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6 1997. 4. 1 (화)
23년동안의 회사, 마지막 날.
2공장 사무실로 이른 아침 P상무로 부터의 전화.
아, 이제 그는 P상무가 아니라 PI서 씨이다.
몹시 나의 회사 그만둠이 부담이 되는 모양, 한번 만나자는 간곡한 청을 마누라와 제주도 여행가니까 다녀와서 내 쪽에서 전화하겠다고 거절하다.
그가 어딘가 조건 맞는 다른 직장에 다리를 놓아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단연코 사절이다.
이제 봉급쟁이는.
그러한 이유도 그와의 만남을 피하게 하는 심리의 일단일 것이다.
LW규 씨는 지독한 독감으로 입원, 하필 나 그만두는 날, 어쩌면 곤혹스런 이별을 피하는건지도 모르겠다.
2공장 직원들 데리고 나가 아구찜으로 점심 대접하여 20여일간의 고마움을 마무리한다.
가방을 들고 쇼핑백에 잡동사니들 넣어들고 2공장 사무실에서 정문에 이르는 긴 도로를 터벅터벅 걷는다.
물밀 듯 휩싸이는 착잡함이라니.
그리고 한줄기 슬픔이 북받처오른다.
이내 콧등이 시큰하며 눈시울이 뜨거워 진다.
아. 이제 나는 어줍잖으나마 소속을 잃었구나.
저렇게 천연스레 크레인은 맴돌고 용접불꽃은 튀기고 있는데.
나 홀로 이렇게 떠나 가는구나.
시멘트 포장의 그 도로는 아득히 멀고 넓기만 하다.
정문에 이르는 멀고 먼 하얀 길. 하얀 길......
오, 주님.
이것이 패배자의 슬픔이 아니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첫날.
새벽 2시 기상.
게으르지 말아야지하는 강박 하나 내게 있으니.
추하지 말아야지, 아내나 아이의 눈에 추레하고 게으른 모습을 행여 보이지 말아야지.
기도.
18317 1997. 4. 2 (수)
이른바 백수의 첫날.
이른 아침 버스타고, 지하철타고 신평까지 간다.
무허가 도로연수선생으로부터 운전연수.
햇빛 쏟아지는 한낮.
영도도서관,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중늙은이의 어줍잖은 공부 폼이 어쩐지 멋쩍어지는 느낌은 내가 직장을 잃었다는 자의식 탓일것.
한낮, 햇살 밝은 한낮.
어느 코미디의 대사 '밤이 무서버'가 아니라 '낮이 무서버'쯤 되는겐가.
초저녁 눕고 2시 조금 넘어 일어나고.
낮이 무서븐 대신 새벽은 너무도 사랑스럽다.
俊이 녀석, 소식 한통 없으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불꺼 어둠에 잠겨 기도드리다.
18318 1997. 4. 3 (목)
서늘한 날씨 속, 봄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윈도우 와이퍼가 삐걱거리며 훔쳐내는 앞 차창을 통해 보이는 시야는 불투명하지만 옆자리 운전선생을 믿고 신평 도로를 악셀레이터를 힘껏 밟아 달린다.
백수는 입성이나마 번듯하고 깨끗하여야 한다.
운전 마치고 돌아오면서 들른 유나백화점.
삼미그룹 부도로 인한 눈물의 점포정리라던가 하는 요란스런 광고로 북적거리는 인파.
그런데 정작 백화점 물건은 눈에 띄지 않는 조잡한 상품들만 널려있다.
완전 사기판이다.
코오롱 지하상가에서 헌트의 잠바와 티셔츠를 사고, 부산우체국밑 상설 세일장에가서 몇 년 묵은 재고품인지 10만원도 안주고 로가티스 양복을 구입한다.
횡재한 기분.
백수 4일째를 맞는다.
18319 1997. 4. 4 (금)
강변도로- 70KM의 속도로 달려보고 한적한 도로를 요리조리 운전하지만 실제로 복잡한 도심에서는 어떠할지.
속력내기는 기실 운전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국의 도로에서는 디테일한 순발력이 중요하다.
그리고 좁은 공간에 주차하는 기술도.
잔득 흐린 하늘에서는 가끔 빗방울도 듣는다.
남포동 버스정류장 옆의 보리밥집.
콩나물과 열무를 듬뿍 얹어 고추장에 썩썩 비벼서 보리밥을 먹는다.
18320 1997. 4. 5 (토)
마지막 도로연수.
그러나 혼자서 거리에 나설 자신은 없다.
가는 빗줄기 주룩주룩.
낙영과 상곤 만나서 대취.
오늘 식목일 휴일이지만 이제 내게는 아랑곳할 사항이 아니다.
英이는 옛 대학 동아리 '씨 싸운드'의 1박2일의 산성 MT에 참석차.
어제 俊이에게서 전화왔었다고.
히유- 무사하고 건강하다는 그 한마디에 마음이 이리도 놓이는데
신무성에게서 전화, 최태용에게서 전화.
그다지 쓸쓸하지 아니하다.
꿈- 어머니, 媛이, 휑뎅그레한 적산가옥, 문단속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아래채의 병원, 나체로 방문한 부부는 심하게 다툰다. 규선이 형, 외국 장교 친구....
18322 1997. 4. 7 (월)
정오쯤, 슬리퍼 끌고 옥천탕 지하 이발관에서 머리카락 자르고 목욕.
목욕탕의 뜨거운 공기 속에서 나는 맥을 추지 못한다.
땀이 흐르고 숨이 컥 막혀서 기운이 쏙 빠져 버리고 만다.
이내 밖으로 나와 찬공기를 쐬고 다시 들어가고 반복하다가 30분도 못되어 목욕탕을 뛰쳐 나온다.
차를 몰고 다니고자 하지만 베테랑 딸네미를 태우지 않고서는 J는 아예 고개를 젓고 키를 주려하지 않는다.
실은 나 역시 겁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英이 이 녀석은 휴일이면 코빼기 보기가 힘이 드니 원.
열왕기 하.
북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게 멸망, 히스기야왕의 유대는 여호와의 손길을 받는다.
기도.
18323 1997. 4. 8 (화)
새마을 연수원과 동삼여중 주위의 새 아파트군.
새롭게 조성된 한적한 신시가의 청결함은 기분이 좋다.
그 부근의 가게도 썩 유망하지 않을까.
아파트,국민학교,여중,무선국이 배후에 있고.
키즈포토와 같은 엔젤 장사도 될 듯 하다.
무엇보다 집과 가깝고 낯설지 않은 우리 동네이며 또한 권리금이 형성되지 않았다.
성숙기는 아니지만 성장 가능성이 있는 곳.
한보 정태수회장 청문회.
수의를 입은채 불려나와 눈을 지그시 감은채 시종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를 공략하는 국회의원들은 역부족이다.
국민회의 김민석등 몇몇 눈에 띄는 면면이 있으나 나머지는 수준이하의 질문들...
열왕기하.
유다의 멸망.
기도.
18324 1997. 4. 9 (수)
어제 이른 아침, 출근전의 英이를 옆자리 앉히고 영도를 한바퀴 돌다.
시큰둥한 선생은 잔소리로 일관한다.
J와 태종대를 걷는다.
지는 목련, 절정으로 만개한 벚꽃은 너무 화사하고, 개나리의 노랑은 얼마나 눈이 부신지.
어여쁜 제비 꽃,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들... 정녕 봄이다.
봄 속을 가시버시 나란히 걷는다.
어제 저녁 동창들 모임이 있었으나 나가지 않기로 한다.
강기탁, 강일용, 신무성등과는 통화하여 양해를 구하였다.
J와 지하철 실려 서면 롯데호텔.
3층 와그너 코리아의 사업설명회.
늘씬한 도우미들을 동원하고 독일에서 귀화한 탈렌트 이한우씨를 모델로 내세워 제법 그럴싸한 규모를 과시한다.
치킨.
한 3시간여 J와 앉아, 홍보 비디오와 이한우씨의 설명을 들을때 까지는 제법 와그너치킨이라는 프랜차이스에 대한 메리트가 느껴 졌는데, 그 다음에 등장한 회장이라는 서른 여섯이라는 젊은 친구.
사업 확장 욕심이 그대로 뚝뚝 흐르는 말투와 그 친구의 품위없음에 신뢰감이 팍 죽으면서 흥미는 사라져 버린다.
모처럼의 늦잠.
백수의 시간감각, 오늘은 수요일이로구나.
18325 1997. 4. 10 (목)
'브로큰 애로우' 홍콩 오우삼 감독의 헐리웃 진출작.
존 트라볼타와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주연한 오락영화.
홍콩영화적 과장과 헐리웃적 스펙타클의 결합 쯤 되는 모양인데 수준 미달이다.
재미도 창출치 못하고 캐릭터도 어설프다.
PI서 씨, LW규 씨, LG섭 씨등에게서 전화.
부서장회의에서의 송별회, LW규 에게 적극 사양하는 뜻을 전하고.
PI서 씨는 산에 오르잔다.
18326 1997. 4. 11 (금)
따스한 봄이라지만 산정의 바람은 차가웁다.
회사를 그만둔 세명의 백수 산을 오른다.
P상무, LG섭 , 나.
범어사에서 북문까지, 다시 동문까지, 거기서 남문으로.
오리백숙과 산성막걸리를 먹고 케이블카 타고 내려오는 산행.
세사람은 그렇게 막걸리를 마시며 그 이상스럽고 고약한 풍토의 대선이라는 회사에 대하여 논한다.
내가 알지 못하였던 사실도 들을수 있었고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진실도 들려주고.
갑자기 무리한 산행, 오른 쪽 무릎 관절에 탈이 난다.
산행때에는 늘 이러한 증상이 있음을 알면서도 파스나 관절밴드의 준비를 소홀히 하였고 어제는 너무 많이 걸었다.
18327 1997. 4. 12 (토)
교대 앞에서 N영 만나 그의 차를 타고 수영 요트경기장에서 개최하는 창업박람회 가다.
수십 곳의 프랜차이스- 먹는, 입는, 마시는.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컴퓨터 관련 사업이다.
한 5시간여를 둘러보고 여러 부스에서 상담.
요즘의 트랜드도 읽을수 있었던 기회였고, 아주 유익하였다.
서적이나 컴퓨터등, 이를테면 좀 점잖은 듯한 사업 쪽에 마음이 기우는 이것은 아직도 내가 벌거벗지 못한 마음가짐이라는 증거다.
한보따리의 카다로그, 사업설명서 안고 그곳을 나온다.
낙영과 사직동에서 몇잔의 생맥주.
아침녁에는 YH중 씨, KK곤 등에게서 전화.
백수에 대한 안부.
18330 1997. 4. 15 (화)
N영과 수영 창업박람회의 창업정보스쿨 강의라는 것을 들으려 하였으나 수강자가 너무 없어 취소되었다고.
어슬렁거리며 다시 전시장을 둘러본다.
키즈포토는 이곳에도 부스를 차지하고 있고, BBQ라는 치킨, 포토네트, 베네타, 월트니...
관심이 가는 부분도 없지 아니하나 부정적인 어떤 부분도 느껴진다.
숙고 숙고할 일이다.
생각도 생각이지만 발로 뛰고 확인하여 자꾸 부닥침으로서 감각을 키울 일이다.
N영 은 차를 몰아 다시 반송 먼길을 달려간다.
7000세대가 넘는 아파트군, 그곳의 중심상권,
그곳 학원원장과 장시간 이런저런 얘기.
다시 영도로 , 고신대 아레의 아파트 상가를 N영 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는 아무래도 이 지역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집에 들러 저녁먹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N영은 차를 몰아 달아난다.
18331 1997. 4. 16 (수)
英이 운전하는 차, J도 뒷좌석 앉아 회사에 간다.
이제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있지 아니한 그곳.
멀찌기 차를 세워 두고 들어서는 본관 건물.
인사과 들러 의료보험증 반납, 경리과 들러 퇴직금 수령, 생산부 들러 H이사등 여럿 둘러앉아서 상투적인 반가움들을 나눈다.
공로패라는 상패조각, 김경곤이 전해주는 금반지.
... 이로써 이곳과는 모든 계산이 청산되었는가.
한국투자신탁 들러 퇴직금 단기 예치.
이제 모든 경제권은 J에게로 넘어가는 것이다.
다시 부전상가로.
英이의 이벤트회사와 거래하는 전자제품점.
J는 오래전부터 냉장고를 개비하고 싶어 하였었다.
냉장고, 전기밥통, 청소기등 2백여만원.
英이는 제 회사로 돌아가고 가시버시는 지하철타고 남포동에 내린다.
자갈치 시장, 멸치 명란젖 땅콩서껀 산다.
호정횟집, 백수의 남편은 소주를 마시고 중늙은이 마누라는 마주 앉아서 회를 먹는다.
후련함과 서글픔이 가슴 속 출렁거려 가뭇 취하다.
18332 1997. 4. 17 (목)
혼자 차를 몰고 거리를 휘돌아 본다.
자성대까지.
멈추었다가 출발할때, 서행할때, 언덕을 오를때 매우 서툴다.
스틱이 아니고 오토였다면 좋으련만,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
중리초등학교 부근 점포 시세 알아보다.
1층은 보통 평당 500만원 수준, 2층은 300만원, 그런데 10평 남짓한 작은 물건은 드물다.
18333 1997. 4. 18 (금)
N영 은 자꾸 서울에 다녀 오자고 한다.
서울의 롯데호텔에서 무슨 사업설명회.
그러나 그 아이템에는 나는 관심이 없어 사양.
운전면허증 찾다. 7년 무사고 운전이라 녹색면허증이다.
나는야 장농면허.
어제가 俊이 입대한지 꼭 6개월 되는날.
어느새 俊이가 군인임을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만큼의 세월인가.
俊이도 저의 군인임이 스스로 자연스러울 거라는 기대.
곧 첫휴가.
J가 어머니께 나의 상황을 넌지시 말씀드렸으면 하는 바람...
아, 나는 B생의원 부동산 처분에 대한 나의 몫을 애타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 기도.
18334 1997. 4. 19 (토)
어제 밤 10시쯤.
느닷없이 들이닥친 군바리 한 마리 있었다,
俊.
어제 낮에만 하더라도 녀석은 제 어미에게 전화하여 고되다는둥, 7월까지 휴가는 힘들다는둥, 천연덕스럽게 늘어 놓고서는 이런 깜짝 쑈를 연출하는 것이다.
여하튼 굇짜.
6박7일의 포상휴가, 작대기 2개 달고 군바리 티 완연하게 아들 놈은 돌아온 것이다.
오면서 큰집 들러 할머니에게 큰 절 올리고, 할머니에게는 제가 왔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여 놓고서- 과자서껀 먹거리 한아름 사들고, 또 비디오 테이프도 하나 빌려서는 돌아왔다.
첫휴가의 행복한 일등병은 지금 잠 들어 있다.
어제 단편적으로 들려준 녀석의 얘기에서 긍정적 낙천적으로 군대생활에 적응하는 듯 하여 듣는 아비의 마음은 기쁘기 짝이 없다.
비디오 '몬트리올의 예수'
상업주의 물신의 맘몬이 지배하는 도시, 형해화된 종교.
그 속에서 정신주의를 표방하는 가난한 연극인들.
예수가 당시 바리새인의 외식과 사두개인의 허영과 로마의 물질주의에 대항하였듯이, 순수한 정신의 인간으로의 환원을 절규하며 십자가에 못박힌 몬트리올의 예수.
주인공 다니엘은 예수역으로 粉하면서 예수처럼 현대를 절규하며 죽어간다.
모처럼 진지하고 감동적인 영화.
18335 1997. 4. 20 (일)
俊이- 이 6개월은 제 스물 남짓한 인생에서 겪는 가장 급격한 변화의 경험일터이지만 집에서 하룻밤 자고난 녀석의 어디에서도 6개월 전과 변한 면모를 조금도 찾을수 없다.
어차피 치러야할 홍역같은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제 인생에는 하등 영향없이 그저 시간만 지나고 나면 벗어나는 부담의 기간일 뿐.
구세대인 아비나 어미는 그 세월을 자기단련 자기계발 자기성숙의 기회로 삼기를 바라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늙다리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俊이 돌아오니 집안이 꽉 차고 생기가 도는 느낌.
녀석의 가끔 질러대는 괴성과, 친구 데려다 잔득 어질러 놓는것과, 슬리퍼 질질 끌고 왼종일 돌아 다니다가 밤늦게 돌아와 늦게 잠드는것.
모두가 새삼스레 정겹다.
오전에 英이 모는 차에 컴퓨터 싣고 박세동을 태워 수영의 그의 동생 가게로.
컴퓨터의 도사라는 그의 동생 박수동씨의 컴퓨터 점포.
컴퓨터의 HARD를 완전히 개비하기로, 쓸 것은 MODEM과 SOUND CARD뿐.
견적 90만원.
일요일이다.
내게는 일요일이 따로 있을수 없으나 英이는 휴일이다.
그리고 이 집에는 첫휴가 나온 군바리가 있다.
모처럼 한 식구의 시간이다.
俊이 방은 임자에게 내어 주고 베란다 책상 앞에서 기도.
18336 1997. 4. 21 (월)
英이 차를 몰고, 俊이는 옆자리 나와 J는 뒷좌석에 앉아 달린다.
봄의 휴일, 곳곳에는 인파가 넘친다.
암남공원에는 차가 몰려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하여 다시 반대로 방향을 잡아 달린다.
해운대 거처서 송정으로.
둘러 앉아서 먹는 생선회.
俊이의 먹성- 군대가서 녀석이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먹성 뿐이다.
삐딱한 자세와 엇가는 말투등은 여일한데 다만 먹는 것만은 변하였다.
차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녀석은 제가 군대라는 이상스런 상황에 묶여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일종의 분노를 갖고 있는듯 하다.
그리하여 오순도순, 아들 녀석과 얘기를 나누며 부자간 정을 새롭게 하고, 나름대로 용기와 지혜의 덕목을 피력하고자 하지만 녀석은 고분고분 이런 아비에게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18337 1997. 4. 22 (화)
봄비 주룩주룩.
휴가란 하루이틀 지나면 산뜻한 즐거움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옛날 나의 첫휴가가 그러했듯이.
쫄병의 휴가란 공연히 외롭고 공연히 억울한 것임을 나는 알고있다.
출근한 英이 잠시 오게하여 俊이 태우고 수영 컴퓨터가게로.
운영체계 WINDOW 95의 현란한 기능들, 물경 90만원의 경비를 들여 고친 컴퓨터를 사역꾼 俊이는 가쁜하게 들어 차에 싣는다.
俊이 휴가인사하러 英이와 제 외갓집으로 가고 나는 사직동에서 낙영을 만난다.
함께 서면의 양가집 밀면,
밀면 기술을 전수하여 주고, 육수의 액기스를 공급하여 준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간 것이다.
주인과 마주 앉아서 두어시간 얘기를 나눈다.
밀면 맛도 제법이고.
밀면- 여름철 성수기에는 분명히 돈이 될것같은데 겨울철 비수기가 문제다.
조직적인 프랜차이스가 아니라 재래식의 기술 전수, 그리고 비교적 적은 투자는 마음에 드는데.
감리회사등 여기저기 소개하는 전화들.
아, 그만 그만.
다시 매인 목숨 되느니 밀면집 주방장이 열 번 백번 행복할 것이다.
그 행복감에다가 뜻과 마음과 힘을 기울여 보탠다면 경제의 윤택은 당연히 획득할수 있는 무엇이다.
俊이 모레면 떠난다.
18338 1997. 4. 23 (수)
4.3인치 박격포의 포수는 힘을 제법 쓴다.
컴퓨터 본체를 가볍게 5층까지 들고 올라와 이것저것 설치를 한다.
시험 가동, 만족스럽다.
구청에 가서 俊이의 서울행 항공권 구입하고, 중리에 있는 컴퓨터 전문점에 들러 보안기, 마우스등속을 사가지고 돌아오다.
俊이는 외출중.
귀대날자가 하루하루 닥아와 녀석의 마음은 스산한 것 같다.
그리고 자꾸만 어디 취직을 하라는 어미때문에 아비의 마음 역시 스산하다.
내일이면 俊이 떠난다.
아들놈 가고나면 구체적으로 무언가 몸을 움직이자.
역대하.
솔로몬, 성전을 완공하다.
18339 1997. 4. 24 (목)
언제나 부산의 봄은 바람이 지배하는 계절.
이렇게 썰렁한 날씨가 계속되다가 느닷없이 여름은 찾아온다.
俊이 아쉬운 시간들, 6박7일의 황금같은 시간은 지나고 다시 기어 들어가야하는 쫄병의 막사, 층층시하의 고참들과 훈련과 ...
얼마나 들어가기 싫을까.
내 첫휴가때 정말 죽을 만큼 귀대하기 싫었던 기억....
그러나 이제 금방이다. 곧 쫄병에서 벗어나고 그런대로 군대생활의 재미도 터득해 갈것이다.
J, 어머니께 전화로 나의 회사 그만둠을 말씀드린 모양이다.
심려하심이 눈에 선하여 마음은 아픈데, 또한 한줌 기대의 마음은 부풀기도.
종일 P/C 앞에 앉아서 프랜차이스 자료들을 입력하다.
N영 과 통화, 그나마 같은 입장의 N영 이 있음으로 얼마나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지.
俊이 오늘 10시 비행기로 서울행.
그리고 21시까지는 양구의 부대로 들어가야 한다.
웃통 벗어부친채 모로 쓰러져 잠든 모습이 안스럽다.
곧 깨워 목욕하게 하고 7시30분쯤에는 김해공항으로 출발하여야 한다.
기도.
18340 1997. 4. 25 (금)
英이 차를 몰아 오전의 도심을 빠져 나간다.
김해공항.
10시10분전, 녀석은 탑승장 입구로 사라진다.
뒤에 남은 어미와 아비와 누나.
녀석, 6박7일의 일장춘몽.
서울서 제 고모 만나고 저녁 8시쯤, 무사히 양구에 도착하여 부대 앞에서 전화하여 준다.
낙영은 월트니 핫도그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모양이다.
18341 1997. 4. 26 (토)
俊이, 다시 돌어간 군대의 분위기에 잘 적응하고 있을까.
그 고약한 첫휴가의 귀대기분을 나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디 군대뿐이랴.
살아보니 그러하지 않던가.
싫은 상황으로 들어가야 하는 그 고약한 기분을 느끼는 경우는 부지기수 아니던가.
어쩌면 인생의 절반 이상은 싫다는 상황으로 기어들어가, 그렇게 순치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 싫었던 상황이 어느새 익숙하여 때로는 즐겁게도 되는 것이다.
싫은 상황을 즐겁게 만드는 그것이 마음다스리기의 최선의 방법이다.
낙영이 차를 몰아 밀양으로.
밀양의 월트니 체인점, 촌냄새 물씬한 인테리어의 점포.
주인내외와 장시간 얘기.
제법 장사는 되는 모양이지만 프랜차이스 본사에서의 지원은 부족, 자체로 이것저것 만들어 팔기도 한다.
가지산 산악으로 뚫린 도로를 휘돌아 내려와서 금정동 월트니 부산지사 방문.
소장이라는 친구는 우리가 어필하는 사항들을 대부분 인정하며 핫도그라는 아이템의 유망성을 강조한다.
N영이는 이 쪽에 관심이 지대하다.
18342 1997. 4. 27 (일)
비디오 '와이어트 어프'
캐빈 코스트너가 와이어트 어프로 분하다.
존 포드의 '황야의 결투'에서는 헨리 폰다가 와이어프 어프, 빅터 맞추어가 닥 할리데이 였다.
존 스타제스였던가, 'OK목장의 결투', 여기서는 버트 랭카스타가 와이어트 어프, 커크 다그라스가 닥 할리데이였고.
이 두편의 옛날 영화에서는 시정과 낭만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그게 아니다.
로맨티시즘을 증발시켜 버린 와이어트 어프, 감동이 없다.
하리횟집에 CS교, SJ엽 , PP갑 둘러 앉다.
소주를 마시고 당구를 치고 맥주를 마신다.
하릴없는 대선 주변의 얘기꺼리, 맴도는 대화들...
18345 1997. 4. 30 (수)
태종대까지 가서 흙을 퍼 담아와서 화분의 흙갈이를 하는 J.
이것은 보기 좋은 그림이다.
12시, 함께 집을 나선다.
동회- 지역의료보험 가입하려 하였으나 월 4만원가량의 보험료가 아까워 가입을 유보한다.
부산역 옆 국민연금공단- 월 5만원 가량의 불입금은 계속 넣기로 한다.
초조하지 말자고 시시로 다짐하지만.
기실 초조하지 않을수가 없다.
수면속에 까지 그 초조함은 밀려온다.
꿈- 포악한 어머니, 나는 바다인지 풀장인지에 텀벙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수영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