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2 1998. 6. 1 (월)
엄마 육신은 이제 썩고 있을까.
마알간 물이 되어.
영혼은 지금 어디 있을까.
나도 이제 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산 것들은 이토록 가볍고 징그러운데.
그곳 어머니 만나면 나는 무거울까.
18742 1998. 6. 2 (화)
오후에 가희로 성호 찾아오다.
고기튀김 시켜다 고량주 마신다.
이씨 집안, 서씨 집안 얘기... 어머니 얘기...
18744 1998. 6. 3 (수)
추적이며 비내린다.
서늘하다.
어머니.
당신은 신불산 산자락에 묻혀 있지만, 내 가슴에도 묻혀 있습니다.
언제나 채워지지 않은 무엇으로.
도우시는 하나님.
인생의 허망함에
시린 영혼에
도우시는 도우심으로 도우소서.
18745 1998. 6. 4 (목)
가급적 가희를 빨리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새벽.
"기적의 하나님을 믿으면 불가능한 일은 우리의 머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알면 그것으로 문제는 결말이 나는 것이다. 기적을 믿으면 우리에게 영원한 인내가 생긴다. 실로 기적의 신앙은 우리를 적극적인 인간으로 만든다. 실로 기적의 신앙은 우리에게 소망을 품게 한다. 죽음을 이기는 소망은 기적에서 나온다. 하늘에 오를 소망도 기적에서 나온다." -우찌무라 간죠-
기적.
나의 신앙이 기적이 되어라.
18746 1998. 6. 5 (금)
가희 들어앉아 디자인 전공이라는 여학생의 그래픽 숙제를 주문 받아 작업.
사진 명화등을 깃들인 칼렌다로 컨셉을 정하여.
품들이는데 비하면 그 대가가 너무나 미미한데도 나는 온 신경을 기울여 열중한다.
J와 英이 장모님 생신 앞두고 사직동.
지방자치단체장, 의원 선거일.
누가누군지 관심 있을리없는 우리 식구들은 모두 기권.
흐린 하늘.
어머니 가신지 열흘이 넘었다.
18747 1998. 6. 6 (토)
어머니, 그곳에 누워 얼마나 썩었을까.
살은 흐물어져 진득한 액체가 되어 땅 속 벌레의 맛있는 먹이가 되고.
진짜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신가.
내 고통을 보고 계시는가.
단절된 그곳.
어머니.
18748 1998. 6. 7 (일)
금정산.
대선조선 OB팀등을 비롯한 20명 넘는 인원들.
어머니 문상에 대한 인사의 기회.
살이의 조건.
양산 쪽에서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 능선을 타고 봉우리를 몇 개 넘어 범어사 계곡에 이르는 나로서는 처음 밟는 코스.
J는 김밥을 10인분 이상 만들어 싸주었는데 모두들 푸짐한 도시락을 가져 와 남을 판이었다.
어머니, 好喪 운운의 얘기.
과연 죽음에 있어서 호상이라는 게 있을까.
죽음은 영원한 이별, 이별은 슬픈 것.
죽음이란 늘 哀喪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 어머니 초상은 호상, 좋을호 호상.
영도병원 영안실, 웃고 떠들고, 술은 맛있고, 규선이형은 반갑고, 삼촌 고모들 고맙고, 사람들이 많이 와주어 남보기 좋았고, 격식들은 격에 맞고하여....
어머니 죽은 날, 호상이었다.
나에게만은.
어머니는 죽었음으로.
그 확고한 죽음을 어머니는 죽었음으로.
죽음의 그 명확함으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를 나만큼 느끼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18749 1998. 6. 8 (월)
일요일.
PP갑 부부 다녀간후 인적 끊긴 가희.
어머니의 죽음.
작년부터 불어닥친 내 인생의 어떤 크라이시스인가.
그 크라이막스를 어머니가 만들어 주었는가.
서서히 어머니 죽음이 가져다준 허망함이 이성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죽은 어머니.
죽은 어머니가 내게 남긴 무엇, 그 의미를 나는 내 것으로 깨닫고자....
그리고 정리.
하나의 개념으로서의 정리.
추상화된 하나의 개념으로.
그리하여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기.
삶과 죽음의 경계는 확고하다.
그녀는 죽었다.
육신은 벌레의 밥으로 해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녀의 영혼은 그녀가 신앙한 하나님의 곁으로 간 것이다.
죽음처럼 확실하고 굳건하고 완강한 것은 없다.
18751 1998. 6. 10 (수)
비 흩뿌리고 잔득 흐린 날씨.
당연히 가희에는 적막이 흐른다.
媛이에게서 내가 갖겠다고 고집한 어머니 젊어 사진들.
동경여의대 유학시절의 예뻤던 규수.
그 사진들을 스캔하여 모니터에 띄어놓고 매만지며 하루를 보낸다.
곁에는 자존이 아닌, 노여움의 소주가 있다.
나는 노여웁다.
어여뻤던 한 여인이 있었다.
나는 그 여인에게 성욕을 느낀다.
가희에서 내다보는 거리의 풍경화.
루오의 그림.
교외의 그리스도.
18752 1998. 6. 11 (목)
어머니 처녀적 사진들.
전형적인 포트레이트.
명암을 짙게 하여 색을 입히고 어머니를 애무한다.
그러나 잡히는 것 없는 허망함..
한 순간의 청춘, 찰라의 반짝거림.
이윽고 늙어 병들어..
이제 그녀는 지금 꽁꽁 땅 속에 묻힌채 썩어가는데.
사진 속 어여쁨이란 이제 썩어가는 몸.
한때 지녔던 모습이 이리도 어여쁜들 그 어여쁨이 무에란 말인가.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18753 1998. 6. 12 (금)
가희.
손님도 없고 가게를 보러 오는 사람도 없다.
야금야금 시간이 흐르고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은 허망함.
역설적이게도 그리움에 목에 메이는데 그것은 허망한 그 존재와의 연대감.
죽은 존재와의 생명의 합일의식.
허망함과 실존함.
어머니, 어머니는 그렇다.
내 존재 속에, 생명 속에 핏속에 아직 죽지 않았다.
어머니는 엄연하게 나의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18756 1998. 6. 15 (월)
이른 아침 버스를 탄다.
사직동에서 N영 S곤 H근 만나 산을 오른다.
사직동에서 만덕, 병풍암의 석불사, 상계봉 코스.
만만치 않은 코스다.
18758 1998. 6. 17 (수)
고등학교 동창회.
생전 참석않았지만 어머니 문상에 대한 인사로 참석치 않을수 없다.
무성, 일용, 태문, 영호, 일용, 만권, 영진, 규명, 기성등....
서면의 일식집.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 보았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오뚜기 한쌍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남지나해 속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황석영 '몰개월의 새'-
나는 황석영이 이십대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이제 오십이 넘어서야 겨우 알아 차렸다.
살이에는 유치한 것이란 없다.
18760 1998. 6. 19 (금)
내가 어리석다는 것을 깨우치는.
내가 악하다는 것을 깨우치는.
내가 못났다는 것을 깨우치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는.
그것을 위한 시련.
새로 태어나기 위한 해산의 고통.
바로 이것이기를.
그리하여 여태까지 얼마나 유치하였는가, 바로 그 진실을 깨닫는.
주룩주룩 비 내린다.
18761 1998. 6. 20 (토)
점심 하자는 형의 전화를 노여운 대꾸로 사양.
나는 지금 형제를 만나고 싶지 아니하다.
나는 아직 유치하므로.
지금 나는 가게를 빨리 나가게 하고, 아파트를 빨리 팔아야 한다.
그리하여 가게달린 자그마한 집을 구하여야 한다.
토요일.
비는 개이고 날씨는 맑다.
18762 1998. 6. 21 (일)
H근이 오토바이 타고 가희 찾아오다.
두판의 바둑.
녀석의 바둑은 나와 마찬가지로 소인배의 바둑.
점심먹고 돌아가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시편 139-
18763 1998. 6. 22 (월)
흐리고 바람불어 음산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가희에 앉아 일요일을 지샌다.
"쥬신구라"
일본 무사들, 사무라이...
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확고하다.
그들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미 죽은 죽음에 미학을 덧붙이는 것이다.
월요일.
여전히 흐리고 술렁술렁 바람이 불어 창 밖 숲의 나무들이 추운 나비떼처럼 춤을 춘다.
18765 1998. 6. 24 (수)
꼭 한달이 되었을 뿐인데 벌써 일년쯤은 되는 것 같다.
어머니, 신불산 자락 땅 속에서 육신은 온전히 해체되었을까.
죽은 생물을 해체시키는 땅속 미생물의 역할이 대단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영도 봉래산에서는 늙어 죽은 새들이나 짐승들의 시체를 발견할수 없다.
청소부 역할을 맡은 생물들과 미생물들이 시체를 해체 해버려서 결코 호기심많은 사람들의눈에는 띄지 않게 하는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어머니는 썩었다.
J희 다녀가다.
20년전 찍은 가족사진, J경이를 끼어넣어 합성을 부탁하다.
18767 1998. 6. 26 (금)
본격적인 장마.
종일 주룩주룩 비 내리고 눅눅한 습기가 허공을 떠돈다.
가희, 추적거리며 비 오는 날 누가 그림사러 올까마는 나는 가희를 지킨다.
달리 내가 무얼 하랴.
비디오 영화.
'돈 쥬앙'
말론 브란도가 비겟덩어리가 되어 웃기는 연기를 하고 페이 더너웨이는 못알아 볼 정도로 독살스런 인상의 노파가 되었다.
'함정' 션 코넬리.
프라이멀 피어와 유사한 종장의 반전이 압권일 법한 내용인데 끝부분이 질척거린다.
할머니 장례때 내려왔다가 돌아간 俊.
그 아이에게 편지를 쓰는 J.
사랑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동의대학의 6개월 교육과정.
실업자 재취업 교육.
신청하려 한다.
18768 1998. 6. 27 (토)
그야말로 호우.
장대비가 줄기차게 내린다.
중리언덕을 비바람 헤치고 올라가 동회에서 주민등록등본 떼고 양정으로 간다.
신청서 작성하여 접수.
컴퓨터 그래픽- 하루 4시간씩 6개월과정인데 노동부 지원을 받아 무료교육이다.
그리고 훈련수당까지 지급하니 금상첨화.
컴퓨터 그래픽, 나는 이 분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내 접수번호는 1700번을 넘었다.
뽑는 인원은 한 200명이나 될까.
월요일 면접후 합격자 결정한다고.
꿈- 할아버지 입관까지 하였는데 다시 살아난다.
18769 1998. 6. 28 (일)
동의공업대학의 교육.
교육도 교육이지만 훈련 수당이라는 몇십만원의 돈이 지금의 내게는 절실하다.
며칠째 숙면은 이루지 못하는데, 새벽 화장실의 거울에다 J가 써놓은 글.
"제발 휴지 치약 아껴 씁시다"하고 끝에다 하트 세 개를 그려 놓았다.
그 세개의 하트가 나를 이토록 안위하는줄 마누라는 눈치나 챌까.
기도.
곽선희 '현대인을 위한 신앙고백'을 읽고.
18771 1998. 6. 30 (화)
모처럼 볕이 들었다.
한낮에는 제법 무덥다.
땀을 줄줄 흘리며 양정 언덕배기 올라 동의공업대학 강당.
가득한 사람들.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고 나와 같은 노털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래도 컴퓨터 관련 교육이라 젊은 실업자들이 위주일 것이다.
그런데 저 쪽 얼쩡거리고 있는 JS영 만난다.
그도 1년 이상 놀고 있고 인터넷 관련 교육을 받고자 신청한 것이다..
내게는 반가운 해후였으나 그 친구는 곤혹스런 포즈.
컴퓨터그래픽스 과정에는 제일 많은 인원이 늘어섰다.
교수라는 사람과 면접하여 합격.
7월 6일부터 개강이다.
하나의 숨구멍 트기에는 성공하였다.
모색의 시간을 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