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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2권 (2)

카지모도 2026. 3. 11.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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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본관이 배천이고 평산서 사령질을 다니다가 검수역말로 나아가 마방직을 했던

사람이외다. 하루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부담마를 정돈하고 땅거미질 무렵에 술이나 한잔 마

시려고 역참거리를 내려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한줄금 비치더란 말이오. 그래 비를 피하여

잠시 어느 민가의 처마 끝에 무료히 서 있었수.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로 아랫도리가 금

방 젖어버렸지요. 그냥 비를 맞으며 걸을까 하고 막 처마밑을 나서려는데 길가 퇴창문이 드

르륵 열리더니 계집의 반쯤 가리운 얼굴이 나온단 말입니다. 여보셔요. 바쁘지 않으시다면

저희 집안일 좀 도와주구 가시지요. 목소리가 청아하고 손짓이 은근하여 나두 모르는 새 겹

대문 안을 들어섰지요. 일이란 별것이 아니고 광에 있는 쌀섬을 져다 빈 뒤주에다 쏟아 넣

어달란 것입니다. 일을 해주는데 계집이 연해 추파를 던지고 집에 남정네가 없어서 하며 눈

치를 보입디다. 알고 보니 계집은 평산 아전의 첩인데 근래 서방의 거동이 뜸하여 적조했던

탓이라 음욕을 이기지 못한 듯합니다. 물을 것 없이 술상을 차려 마시고 농탕질을 하다가

자리를 깔고 한참 행음을 놀았지요. 자리 속에서 그년의 허릿짓이며 감창소리가 얼마나 대

단한지 세 번을 거듭했소이다. 밤이 거의 삼경이 되었을 무렵인데 문 밖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요. 계집이 당황하여 나를 다락으로 밀어올리며, 주인이 왔어요. 포착되면 큰

일이오. 수선을 떱디다. 그년이 발가 벗은 몸 위에 간신히 치마와 저고리를 꿰고 나가 제 서

방을 들이는데. 시골 아전치고는 늙은이가 풍채있고 점잖습디다. 내가 다락에서 엿보고 있자

니 계집은 새침하게 토라져서 제 서방을 면박 주는데, 이 밤중에 어인 일루 평산서 달려왔

수. 큰마님께나 가실 일이지. 독수공방 한이 맺힌 내게 와서 어쩌시려오. 이렇게 수작질하며

타시락거리다가 서방이 제 계집을 희롱하려 하는데, 계집은 백방으로 거부하고 순종하지 않

는 것이었소. 아마 그동안 뜨음했던 서방의 애간장을 태워 다음을 경계하려나 보다 여겼는

데 실은 나중에 알구 보니 그게 아닙디다. 나를 끌어들인 것두 처음부터 계획이 있어서였지

요. 아전이란 자가 전장이 제법 많고 장사를 하여 점포를 두셋 가지구 있는 터에 슬하에 딸

만 자매가 있었지요. 첩의 소생이 있었는데 아마도 아전의 자식이 아닌가 봅디다. 아무튼지

술상을 차려 제 서방을 대취케 하여놓고는 다시 치마를 걷어올리고 음사를 한판 더 벌이는

데, 계집이 한편으로는 입을 벌려 감창소리를 내고 손을 뒤로 뻗쳐 뒤꽂이를 뽑습디다. 매서

운 독부지요. 뒤꽂이를 세워 서방의 목줄기를 노려 대번에 깊숙이 찔러넣는데 한참 그짓을

벌이던 자가 긴 신음 한 소리에 사지를 뻗습니다. 이년이 검불 떨어내듯 사내를 밀어 내렸

지요. 나를 다락에서 내리우더니 피가 낭자한 시체를 손가락질하면서 이 시체를 치웁시다.

나는 도적이 들었다고 할 터이니... 만약에 댁이 거절하면 소리쳐 사람들을 부르겠어요. 계집

의 얘기가 아전이 이미 늙어 사는 재미도 없으나 재산을 떼어 받으려면 이런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도리없이 걸려들구 말았지요. 오밤중에 난데없는 시체를 치우게 되었으니 정욕은

고사하고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립디다. 계집의 말이 이제 당신과 연분을 맺어 백년해로 하

여보자는 것이었으나, 시체를 치우고 난 뒤에 새벽 선잠을 깨어 문득 마음속으로 깨달아지

는 바가 있습디다.

나는 한갓 음욕을 채우려고 몸을 그르친 바 되었거니와 계집은 외간 남자를 끌어들여 제

하늘 같은 가장을 죽인 뒤에 시체 치우는 일로 공모하여 영영 묶어버렸으니 나는 완전히 수

노가 되었구나. 앞으로 이런 잔인한 년이 또한 전철을 밟지 않으란 법도 없겠거늘, 사람이란

뉘우친 다음엔 고쳐야 하는 법이다. 내 차라리 이 계집을 죽여버림만 같지 못하리라 작정하

고서 자고 있는 년을 식칼로 쳐죽여버렸지요. 그리고는 벌거숭이 채로 도망을 나와버렸으나,

그 집안에 검정 더그레와 벙거지를 그대로 두고서 동저고리 바람으로 나왔으니 발각되지 않

을 리가 있겠소이까. 잡혀 죽게 되었다가 사실이 밝혀지게 되어 회자수로 쓰였던 것이오."

본관이 배천인 회자수가 전력을 대략 얘기하고 나자, 다른 회자수도 얘기를 꺼내었다.

"나는 보다시피 경친 놈이올시다. 전에 두 번이나 옥살이를 했던 적이 있지요. 봉산서 원

래는 옹기장수를 하다가 골패에 손을 대어 돈에 쫓기게 되었소이다. 원래 손이 빠르고 눈치

가 맑아서 오히려 장사보다는 도적질에 능하게 되었수. 장터에서 남의 뒤짐을 했는데 봉산

부엉이라면 왈짜패들은 모두 압니다."

길산이 잠깐 말을 막았다.

"만동네 형제를 아시우?"

"알다뿐입니까. 그자들은 내게 돈냥깨나 얻어 썼습니다. 원래 내가 골패잡이를 하며 투전

을 시작했을 적에 손끝으로 패를 더듬어 맞히느라고 날마다 손가락 끝을 물에 담가서 단련

시킬 적부터 장사 생각은 집어치워버렸소이다. 우리네가 솜씨 자랑을 해 보일 적에 빈 대접

에 콩알을 가득 담아 어깨와 다리로 해서 몸 뒤오 올리고 내리고 돌려도 한알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손맵시를 부드럽고 날렵하게 합니다. 또한 그뿐이 아니오. 담넘기, 기둥타기, 지

붕타기, 지붕뚫기, 개피하기, 장롱과 패물함과 온갖 광의 열쇠를 쇠끄틀 하나로 열기에도 능

해야 하는데 한창때에는 서도에서 이 봉산 부엉이만한 도적이 없었소이다.

제일 처음에 잡힌 것이 옹진서였지요. 장물아치 맡은 자가 물건을 옮기다가 포교에게 발

각되어 잡히고 추심중에 매를 못 이겨 나를 찍어 냈습니다. 일년 동안 살고 나서 이렇게 이

마에 먹물을 찍혔습니다.

두 번째는 관아의 담을 넘어들어가 봉물짐 하나를 슬쩍했습니다그려. 한동안 색주가에 박

혀 떵떵거리며 지냈건만 한량패들과 시비가 붙어 싸움질 끝에 꼬리를 잡혔지요. 포교가 와

서 창끝으로 기방의 천장을 꾸욱 찔러 올리는데 대국 비단이 주르르 풀어져 내리지 않겠습

니까. 심한 매를 맞고 삼 년을 살았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년 전에 이 해주 저자에서 평양 상고의 돈전대를 빼냈다가 동행 상

인들꼐 띄어 뭇매를 맞고 잡혔습니다. 이미 세 번째이니 십년 동안 망나니 노릇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요."

봉산 부엉이와 배천 사령인 두 회자수의 전력 얘기가 대강 끝나고 나서 밥때가 되었다.

옥졸들이 풀려나와 우선 칸마다 지켜 섰고 옥 마당으로 음식장사치와 옥바라지하는 사람들

이 몰려들어왔다. 옥바라지하는 가족들은 옥졸의 죄인 점고에 따라 하나씩 나와 반합과 찬

합을 건네고 특히 관원이 들어 있는 삼칸 쪽에는 개다리소반이나마 번듯한 밥상도 들여갔

다. 옥졸에 뇌물을 쓰고 옥전거리 임집에서 밥을 대어 먹는 죄수들도 저녁을 들여 먹는데

그 층이 다담에 못지않는 것에서부터 주먹밥 개떡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었다. 회자수칸

에는 옥사장이 내리는 관밥이 있게 마련인데 점심에 먹고 남은 밥과 젓국이 고작이라 아예

물리고 그 대신에 용당포서 떠날 때 행수 선인이 입금시킨 것과 박대근이가 우대용이와 길

산이 넣은 어음 탓으로 옥전거리 주막집의 그럴 듯한 밥을 대어 먹었다. 주막 주인 사내

가 직접 날라온 겸상밥이 옥 안에 들어왔다. 국과 밥은 물론이요, 비린 것까지 끼였는데 상

위에는 따로 막걸리도 한병 얹혀 있고 식후 연초랍시고 남초에 곰방대까지 올라 있었다. 밥

을 먹으며 한편으로 주막집 사내와 우대용이 수작을 하는데, 그가 바깥 소문을 전해주는 것

이었다.

"김서방, 어찌되었나, 집행은 한다든가?"

"낼 모레라구 하데. 일감 생겨서 좋겠구먼."

"예미랄, 일감은 또 뭔 소리여?"

"좌우간에 바람 쐴 일이 생겼지."

"그나저나 딴것보담 압송한단 소리는 못 들었어?"

"누구를..."

"내야 이리되었지만, 이 장서방 말이야."

"장서방... 오라, 내 정신 좀 보게. 송도 어른이 부탁하신 그 양반말이로군. 아까 사창 포교

가 들렀어. 장계 올린 것이 떨어질려면 달포는 끌겠다더군."

"그놈에게서 얼마 맡았나?"

"백냥 받아두었네. 한 석 달 먹을 건 되니까... 염려없어. 저 양반 물고 치른 뒤에 자네 양

식값으로 챙겨두지."

"뭐라구, 이놈?"

길산이 상 위를 수저로 때리며 외치는데, 우대용이는 저대로 화를 냈다.

"그 찢어 죽일 놈 같으니... 박대인이 어음을 냈다면 못 되어도 삼백 냥은 될 터인즉 다

짤라먹었구나."

"두 사람 다 노염을 풀라구. 내 초면에 입바른 소릴 하는게 아니라 오늘 들어오신 장서방

은 듣기에 신생원하구 원한이 있다며? 그 사람이 눈을 시뻘겋게 뜨구 노려보는데, 만약에

형방께서 돈깨나 먹고 슬쩍 눈을 감는다 할지라두 옥에 찾아와 죽이려 할 것이요, 더구나

살인 대적이라 장계까지 올랐는데 정승도 구명해내지 못합니다. 그저 참형 당하기 전까지

신관이나 편히 지낼 꾀를 쓰시우. 내 술을 못 들일까, 계집을 못 들일까, 돈만 좀 쓰면 원님

부럽잖게 옥살이시키리다. 그리고 우서방... 분기내는 것은 모르는 소치여. 어디 돈 삼백 냥

이라면 사창포교 그 사람 혼자 먹는가. 형방 비장께 한 백 넣고 옥사장가 자기가 종히 오십

냥씩 나누면 내게 떨어진 약시대가 백 냥으로 계산이 맞아떨어진다구."

잠자코 듣고 있던 길산은 한숨을 쉬며 밥상에서 물러났고, 우대용이가 창살 사이로 팔을

뻗어 주막 사내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래 말 잘했다. 원님 부럽잖게 호강시켜준댔지? 오늘 내 방에 손이 들었으니 술상 보아

올 테냐?"

주막 주인이 껄걸 너털웃음을 웃었다.

"아니, 이자가 뭘 믿구 이리 드센 척하구 야단이야. 가만있어. 내 이따가 늦은 밤에 약주

한동이 들여줄 테니까, 그보다두 이리 귀 좀 대어봐."

우대용의 귀를 잡아당긴 사내가 재빨리 속삭였다.

"사창포료 말이 송도 사람 전갈에 자네들을 늦어도 겨울을 넘기게 하진 않을 거라데. 우

선 저기 장서방이란 손을 구명해내는 일이 급하네. 송도 분은 한양에다 줄을 대겠다구 하지

만서두 아예 싹수가 글른일이여. 그렇다구 자네처럼 내정 돌입한 적당을 과실로 살인한 것

두 아니요, 관군과 싸워 살상시켰으니 죽는 건 꼼짝없네."

"그래 무슨 수라도 있단 말인가?"

"있긴 꼭 한가지 방법이 있네."

어느결에 우대용이가 바싹 긴장하여 길산을 곁으로 손짓해 불러 앉혔다. 막상 반응이 이

렇게 되자 주막집 사내가 슬쩍 딴전을 피우면서,

"있긴 있는데... 자네들 얼마나 낼라나? 돈이 있어야지."

"돈... 양식값두 근근할 정도루 엄청난 판인데 우리가 옥 밖이라면 도적질이라두 하겠지만

갇힌 놈들이 무슨 돈이 있는가."

"허허, 옥에 갇힌 자가 들보를 뽑는단 말두 있네. 하다못해 마누라까지 팔 건 팔구 보는

게야. 더구나 자네들껜 뒤가 든든하지 않나? 지금 세상에 송상이라면 오품 벼슬까진 바꿔

앉힌다잖아. 돈 가지구 안될 일이 어디 있겠나. 역적질하는 것두 아니구 살인난 옥사나 줌

바꾸려는 겐데."

길산이 제 목숨값이 흥정되는 데에 고지식한 성미가 발동하여 퉁명스레 내뱉으며 물러나

앉았다.

"고만들 두슈. 까짓 죽으면 흙 한줌이긴 빠르나 늦추나 매일반인데, 공연스레 관원들과 구

차히 흥정하긴 싫소이다. 술이나 좀 마시게 해주면 고맙겠수."

우대용이가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 얼마쯤이면 구명이 되는데?"

"동 천냥이면 되어."

"뭐라구? 천냥이 뉘 집 워리새끼 이름인 줄 알어."

"참, 이게 보통 돈이람야 팔도 행상을 휘젓고도 남을 대금이지만, 사람의 목숨값이란 말

야. 자네들은 그저 시름놓고 앉았으면, 내가 송도루 쌍급주를 사서 급히 놓을 테니 그 송상

댁네나 일러달란 얘길세. 벌써 두 사람 양식대로 누백 냥을 썼으니 자네들께 애착이 단단허

달밖에. 틀림없이 아깝다 않고 구명해줄 걸세. 이 사람아, 비록 옥살이는 해두 우선 목숨이

붙어남구 봐야지. 북망산으루 가구 나면 여름 한철의 구더기보다두 못한 게야."

우대용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가 말했다.

"하긴 자네 말이 옳지만, 까짓 사람 백정이나 하며 살아간들 무엇하겠나."

"내가 옥전거리서 이 장살 해오며 한둘을 겪어온 사람이 아닐세. 우선 연명이 급하구 그

다음에 날을 봐야 하는 법일세."

"날을 보다니..."

"아니 예서 참말 옥살 맞은 아수라귀신이 되구 싶어?"

"그럼 어째... 날구 기는 재주가 따루 있어야지."

"이봐, 옥사장의 연중 녹이 얼만지나 아는가. 나락 두어 섬이야."

"자네들 돈냥이나 나올 듯싶어 귀띔해주는데, 옥사장의 후생 팔자나 고쳐줄 듯싶다면 두

몸이 광명 천지에 나서는 것쯤이야 여반장일세."

"그렇다면 구명보다두 탈옥쯤 시켜주어."

"쉿... 목소리 한번 크다. 지금 성내에서는 아무데두 도망 못 가네. 천상 궁방전으루나 수

철장으루 노역을 나가면 몰라두 읍성 안에서는 잡히구 마네."

"언제 노역을 나가나?"

"이제 곧 겨울이니 해 안으룬 틀렸네. 봄이 되면 노역들을 내보낼게야. 그때까지 우선 구

명이나 해놓고 틈을 보아야 하네."

"내가 놓인 몸이라면 강화나 마포를 뒤져 우리 행수 선인을 만나 몸값을 받을 수가 있겠

건만 아무튼 송도루 기별은 해야겠지. 송상 배대인 댁을 찾아서 차인 행수 박대근이란 양반

에게 대이도록 하게나."

"쉿 옥졸이 온다. 내 이따 술 들일 적에 다시 와서 의논을 허지."

옥졸이 각 칸마다 옥바라지들을 몰아내며 끌칸으로 다가왔다. 그는 옥사장이 평소 우대용

이께 대하는 것이 너그럽고 또한 새로운 죄수를 합방시키는 것에 더욱 기가 죽어서 마구 대

하지는 못하는 눈치였다.

"어떻게 저녁은 다 먹었나?"

"지에 막 끝나서 상을 물리는 참일세. 번 끝나면 우리 주막으루 오게나. 주안상 봐둘 테

니..."

"우리 먹을 술이 있어?"

"암 있다뿐인가. 낮에 새루 걸러논 약주가 한 독인데."

너스레를 치는 주막 주인은 역졸이 쇠를 따주어서 상을 들어 내갔다. 모두들 물러가자마

자 다시 한번 각방의 죄인 점고가 있고 나서 조용해졌다. 옥마당에 큰 모닥불이 피어올랐고

번이 갈려 나갔다. 대용의 방에 있는 네 사람은 각자 기대어서 주막 사내가 넣어준 곰방대

한죽을 돌려가며 피웠다. 우대용이가 길산에게 대를 넘겨주면서 말했다.

"장서방, 사람이 우선 살구 봐야 하오. 송도에 통기하여 구명할 방도를 뚫어봅시다."

길산이 상처가 닿지 않도록 꾸부정히 앞으로 숙이고 앉아서 길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글세, 비록 박대인과 형제지의를 맺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그이께 구명을 요구할 만큼

큰 은덕을 입혀드린 바가 없소이다. 사나이가 무슨 염치루 아무 사유 없이 신세지기를 바라

면서 목숨에 연연하겠소."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외다. 돈이야 쓰구 나면 곧 벌 수도 있구, 물질은 갚을 수나

있지만, 장서방과 박대인께서 형제의 의리를 맺었다 할 제 돈냥이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그

어른두 이 얘기를 들으면 가소로이 여길 것이오. 주막 사내가 비록 허풍이 심하고 간교하기

는 하지만 감옥 사정에 저만큼 밝은 자의 제안이니 확실한 구명책이 있을 것이오."

길산이 침통하게 앉았을 때 봉산 부엉이와 배천 사령 출신의 두 회자수가 나서서 말참견

을 하였다.

"우리가 예서 더러운 목숨을 잇고 있는 것은 그나마 회자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냥

죄수였다면 굶어서 한 달이 못되어 죽었을 거요."

"관에서 남겨주는 한밥을 먹다가, 이제 우서방 덕분으루 밥에 술에 호강은 하오만 참으로

목숨이 모진 것이지요."

봉산 부엉이가 얘기를 계속하였다.

"다른 놈들은 목이 잘려 황천으루 가고, 어떤 놈들은 반병신이 되어 나가고 귀양으로 내

쳐지구, 관노루 부려 나가구 하여 옥 안에서 서너달을 넘기는 자가 드물건만 우리네는 십

년을 기한하구 남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자처할 생각두 없지 않아 몇번이나 목을

매달고 죽어버릴려구 했으나, 이제는 십년 세월을 기다리게끔 되었소이다. 우선 장서방두 살

구 볼 생각을 해두시오. 헌데 이건 우리 생각인데 저 주막집놈을 믿진 마시우. 돈냥에 닳구

닳은 놈이라서 언제 배신할지 모릅니다. 지금 두 분께 뒤가 든든하단 낌새가 있으니까 저리

다정하게 아첨을 붙이지만, 나올 게 없을 듯하면 당장에 송장이 되어 나가두 거적 한 장 덮

어줄 위인이 아니외다."

"여기 죄수가 모두 몇이나 되오?"

길산이 묻자 배천 사령이 말했다.

"글쎄올시다. 시골 군옥이라면 토옥이니 한 열 명 남짓이면 가득 찰 것이며 서울 포청의

전옥서에는 수백 명이 끓는답디다. 그래두 해서 감영의 옥이니 줄잡아 오십은 넘을 것이오."

"글구 나는 인원이 많으니 대략 반 년부터 석 달짜리루 쳐서 늘상 삼사십 명은 되겠구먼."

하며 우대용이가 셈을 잡았고,

"아니우, 좌옥만 쳐서두 그쯤은 되고 우옥에는 온갖 잡죄인이 들락날락하는데 사흘 걸리

에서 보름 걸이까지 좀이나 많습디까."

봉산 부엉이가 가장 그럴 듯이 얘기하여 남은 두 사람의 회자수는 역시 옳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옥 사람들이야 거지반 약한 백성들인데, 우리게 비하면 그야말루 법 없이 살 수 있는

양민들이지요. 밥때 되어보시우. 옥바라지하는 이들이 모두 아낙네거나 늙은이들 아닙디까."

얘기를 주고받는데 갑자기 바로 옆방에서 창살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칸에 고택골이오."

번을 서던 옥졸이 느릿느릿 걸어와서 일칸 앞에서 수작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예, 창물아치 영감이오."

"사흘 전부터 운신을 못하구 드러누웠더니 여하튼 오늘 안으루 죽은 모양이우. 자리를 좁

힐려구 밀어붙이는데 뻣뻣해서 죽은 걸 알았습니다."

옥졸이 몇사람 더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자물통을 따면서 투덜되는 소리도 들렸다. 봉

산 부엉이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저 영감태기 죽은 지 며칠 되었소."

"그럼 시방은 썩어내렸겠구먼."

"뭣하러 시체를 방에 껴들라구들 알리지 않았을까?"

봉산 부엉이가 다시 설명을 하였다.

"저 영감이 일찍이 옹진서 좀도적들의 장물을 넘겨 팔아왔는데, 돈냥이나 모았다지요. 나

두 거래깨나 있어 잘 아오만 그 왜 하루 아침때 저녁때 두 번씩 반합을 들이던 이가 양자

노릇하는 총각이오. 일칸놈들이 영감 죽고 나서 앓아 누웠다며 총각을 속이고 반합 받아먹

는 재미루 신고를 않더니 아까 밥 먹으며 내다보니 총각이 오늘은 안 왔습디다. 어제 저녁

이 마지막이었으니 죽은 걸 눈치챈 게 분명하지요. 이제 차압두 끊겼으니 제놈들이 시체를

방에 두어둘 까닭이 있나요."

옥졸이 놀라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썩은 송장인거. 이놈들아, 거적 및 깊숙이서 썩어나는 시체를 이제 알리느냐. 모두

대장으로 치도곤이를 주리라."

하며 떠들어대는 옥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방의 간장과 색장이 언놈이냐, 이리 나서라."

함부로 매우 치는지 에구 지구 하는 소리와 매 떨어지는 소리가 부닥이며 들려왔다.

"들구 나서라."

회자수칸의 네 사람은 창살에 붙어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적에 둘둘 말아 들린 시체

의 축 늘어진 목과 뻣뻣한 팔이 허공중으로 뻗쳐있었다. 길산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어디 야산에라두 묻어나 줄까?"

"쳇... 묻긴 뭘 묻소."

"그럼 화장하우?"

"내다 버리지요. 전에는 순명문 밖을 지나 동강방 부근에 다 버렸는데 역병이 한번 있고

부터는 송림방까지 차부를 시켜서 실어다가 썰물 때에 바다에 던진답니다. 연고 있는 시체

는 동강방에 내다 놓고 며칠 말미를 주어 수습해가도록 하지요."

시체가 옥마당을 지나 우옥의 뒤로 들려 나가는 게 보였다. 어느덧 달이 높이 솟아올라

모닥불이 희미해질 정도로 새하얗게 우옥의 기와 지붕과 그너머 높다란 담장 위와 마당에

내리깔렸다. 담그림자가 길게 남쪽에서 북으로 엇비슷이 드리워져 있었다.

"슬 생각이 나는데 이자가 좀 늦는걸."

우대용이가 투덜거렸고, 봉산 부엉이가 맞장구쳤다.

"저자의 말을 믿지 마우. 내 네 해를 예서 망나니로 썩었지만, 여태껏 감영 옥내에서 탈옥

했다거나 파옥했단 말은 듣지 못하였소. 셋인가가 뛰었다가 성내에서 잡혀 죽고 총 맞아 죽

은 일은 있었수."

"구명시킬 방도야 있겠지."

"그건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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