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갈매빛 그늘> (5)
2008년 3월 25일
아버지 바로 아래 여동생, 마산고모 이인순(李仁順).
1918년 10월 12일 부산 영주동 출생, 2005년 서울에서 돌아가셨다.
통영사람 최씨 성(창씨명 高村浩)의 고모부님.
큰 딸 최광주, 내 사촌 형제중 가장 연배인 광주 누나의 다정한 웃음이 떠오른다.
큰 아들 역시 사촌 남형제중 가장 연배의 풍이 형(최동석).
풍이 형은 1995년 4월 초 어느 봄날, 처자식 두고 아직 청청한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버렸다.
최씨 집안의 장손으로서 좀 더 영악하게 사셨어도 좋으련만 마산 어느 병원의 영안실 영정 속 풍이 형은, 머리 벗어진 모습으로 마냥 착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보생의원 건넌 방. 함께 얘기 나누었던 레마르크의 '개선문‘의 라비크와 조앙 마듀.
그때 마셨던 술은 국산 사과주 파라다이스, 마주 잔 부딪치며 우리는 "살루트"하였지요. 형.
풍이 형 밑으로 세 명의 동생들, 문이, 명이, 동철이는 좀 소원하여 기억이 아슴하다.
그 다음 대구고모 이영순(李英順).
지금(2008년 3월 현재) 꼬부랑 할머니로 부산의 어느 병원 입원하여 계신다.
입원 전, 부산 영도의 작은아들 성호집 아파트 안방 고모님 머리맡 탁자에는 박경리의 토지라던가 최명희의 혼불이 흩어져 있었다.
고모부님은 연전 돌아가신 대구사람 달성 서씨.
큰딸 정자 누나(서정자), 자그마한 몸집의 좀 수다스러워 더욱 정겨운 누나 본지도 오래 되었다.
큰아들 의호 형(서의호). 나의 중동중학 이를 옹 다문 그 시절, 삼일당 (효자동 진명여고강당)무슨 행사에서 교통정리하던, 중동고 무슨 간부였던 형의 모습 떠오른다.
십여년 전 아내 잃은 의호형은 불교신앙에 푸욱 잠기어 부처님 발가락이라도 잡았다면 외롭지 않게 늙어가고 있을 것이다.
둘째아들 문호(서문호). 동갑인 문호와, 홍철 고모댁의 홍철이는 나와는 사촌이기 전에 친구들이었다.
문호 서울서 내려오면 급하고 과장된 몸짓과 언어로 보생의원은 시끌벅적.
그 몸짓과 언어는 결국, 마흔도 아니되어 서둘러 세상과 작별하여 떠나 버렸다.
문호의 죽음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내게 이르렀는데. 그 무렵 나는 스스로 그렇게 어떤 단단한 껍질 속에 묻혀 살았던 모양이다.
셋째아들 성호(서성호)는 내 두서너살 아래.
오랜 직장생활의 서울서 물러 내려와 부산에 살며 때로 만나 회포를 풀기도 한다.
지난 연말 내 친형과 더불어 어울려 통음하였는데 노모 때문에 시름있는 경황에 항공대 졸업한 큰아들 현대자동차 입사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성호의 아내는 캐리어우먼이면서 몇 년간 꼬부랑 시어머니 노인 수발에 헌신하였던 며느리.
대구고모님의 막내딸 애경(서애경)이는 미국에 있다.
아버지의 세 남동생중 가장 위인 이진우(李鎭雨)
1925년 6월 6일 생.
의사로 사셨는데 부산서 유수한 종합병원을 경영하다 은퇴하여 1980년 후반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다음으로 친권자의 느낌을 갖고 있었던, 내가 어려워 하였던 분.
1967년 어떤 봄날이 떠오른다.
나는 그날 국제시장 막걸리집에서 퍼마시고는 무리와 헤어져 어떤 여학생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통금이 임박한 남포동입구를 걷고 있었다
그때 “상헌아”하는 소리.
당시 대학병원 교수로 재직하였던, 술이 얼근한 작은 아버지. (술을 좋아하셨다. 우리 가문 내력이다 술은..)
여학생에게는 일별도 하지 않은채 내 손을 잡아 끈다.
덜컹 간 떨어지는 소리, 스물 남짓한 녀석이 그 늦은 시각 술에 취하여 여자와 어깨동무하고 걷다가 너무나 어렵게 여겼던 작은 아버지에게 된통 걸려 버렸으니.
그러나 작은 아버지는 아무 말씀없이 내 손을 꼬옥 쥔채 함께 영도다리를 걷는다.
그 침묵이 오히려 무서웠던지 느닷없이 나는 말한다. “군대 가겠습니다”
한참 아무 말씀이 없다가 불현듯 뱉는 한마디 말씀. “안다. 니 맘”
무얼 안다는 말씀인지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홀연 눈시울 뜨거워지며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보생의원 현관 들어서며 마중하는 작은어머니와 함안댁에게 한마디 하시며 안방으로 들어가시는 작은 아버지. “상헌이 밥 채려줘라. 속 쓰리다”.
그해 가을 나는 자의반 타의반 지원 입대하였다.
작은 어머니 김순옥(金順玉). 경상남도 사천분.
위층에 호랑이같은 시부모 모시며 십수명 식솔들의 안살림을 꾸려나가시던 모습은 필경 여장부 면모였지만 피부가 하얀, 마음이 마냥 넓으신 분이셨다. 아들 얻을 열망이외에는.
여섯의 딸 다음 얻은 금지옥엽 외아들 상명이와 좀더 알콩달콩 사셔야 하는데, 내 어머니 가고 일년도 채 안된 1999년 11월 초 별세하여 마석 모란공원 작은아버지 곁에 묻히셨다.
두분 슬하 큰딸 주희와 그 아래 사촌들은 내 사춘기와 함께 보생의원에서 성장하였던 친동생같은 누이들이다.
큰딸 주희(李珠姬-1952.8.14생)
남편 배박사(배석천)는 산부인과 의사로 내 고등학교 동기. 작년 큰아들을 치웠는데 나는 먹고사니즘 강의때문에로 가보지도 못하였다.
주희도 곧 손주 볼것이고 으흠, 우리는 그렇게 늙어 가겠지.
둘째딸 주영이 (李珠英 1955.7.15 생). 풍성한 성품과 외모의 동생, 역시 부잣집 맏며느리로 서울서 잘 살고 있다.
셋째딸 주경이 (李珠慶 1957.4.21 생). 차분하기 그지없고 비상한 두뇌를 갖고 있었다. 안과의사이고 남편도 역시 의사.
넷째딸 주임이 (李珠任 1959.2.28 생), 좀 자라서 까무잡잡한 피부의 기막힌 미인인데, 어린시절 미운 오리새끼마냥 그토록 울보였음을 주임이는 알랴마는.
다섯째딸 따꾹이 (李珠淑 1962.6.1 생), 어린 시절 따꾹이는 정말 인형같은 아이, 손녀 정빈이를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어린 날의 제 어미와 더불어 따꾹이 모습이 떠오른다. 의사 아내로 서울서 잘 살고 있다.
여섯째딸 점주 (李點珠 1964.2.25 생), 피부가 희고 여리고 상냥한 성품의 아이, 내 느낌으로는 가장 제 엄마를 닮은 누이동생이다.
일곱째 첫아들 상명이(李相明 1968.9.7 생), 작은어머니가 정말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아들. 사랑하던 어머니 잃고 울부짖던 모습 떠오른다. 작은 어머니, 아들 장가가는 거나 보시고 가셨더라면 상명이도 마음 그리 좋았으련만. 미국서 박사학위(전공이 경제학이던가) 받아 지금 한양대 출강하고 있다.
작은 아버지께는 또 한분 숙모님이 계셨다. 김양숙(金良淑).
지금 폐암으로 투병중이시다.
지난 설에 뵈니, 이쁘신 그 모습 반쪽이 되어 힘들어하시는 모습 안타깝기 그지없다.
독실한 권사님, 은총의 기적 있기를 빌 뿐이다.
아들 동은이(李東恩), 신학교를 나와 목사의 길을 밟지는 않지만 어머니를 향한 기도빨은 정녕 간절하여 신령할 것이다. 동은이 아들 헌이는 벌써 초등학교 4학년이다.
주은이(李珠恩)는 일찍부터 호주에서 학교를 나왔고 그곳 사람으로 거주한다.
어머니 병환으로 자주 다녀 가느라 힘들겠지만 꿋꿋하여 더욱 이쁜 누이동생이다.
오늘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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