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본관이 배천이고 평산서 사령질을 다니다가 검수역말로 나아가 마방직을 했던 사람이외다. 하루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부담마를 정돈하고 땅거미질 무렵에 술이나 한잔 마시려고 역참거리를 내려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한줄금 비치더란 말이오. 그래 비를 피하여 잠시 어느 민가의 처마 끝에 무료히 서 있었수.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로 아랫도리가 금방 젖어버렸지요. 그냥 비를 맞으며 걸을까 하고 막 처마밑을 나서려는데 길가 퇴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계집의 반쯤 가리운 얼굴이 나온단 말입니다. 여보셔요. 바쁘지 않으시다면 저희 집안일 좀 도와주구 가시지요. 목소리가 청아하고 손짓이 은근하여 나두 모르는 새 겹대문 안을 들어섰지요. 일이란 별것이 아니고 광에 있는 쌀섬을 져다 빈 뒤주에다 쏟아 넣어달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