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5 1996. 12. 1(일)
동남아 제1의 재벌이라는 홍콩 SWIRE GROUP 회장부부가 SB-425 진수식 참석한다고 총무부 직원들 법석을 떨더니, 서울의 기상상태 때문에 제시간 비행기가 뜨지 않아 무산.
몇사람의 VIP 참석하여 거대한 선박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고 나서야 참석.
제1공장으로 예인해 와 안벽에 접안한 진수선박을 둘러본다.
국제적인 부자들...
LB걸 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태종대까지 들어가 SJ엽 LB걸 등과 맥주를 마시는 토요일 오후.
일요일 새벽.
이제 3일후면 그리운 아들놈을 만난다.
Sh씨다, 사직서다 등 골치 아픈 사안들은 그 후로 유보다.
기도.
18196 1996. 12. 2 (월)
일요일도 英이는 사뭇 밖으로만 나돈다.
집안으로 향한 큰딸로서의 어떤 손길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까.
지금이 문제가 아니라 시집가서 제 남편, 시댁, 제 새끼들을 향한 그윽한 손길, 이런 것이 결여되었을까봐 행여나 걱정스러운 아비짜리.
데이비드 린치감독 '이레이저 헤드'
카프카가 연상되는 영화.
흑백화면은 무언가 있을듯한 의미심장함이 가득한데 기실 재미대가리는 하나도 있지 아니하다.
컬트영화로서 찬사 가득한 영화라지만 내게는 '아담스 훼밀리'류의 영화가 훨씬 재미있고 특이한 느낌을 자아낸다.
스페인 영화 '달과 꼭지'
참 동화같은 에로티즘이다.
'하몽하몽'을 감독하였던 사람의 영화.
18197 1996. 12. 3 (화)
사무실 책상앞 앉아있으면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Sh씨의 독기도 요즘은 뜨아한 편이지만 나는 이미 동기 부여의 요인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쨌거나 내일은 俊이를 만난다.
부쩍 성숙하여 있을 내 아들.
회사와는 정 반대의 개념.
내 아들.
18198 1996. 12. 4 (수)
부서장회의.
발기부전의 고개 숙인 남자들 속에서 무슨 진취적 발상이 나오겠는가.
다소 일찍 퇴근하여 잠자리 들었으나 쉽게 잠이 올 리가 없다.
뒤척뒤척, 꿈의 바라이어티 쑈우를 공연하다가 1시도 못되어 일어나 버린다.
조금 있다가 4시, J와 英이와 함께 집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서면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리하여 50여일만에 俊이를 만날 것이다.
이제부터 俊이는 본격적인 군대 시집살이가 시작되는 것.
기도.
18199 1996. 12. 5 (목)
俊에게로.
전날 저녁부터 J는 김밥, 불고기, 회등 장만에 분주.
아직 깜깜한 꼭두새벽, J와 나와 英이는 서면 대아호텔 앞에 대기중인 3대중 한대의 버스에 승차, 대전으로.
경상남도의 경계를 넘어서니 아연 흑백의 수묵화, 눈 풍경이 펼처진다.
대전서 다시 남하하여 논산의 연무읍.
그곳에서 俊이 만난다.
군복입은 俊이.
비쩍 마른 몸, 얼굴이 다소 검어진 꼴일까.
다른 훈련병들 부모 친지 앞에서 구령소리 요란한 '충성!'.
그러나 우리 俊이는 어림없다. 그저 한번 씩 웃었을 뿐.
갓 이등병의 군인으로서 뽐냄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들 놈.
좀 허세를 부려도 좋으련만.
俊이에게는 도무지 군대라는 곳이 유치한 것이다.
장방형 마분지를 끼어넣어 관물정리를 하는 짓거리랑, 변기는 무슨 정성이 치뻗어서 돌맹이로 문질러 닦아야 하는지.
다른 훈련병들과는 근본 다른 俊이다.
아들 놈에게서느 다른 아이들마냥 제부모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과장어린 군대 얘기들의 떠벌림은 기대할수 없다.
10시45분쯤부터 오후 2시 15분까지.
군복입고도 여전히 자신의 개성을 고집하는 아들녀석과의 몇시간.
제 어미와 제 누나는 그러나 눈물짓는다.
그곳 PX에서 俊시계와 내 시계.
면회장을 나오니 쏟아지는 겨울비.
18200 1996. 12. 6 (금)
돌아오고 나니 그제서야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俊이 편지.
오래 전 부쳤는데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그 편지에 박격포 주특기는 제발 걸리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는 한마디.
俊이가 더욱 눈에 밟힌다.
손등과 정권은 까져서 딱지가 앉았고, 해맑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풀썩 웃던 아이.
군대가 어울리지 않는 아이, 군대가 어색한 아이.
어디로 배치될런지, 무조건 기차에다 주워 싣고서 곳곳에다 무더기로 떨어뜨리는 그곳이 바로 임지라는데.
JM교 자형에게 부탁한 것은 어떻게 잘 진행되고 있는지.
단단한 사례를 준비하고는 있건만, 아직 구체적인 연락은 없다.
이제 전반기를 마쳤는데 말이다.
군번 96-76084033.
제대를 꿈꾸기에는 너무나 아득한 새까만 쫄병.
3일만의 출근날 아침.
18201 1996. 12. 7 (토)
가슴 울렁거리는 증세.
수면중에 때로 깨어나 심장이 벌떡벌떡 뛰는 소리를 듣는다.
쫓기는 발자국 소리처럼.
사무실 앉아서도 때로 심장이 벌떡거린다.
JM교 제 자형과 통화.
俊이는 이번에 배출되지 않는다는 전갈이다.
주특기는 알 수 없고 2주의 후반기 교육을 더 받게 될거라고.
이게 도무지 잘된 징조인지는 알수 없으되, 육군본부의 사무관이라는 그가 과연 얼마나 신경써 노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18202 1996. 12. 8 (일)
토요일 늦은 오후 퇴근하여 돌아오니 英이는 역시 외출중.
우리 집 장녀께서는 어지간히도 밖으로만 나돈다.
이제 곧 남의 집 며느리가 될 아이, 지금부터라도 부덕의 무슨 덕목이나 기능같은거라도 배워 두어야 할텐데.
俊이.
살벌한 논산 땅.
그곳에 면회를 다녀와서는 그만 나는 하나의 뚜렷한 인상을 안고 돌아오게 되었다
俊이에게는 군대가 어울리지 앟는다는.
강인하게 새겨지는 인상.
자꾸만 거친 손마디와 어색한 웃음, 그리고 빗속을 열지어 구보하여 사라지던 그 모습이 눈에 밟힌다.
18203 1996. 12. 9 (월)
일요일 俊이에게서 혹시 전화가 오지 않을까 기대하였으나 벨은 울리지 않는다.
英이는 어김없이 외출, J 는 태종대.
오십넘은 고독하고 나약한 정신.
게다가 속된 정신은 그 무료와 울렁거리는 시간을 맥주로 잠재울 뿐이다,
비디오 '리허설'
격렬한 정사장면을 기대하였으나 시시한 국산영화.
박영선이라는 여배우는 전혀 매력이 없고, 최민수는 여전 멋은 있지만 깡패의 속기가 느껴지지 않아 리얼리티가 없다.
구성도 시시껄렁.
오전에는 톨스토이 '크로이체르 소나타' 종장을 마저 읽다.
"실로 놀라운 일이지만 인간은 때로 美는 善이다하는 환상에 완전히 마음을 지배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자가 바보같은 소리를 해도 그것이 바보같은 소리로 들리지 앟고 오히려 현명한 소리로 들리는 법입니다. 예쁜 여자의 말이나 거동이 상스러워도 그것을 마치 무슨 애교로 생각하기 일쑤죠. 바보같은 소리나 상스러운 소리를 한마디 입밖에 내지 못하더라도 그 여자가 미인인 경우엔 대뜸 현명하고 정숙한 여자라고 믿어 버린단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꼴로 살아가고 있었지요.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너 원수지간처럼 되었습니다. 나중엔 의견의 차이 때문에 적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적의 때문에 의견의 차이가 생기는 격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말을 마치기 전에 나는 반대햇고 또 아내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자는 俊에게 들려주고 싶고, 후자는 J에게 들려주고 싶다.
18204 1996. 12. 10 (화)
Sh씨의 악다구니는 소강상태이지만 결재서류가 올라갈때마다 나는 말할수 없이 불안하다.
책상 위 전화벨 소리가 섬뜩할 정도로.
연말 잔득 널려있는 사안들.
TV다큐멘타리 '生老病死' 씨리즈중 '죽음편'.
왜 신은 인간을 영생불사토록 창조하시지 않았을까하는 어리석은 질문.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성숙하여 자란다는 사실.
절대적으로 자연스럽고 절대적으로 정당한 것이 바로 죽음.
EGO로서의 자신만이 전체라는 인식때문에 죽음을 괴롭고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인간이라는 동물만이 가지고 있는 자의식 탓이다.
외부와의 유기적인 관계로서의 자기인식을 획득한 사람은 결코 두렵지 않은 것이 죽음.
사랑, 그 본질도 필경 죽음 때문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 상헌이여,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아니다, 정말 두렵다.
18205 1996. 12. 11 (수)
俊이에게서 편지.
제가 그렇게 피하려고 한 박격포 주특기다.
박격포 주특기라면 최전방으로 가는 것.
M교 의 자형은 어떻게 된 셈일까.
그 입김은 지금 먹히고 있는 중일까.
좋은 춘기를 기다려 후반기 교육으로 뺀 것은 아닌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 행간에는 6주동안 고락을 함께 하였던 친구들과 헤어져, 저는 그냥 훈련소 남아서 후반기 교육을 받는 외로움같은게 배어있다.
쓸쓸하고 뒤숭숭한 마음을 아비는 읽는다.
그리고 불안한 마음이 왜 없으랴.
편지에는 하하하는 웃음의 의성어를 썼지만.
내가 마치 논산에 있는 듯 마음밭이 편치 못하다.
편지를 써서 그저 용기와 낙천을 잃지 말라는 상투적인 말만 뇌까리는 힘없는 자의 무력감.
俊아.
그 추운 황산벌에서 뛰고 뒹굴고 없드리고 불안하며 쓸쓸할 아들 놈아.
건투! 건투! 건투!
한 육개월만 고생하자 우리.
'네가 어디를 가든지
그가 너를 지키실 것이니
지금부터 영원히 지키시리라.'
-시편 121-
18206 1996. 12. 12 (목)
겨울 답지 않게 따뜻한 날씨.
俊 면회갔을때 찍은 사진 찾다.
俊이의 덩치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아비 어깨에 팔을 둘러 찍은 사진, 머리 하나는 아들놈이 커서 아비는 꼭 난쟁이 같구나.
어미와 누나 사이에서 웃는 모습.
군복이 썩 어울리지 않는 편도 아니다.
그립다. 俊.
JM교 와 술한잔 하면서 제 자형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해 주기를, 아니면 대전에를 직접 올라가 재삼 재사 부탁하기를 얘기.
육군본부의 사무관...
18207 1996. 12. 13 (금)
논산의 후반기 교육은 중화기 주특기.
문교는 제 자형의 영향력에 불만을 나타낸다.
딴에는 아주 간곡한 당부를 하였다는데.
어찌하랴.
俊이에게 편지한대로 俊이의 하나님께서는 최선의 길로 俊이를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다소곳한 수렴의 자세를 가져라.
나부터도.
매서운 추위 속 중화기 훈련.
그 껑충하고 여린 모습의 아들 녀석을 향한 이 연민의 감정, 나 자신 이 감정을 좀 더 숙성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제 녀석만 낙천성을 잃지 않는다면 이 아비는 얼마든지 긍정의 감정을 가질수 있다.
어서 훈련을 모두 마치고 어딘가 자대에 배치되어 이 곳이 바로 2년간의 내 시집이겠거니하고 스스로 안돈할수 있는 시간이 빨리 되었으면..
18208 1996. 12. 14 (토)
노동법 개정때문에 정국은 시글쩍.
노동계측은 노동계대로, 사용자측은 사용자대로.
아가야라는 사이비 종교집단.
신나라 레코드라는 국내 최대의 음반회사, 거대한 집단 농장을 조성하여 중년의 여교주를 마치 여신처럼 떠받드는 종교집단.
뉴스화면에 나오는 여왕을 받들어 모시는 그 잔치마당은 정말 우습지도 않은데.
과연 사람이 그토록 맹목적으로 사교에 빠질수 잇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어제 오후 1시가 조금 넘었을때, 돌연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건물이 흔들린다.
지진, 영월 어딘가의 진앙지로부터 한반도 전체에 영향.
俊.
내 아들의 건투함을,
아들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께 기도.
18209 1996. 12. 15 (일)
토요일 오후.
사직한 최석교와 한잔 나누기 위하여 SJ엽 등과 어울려 마신다.
저녁 무렵 집에 오니, 英이는 토요일 오후 물론 집에 있을리 없고 J도 외출한 집안.
아, 그런제 俊이에게서 편지가 와 있다.
후반기 교육, 박격포 교육은 전반기 보다 몇배나 힘든 모양.
행간마다 녀석의 땀과 고된 숨소리가 느껴진다.
지금의 고됨도 그렇거니와 녀석을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은 전방으로 팔려가서 겪어야하는 2년여의 불안이다.
그 불안함이 아비에게 그대로 전해져 아프게 아프게 아비의 마음을 들쑤신다.
문교 자형이라는 사람의 영향력은 전혀 작용하지 않앗단 말인가.
미칠 지경이다.
俊아, 俊아.
이번 일요일 교회에 출석하여 너의 하나님께 간구하여라.
이곳 아비도 간구드리마.
18210 1996. 12. 16 (월)
俊이에게 편지 써 부치다.
英이 저 출근하는길, 할머니를 가야 인성의원까지 모셔드리는 문제를 입이 닳도록 얘기하였으나 오불관언.
휴일도 없이 싸돌아 다니는 그 잠시의 틈을 내어 할머니께 가 뵈이라는 신신당부도 소귀에 경읽기.
아비 말을 참 듣지 않는 한 집안의 큰 딸이다.
일요일 오후 2시.
부산역앞 아리랑 관광호텔.
이욱규씨 장남의 결혼식.
회사를 그만 둔 사람들, 그곳에서 만난다.
염효동, 정진호, 양홍중,사조산업 사람들, 최태용, 김만철, 최상만, 이희복, 김부중... 제씨들.
어울려 한잔 해야하는 분위기에 나는 일찍 슬그머니 빠져 나온다.
'철학사상 이야기'라는 문고본 상하권 구입.
18211 1996. 12. 17 (화)
어머니 인성의원 그만두시다.
밀양의 어떤 개인병원에 일주일 두 번 출근키로 하셨다고.
이런 소식을 英이로부터 듣게 되는 자식놈의 무심함.
어머니를 뵌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제 새끼 군대에 몽땅 마음을 빼앗겨 제 어미에의 정성은 이토록 인색하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때로 한스럽고 때로 죄스럽고 그리하여 가슴이 메이고, 아내를 생각하면 때로 가엾고 때로 부아가 나 그리하여 가슴이 메이고, 딸년을 생각하면 때로 예쁘고 때로 부족하여 가슴이 메이고 아들놈을 생각하면 빨빨 기고있을 녀석의 군대가 그냥 안스러워 가슴이 메이는데.
나는 이들에 있어서 누구인가.
아, 아버지.
좁다란 이 마음밭을 넓혀주소서.
쟁기를 쥐어 경작케 하소서.
연민하게 하여 이 연민이 사랑이게 하소서.
나이 오십줄에 들어서 점점 추워지고 쓸쓸하여 자주 눈꼬리가 젖는다.
18212 1996. 12. 18 (수)
M교 의 자형, 무심한 것이 아니었나?
그가 문교에게 전화하여 俊이의 주특기는 105 박격포가 맞다고.
그러나 군대는 보직이 중요한게 아니냐는 얘기다.
그렇다. 주특기가 군대생활에 무슨 큰 상관인가.
나 역시 810 일반의무 주특기로 군의학교까지 마치고, 자대에 가서는 주사바늘 한번 찔러보지 않은채 제대하지 않았던가.
이제 바라는바 俊이가 후방의 어떤 사단으로 배출되어 좋은 보직을 받는 것이다.
훈련소 인사참모에게 당부하여 놓았다는 육본 사무관 문교의 자형 언질에 가슴속 커단 빙하 하나가 스르스 녹는다.
이번 주말이면 결정 될것이다.
이동 도선관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씨 이야기' 심진송 '신이 선택한 여자' 빌리다.
'좀머씨 이야기'는 올 상반기 최대의 베스트 셀러라는데 쥐스킨트는 바로 '향수'의 작가이다.
18213 1996. 12. 19 (목)
부차장 회식.
서울사무소까지 참석하여 20여명 일식집 팔금산에 모이다.
무어 할 것 있겠는가, 그저 생선회나 주어먹고 튀김이나 씹어가면서 술이나 마실 뿐이다.
2차 단란주점의 도식적인 코스.
미끈하게 빠진 英이보다도 어린 여자아이와 어울려 늙다리들은 덩실거리며 돌아간다.
18214 1996. 12. 20 (금)
俊이 이제 내일이면 후반기 교육 수료,
과연 육본 그 냥반의 입김이 제대로 먹히게 될런지 말할수 없이 초조하다.
俊이 입대한지 2개월이 지났다.
세월- 어서 후딱 후딱 흘러가서 쫄병생활이 지나가 버렸으면.
아아, 망팔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세월이여 더디게 흘러가라하여야 하는데.
18215 1996. 12. 21 (토)
제법 추운 날씨.
보일러 열기 훈훈한 사무실에서 종일 신년도 계획을 만든다.
오후 4시, 갑자기 정전.
아뿔사! 너덧시간 작업한 것을 몽땅 날려버리고 말았다.
오늘 俊이는 후반기 교육을 마칠 것이다.
이 추운 계절에 이제부터 혹독한 시집살이가 시작될 토인데 모쪼록 모쪼록 녀석이 원하는 후방 사단에 배속되어 녀석의 적성에 맞는 보직에 떨어지기를.
어느 구덩이에 떨어뜨려 놓아도 강인한 잡초처럼 적응하기에는 내 아들은 너무나 예민하고 여리다.
2년 동안 줄곧 싫다 싫다 벗어나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만 되뇌이는 군대생활이라면 어쩐단 말이냐.
부디 M교 의 자형, 그 분의 입김이 팍팍 먹히기를.
어둠에 잠겨
기도.
18216 1996. 12. 22 (일)
俊, 훈련은 마쳤을텐데 소식이 없다.
자대에 배치되어 경황이 없는걸까, 집단적인 이동으로 전화할 상황이 아닌가.
어쩌면 아직 배출되지 않은 것일까.
저녁, 英이 차를 타고 시내.
케익을 사고, 英이 먹고싶다는 피자를 산다.
피자헛이라는 가게에는 번호표를 받아 줄을 서 기다려야 피자를 먹을수 있다.
그런 호황이 없구나.
피자라는 음식이 언제부터 조선사람 입맛들을 잡았단 말인지.
입맛보다는 하나의 유행인지도 모르겠다.
英이와 어머니께.
형과 형수 그리고 哲이.
두런두런 얘기 나누고...
어머니.
가지고 간 꼬냑 한병을 형과 함께 비운다.
18217 1996. 12. 23 (월)
일요일 사무실 들렀다가 지하철타고 연산동 목화예식장.
SS우 결혼식.
M교 의 차를 타고 영도로 돌아와 술마시자는 유혹 뿌리친다.
그러나 집에서 소주를 홀짝인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명화 '대부 1,2 편' 다시 보면서.
볼때마다 새로운 영화.
장중한 고전적 품위, 마치 렘브란트의 그림과 같은 깊이있는 영상.
마피아의 갱스터 이야기를 심오한 영상미로 재현한 것은 마리오 푸조의 원작이 코폴라라는 거장을 만난 행운이다.
俊이, 연락이 없다.
과연 어디로 배치되었을까.
18218 1996. 12. 24 (화)
연일의 술로 인하여 뱃속은 무슨 돌덩이가 들어 앉은 듯 하고, 마음은 마음대로 俊이의 무소식에 먹물 풀어놓은 듯 답답하고, 연말의 업무는 산적하였건만 진척없이 질척거리는 월요일.
그런데 J의 전화가 온다.
俊이로부터 편지 왔다고.
그 편지의 분위기는 매우 밝았다는.
그 한마디에 마음은 금새 환하여져서 업무에도 가속이 붙는다.
집에 와서 본 편지.
편지는 후반기 교육중 쓴 것이다.
농담과 우스개로 편지는 밝게 빛난다.
4.2인치 박격포, 가장 무거운 포를 주특기로 하는 俊.
80mm, 60mm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나?
차량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포.
그리고 여러 에피소드들.
벼슬 달린 닭이 나오는 음식, 닭된장국, 닭 콩나물국....
우스워 J와 나는 깔깔 웃는다.
또 제 전우 얘기, 제설작업은 얼마나 귀찮은 노동인데 눈 많이 왔다니까 여자친구가 '어머 좋겠다' 하여 '야 이 미친년아' 했다나.
녀석, 4.2 인치를 가지고 놀더니 힘께나 쓰게 된 모양이고....
어디에 배출되고 보직이 무어고가 정작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런 밝은 마음가짐,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닥친 상황을 껴안아 즐기는 것.
지금은 아마 어딘가에 배출되었을텐데 아마도 전화 한통 할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편지를 기다려 보는수 밖에는 없다.
육본의 그 분의 입김이 먹혀서 후방의 좋은 보직에 떨어졌으면 금상첨화이겠으나, 전방의 빨빨기는 보직이라도 이런 낙천성만 유지한다면 문제 없다.
18219 1996. 12. 25 (수)
영업의 이상무가 주재하는 회의.
그의 능란한 다변함, 예전 모임의 주제를 압도하던 P상무는 의외로 조용하다.
이제 기가 죽었는지.
'좀머씨 이야기'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좀머씨. 무어라 중얼중얼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자꾸 말을 걸면 '나를 제발 내버려 달라'고 허둥지둥 도망가 버리는 좀머씨.
좀머씨는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도망하는 것일까.
관계인가, 인간인가, 죽음인가.
종장에 호수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좀머씨,
그것은 안락인가, 영원한 도피인가, 항복인가.
좀머씨의 프로필에서 나는 얼마만큼씩의 나 자신을 발견한다.
성탄절.
俊이 녀석.
지금 어느 고장 어느 철조망안 어느 막사에서 깨어 일어나 성탄절 아침을 맞고 있을까.
부디 기쁜 성타절이 되거라, 아들아.
카드 하나 보낼 향방을 모르니 참.
피아노 위에 얌전히 놓인 英이의 카드.
'아빠, 英이에요. 올 한해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 닥아오는 새해에는 건강하시고 술도 좀 줄이시고 마음 편한 한해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俊이도 잘 지낼거에요.'
내 딸 英이도 MERRY CHRISTMAS !
18220 1996. 12. 26 (목)
성탄절, 그리고 회사의 창립 51주년 기념일.
하필이면 12월 25일이 창립일이라니.
1선대, F/D, 상가선대에 돼지머리가 웃고 있는 고사상.
큰절하는 사장, 전무 뒤에 엉거주춤 도열해 선 부차장들과 과장들.
절하는 그 엉덩이에다 대고 한심한 인사들아 하고 군시렁대고 있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2공장의 식당에서 맛있게 끓인 떡국을 배불리 먹는다.
시내 가 책을 산다.
테네시 윌리암스 '유리 동물원'
피터 쉐퍼 '에쿠우스'
유한평 '자기최면'
비디오 방, 보고싶은 영화 '대드맨 워킹'은 갈때마다 없다.
이 영화를 보고싶다.
예정된 시각에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 이상한 전율.
전에 읽었던 '전기의자' 트루만 캐포트의 '냉혈'을 읽으며 등줄기에 식은 땀을 흘리면서도 이상한 전율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
18221 1996. 12. 27 (금)
俊이 군대간지도 70일이 지나고 있다.
그리고 올해는 나흘을 남겨놓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俊이에게서는 소식이 없다.
노동법, 안기부법, 여당 단독으로 국회 통과.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야당.
노동계도 들고 일어나 오늘 1시부터 파업 돌입하겠다고.
곳곳에서는 감원의 열풍이 잠자지 않고, 김정현의 '아버지'라는 소설이 유행을 하는 세태.
'불쌍한 아버지'의 시대인가.
俊녀석.
어느 구석에서 뺑이를 치고있는지.
어째 소식이 없을까.
18223 1996. 12. 29 (일)
토요일.
퇴근하여 아파트 입구 들어서니 우편함에 꽂혀있는 한통의 전보.
俊이다!
제 어미에게 새해 인사의 전보.
발신지를 보니 춘천이다. 그러면 전방이 아닌가.
그리고 오후, 안방의 전화 벨소리.
예감은 틀림없어 역시 俊이다.
경황없는 상황에서 겨우 전화한 듯 바쁘게 통화하다.
춘천의 103보충대. 일주일동안 보충대에서 대기병으로 있었다.
곧 전방으로 팔려갈거라는 짧은 전화 한통.
결국 전방으로 팔려가는구나.
이제 갓 스물넘긴 키만 멀쑥하게 큰 아들놈.
도대체 문교 자형이라는 사람, 참 맥대가리도 없는 사람이다.
도대체 힘 한번 쓰지 못하였으면서 안심하라는 말은 무에 말라 비틀어진 헛소리였단 말이냐.
차라리 俊이에게 빽이 있다는 귀뜸이나 하지 말았더라면 녀석이 기대라도 품지 않았을 것 아닌가.
오히려 실망을 듬뿍 안겨주고 말았으니, 녀석은 아비를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 어찌 하겠는가.
마누라 말대로 남들 다 하는 거, 젊어 한때 고생은 약이라고 생각하여야지.
요는 俊이의 마음가짐이다.
俊아.
용기와 낙천!
용기와 낙천!
엄마 아빠는 빈다.
18225 1996. 12. 31 (화)
세밑.
한해의 끄트머리.
스스로 걸어와 여기까지 다다른 것이 아니라 떼어 밀려서 다다른 세밑.
사람들은 세월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사람의 등을 떠밀어 세월 끝에 세운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흰머리가 부쩍 늘었고, 턱 밑에는 주름도 가로 그어젔다.
J역시 목과 눈가의 주름살.
俊이 어제 저녁 제엄마에게 바쁜 전화 왔었는데, 지금은 강원도 양구에 있다고.
사단까지는 팔려간 모양이다.
2사단 노도부대 라던가
결국 俊이는 전방의 4.2인치 박격포 포병으로 군대생활을 하려나 보다.
부디 俊아...
낙천성.. 건강하게 ... 매사에 신중하고...
형수의 기억도 알아주어야 한다.
작년에도 양력설 쇠었으니 내일 설이라고.
아무려면 어떠랴.
정초, 피붙이끼리 모여 마음들을 나눈다는 게 어찌 좋지 않으랴.
세밑의 기도.
눈물 흐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