탁이야 그렇다 치고.
신무성, 몇억을 쉽게 굴리는 사업가.
기사가 줄곧 곁에서 모시는 수협의 전무, 옥영재,
그리고 강일용, 방봉환.
중국요리와 고량주.
단란주점.
몇십년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해후한 것이다.
18308 1997. 3. 24 (월)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의 만남.
그 회포가 즐겁고도 즐겁다.
풋내나던 시절, 우리는 공통된 추억을 갖고 있어 나누는 언어는 치기어린 즐거움이다.
우리 너댓 놈들, 내원사 법당 얘기, 크리스마스 이브의 대신동 얘기, 태종대 후랍빠 얘기들.
얘깃꺼리는 얼마나 많은가.
일요일, 작취미성의 아침이지만 기분은 어둡지 아니하다.
J와 태종대 숲길을 돌아 걷는다.
목련은 흐드러지게 피었고, 진달래의 촌스런 분홍빛은 더욱 곱다.
개나리의 선연한 노랑에는 눈맛이 황홀하다.
J와 장사에 다하여 의논.
두렵지 아니하다.
자신감도 새록새록 솟아난다.
俊이 녀석, 소식이 없어 어미는 안타깝다.
백호부대에 전화하여 보니, 사병은 통화할수 없다는 답변.
별일이야 있을까마는 녀석의 무심함이 안타깝고, 양구 터미널에서 배웅하고 서 있던 그 모습이 눈에 삼삼하다.
18309 1997. 3. 25 (화)
근 보름째 본사 쪽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사직서도 퇴직서류도 봉투에 넣어 여사원 편에 H이사 앞으로 보낸다.
Sh씨는 요즘 거의 매일처럼 생산부 사무실 올라와 거품을 물며 들들 볶아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못나고 못난 행태,
떠난 P상무를 업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형편없는 욕을 해대는 그 인간성의 유치함이라니.
자꾸만 미리 속에 맴도는 아이템 '키즈포토'
나는 사진에 대하여 무식하지 않다.
한때는 암실까지 만들어 놓고서 사진에 심취하였던 나다.
입지는 영도의 시장앞 거리, 롯데리아가 들어서고...
배후단지도 아파트 군.
장사는 목인데.
그러나 좀 더 넓게 알아보고 숙고하고 또 숙고해야 한다.
검토해야 할 사항들 수십건 노트에 정리한다.
자본과 업종과 입지의 삼박자.
18310 1997. 3. 26 (수)
부산 특유의 봄날씨.
베토벤의 소나타 '봄'과는 거리가 멀다.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불어재끼는 부산의 영도의 봄.
며칠전 회식 자리에서 G탁 이가 나를 보고 하였던 말.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앟고 좋아하지도 않는 옷을 24여년 입고 있는 네가 놀랍다는.
오랜 세월 조선소에 근무하는 나를 빗대어 한 말이다.
그래 기탁아, 이제는 그 옷을 벗는다.
요즘 나는 본사 쪽에는 그림자도 얼씬 않은채 전화로 원격 사직업무를 보고 있는데도 회사의 무정견하고 독살스런 바람이 선듯하게 느껴진다.
18311 1997. 3. 27 (목)
그만둔 P상무에게서 전화.
면목없음을 자꾸 토로한다.
나는 조금도 마음 쓰실 것 없다고 말한다.
그는 긴 통화의 말미에 회사를 그만 두거든 함께 몇박며칠의 산행을 하자고 제안한다.
나의 대꾸인즉슨 4월초 집사람과 함께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려한다고, 그리고 한 한달쯤은 아무 생각없이 지내고 싶다고.
당장 나의 손길이 필요한 생산관리업무.
H이사는 곤란을 겪는 모양이지만 이제 나는 아랑곳 없는 사항이다.
오늘 저녁 H이사가 마련하는 과장급 이상 모이는 송별회식.
쑥스럽고 내키지 않은 짓거리.
그래도 LW규 가 수배하여 마련한 것이니 아니 참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8312 1997. 3. 28 (금)
엠시 스퀘어 구입.
뇌파를 조정하여 정신을 집중하여 준다는 기계.
그 효능은 일단 유보- 내 하기 나름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 우연히 시형어머니 만나 함께 택시타고 영도로 들어온다.
하리의 횟집.
H이사, LW규 부장, CG준 부장 ,GJ수 차장 , SJ엽 과장 ,JM교 과장 ,KH호 과장, LB걸 과장등 생산부의 과장급 이상 10여명.
그저 상투적인 이별의 술자리.
덕담들 역시 상투적일수 밖에는 없다.
마치고 SJ엽 서껀 KH호 JM교 LB걸 등과 맥주집에서 마시는데 KO훈 사장과 설계의 YY호 가 찾아와 합석.
다시 목화그릴의 3차 맥주.
KH호 한사코 집에 까지 와서 두병의 맥주를 마시고 짐짓 아쉬운 이별의 포즈를 나누다가 2시 넘어 돌아가다.
작취미성의 토요일.
매여 사는 일상은 이것이 마지막일터.
겨우겨우 몸을 일으킨다.
18313 1997. 3. 29 (토)
나의 나쁜 점.
현학적인채하는 허영이 있다.
무언가 유식한척, 고급스런 이미지로서, 이른바 먹물 든 언행을 구사하려는 허영.
이런 건방은 이제 장사 세계에서는 버려야 할 것.
어떠한 상대에게라도 건방진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누구나 대하기 쉬운 정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토요일.
본사에 뭇사람들과 인사하려 들어가는 일이 큰 곤욕이다.
딴 사람들은 몰라도 직반장들, 협력업체의 사장들, 생산부의 젊은 친구들과는 악수라도 나누고 떠나야 할텐데.
18314 1997. 3. 30 (일)
비 흩뿌리는 토요일.
20일 넘게 발길을 끊었던 본사에 들어가 한바퀴 돌면서 악수를 나눈다.
건설 A이사의 깎듯한 응대, 영업 L상무의 장광설, 경리 L이사의 간곡함등...
직반장들과의 아쉬운 악수...
CS조 부장의 간곡함이 인상에 남는다.
Hw 부장, 얼굴이 벌개져서 곤혹스런 표정이 역력.
그러나 그와의 껄끄런 감정 따위 이미 내게는 없다.
무슨 빚을 갚듯이 그것들을 마치고 다시 2공장으로.
트레일러 기사인 최기사에게 도로연수를 부탁, 그의 프라이드를 끌고 3부두까지 진출하고 집까지 돌아오는 운전 연습.
18315 1997. 3. 31 (월)
봉급쟁이로서 마지막 일요일.
새벽, 英이를 들깨워 태종대 자유랜드 뒤편의 자갈마당 광장으로 간다.
불안해하는 英이를 옆에 앉히고 천리교 앞까지, 다시 태종대로 가서 핸들을 英이에게 넘긴다.
딸년은 아주 능숙한 선생님이지만 또한 아주 엄격한 선생님.
英이가 몰고 수영 광안대로 현장의 한적한 도로. 그곳에서 연습.
다시 영도로 들어와 진주집의 해장국을 英이와 함께 먹는다.
英이에게 아빠 회사를 그만둔다는 얘기하였으나 무덤덤한 반응.
英이의 대범한 낙천성이 고맙기 그지없다.
俊이에게서는 소식이 없다.
녀석 이토록 무심할수가.
월요일 새벽.
마지막 출근길이다.
담담함 속에는 진한 착잡함도 있을터인데 엠시 스퀘어를 귀에 끼고 내면의 언저리에 들어가 의연하라 침착하라고 속삭인다.
시편.
불꺼 기도.
주님은 내게 어떤 변화와, 어떤 평화를 계획하고 계신다.
내 꿈꾸어 왔던 그것들, 그 공간의 색채... 그 공간 속에 걸린 마음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