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갈매빛 그늘> (6)
2008년 5월 24일
2008년 5월 24일 오후.
추적이며 비 내린다.
가신지 10년, 오늘 어머니의 10주기이다.
책상 앞 앉아 맥주잔 기울인다.
유택(幽宅)에는 며칠 후로 미룬채.
신불산자락, 그 등성이 풀섶에도 비는 촉촉하게 적시고 이윽고 스며들어 어머니의 진토를 적실 것이다
육신은 썩어 이미 초록기쁨으로 화하여 이 푸른 오월을 겨워한다고, 그렇다고..
執事 朴仁淑之墓- 요단강 저너머 하나님 곁에서 영생의 복락에 겨워하고 있다고, 그렇다고..
또 하나의 어미인, 아내는 모처럼 귀국한 아들놈 생일이 내일이라고 빗소리 들으며 또닥또닥 도마소리를 내고 있고. 그 또한 그렇다고..
또 다른 어미 내 딸은 제 딸 정빈이 어르면서 고층 아파트의 창밖으로 뽀얀 도시의 우무(雨霧)를 내려다 보고 있으려니, 그 또한 그렇다고..
빗소리 더불어 시나브로 술기운 올라 멜랑꼬리한 정서에 젖는다.
방안에 울리고 있는 양희은의 노래들은 빗속에 더욱 푸르러 가슴에 서늘하다.
슬프지도 아니하지만 행복하지도 아니한 그런 것들이 노래와 함께 마음을 적신다.
이정순(李貞順).
1925년 2월 2일, 큰 숙부(李鎭雨)와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고모님.
그런데 어인 까닭일까?
정순고모는 나 태어나기 일년전인 1946년 3월 20일, 스물하나 꽃다운 나이로 사망하였다는 호적의 기록은.
아아, 바람결이었던가.
내 귓가에 남아있는 수군거림의 흔적 하나 있으니.
지독한 연애와 실연 그리고 자살.
갈매빛 그늘.
그늘 속 실루엣으로 떠오르는 이끼 낀 고성(古城).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밟고 올라가 어느 다락방 녹슨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면 백년의 먼지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퀴퀴한 냄새로 부유한다.
그것은 죽어 잠들어있는 요요(耀耀)한 것들의 냄새 만이 아니다.
때로 싯뻘건 파토스의 불길은 이글이글 살아서 나의 파토스에 확 불을 붙인다.
그 액츄어리티에는 진한 관능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 2년 후인 1927년, 할머니는 연이어 이번에는 일란성 쌍둥이 대훈고모(李先順)와 홍철고모(李後順) 두 자매를 출산하셨다.
많은 알곡을 생산하신 풍요한 대지, 할머니.
할머니 별세하였을 적, 상청에서 어느 고모님의 곡(哭)속에 섞인 사설 한자락에서 할머니의 면모 한줄금 기억해 낸다.
<“오른손 물에 담그고 왼손으로 새끼들 뺨알떼기(경상도 사투리 ‘뺨’) 때려 가면서 열 자식 남부럽잖게 키워낸 당신”>
고집과 심통도 대단하셨는데 자그마한 덩치의 할아버지에게만은 꼼짝을 못하셨으니 그게 때로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대가족을 거느리며 대소사 처결하시던 그 품은 늠름하신 암사자의 풍모였을 것.
무지한 시절 남녀 쌍둥이(이진우 숙부와 이정순 고모)에 대하여 요상스런 속설도 있었을 터이지만 무지하지 않았던 할아버지와 늠름하신 할머니는 그런 수군거림 따위 끄떡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대훈고모 이선순(李先順)
1927년 7월 8일 일란성 쌍둥이 이후순과 함께 1927년 7월8일 출생.
활달하신 성품.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교회에 흠취하신건 중년이 훨씬 넘으신 후이고, 그 후 숙부와 숙모님들, 다른 고모님들 기독교 귀의의 역정에는 아마 대훈고모 영향이 지대하였을 것.
내 어린시절, 남편없는 손위 올케와 아버지없는 조카들에게 그윽한 사랑 베풀어 주셨다.
1950년대, 척박한 시대에 바나나, 초콜릿, 햄이나 소시지를 맛보았던 것은 오로지 고모님 덕이다. (정능의 우리집에 미제 물건을 싣고 오갔던 고모님댁의 운전기사 성식이 아저씨가 생각난다.)
훗날 연좌제의 족쇄를 현실로써 의식하였을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어린 날 늘 말씀하시던 고모님의 당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네게 누가 닥아오거든 꼭 고모한테 먼저 얘기해야 한다”는 의미를.
고모부님 이인식(李仁植)
자그마한 분이셨지만 똑똑하고 야무진 이북 분이셨는데 작년 (2007년) 돌아가셨다.
자유당때 고위 공무원, 후에는 동서식품 회장을 역임하셨고 한때 영화제작에도 참여하셨다.
강대진 감독의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인가 받았던 ‘마부’는 고모부님이 제작하신 영화.
그 영화의 한 시퀜스에는 도렴동 고모댁이 로케 장소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 필름 다운받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시절 도렴동 고모댁에서 변소 갔다 나오다 사나운 개에게 물리고, 한달여 척추에다 열 몇 대의 광견병 주사를 맞았던 기억.
큰 아들 이대훈, 이른바 KS (경기고 서울대) 출신의 사촌동생.
그러나 쫌생이 모범생 풍모는 아니다. 대훈이 대학시절쯤 나는 막 제대하고 나서 막내 작은아버지와 송정의 해수욕장 민박집, 저나 나나 영글지 못한 사변 늘어놓던 기억이 새롭다. 곁에는 작은 숙부 큰아들인 상하도 있었는데.
둘째 이성훈.
제 아버지를 쏙 빼닮은 성훈이.
셋째 이동훈.
대훈고모님은 아들만 셋인지라 늘 딸 갖기를 소망하셨는데 작년 뵌 고모님.
아아, 파파 할머니.
홍철고모 이후순 (李后順)
곧 서울로 옮겼지만 내 중학시절 고모님댁은 부산 수정동에 있었다.
방학되어 삼형제(형과 나와 주원이) 서울서 내려오면 고모님은 우리에게는 봉이었다.
부산서 아이들 좋아할만한 곳은 고모님 아이들인 홍철, 영철, 홍규와 더불어 섭렵하였고, 영화라면 당시 부산 개봉영화는 거의 빠짐없이 마스터하였을 것이다.
홍일이와 영희는 (때로 홍규도) 아직 어린지라 자주 어울리지 못하였다.
일란성 쌍둥이 언니인 대훈고모님에 비하여 여리고 여성적인 면모.
우리 형제중 누군가 두분 고모님 구분이 안된다고 하였는데 나는 확연하게 구분이 되던데 하고 이상스레 생각하였던 기억이 있다.
벌써 돌아가신 고모부님 김병준.
미남이셨고 상당한 직위의 공무원 역임.
큰 아들 김홍철.
낫살들어 서로 뜨아한 포즈이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 아닌 대구고모의 둘째 서문호와 더불어 홍철이는 사촌이면서 친구였었다.
작년 얼굴 마주하니 홍철이나 나나 그렇게 늙었더구나.
홍철이는 미국서 오래 공부하였다.
지금은 유수한 건축설계 회사 CEO인 건축가.
둘째 딸, 김영철.
이름이 남자 이름같지만 여리고 예쁘고 착한 사촌 여동생.
소년의 어느 시절, 영철이를 향한 사촌오빠의 감성은 어쩌면 분홍빛이었을 것이다.
아름답게 나는 그를 회억한다.
셋째 아들, 김홍규.
고모님 내외의 맏아들에 대한 폄애에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은 씩씩한 둘째아들.
부산중 시절은 화랑기 야구스타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이민 가 미국서 살고 있다.
넷째 아들, 김홍일.
눈매가 서양아이처럼 자알 생긴 아이.
막내 딸, 김영희.
나이차가 큼으로 기억 아슴하지만, 제 언니 영철이를 벗어나지 않은 인상 여리고 고운.
이길우(李吉雨)
(1927.7.8 - 2007. 11. 3)
둘째 작은 아버지.(사촌끼리는 길우삼촌이라 불렀다)
조각같은 얼굴, 비상한 두뇌.
겉으로는 차거운 인상의 금융인이지만 따뜻한 분이셨다.
작년. 2007년 11월 3일 운명하시는 순간, 맏아들 상돈이가 흐느끼면서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하니 그토록 평안하게 숨을 거두셨다고.
작은 아버지의 서교동 저택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도 돌아가셔 모두 모란공원에 잠들어 계신다.
숙모님, 김혜숙.
작은어머니는 우리나라 신극계의 선구자인 연극배우 김동원의 누이동생, 그러니까 가수 김세환의 고모님.
언제나 그 품이 풍성하여 따뜻하신 분, 그 음성 생생하게 떠오른다. 연전 뵈었을적 ‘상헌이는 베토벤이야’ 잡초처럼 무성한 내 머리칼 보고 하시는 말씀.
큰 딸, 이주옥 (1955.7.15생)
새침떼기 주옥이도 이제 사위를 보았다.
둘째 아들, 이상돈 (1957.4.8생)
의젓한 큰 아들, 아버지 따라 금융일을 하고 있다.
셋째 아들, 이상수 (1960.9.21생)
상수의 얼굴은 기억에 아슴하구나.
을지로 막내고모님, 이문순(李文順)
1930년 4월 14일 출생.
늘 에레강스라는 발음에 이어 떠오르는 이미지는 막내고모님이다.
한 시절 서울 을지로 병원을 찾아가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색다른 디자인의 현대적인 병원의 꼭대기층이 고모님의 살림집이었다.
조근조근 사춘기 조카를 타이르던 고모님의 주위에서는 언제나 잔잔한 클래식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돌아가신 고모부님 서병준.
을지로에서 유수한 병원을 운영하신 의사.
큰아들 서경묵. 역시 의사로 아버지 뒤를 잇고 있다.
둘째 셋째는 명확하게 기억을 못하니 이를 어쩌랴.
막내 작은아버지 이광우(李光雨)
(1932.1.15 - 1997.1.9)
옛날 열혈청년으로서의 작은아버지가 기억난다.
길우삼촌처럼 서울상대 출신의 금융인.
많은 형제의 막내로서 가족의 어떤 결속감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려고 애를 쓰셨다.
유언에 의하여 할아버지 할머니 함께 묻힌 그 곁에 유골이 묻히셨다.
작은 아버지는 결국 갈매빛그늘 사랑하여 거기 묻힌 것이다.
숙모님 이연옥,
자그마하시고 이쁜 대구분인데 이화여대 다니다 작은아버지께 넘어가셨다.
경북사투리의 다정한 어투는 아직도 귀에 선하다.
큰 딸 이주리, 어머니 닮은 굉장한 미인의 여동생인데 아아. 주리야 늙는구나 너도.
둘째아들, 이상하, 사업실패하여 뉴질란드에 있다,
아버지 여의였을적 상하의 눈물에는 피가 섞였을 것이다.
셋째아들, 이상호.
형 몫까지 담당한 늠름한 포즈, 너무 대견하다.
비 그치고.
날 저물다.
오늘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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