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 28

장길산 1권 (28)

“해가 지자마자, 나와 있었어요.” “총대 어른은 뭐 하셔?” "저녁 드시구 일찍 자리에 드셨어요." “밤공기가 서늘한걸.” 그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후미진 산비탈길을 지나 곧장 손돌의 외딴 초가로 내려갔다. 손돌이 거처하는 바깥방에는 불이 꺼져 있고, 부엌이 달린 안방에만 관솔불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묘옥이 발끝걸음으로 마루에 올라 미닫이를 열고 들어오라는 시늉으로 손짓했다. 방 아랫목에는 이미 간소한 주안상이 차려져 있었다. 수수로 담가 거른 막주와 산나물무침 몇가지가 올라 있는데, 콩가루를 두텁게 묻힌 인절미도 한접시 놓여 있었다. “야, 웬 인절미가 다 있소.” “쉬이...... 찹쌀이 어찌나 귀한지 송화 나가는 분에게 무명 끄틀을 주구 한됫박 사오게 했어요. 드셔요.” “우리집에서두 리루..

장길산 1권 (27)

만첩 청산 늙은 범이 살찐 암캐를 물어다 놓고 이가 없어 먹지는 못하고 흐르름흐르름 아웅 어루는 듯, 북해의 흑룡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색구름 사이에서 넘 노는 듯, 단산의 봉황이 대열매를 물고 벽오동 사이로 넘나드는 듯, 연못 깊은 곳에 청학이 난초를 물고서 오송간에 넘노는 듯, 두 몸이 칡넝쿨처럼 어우러져 풀어질 줄을 모르고 감겨만 드는데, 묘옥은 길산의 탄탄한 어깨에 손톱을 찍어 누르면서 몸을 열었다. 봄비 내린 찰흙 속으로 뻗어내리는 억센 소나무 뿌리처럼, 그의 신근이 묘옥의 열린 몸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잔솔밭 위를 지나는 바람소리가 제법 스산했고,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 가끔씩 솔잎이 떨어져 그들의 벗은 몸위에 내려앉았다. 길산의 춤사위가 용틀임에서 깨끼리장단의 허리잡이춤으로 바뀌었다. 녹수청산..

장길산 1권 (26)

소매로 치고 창칼을 뿌리치고, 다시 흩어지며 무녀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창부의 넋이 씌운 세 사람의 광대는 곤두박질치며 차례로 빠져나가고 무악이 가라앉으면서 탈광대 하나만 남았다. 남은 광대는 신명의 극치로 황홀경에 정신을 잃고 뒤로 번듯이 쓰러졌다. 쓰러진 광대를 이리저리로 쓰다듬으며 무녀의 넋두리가 계속 되었다. “어떤 광대가 올라왔다. 황해도허구두 구월산 광대, 해주 송도로 한양 경성을 올라올 제, 놈틀 밭틍을 건너올 제, 돌두 굴러서 구렁 메우고 마무두 꺽어 다리를 놓고 한양 성내를 올라왔네. 얼씨구 좋다. 절씨구나, 아니나 노지는 못하리라. 이렇게 좋은거는 처음 보것다. 세월아 네월아 오고가지를 말아라. 장난에 호걸이 늙어나 간다. 인생 한번 늙어지면 다시나 젊지는 못하리라. 이 때나 안놀구 언제..

장길산 1권 (25)

길산이네 광대들과 박대근이의 상단은 안악장을 벌이고 나서 월당강의 지진나루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큰돌이가 이끄는 광대패는 안악서 먼저 재인말로 돌아가고 길산이, 갑송이는 박대근이와 밤새껏 여러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나루터에서 배에 오르기 전에 박대근이 말했다. "이번 장삿길은 무엇보다도 아우들을 여럿 갖게 되어 내 틀림없이 큰 부가옹이 될 성 싶소. 아마도 예상보다는 빨리 이 박대근이의 상단이 생길 거요. 송도 가서 꼭 광대 물주 한 번 되어보우. 지방 장시를 모조리 쓸어버립시다." "글쎄요, 우리네는 그러고 싶지만, 어디 노인네들이 허락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대장부 사는 일이란 게 ..... 날마다 제 처지에만 매달려서야 되갰습니까." 길산이가 말하자 갑송이도 껄걸 웃으면서 자기 가슴을 두드..

장길산 1권 (24)

"도대체 자네는 무엇이었나?" "사노였수." 라고 감동이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의 집 종이 어찌 글을 알겠나?" "그럴 만한 사연이 있수." 하고 나서 감동이는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한숨부터 쉬었다. 그는 갑자기 솟구치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저고리 자락을 들어 비볐다. 감동이는 한양 숭례문 안의 금동에서 교리 벼슬 하는 집의 여비 양갑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노비문서에는 오직 솔비양갑고부모명부지라는 글 밑에 노감동병신생모사비양갑이라고 적혔다. 감동의 나이 십삼세 때에 그는 동갑내기인 주인 아들의 방자 노릇을 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서당에 모시고 다녔고 늘 곁에 붙어 있게 되니 학문을 알고 싶었다. 양반 도령이 글을 읽을 때엔 곁에서 그 소리를 따라서 외곤 했었다. 워낙에 성의가 있고 배우고 싶..

장길산 1권 (23)

"여기에 신복동이가 나와 있소?" "신생원 나리는 여기 안 계시구. 그 대신 전에 주내방 차인 하던 사람이 회계 어른으루 나와 계시우." "주내방 차인? 그자를 지금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겠소?" "결성골 용정루엘 찾아가보슈." "결성골 용정루..... 처음 들었는데." "예, 게가 전의 임대인 댁이지요." 박대근이는 짧게 신음했다. "나쁜 놈들! 남의 집을 빼앗아 창가를 만들다니...." "아유 무슨 말씀이 그렇게 어패가 있으슈. 빼앗긴 뭐, 그 바보 같은 작은 임씨가 헐값에 팔았지." 박대근이는 눈을 부릅뜨고 노파를 건너다보다가, 음식값을 치러주고는 나서려는데 노파가 불렀다. "나리, 셈이 맞질 않는데요." "뭐요, 밥 겸상 열에 술 한 말이면 셈이 꼭 맞는데." "아니...... 또 있잖우. 얘..

장길산 1권 (22)

"끌러주고 함께 먹고 싶지만 달아나면 내가 경을 치겠으니 할 수 없네, 내 다 먹구 자넬 먹여줌세." "고맙수, 밥은 필요없구...... 술이나 한말쯤 시켜주시우." "누구 망하게....." "젠장, 술 한말엔 겨우 목줄기나 축이는 건데...... 참말 취토록 멕일라우?" "거 왜 사람을 쳐죽이구 남까지 귀찮게 만들어, 이거." "누가 죽을 줄 알았나, 홧김에 두어 대 패구 보니까 녀석이 똥을 싸구 죽어 자빠졌습디다." "자네보담두 죽은 놈은 더 불쌍하게 되었어. 신생원 쪽에서 아예 범잡을라구 내어논 토끼새끼 미끼였거든." "어째 그러우." "사람 공연히 숭어처럼 펄펄 뛰기만 하구, 세간의 간사한 꾀는 이해를 못하네그려, 신생원네서는 용댕이 선창이며 객주가 탐이 나는 게야. 헌데, 기운깨나 쓰는 자네하구..

장길산 1권 (21)

하인들은 되돌아갔고 그들은 용댕잇개의 어계방을 향해 돌아섰다. “거기 가면 더욱 남의 눈에 뛰기가 쉽지 않나.” “그럼, 이런 판국에 송장을 떠메고 우환이 난 집으루 들이닥친단 말야? 더구나 그 집서 송장이 나와봐. 신복동이놈만 기승이 나는 게지.” “어이, 무거워.” 우대용이가 덕이의 송장을 다른쪽으로 바꿔 메면서 투덜대자, 총대 선인이 말했다. “이 사람아, 기운깨나 쓴다면서 사람 한 몸이 무겁단 말야?” “내 손에 죽은 놈이니 기분이 나빠 그렇지.” 그들은 갯가를 따라 걸어갔다. 뱃사람 일행이 포구로 나가는데, 주막 앞에서 서성대던 노파와 마주쳤다. 주모가 겁도 없이 냉큼 나섰다. “어찌들 됐수, 그놈을 잡은 게유?” “떠들지 말어. 나중에 관에서 조사 나와두 모른 체하란 말이야. 입 잘못 놀렸다..

장길산 1권 (20)

막개가 남은 꿰미를 인심 쓰듯 건네주니, 주모는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구, 참으루 대인이셔. 이 많은 돈을 선뜻 내주시네. 염려 마슈, 내 과부를 호려내라두 해낼 테유.” “술이나 좀더 주우.” “예, 알이 통통 밴 자반아치를 맛나게 구워 올릴 테니, 술은 탁주루 하실라우 화주루 드실라우?” “화주 반 되 주시오.” 주모가 자반을 굽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막개에게 물었다. “우서방을 잘 아슈?” “듣긴 여러번이나 만난 적은 없소. 힘깨나 쓴다면서요?” “그 임대인이 부리는 뱃사람 중에 제일 힘꼴이 세답디다. 연평 사람이지요.” “까짓 놈, 뱃놈이 뭍에 올라오면 별거 있겠나.” “수군 다니다가 임대인이 군적을 빼주었답디다. 술 잘 먹고, 성질이 개차반인데, 약한 사람들께는 아주 부드럽지요. 댁두 용..

장길산 1권 (19)

덕이가 나귀의 볼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 녀석아, 네가 지금 누굴 태워는고 하니...... 이 어르신네의 애첩에 만회루 기방어멈을 태웠다 그 말이다.” “흥......” 취련이는 장옷을 깊숙이 쓰고서 덕이 쪽은 흘낏도 하지 않고 코방귀를 뀌었다. “얘, 어째서 코바람을 내느냐. 임가놈만 물고를 내버리면, 너희 만회루 바깥채앤 내가 들어앉는다. 그리되기만 한다면 너는 이제 머릿기생이 아니라 어엿한 기모루 올라서는 게야.” “참 나, 기맥혀 죽겠네. 나는 뭐 언제나 기방에서 사내들 까실림이나 받구 있나. 보아요, 나는 생원나리 작은방으루 들어앉을 텐데 혼자서 신명일세.” “에라 이년...... 무엄한 소리 지껄이지 마라. 네 따위가 감히 샌님의 소실루 들앉아? 다 의논이 되었으니, 오늘밤엔 손님 받지..

장길산 1권 (18)

“감영의 관전이 원금이라는 걸 임가 쪽에서 알면, 돈을 당장 갚을 게다. 갚고 나면 일은 모두 글러버리는 게야, 네 사삿돈이라구 외치며, 핍박하여 임가의 분통을 잔뜩 건드려놓으란 말야. 될수록 구경꾼이 많으면 더욱 유리할 것이니까.” “염려 마십시오. 그래서 틈을 보아 임가의 골통을 깐 연후에 허리뼈를 부러뜨리지요.” “아니야, 그자를 물고를 내는 것은 아무도 안 보는 데서 해야지. 그러니 며칠 뜸을 들이는 게 좋을 게야. 오늘은 소란만 피우고 오게나. 취련이년두 함께 데려가라구. 너는 취련이 서방 행세를 한단 말이지.” 곁에서 막개가 물었다. “샌님, 그런데 임가가 창피하여 돈을 갚아버리면 어쩝니까?” “원금이 관의 변릿돈인 줄 모르는 한, 임가는 돈을 절대로 갚지 않을 거야. 더구나 임가는 아들이 사..

장길산 1권 (17)

흥취가 났는지 박대근이는 잔질이 잦아졌고, 길산은 벌컥벌컥 들이켜는데도 여전히 덤덤했고, 갑송이는 갈비를 뜯기에 바빴다. 서슴지 않고 매옥이가 나서며 사설시조로 엮어 내려갔다. "역시 엮음이 우리 취향이로다." 흥취가 났는지 박대근이는 잔질이 잦아졌고, 길산은 벌컥벌컥 들이켜는데도 여전히 덤덤했고, 갑송이는 갈비를 뜯기에 바빴다. "벽사창이 어른어른커늘 님만 여겨 뚝 나서보니 님은 아니 오고 명월이 만정한데 벽오동 젖은 잎에 봉황이 와서 긴 목을 휘어다가 깃 다듬는 그림자로다. 마침 밤일새망정 행여 낮이런들 남 우일 뻔하여라." "이총각두 엮음새 한수 해보우." "그럴까..... 어디 그동안 목청 상허지 않았는가 떨어봐야겠군." 갑송이가 우람한 체격대로 굵고 거친 소리로 엮는다. "얽고 검고 키 크..

장길산 1권 (16)

"아니 언제 무더리에서 일루 날아왔네. 관가에 끌려간 줄 알았지." "재인패가 상가 무서워했지, 언제부터 관가 무서워한대?" 라고 큰돌이가 받았으며, "해주 것들 코가 석 자나 빠져서 장연길루 내빼데." "무더리는 시방 완전히 파장이더만. 우물집 쥔이 길산이를 꼭 보겠다네." 하며 작은잿말 사람들은 떠들었다. 그들은 값을 후히 받고 벙글대며 돌아갔다. 작은 잿말 사람 하나가 뭔가 생각났는지 돌아서며 물었다. "자네들 이번 가을 출행 계회에 나올건가?" 그들은 모두 재인계 계원이었는데, 철마다 이틀씩 모임이 있었고 여기서 연희 지방을 분담하고 손발도 맞춰 보는 것이었다. 큰돌이가 대답했다. "작은골이 큰골루 올라와야지, 이번 계회는 큰잿말서 열라네." "이 사람아 총대 손돌 어른이 작은골에 계시는데 ..

장길산 1권 (15)

"내가 동헌 전령이지 어디 해주 양반 전령이우. 말을 빌려두 꼴값은 세마 임자가 내는 법인데..... 내 지금 뛰면 조반 먹은 거 모두 띠 되우." 눈치가 멀건 관노 녀석은 물주의 애간장을 태우느라고 일부러 털퍼덕 주저앉아버렸다. 물주가 턱수염을 떨며 내려다보는데 호통을 칠까말까 하다가, 말고는 중치막 자락을 젖히고 바지끈에 달린 비단 주머니에서 세 닢을 꺼내어 땅에 던졌다. "옛다, 어서....." "예예, 벼락같이 전합지요." 관노가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갔다. 행수라는 자는 아예 땅바닥에 두다리 뻗고 앉아서 어이없는 듯 길산을 바라보았다. 길산이도 그자가 완전히 싸울 마음이 움츠러든 것을 알았다. "왜 덤비지 않느냐?" "우리가 성님을 몰라봤습니다." "너 같은 아우 둔 적이 없는데." "성님께 ..

장길산 1권 (14)

"갑송아, 물 좀 먹여주어라." "내가 뭐라더냐, 고기에 주린 놈만 오랬는데, 살집이 피둥피둥한 것들이 그리도 남의 살만 탐하느냐, 이놈들." 갑송이는 히죽대며 두 녀석을 한꺼번에 잡아 몇바퀴 뺑뺑이를 시키다가 다리 아래로 내던져버렸다. 다리를 가고 오던 장꾼들이 차츰 모여들어 서로 손가락질을 하면서 웃어대는 중이었다. 갑송이는 먼저 상통을 땅에다 갈아붙이고 엎드렸던 자가 엉금엉금 일어나자 뺨 한차례 울려붙이는데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콧날이 옆으로 돌아가며 단번에 주둥이가 터져버렸다. "너두 송사리나 두어 근 먹구 용궁 형리 앞으로 가거라." 물소리와 웃음소리가 사근다리 위에 가득 찼다. 이제 남은 것은 제법 침착해 보이는 오장 비슷한 놈과 겁에 질린 졸대기 한 녀석뿐이었다. 갑송이가 싱거운 듯 웃고..

장길산 1권 (13)

이어서 들어선 큰돌이란 광대도 수인사를 건네고서 격의없이 툇마루에 와서 엉거주춤 주저앉았다. "아저씬 장에 안 갈 테요?" 장충은 큰돌이를 흘끔 보면서 혀를 찼다. "이런 지지리 못나긴..... 호환 당한 놈이 애꿏은 고양이 밥그릇 찬다고, 어디 가서 맞구 다니다가 애들은 왜끌어모아?" "말씀 마슈, 내 까딱했으면 다시는 마누라 재미두 못 보고 칠성판 짊어질 뻔 했수." "촌구석에서 경을 칠 바엔 아예 문화 광대란 말 내지두 말어. 송도나 한양 가면 내로라 하는 건달들이 저자에 깔렸으니까." 큰돌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뒤에 섰는 두총각을 돌아보고 나서, 열을 올려 말하였다. "나두 장정 두엇쯤은 어깨넘이루 내치는 놈이우. 송화 본바닥놈들이 아닙디다. 해주 바닥 무뢰배들이래요. 요새 구월산 서쪽의 장연..

장길산 1권 (12)

갑송이는 몽둥이를 휘두르며 도적 무리의 가운데에서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몽둥이에 당하지 못하고 도적들이 뒤로 밀려났고, 감동이와 차인들이 그들을 차차 압축해 들어갔다. 박대근이는 창을 제법 잘 다루는 자와 칼 가진 자를 상대해서 싸우고 있었다. 상대는 창법을 제대로 익힌 듯 했다. 먼저 지남침으로 공격해 들어오더니 대근이 날렵하게 비켜나자 백원법으로 퇴거하면서 다시 기룡으로 갑자기 바꾸어 급습했다. 박대근이가 상체를 뒤로 넘기려는데, 이미 창끝이 뺨을 부욱 찢고 지나갔다. 박대근이는 뒤로 넘어졌고, 상대가 적수의 자세를 취하면서 창을 비스듬히 헤워 박대근이의 배를 꿸 듯이 들어왔다. 박대근이는 몸을 굴려 피하면서 창을 장검으로 받아냈다. 길산이는 칼을 날렵하게 쓰는 노가에게 쫓..

장길산 1권 (11)

말리는 감동이에게 졸개가 대들며 원망했다. "노가놈 따위에 충성 바칠 거 뭐 있수. 그 찢어 죽일 놈이 부두렁을 산채서 쫓아낼라구 안달하는 판인데." 졸개의 말에 의하여 두령인 노가와 부두령 감동이가 불화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무슨 사정이 있군 그래." 길산이가 슬쩍 던지자, 감동이는 한동안 뜸을 들였다가 한숨을 푹 쉬고 나서 얘기를 꺼냈다. "두령이란 자가 덕이 없고 마음이 좁아서 졸개 아이들을 몹시 학대 하오. 재물에는 터무니없이 욕심이 많아 상대를 가리지 않는데다 혼자서 차지할려구 그러거든. 나는 살생을 몹시 꺼리는데 그자는 닥치는 대루 사람을 죽인단 말요. 구월산으로 옮겨온 뒤부터는 나하구 사이가 별루 안 좋았지. 계획두 모두 내가 하고 아이들 데리고 살피러 다니기두 하는데,내 약산골 서낭테에 ..

장길산 1권 (10)

갑송이가 술상을 번쩍 치켜들며 일어섰다. 막걸리 사발이 굴러떨어지고 국이 쏟아졌다. 막 내려치려는데, 감동이는 두 손을 치켜들어 막는 시늉을 했다. "성님..... 약조는 지켜야지." 낄낄대던 술청 손님들은 웃음 소리가 여럿 속에 석이게 되자 마음놓고 광소를 터뜨렸다. 길산이도 팔짱을 낀 채 쿡쿡 웃었고 박대근이는 숫제 주먹으로 방바닥을 치며 웃는데 눈물이 비칠 정도였다. 그런 양을 휘둘러보던 갑송이도 하는 수 없이 픽 웃어버렸다. "젠장할 생쥐 같은 놈 . 자아, 술이나 쳐마셔라. 얘야, 한상 다시 내오너라." " 나 마감동이란 놈이우." "성명을 듣고 보니, 너두 천하 상놈의 천출일시 역력하구나. 얘,, 그럴 거 없다. 우리말 놓지. 나는 광대질 해 먹는 이갑송이다." 건너편 방ㅇ에서 박대근이가 ..

장길산 1권 (9)

갑송이는 이미 뽑혀진 다섯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앞줄에 버티고 앉아 있었는데 상대는 둘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자도 갑송이보다 몸집은 작았으나 눈꼬리가 매섭고 목은 짧으며 어깨가 다부지게 벌어진 것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 사내의 뒷전에 장정 서넛이 않아서 떡을 돌려 먹고 호리병에 담아온 술을 나눠 마시고 하는 품이 일행인듯하였다. 그들의 차림새로 보아 농부들은 아니고 보상들인 것 같았는데 패를 떠나 별개로 다니는 자들인 모양이었다. 드디어 심판을 보는 박대근이네 행수 차인이 나서서 말했다. "자아, 이제는 끝으로 남은 두 장사가 나와서 결판을 내겠소. 이긴 사람은 저기 천리를 달리는 청노새 한 필을 상물로 받게 되오. 자아 투전 걸오볼 사람은 양쪽 멍석에 돈들을 걸어두시오...

장길산 1권 (8)

"나두 알어. 헌데 참, 누가 왔다면서..... 새댁이라든가?" "새댁이 아니야. 너두 왜 들었지. 신천서 다 죽게 된 창기를 구완해 냈다는 소문 말이다." "들었어." "그 여자가 지금 총대 어른을 보살펴 드리구 있는데 정말 어느 집 규수에 못지 않더라. 하두 참해서 그 여자가 언제 창기 노릇을 했는지 못 믿겠데." "뭐 태어날 때부터 창기가 따루 있겠수? 그게 다 성정 나름이구 사람 나름이지." 하면서 길산은 은근히 그 여자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새벽녘에 그들은 잠이 들었는데, "문 열어! 빨리 문 좀 열라니까." 하고, 밖에 와 찾는 낯익은 목소리에 얕이 잠들었던 박서방댁이 먼저 깨어났고 뒤이어 길산이가 일어났다. "형님 목소리 같은데." "아니, 저이가..... 무슨 일이 있었나..

장길산 1권 (7)

손돌은 소향의 집에서 묵었고, 마음 착한 소향은 밤새껏 그 천한 여자의 몸을 씻기고 머리에 찬 물수건을 얹어주며 간호했다. 열이 차츰 내려갔고 이틎날 아침에는 의식을 되찾았다. 손돌은 환자를 소향에게 부탁하고 재인말로 돌아가며 나중에 꼭 갚으리라 치사를 해줬으나 소향은 빙긋 웃기만 했다. 저두 모처럼 활인을 거들게 되어 기뻐요. 몸조리만 잘 시키면 건강해질 것인, 자네가 거두어두고 잔일이나 시키면 좋겠네. 알아서 하죠. 이틀 사흘 지나든 동안에 종처의 고름이 터지고 창이 아물기 시작했는데, 부기가 빠져 수척해진 여자는 본 얼굴로 돌아오자 수려한 미모를 드러냈다. 처음에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더니 열흘지나 기동하게 되고부터 소향과 함께 바느질도 거들며 얘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여자는 금년 십팔세이며 이..

장길산 1권 (6)

"여느 겨를에 땅 파고 흙 덮고 하겠수. 우리 식대루 묻으면 되지." 광대패는 그들의 동료가 길을 가다가 죽으면 길에다 얕게 파묻고 잔돌멩이들을 그러모아 덮어주는 것이 상례였다. 지나는 해인들은 이 무덤을 알아보고 가엾은 광대의 넉을 위로할 겸, 행로에 재앙도 물리칠겸 하여 저마다 돌멩이를 던져주고 가는데, 얼마 안 가서 길가에는 자연스럽게 돌무더기의 탑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광대가 죽은 자리에는 창부라는 익살맞고 심술궅은 도깨비가 지랄병을 물려줄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법이었다. 길이란 광대들이 태어나는 곳이자 살아가는 동안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이며, 죽는 곳이며, 묻히는 곳이었다. 손돌과 장충의 수작을 곁에서 듣고 있던 어름사니가 제안을 하였다. "죽은 사람 장사 지내는 것보담두, 산 애기 먹여 살..

장길산 1권 (5)

수군거리더니 한 사내가 치켜들었던 몽둥이를 내리고 나서며 하겟말을 고쳐서 물었다. "재인패들 같은데..... 누가 행수시우?" "내올시다." 손돌이 대답했다. "이 마을에 어디 연고 닿는 데라두 있수?" 손돌 대신에 어름꾼이 나섰다. "있다마다요, 이 동리 선다님께서 풍류를 즐기셔서 저희가 해마다 찾아와 놀아드렸습니다." "선달? 큰나리, 작은 나으리?" "저어 ....." 반가워서 나섰던 어름꾼은 머뭇거렸고 동네장정이 말했다. "아마 감나무집 박선다님인 모양인데..... 그 어른 작년에 작고하셨소. 그리고 시방은 우리 동리에 우환이 있어놔서 외객은 받질 못하오." "그 댁에 가면 곧 숙박을 허락할 겁니다. 제가 작은 서방님과두 안면이 있습니다." 장충도 야속하여 조금 노기를 띠워서 말하였다. ..

장길산 1권 (4)

장충은 가슴이 털컥했고, 엄살을 떨면서 사정하였다. "아이구 바람이 들면 어쩌라구 그러십니까. 나리는 동기간두 없으시우." 도승은 처음부터 남의 직무에 끼여들어 이래라저래라 하는 포교가 못마땅했는데다가, 보잘 것 없는 선비의 험구도 들었고, 이제 자기가 승낙을 했는데도 가로막고 나서는 포교가 고까웠다. "여러 말 할 거 없다. 어서 태워줘라." "예예, 나으리가 참말 명관이십니다." 장충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올라타자 사공이 삿대로 모래를 밀어냈다. 다른 배가 다시 와서 닿자 포교는 그쪽에 모여드는 사람들께로 눈을 팔아버렸으니, 여인네들도 일일이 기찰하기가 어려운 판에 더구나 광대 형제에게까지 세밀히 검색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배가 강상에 두둥실 뜨고 사공은 노를 잡아 저으면서, ..

장길산 1권 (3)

이래서 한양 과거를 본답시고 올라가는데, 거리마다 국밥도 많고 막걸리도 흔천이오. 갖은떡에 갖은 실과에 이것 저것 먹다보니 엽전 두 돈 오푼이 거덜이 나는구나. 문절걸식으로과거날을 기다리니 꿈을 잘 꾸고 줄을 잘 잡아 고관대작네 행랑에 기별이 갔구나. 행랑살이십 년 만에 네 소원이 무엇인고 물으시니, 이내 몸이 객지 와서 같은 괄세 갖은 봉욕을 다치르고 벼슬을 한들 무엇할까. 소원은 다른게 아니고 밥 잘 먹고 똥 잘 뀌는게 소원이올시다. 그런 소원말고 선달이 어떠하냐. 선달 선달 좋다지만 선달 벼슬 못할 내력이 있소이다.내가 안 그래도 주야장천 서서 잘 다니는 놈이 벼슬까지 서게 되면 다리 부러질까 못하오.그러면 급제 벼슬이 어떠한고. 급제급제 하지만 급제 벼슬 못할 내력이 있습니다. 내 성미가급한 놈이..

장길산 1권 (2)

"장단 가는 방향에서 어째 북쪽으루 돌아왔을꼬. 더 멀리 달아날 터인데." "예, 그년이 원래는 외거 노비로서 지아비는 시노질 다녔죠. 헌데 우리 댁네서 소송을 오래 끌다가 연놈을 데려오게 된 겁니다. 노자가 많아서 남자를 장단 고을 이진사네루 팔아버렸읍죠. 헌데 계집이 달아난 뒤, 득달같이 수소문하여 그자의 동무되는 조현역참의 역노를 주뢰 틀어보니계집이 다녀갔다는 애깁니다. 지아비 되는 자가 먼저 해주나 강령 쪽으로 달아났으니 틀림없이 만날 게란 말이죠.""두 연놈을 다 잡을 테니 두고 보게.""그러면야 저두 수청 잡인으루 체면두 서구요, 나리께선 스무 냥은 어김없이 받으리다."그들은 두 잔씩 더 청해 마시고 나서 일어섰다. 겸인은 팔짱을 끼고 나각 앞 길가에 버티고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고, 기..

장길산 1권 (1) -황석영-

장길산 1권 -황석영- 서장 노상 황해도는 동으로 황해도에 인접해서 마식령 산맥의 산세에 닿고, 남은 예성강을 지경으로경기도의 들판과 만나며 북은 대동강을 건너 평안도를 바라보는데 서쪽으로는 바다로 솟아나가 중국의 산동을 마주보고 있다. 들판도 있으나 험한 산에 골짜기도 깊고 ,오랫동안 경부에 가까워서 예부터 관의 혹정에 민감했으며, 도둑이 많아 조정을 괴롭히곤 하였다. 팔대명산의 하나이며 태곳적 단군의 도읍지인 구월산은 그 줄기가 남서쪽으로 우회하여 추산을따라 불타산에 이르고, 막바지로 그친 곳에 장산곶이라는 험한 해안 마루턱이 있으니 옛 노래에,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금일도 상봉에 님 만나보겠네갈 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서낭님 조른다.하던 곳이 그곳이다. 그곳에 지방민의 입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