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푸른 돛배가 뜬다 -백종선- (1,4,3,3,1)

카지모도 2016. 6. 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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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소설집 ‘푸른 돛배가 뜬다’>

-백종선 作-

 

백종선의 소설집, 푸른 돛배가 뜬다.

이제야 독후감을 긁적인다.

책을 잃어버리는등 곡절이 좀 있었고, 모처럼 출간한 친구의 책인지라 아껴가며 읽고 싶었을 것이다.

 

아홉편의 단편소설들.

한마디로 작가의 문학적 역량과 여성적 감성이 깊이 배여있는 노작(勞作)이었다.

개성적인 문체와 함축적인 플룻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의 솜씨는 정교하고 노회하였으며,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눈길은 그윽하여 여성적 삶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사뭇 깊었다.

예전 소설들에서는 작가의 젊은 쪽 색감이 좀 더 승(勝)하다고나 할까, 10 여년전 출간한 소설집 '그 남자의 뱃속에는 개구리알이 들어 있다' 로부터 그녀의 문학은 한층 무르익었다는 느낌이었다.

소설가로서 그녀의 연배, 인생에 대한 어떤 통찰에 이르렀는가.

 

여성적 감성이 꿈꾸어 왔던 것들, 나이가 들었을지라도 마음 속에서 파문을 일으키고 있을 여심의 욕동(慾動).

그런 여성적인 것들을 울울한 회색빛으로 황칠해 버리는 시간(세월)이라는 것과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뭇 상황들, 그리하여 변색하는 관계의 색감들. 

작가의 여성성(女性性)은 그 꿈과 세월과 현실의 배리(背理)함을 지긋이 껴안는다.

화해와 용서, 치유에 이르려는 몸짓이다.

맺힌 것들 풀고 아픈 것들 호 해주고 들앉은 것들 내려 놓고 가야지, 삶이 맑지 않으면 가는 길 무겁고 어둡지 않겠는가. 

 

그리고 엄습하는 모종의 기시감(旣視感)이 있었다.

남성인 내게도 자연스레 감정이 이입되는 여성적 맨탈리티.

섬세하고 리얼하게 여성심리를 묘사한 작가의 글 맛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비롯하여 주위의 여성들의 프로필에서 내가 경험하였을듯한 데자뷔 같은 것들.

그녀들의 슬프거나 기쁘거나 안타깝거나 한 낯익은 눈빛, 부지불식간 새어 나와 내가 들었던 귀익은 웃음소리 한숨소리 흐느끼는 소리.

 

파킨슨씨 병으로 병상에 꼼짝못하고 누운 여든 노파의 의식(意識).

신산(辛酸)한 삶의 편린의 기억과 혼재되어 늙어 병든 의식이 읊조리는 사설들.

그걸 나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었는지 모르겠다.

혹 어쩌면 내 심층심리에 숨어있는, 어떤 여성 페르소나가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스스로의 목소리는 아니었을까.

 

으흠, 놀을 바라보는 나의 세월.

사랑하고 아프고 그립고 원망스러운 관계들에 대한 애증(愛憎)의 감정들.

그 가지가지 무겁고 어두운 것들, 어이 주체하여 내 푸른 돛배를 띄우려는지 아득할 뿐이로다. 

 

[잠 못드는 잠]

'엄마는 성격이 깔끔해서 죽을때도 깔끔하게 가실거라'고?

다른 복이 없더라도 곱게 죽을수 있는 복만 있었으면하고 그토록 바랐건만 지금 이 꼴이 무엇이란 말인가.

혼자있으면 가슴이 벌렁거린다. 

예민한 신경줄, 눈 뜨고 자는 밤.

몸뚱이가 나무등걸 같은 느낌이다. 15분 간격으로 오줌이 마렵고 오줌을 지린다.

옛날 생각. 인텔리 멋쟁이 남편과 포목점 막내딸인 나.

20년전 쫓아낸 며느리 계주의 얼굴이 떠오른다. 저 무덤덤한 아들놈, 눈빠지게 기다리는 손자는 안오고 엉뚱한 년이 백합을 가져와서 속을 뒤집는구나. 백년이 가도 변치않을 시누이의 백합꽃 향기는 여전히 역겹다.  

내 뱃속으로 나온 새끼도 아니건만,  살가운건 남편이 젊어 바람피워 나은 자식 큰 딸 정희뿐이다.

정희가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다리를 주무른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패티김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엄마 오늘밤은 신경안정제 먹지마요. 내가 엄마랑 같이 잘테니까. 아무 걱정말고 눈을 감아봐요. 따뜻하고 감미로운 햇살아래 콩고물같은 모래밭을 엄마와 내가 손잡고 걸어가고 있어요. 갈매기가 나르고 무지개가 떴어요... 엄마를 만나서 행복해요. 엄마를 사랑해요.

누구나 다 가는 길이라지만, 자갈밭길 걸어가지 말고 그냥 산보하듯 걷다가 힘이 다해 풀숲에 누워 잠이 들 듯 그렇게 갈수는 없는 것일까.

<스스로 품위 있는 죽음을 희망하면서도 단지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나를 그냥 보내지 못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그냥 본능인 걸까? 땅을 온전히 딛고 있지도 못하고 새털처럼 가벼운 몸을 하고서도 하늘로 날아가지도 못하는 나를 대책없이 바라보는 가족들이야말로 천형이 아니고 무엇일까? 나는 지금 아마도 정희가  가끔 들려주던, 코마 장벽이라는 곳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그 곳, 안개 자욱한 깊고 깊은 골짜기로 누군가 나를 떠미는 것 같은 느낌이든다. 끝도 없는 어두운 골짜기로 밀려 내려간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안간힘으로 떠올려본다, 정희의 해맑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 둘 구름 조각이 되어 흩어진다.>

잠 못드는 잠, 노파는 살아낸 세월들과 화해하여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로 날아가려 한다.

이제 영원한 잠을 잠자려 하는가.     

 

[백문조의 입맞춤]

새장 안에 갇힌 새는 자유를 잃어버린 보상으로 노래한다. 

조롱 밖에서는 먹이 찾아 계속 날아야 할 일만 남아 있는데 무얼 위하여 노래하겠는가.

백문조는 새장 안이 좋은걸까, 새장 밖이 좋은걸까.

이미 굳은 뼈, 쉰내나는 오십이라고? 남편은 철없는 것 하고 혀를 차면서 바라보지만, 여전히 뜨거운 여심은 일탈을 꿈꾼다.

억압된 감성의 숨구멍. 춤은 방종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 아름다움을 꿈꾸었을 뿐이다.

아직도 마음 속에 관계 속에 남아있을 아름다움에 대한 절실한 자기 확인이다.

황량함에서의 반발은 타락이지만, 여자는 결코 황량할 적에는 춤을 추지 않았다.

여자는 자신의 동우리를 포옹한다. 자신의 동우리로 돌아온 여자 앞에서 백문조가 입맞춤을 한다.

 

[화사한 날의 벌초]

아들을 남자답게 키우고자 하여 거칠게 내모는 남편의 욕망은 허세인가, 사랑인가. 

아들이 사고로 죽었고 부부는 자식을 잃은 지독한 상실감과 아들을 향한 그리움으로 괴롭지만, 아내의 자궁은 더 이상 잉태를 허락치 않는다.

불화하는 부부. 

종장에 남편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중얼거린다.

"아버지! 막 벌초를 해서 추우시겠지민 곧 새 풀이 돋아날 거예요."

삶과 죽음처럼 명확한 갈림이 어디 있으랴.

아버지(시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필경 산 것들은 화해한다.

세월로던지 인식으로던지 필경 슬픔은 극복된다.

산 것들은 살게 마련이다.

 

[몸의 시간]

"일단 그 처녀라는 딱지라도 떼라, 그거 사십까지 달고서 거추장스럽ㅈ도 않아? 순리대로 살지 않으니 자궁에 반갑지 않은 혹이나 생기는 거잖아."

사십이 넘도록 남자를 모르는 여자의 몸. 몸의 신비전, 초봄의 지랄같은 바람은 몸의 욕정인가, 생명의 신비를 잉태해보지 못한 안타까움인가. 

남자는 그러나 자신의 이기적인 영역으로부터 한발짝도 나오려 하지 않는다.

여자에게 '몸의 시간'과 '마음(영혼)의 시간'은 합일(合一)한다.

남자가 여자의 귓결에 '몸의 시간이야'라고 속삭이면 여자는 몸과 함께 마음을 열어주려 한다. 

그러나 남자라는 동물, 몸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은 엄연히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시간인가.

제 마누라 제 새끼들. 여자는 아연하다.초봄의 지랄같은 밤바람이 모텔 입구의 검은 장막을 펄럭이고 있었다.

 

[8월의 빗방울]

정신분석적 어프로치. 목이 잘린 해바라기, 좌절된 섹스의 메타포일까.

밤새 지리하고도 메마른 남편과의 잠자리, 다음 날 얼굴이 당기고 머리가 띵하다.

옛날 제자와의 정사는 불결하지 않는 풋풋함이었다.

꿈을 꾼다. 모래벌판 저만치 목이 잘린 해바라기가 진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알몸이다.

여자로서의 욕망, 태양을 지향하는 해바라기는 목이 잘렸다.

 

[줄마노 반지가 내게로 왔다]

늙음을 '잠 못드는 잠'만이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네발의 짐승이 되어 아늑한 안방으로 기어든 시어머니.

90kg에 육박하는 고릴라같은 몸, 치아는 거의 다 빠져 합죽했고 아랫입술은 번들거리며 두툼하게 아래로 처져있다.

남편이 그녀를 휠체어에서 일으켜 거실로 발을 딛게 하려 하자 으아악! 비명을 낸다.

"놔 둬! 내가 기어가마," 순간, 구토가 나는걸 간신히 참았다. 오셨어요? 어머니.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시궁창에서 나는 냄새같은 게 훅 끼쳐왔다.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온 어느날, 시어머니는 줄마노 반지를 여자의 손가락에 끼워준다.

"어미야! 힘들더라도 나를 요양원에 보내지 마라. 난 큰며느리하고 살다가 죽고 싶어. 요강을 화장실에 두고 그곳에서 누고 요강도 내가 비우마, 그러니 요양원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마라"

며느리에게는 척박하기 그지없었지만 시어머니의 고난에 찬 일생의 역정, 이제 몹쓸 몸이 되어 구사하는 방어기제는 가여운 생존전략.

여자는 겨울나무에 기대어 선채 '세월'이라는 걸 사유한다. 저녁노을이 참 아름답듯이 노을 진 나이에 아름답게 살고 싶지만 늙음이란 그를 용납지 않는다.

늙음은 추하지만 죽음으로 그 추함조차 가뭇 흔적도 없이사라져 버린다.

그래! 힘들고 짜증스러운 이 시간들도 결국은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릴꺼다, 언젠가는 그녀가 풍기던 똥 냄새조차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려나.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살펴 줘야지' 여자의 마음은 날을듯 가벼워졌다.

산 것들은 나남없이 모두 늙는다. 그리고 죽는다.

 

[회색모드]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객관화의 눈길로 바라보는 작가적 상상력과 테크닉.  

아내 이외의 여자를 안을수 있다는 생각조차 너무나 생경한, 성불구자처럼 사는 기러기 아빠.

젊었을때 즐겨 불던 색소폰의 화음....

별거에 이어 이어진 파경을 극복하고 부부의 관계는 치유된다.

점차로 아내의 얼굴에 피어나던 환한 웃음, 아내 스스로는 결코 보지못할 그 생의 환희를 포착한 순간 남편의 바지 아래 춤은 불쑥 솟아 오른다.

 

김치냄새나는 여자의 삶, 첫사랑을 찾아나선 여자의 이야기 <그녀가 새벽 기차를 타고 있었다>

주부라는 환경 속에서의 소설가라는 정체성과 자기인식에 관한 이야기 <소설작법-보통호를 찾아서>

 

푸른 돛배가 뜬다.

 

인생을 관조하는 눈길, 삶에 대한 사유와 통찰.

그것은 지긋한 연배가 아니라면 체득하고 심득할수 없는 경지일 것이다.

작가 백종선의 그 연륜을 나는 무겁게 느꼈다.

 

백종선의 유니크한 개성이 배어있는 문체.

범상한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파동하는 세미한 여성적 감성의 결.

남성작가라면 도저히 획득할수 없는 감성일뿐더러 남성적 문체로서는 묘사하기도 벅찰듯.

 

푸른 돛배가 뜬다.

귀에다 대고 조곤조곤 속삭이는 쓸쓸한듯 아름다운 세리프.

인생을. 욕망을. 꿈의 상실을. 상처를. 허망을. 세월과의 불화를.

그리하여 화해를 치유를 용서를.

 

이처럼 역작을 세상에 내 보였으니, 이를 시발로 일년에 한 권씩.

이제 쓰시라, 친구여.

우리 또래 드문 문단에 우뚝 서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