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갈매빛 그늘> -7-
2008년 7월 14일
엊그제 (2008월 7월 9일) 한여름 무더위 속, 가야 숙모 기어이 가셨다.
남은 것은 한 줌의 재와 아들 동은이와 딸 주은이, 며느리와 손자와 호주사람 사위 크리스.
남매의 오열 숨죽이지 않았더라도 올올이 맺힌 그들 세모자녀의 사연, 제대로 들을 귀 없으니 통곡 없다하여 어떠하랴.
아, 어느 죽음엔들 남은 자들 호곡(號哭)속에 질펀한 사설 없을까.
그러나 영결의 슬픔이란 순간의 것은 아니다.
주검 앞의 울음은 보내는 절차와 요식으로서의 슬픔이고, 산자들 스스로를 위한 카타르시스로서의 슬픔일 것이다.
진정한 슬픔이란 제의적(祭儀的)인 것이 아니다.
깊은 곳에 잠겨 삶 속의 한 부분으로 잠겨있다가 시시때때로 사무치는 그 무엇이다.
영락공원 화장장에서 주검을 처리하는 매카니즘은 참으로 깨끗하여 삼빡하다.
년전 내 큰처남도, 올 4월에 딸의 시아버지인 내 바깥 사돈어른도 그렇게들 삼빡한 절차로서 가셨다.
너무 아쌀하여 슬프지 않은가.
사대(四大)는 흩어져 공허하여, 아아 뭇 죽음들, 영결의 슬픔은 영락공원 성하(盛夏)의 하늘 어드메 있단말가.
‘갈매빛 그늘’.
그늘이라면 어디메쯤인가.
구약에서의 ‘스올’.
스올이란 죽음이 내려가 머무는 곳이고 그곳은 하나님 이외에는 소통할수 없는 곳.
그러나 무의식의 어느 구석, 푸르스름한 기억의 그늘 속 머무는 그 곳은 완전히 단절된 영토가 아니다.
잠이 들면 꿈이 찾아온다.
남보다 긴 입면시간, 나는 잠 한번 들기가 남보다 배는 힘든 인종이고 잠의 영역에 들어섰더라도 나의 잠 속에서는 어김없이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바라이어티 쑈의 무도회가 열린다.
내 잠의 품질은 정녕 최하품이다
꿈 속, 스올의 강가에서 가신이들 남은이들 더불어 온갖 상황을 가지고 노닌다.
이윽고 고통으로서, 부끄러움으로서, 어쩌다 기쁨으로서, 잠에서 깨어날 때, 그 순간의 기분이란 대체로 썩 고약한 것이다.
평생 난만한 꿈의 세계에 짓눌려 밤의 시간을 영위하는 나는 정녕 곤고한 사람이겠으나 어찌하랴.
그리하여 내게는 꿈의 의미를 천착코저하는 열망 있었으니, 그만둔지 오래 되었지만 깨어나면 가장 먼저 꿈의 내용을 기록하여 그 노트가 이십여권에 이른다.
내 한 친구는 ‘읽고 싶은 책’과 ‘읽어내고 싶은 책’의 두 종류로 구분하여 독서계획을 세우는데, 前者야 엔터테인먼트의 독서이겠으나 後者는 일단 강박의 책이다.
그런 後者의 책중에서 정독(精讀)을 거쳐 내 정신의 거름을 이룬 것은 드물겠지만, 그나마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만은 그나마 그런 축에 속한 책이었을 것이다.
꿈이란 나로서는 그만큼 절실한 명제였던 것이다.
우리의 자아는 현실로서 인식하기 두려운 경험, 느낌, 기억의 어떤 대상을 무의식 속에 밀어 넣어 억압한다. 잠이 들면 자아가 의식적으로 억압하는 정도가 현저히 약화되고 의식적으로 억압하려 했던 무의식속에 잠겨있던 것들이 꿈속으로 튀어나오려고 용틀임을 한다. 그러나 그 벌거벗은 모습들은 너무나 적나라한 원시의 불덩이. 그대로 표출되었다가는 견딜수 없는 불안을 야기한다.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억압. 근친상간적 충동등 성적인 것들로 점철된 욕동의 그 현장을 제 정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엄청난 고통일 것이므로 방어기제로서, 무의식의 검열을 거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왜곡 또는 치환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이른바 우리가 겪는 꿈이라는 것이고, 데포르마숑된 그 꿈의 해석을 통하여 무의식 속으로 들어갈수 있으며 어떤 자아가 겪는 감정모체의 고통을 이해할수 있다는 것.
무의식의 발견, 완벽한 압도, 위대한 프로이트,
그 이론은 물리법칙과 같이 지극히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다.
성(섹스)에 근거한 인간성, 근친상간, 오이디푸스 컴프렉스.... 깊이 숨은 곳에서 욕동하는 무릇 성적욕구.
아아, 나의 꿈의 원형이 순전히 그러하다면 그 배후에 실존하는 내 감정모체(emotional matrix)의 현실은 얼마나 참혹한 것일까.
그러나 나 스스로의 임상(臨床)은 프로이트에 전적인 동의를 유보한다.
프로이트도 부분적으로 인정한, 일상중 느꼈던 어떤 서정적 감성이나 수면중에 외부로부터 또는 자신의 육체 상태로부터 오감이 자극받는 영향 또한 분명 꿈의 중요한 질료이기도 하다는 것.
내 많은 꿈들은 패턴화된 어떤 유형을 이루고 있다.
뱃속이 불편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중인환시리에 대변보기.. 똥의 바다에서 헤엄치기.. 층층의 달동네의 미로 속 헤매이기..등등의 정형화된 내용들이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동반하여 꿈의 극장에서 상연된다.
캄캄한 밤중에 손과 발을 저어 헤엄치듯 나는 하늘을 날며 여기저기를 산책하는데, 이는 지극히 비밀스러운 나만의 재주로서 뉘에게라도 이 재주가 들켜서는 아니 되는데 지상 저만치에서 갑자기 후랏쉬 빛이 내게로 비취는 순간 나는 갑자기 추락하여 잠에서 깨었는데, 그 순간은 흔히 아내가 갑자기 방안의 불을 켰을때였다.
그리고 일상중 누군가의 자취를 접하였거나 문득 그에 대한 사념에 젖는 날이면 그 누군가는 으례 그날밤 꿈에서 등장하게 마련이고, 가지가지 데포르마숑된 캐릭터로서 헐리웃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꿈이란 시간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불과 일분 동안의 백일몽 속에서도 대하소설의 꿈을 꿀수 있다는 사실도 나의 임상으로 증명되었음을 나는 안다.
나의 꿈은 대체로 개꿈. 그래서 년전 꿈의 기록을 그만 둔 것이다.
아아, 가신 이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래, 그래. 꿈 속에서나마 그리운 것들과 조우한다.
꿈. 그래, 내 자아의 어느 공간, 기억이 만든 무대에서 개꿈의 환영 속에서 .
나의 당신들이여. 게서 우리 만납시다.
정빈아, 한밤중.
이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꿈 타령이람.
십년전인지 백년전인지 어쩌면 엇그제인지, 할아비는 낯선 시가지를 씩씩대며 걷는다.
부산인지 서울인지 뉴욕인지 동경인지 파리인지, 너무 낯설어 외로운 소외감 그리고 궁박.
분노에 휩쌓여 “이건 부당하다 이건 부당하다”고 주문을 외우면서 나는 헤매인다.
어떤 골목의 입구.
아주 미세한 어떤 디테일.
익숙한 모습과 냄새가 확 끼쳐온다.
골목으로 들어선다.
오, 그곳은 놀랍도록 낯이 익은 곳으로 바로 서울 종로구의 내수동 외가 동네이고 또 한 골목 넘어서 저 쪽은 유년의 여름 가득한 성북구 정능의 동네이다.
고색 짙은 한옥이 즐비하고 외가 일족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곳 예제서 ‘상헌아’ 하는 범상하고 예사로운 인사말이 건내진다.
그리고 정능의 초록에서는 ‘켄터키 옛집’의 노랫소리와 농익은 과일냄새 풍긴다.
나는 순간의 꿈, 소년이다.
외가에는 옛 것들로 가득 찼었다.
고색 짙은 옛 기와집, 놋쇠 장석이 달린 육중한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 편 곳간이 있었고 별채를 지나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대청마루를 오르는 큼직한 섬돌, 대청에 차려진 외할머니 상청(喪廳). 안방의 다락에는 옛 정취 간직한 기물 기구 소품들 가득하였다.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적 갔었던 경기도 어딘가의 드넓은 선산, 그리고 범제사의 격식미는 어린 눈에 장엄하였다.
기억 속 외갓집은 이조의 잔영이 고즈넉하게 드리워진 곳이었지만 비까번쩍한 사대부 내력의 가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참 후 횡보 염상섭등등의 소설의 행간에서 느꼈던 것이지만, 외갓집 식구들(어머니를 포함하여)이 웃사람에게 아뢰는 언어중 語尾에 “....하굽쇼”를 붙이는 말씨는 전형적인 서울 깍쟁이 중인계급의 언어였을 것.
친가도 그렇거니와 외가도 골기(骨氣) 꼿꼿한 양반 내력은 아니었을거라는 그게 내 느낌이다.
외할아버지 朴*石.
본관은 밀양,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나는 뵌 적이 없다.
외할머니는 내 중학교 적 돌아가셨는데, 인자한 그 모습 생생하고 외할머니의 말씨까지도 고스란히 귓가에 남아있다.
피난시절, 부산 범일동 윤소아과 이층, 어머니가 고용의사로 근무하며 피난살이 하던 곳인데 외할머니가 때로 들르셔(한번이었던지) 나를 안고 누워 자던 외할머니 젖무덤의 냄새가 가무스름하게 콧가에 남아 있다.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나의 젖엄마(이선희)와 피난 오기전 신설동의 가정부였던 기옥이누나도 연이어 떠오르는데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겐지.
아마도 그 젖무덤의 따뜻함에 연유한바 아닐까..
외할머니의 장례(오일장?)중. 슬프지만은 않은 어린 사촌들은 안채에 모여 앉아 카드를 하였다.
외가 작은누나(박규연)로부터 배웠던 트럼프놀이, 여러 걸 배웠었는데 시찌나라베라는 게임의 이름이 생각나는구나.
어머니의 오라버니, 큰 외삼촌은 요절하셨는지 내 기억 속에는 없다.
대신 큰 외숙모님은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 속 살아난다.
서울 깍쟁이하면 나는 대뜸 큰외숙모가 떠오른다.
단정하시고 야무지신 분.
욕을 잘 하셨다. 조카에게도 “매친 놈(미친 놈)”이라고 욕은 하시면서 마냥 정다운 표정.
오소독스한 서울 사투리로서 구사하는 외숙모님의 욕은 욕이 아니라 익숙한 냄새로 내 코가 정겹다.
큰 가문의 종부로서 홀로 되어, 오남매를 굳건히 건사하시고 훌륭하게 키워 내시고자하는 열망.
미국땅, L.A 거주하신지 수십년 되었으니 이제 미국사람 언저리쯤은 가셨을까.(나는 믿지 못하련다?)
오늘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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