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2 1998. 7. 1 (수)
몇날 며칠 고객의 발길이 없는채 보내는 6월의 끝날.
잔득 찌푸린 하늘은 오후가 되자 비를 뿌린다.
마음을 가라앉혀..
젊은 혈기도 아니면서 늘 들끓는 마음밭을 가라앉혀...
쇼 윈도우에다 임대 매매등 쪽지를 뽑아 붙이고 차분하게 창업잡지도 읽는다.
형, 홀연 방문하여 겉도는 싱거운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이내 돌아간다.
점포주인 KS동 모셔다 내 처지를 토로하고 배려를 호소한다.
18773 1998. 7. 2 (목)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나와서 작금의 IMF 시국에 대한 해석과 해법들을 쏟아낸다.
몽롱한 경제용어들을 구사하면서.
쇼 윈도우에 붙여놓았던 포스터들 떼어내고 '점포 정리!! 파격할인!!'이라고 출력하여 붙여 놓다.
이제 우유부단이나 더 이상의 숙고가 소용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빨리 처분하자.
18774 1998. 7. 3 (금)
쇼 윈도우에다 "점포정리!! 파격할인!!"을 써 붙이니까 비로소 발생하는 매출.
구매충동이란 이와 같이 싸다는 암시에 걸려드는 것이다.
장마는 소강상태.
빨리 점포가 나가야 하는데, 작금의 세상 꼬라지를 보아하니 쉽게 나가 줄 것 같지 않아 정말 걱정이다.
KS동 씨가 이런 상황을 인정하고 점포 보증금과 월세를 좀 깎아 주면 그래도 다른 사람의 점포임대를 기대하여 볼만한데 KS동 씨는 그럴 의사가 조금도 없으니.
18776 1998. 7. 5 (일)
은행들은 퇴출되고, 기업들은 빅딜이다 구조조정이다, 참으로 어수선하고 살벌한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도 월드 컵 열기는 뜨겁고.
이제부터 쏟아져 나올 실업사태...
있는 놈은 더욱 살만한 세상이고 없는 놈은 곱다시 죽어나가야 할 우라질 세상이다.
본격적인 IMF 는 아직 멀었단다.
이것은 서막에 불과하다고.
조그마한 행복, 좁은 테두리의 소박한 행복이 이토록 지난하단 말인가.
세상은 빈틈없고 훌륭한 시스템에 의하여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태엽감는 새, 혹은 미친 곡예사가 태엽을 감음으로 돌아가고 있다.
견디자.
주님.
18777 1998. 7. 6 (월)
일요일 저녁, 아래 태종파크에 사는 W이 집 J와 방문.
W이 아버지의 초청, 양주를 마시며 W이 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
사람은 좋으나 어딘가 허황하고 과장하는 지식은 좀 모호.
TV, 왕년의 청춘배우 손창호.
행려병자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여 있다.
시한부 생명.
철저하게 스스로를 방기하는 삶을 살고 있는 그.
먹어서는 안되는 소주를 숨어서 홀짝이고.
나는 이런 프로를 보면 눈물이 흐른다.
오늘부터 공부를 하게 된다.
체계적인 디자인 공부.
컴퓨터 그래픽 공부.
기도.
18778 1998. 7. 7 (화)
초여름의 불볕 더위.
양정 황령산 기슭의 동의공업대학.
그 언덕을 허위허위 올라간다.
개강식.
동의대학교와 동의의료원 동의대학등 학원 재벌인 이사장, 흡사 대선조선의 안회장 인상이다.
장광설의 치사, 도열하여 국궁하는 학장 교수들.
학교라는 곳에서도 어쩔수 없이 흐르는 권위주의.
오리엔테이션- 전문대학답게 교수진의 구성도 상당한 실무적이다.
컬리큐럼- 디자인론, 컴퓨터그래픽론, 디자인마케팅론, ImageProcessing, Presentation....
컴퓨터 그래픽이라면 아무래도 애플의 매캔토시이지만, 그래픽과정은 맥과 아이비엠으로 나뉜다.
나는 아무래도 손에 익은 아이비엠을 지원.
젊은 학우들, 그러나 늙다리도 몇 명 끼었다.
18779 1998. 7. 8 (수)
디자인 마케팅론.
금강기획에 오래 근무하였다는 강사, 실무의 에피소드로서 시작한다.
실습실의 윈도우.
그러나 수강생 대부분은 이미 상당한 컴퓨터의 기초실력들을 갖추어서 여자 강사는 놀란다.
교재는 아직 나오지 않다.
수업 마친 오후, 가희 J와 교대.
'닉슨'
올리버 스톤의 영화.
인간적으로 약점이 있고 추악하기까지 한 미국 대통령 닉슨.
그리고 보수적인 미국의 주체 세력들.
닉슨이 케네디의 초상화 앞에서 중얼거리는 독백의 대사.
"국민은 당신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상을 보지만, 나를 통하여는 자신의 추악함을 본다"
과연 그랬을까.
곽선희 목사 '사도신경' 다시 읽다.
18780 1998. 7. 9 (목)
산업디자인과 과장의 '디자인론'
바우 하우스를 자세히 알게 된 것은 소득.
박일철이라는 시간강사, 본래 화가인데 그래픽에 관한 깊은 실력이 있다.
자신의 저서를 교재로 하여 '컴퓨터 그래픽개론'은 열강이며 수준급.
그가 쏟아놓는 정보도 고급이다.
기탁이의 전화.
곧 중국에 가는데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어려움 토로.
18781 1998. 7. 10 (금)
CAID 실습실.
벽에 부착된 선풍기는 돌아가지만 찜통 더위.
DTP- Desk Top Publishing.
전자 출판 시스템이다.
그 프로그램은 포토샾의 회사인 ADOBE 사의 'PAGE MAKER'
이 프로그램을 카피해다가 가희의 컴퓨터에 이용하면 무척 유용할 것이다.
전에 K사장 권유하는 일사천리라는 비싼 프로그램은 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수업 마치고 더위에 흔들려 버스로 가희 들어서니 뜻밖에 P갑 홀로 앉아 가게를 지키고 있다.
방문하였다가 英이 학원 갈 시간되어 대신 가게를 지키고 있다고.
그림 한점 사고 차몰고 돌아가다.
내일이면 어머니 가신지 49일째.
49일이 지나면 영혼은 비로소 하늘에 올라 그 분의 나라에 가서 편히 쉬시는걸까.
18782 1998. 7. 11 (토)
연일 땡볕이다.
올 여름은 초장부터 기세를 올린다.
실습실.
'코렐 드로우'
벡터이미지.
이 그래픽 프로그램도 유용하다.
그리고 내게는 낯설지 않은 것들.
저녁 가희 뒤편에 상펴놓고 LD찬 씨 맥주 사와 마시고 있는데, 가게보러 찾아온 젊은이들.
우연하게도 그중 한명은 남천동 담시화랑 사람이다.
부산은 넓은듯해도 이리도 좁다.
18783 1998. 7. 12 (일)
새벽마다 책상 앞 앉아 드리는 나의 예배시간.
성경읽고 기독교 서적을 읽고 불끄고 기도드리는.
자신의 밑바닥에 내려가 스스로는 도저히 구제될수 없는 죄의 속성을 발견하라.
그리하여 빛나는 새벽별인 그리스도를 발견하라.
이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논리도 아니고 추리도 아니고 가름침에 의한 것도 아니고 다만 심령의 실험, 도덕적인 실험에 의하여만 깨우치는 그것이 신앙.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은혜.
18784 1998. 7. 13 (월)
가희의 점포가 나가든 안나가든.
KS동 씨가 계속 월세를 요구하든 안하든.
빠른 시일 내에 가희는 철수되어야 한다.
고정비도 감당못하는 상황.
일요일.
아침부터 설치기 시작한다.
노동.
우선 俊이방 단층 장을 창가로 옯겨 공간을 확보한다.
어영차 어영차 英이와 힘을 쓰며 피아노를 옮긴다.
마루의 장의자를 안방에 들여 놓는다.
그리고 베란다 나의 공간, 비가 오면 질척거리는 각목들과 스티로폼을 거두어 낸다.
맨 타일이 드러나게 하여 호스로 붓고 솔로 문질러 청소.
베란다 내 방 철제 책상을 내다 버리고, 부엌베란다의 탁자 찬장 쌀통들을 내다 버린다.
세식구의 중노동으로 마루에는 가희로부터 철수할 장비를 수납할 공간이 어느정도 확보되고 베란다도 청결하여 졌다.
노동 그 자체도 모처럼 즐겁구나.
18785 1998. 7. 14 (화)
바람이 선들 불어 더위는 한결 가시다.
동의대학 캠퍼스, 초록 기쁨을 뽐내는 숲들이 수런수런 노래를 부른다.
LJ덕 교수, 사람은 좋아 보이는데 말은 어눌.
코렐 드로우와 포토 샾의 실무 강사.
월드컵 프랑스 우승, 박세리 메이저 골프 대회의 삼관왕.
18786 1998. 7. 15 (수)
실습실에서 PAGE MAKER 프로그램을 압축하여 복사하여 가희로 가져오다.
압축을 풀어 인스톨하려 하니 도무지 되지 않는다.
CONSIS를 찾아가며 모니터에 뜬 메시지를 해석하니 '도둑질하지 말라'는 경고다.
머쓱하기보다 생명없는 광물이 사람의 얼굴에다 침을 뱉는 느낌이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소프트웨어를 도둑질한다는 도덕적 수치심은 들지 않은채 어떻거든지 내 하드에다 그놈을 잡아 넣으려는 투지가 솟는다.
프로그램 따위가 인간에게 경고하다니.
가희의 밤.
세창공예 KD호 사장 방문.
서너시간 마주 앉아 대담.
사람 좋은 30년 장사꾼.
18787 1998. 7. 16 (목)
장마 다시 내습.
종일 비 내리다.
수업은 유익하다.
혼자서 익힐 때는 얼마나 많은 오류를 겪었던가.
정보와 지식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동기를 부여해주는 환경과 인적 교류가 있다는 점.
귀가 길의 교통문제 해결.
건축설계사로 있다가 퇴직한 젊은 친구가 마침 영도 살아 그의 승용차를 얻어 탄다.
새벽.
비는 그저 내리고.
기도.
18788 1998. 7. 17 (금)
ADOBE 社의 '페이지 메이커'는 참 유용한 프로그램.
편집 디자인은 나 역시 전부터 관심이 지대한 부문이다.
오후, 가희에서 J희 가 맡긴 복원 사진들, 포장하고 간단한 편지를 써 소포로 부친다.
모처럼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18790 1998. 7. 19 (일)
산업디자인과 과장 CD희 교수, 그의 연구실에서 함께 차를 마신다.
그는 나를 IMF 희생자의 전형으로서 생각하는듯.
날더러 학급 반장을 맡아 달라는 부탁.
어쩔수 없는 승낙.
수업 마치고 언덕길 내려가 역시 양정에 있는 백조아파트, S곤 의 집으로 간다.
곧 H근이도 오고,
거실에 둘러 앉아 맥주를 마신다.
S곤이는 점포를 당분간 접고 한참 사진예술에 빠져있다.
김복만 교수의 수제자로 자처하며.
H근이는 나와 함께 영도로 들어와 우리집 마루에서 자다.
18791 1998. 7. 20 (월)
비오는 일요일이 될것이라더니, 불볕 더위.
H근이와 가희에 앉아 바둑.
피차 下手의 마구다지 바둑이라서 엎치락 뒷치락.
녀석은 요즘 불교 경전에 푹 빠져있고 어느 땐가는 입산하여 탈속하겠단다.
그런데 녀석은 바둑 하나에서도 이토록 수양이 부족한데 탈속이라니.
웃기지 말라는 나의 핀찬.
18793 1998. 7. 22 (수)
135번 버스는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타고서는 흔들려 한시간여.
그 동안 시간 나는 여러 갈래의 사념에 잠긴다.
밑천없는 장사는 없을까.
점포없이 내 집에서 하는 SOHO.
마루에 차려 놓은 장비로 .
도로 쪽 창문에다 '좋은생각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붙여 놓고, 아파트 입구에다 동판으로 조그만 안내 판을 붙여 놓아.
그림, 액자, 디자인, 편집등의 영업을 하면?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이다.
18795 1998. 7. 24 (금)
옆 2층 이발소 들어가 머리를 확 쳐버렸다.
G.I Style.
딴에는 미망을 끊는 폼인가.
가게 앞에 있는 KS동 씨.
손을 끌어 얘기나누자고 청하였으나 한사코 뻗댄다.
보증금이나 월세를 깎아 점포를 내 놓지는 못하겠다는 완강함.
점포를 비우든 말든 2년간 보증금은 돌려 줄수 없으며 월세도 꼬박꼬박 내야하고.
월세는 보증금에서 공제하겠다는...
18796 1998. 7. 25 (토)
서울 인터내셔널동방이라는 의료기기 무역회사를 경영하던 WS규.
회사가 부도 나고 빚장이로부터 도망처 내려오다.
늦은 저녁 가희로 찾아온 S규.
귀공자풍 얼굴은 여전하지만, 늘 고급스런 취향의 입성은 후줄그레하다.
아, 모두 망하는 판이다.
짜장면과 덴뿌라를 시켜서 술을 즐겨하지 않는 S규 는 짜장면을 먹고 나는 술을 마신다.
길고 긴 얘기들은 구차하다.
그 사업의 역정이야 내가 구체적으로 무얼 알아들을수 있겠는가.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뿐.
집에 와 승준이 방에서 함께 자고, J가 장만하고 있는 아침도 먹지 않은채 바삐 나가는 S규.
18798 1998. 7. 27 (월)
일요일.
가희에 박혀 Hw 선생님 시어머님 영정사진 만들고 젊은 신부가 맡긴 웨딩사진을 연출한다.
오후, 가희 셔터 내리고 돌아와 마루와 부엌의 벽과 천정에 롤라 페인팅.
보통 중노동이 아니다.
마님은 허리가 빠지고 목이 떨어져 나갈것같은 머슴에게 솜씨가 없고 부실한 공사라고 핀찬을 퍼붓는다.
추켜 주어도 능률이 없을 판에 뉘라서 즐겁게 중노동을 하랴.
여하튼 동기를 실어주는데에는 너무도 인색한 마누라짜리.
18799 1998. 7. 28 (화)
포토 샾.
LJ덕 교수, 따로 디자인 연구소를 운영하는데 그의 전문은 주로 DTP쪽인 것 같다.
인쇄, 복제미학, 인쇄의 꽃 제판,
이제는 모든게 디지털화 되었다.
사진식자로 원고를 작성하여 수작업으로 편집하여 촬영하고 4도 분판 필름 작성하는 번거로운 공정이 아주 심플한 공정으로 바뀐 것이다.
오퍼레이터가 아닌 디자이너의 개념으로 어프로치하여야 승산이 있는 DTP.
중요한건 그렇다.
소프트웨어적 FUNCTION이 아니라 감각의 개발이다.
디자인이란.
KS동 씨에게 내용증명을 써 띄우다.
...도무지 장사가 되지 않아서 언제까지나 출혈을 감수하고 운영할수 없다....가게를 비우겠다....2년의 계약이지만 1년이 지난 시점에 보증금은 돌려 주기 바란다...그 간의 달세는 드리겠다....
18800 1998. 7. 29 (수)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
SM성 의 집, 장전동 경남한신 아파트의 드넓고 화려한 일실.
부부동반으로 네 친구 모여 앉는다.
G탁 이까지 중국서 돌아와 참석.
KI용 에게는 뜻밖의 젊디 젊은 아내, 녀석 재주도 좋을사.
수협 전무 Y재, 협심증으로 고생.
M성이는 대궐같은 집이 벌써 몇채.
순박하였던 고성 촌놈이 이제에는 나같은 놈과는 비교가 되지 아니하는 부자이다.
고등학교때 뵙고, 처음 뵙는 녀석의 모친께 큰 절 올리고, 떡 벌어지게 차린 상 둘러 앉는다.
18801 1998. 7. 30 (목)
꾸벅꾸벅 졸면서 듣는 강의.
가희에서는 할일이 태산이다.
6만원 짜리 웨딩 사진도 뽑아야 하고, 이삿짐도 꾸려야 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문을 밀고 들어서는 SJ엽.
그도 회사를 그만 둔 것이다.
모든 일 접어둔채 함께 마실 밖에.
아,직장 잃고 부도나고 알량한 점포의 문을 닫고.
모두 어쩌란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